선교란 무엇인가?
/ 국제선교신문
21세기 상황의 선교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한국교회가 선교사 2만 4천여명을 파송하는 선교강국 시대를 맞고 있지만 막상 “선교와 전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그리 명확한 대답들을 듣지 못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선교는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역정도로만 이해하고, 그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아직도 선교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선교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두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져야 세계선교의 바른 지평을 열어 갈 수 있다.
첫째로 선교란 용어의 개념 이해이다.
선교(mission)라는 용어는 라틴어 mitto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내다"라는 의미이다. 신약성경에 헬라어로는 “아포스텔로”(ἀποστέλλω)가 135회, "펨포"(πέμπω)로는 80회 정도로 쓰여져 있는데, 이 두 헬라어 역시 "보내다" 또는 "파송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선교학의 조종(祖宗)으로 불리는 독일의 선교학자 구스타프 바르넥 (G. Warneck)은 “파송은 사자(使者)를 통하여 수행되며 선교의 목표가 달성된다. 일반적으로 "선교"라는 명칭은 높은 위치로부터 부여된 사명을 수행하는데 적용된다.
그리스도는 선교의 근간을 이루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니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바울도 이렇게 말한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었다"(고후 5:20).
그리스도의 봉사자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고전 4:1) 파송되는 것이 성경적인 선교의 개념이다.”라고 파송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영(John M.L. Young)은 그의 저서, <선교의 동기와 목적>(The Motive and Aim of Missions)에서 “선교란 용어는 아직 복음을 모르거나 조금 밖에 모르는 다른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주로 외국에 하나님의 백성을 파송하는 일을 말한다.”라고 정의를 말한다.
이러한 인용들에 의하면 선교란 용어의 본래적인 개념은 파송의 의미가 있음을 더욱 확인할 수 있다.
둘째로 선교(mission)와 전도(evangelism)에 대한 바른 이해가 요구된다.
선교와 전도가 같은 의미일까? 아니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David J. Bosch)는 초기의 견해는 “선교와 전도 두 가지가 다 오로지 복음을 구두로만 선포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보쉬에 의하면 이와 반대의 경우로서 과거에는 전도와 선교는 지리적이거나 신학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먼저, 지리적인 구분에 의하면, 선교는 타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전도는 본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역적으로만 본국과 타국으로 나눈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지역적인 차이로 선교와 복음전도를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은 이미 기독교가 정착되어 있는 서구가 지리적으로 볼 때 서구가 아닌 다른 지역에 나가서 복음 전하는 것을 선교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던 16세기의 상황에는 어울렸다. 왜냐하면 16세기의 서구 기독교 국가들은 아시아를 비롯하여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관심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로 이해했다.
다시말해서 서구의 기독교는 선교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해외로 선교사를 파송했던 것을 선교라고 강조 한 것이다. 즉, 선교사는 지리적으로 구분하여 멀리 떨어진 해외 지역에 파송되는 사람으로 보고, 전도자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사람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구분의 입장 위에서 선교를 정의한 사람들로는 대표적으로 죤 영(John M.L. Young)이나 구스타브 바르넥(G. Warneck)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영에 의하면 “선교란 용어는 아직 복음을 모르거나 조금 밖에 모르는 다른 나라에게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도록 주로 외국에 하나님의 백성을 파송하는 일을 말한다.”고 정의했다. 구스타프 바르넥 (G. Warneck) 역시 “비기독교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조직하는 것”을 선교라고 말함으로써 지역적인 구분으로 개념을 표현했다.
다음은, 신학적인 구분으로서, 먼저 선교는 “아직도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사람들(Not-yet-Christians)과 관계되는 일이고, 전도는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No-more-Christians)이거나 혹은 이름만의 기독교인으로 자칭하는 사람들(Nominal Christians)의 신앙을 부흥시키는 일”로 나누었다.
다시 말하면 선교는 이직도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라면, 전도는 이미 복음이 전파되어 믿는 사람이 있는 지역의 불신자들뿐 만 아니라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실은 믿지 아니하는 명목적인 기독교인들(Nominal Christians)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으로 이해한 것이다.
신학적인 구분은 지리적인 구분과 유사성이 없지 않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본국은 이미 복음을 수용한 것이 분명하며, 타국은 아직 복음을 수용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두 구분이 반드시 동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리적인 구분은 단순히 장소로서 본국이냐 타국의 구분이라면, 신학적인 구분은 이미 복음을 받은 지역의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도 복음이 들려지지 않은 지역의 사람인가에 더욱 초점을 두는 구분이기 때문이다.
선교와 전도에 대한 신학적인 구분 개념을 지지했던 사람들 중에는 화란 신학자 반 룰러(A. A. Van Ruler)가 있다. 월터 프레이타그(W. Freytag) 역시 선교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이방인 가운데서 이루어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 것”으로 말해 단순한 지역적인 개념보다는 대상으로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로 이해하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지금까지 선교와 전도에 대하여 일반적인 지리적인 구분과 신학적인 구분으로 말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두 구분으로 나누는 경향 외에 또 다른 한 경향으로서 문화적인 구분에 대하여 고찰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문화적인 구분을 덧붙인다. 문화적인 구분에 의하면 동일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도이고 타 문화권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교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문화적 구분은 지리적 구분과 차이가 없는 것 같이 생각될 수 있다. 그 이유는 타 문화권은 지리적으로 보면 본국이 아니고 타국이며 동일 문화권은 주로 본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그러한 것만은 아니다. 동일 국가이면서 문화 전통이 다른 민족들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결코 동일 할 수 없는 것이다. 동일 국가 안에서도 다문화권 시대를 맞고 있는 경우이다. 즉, 한 나라 안에서도 타 문화권의 지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구분으로 선교를 정의하려는 사람들 중에는 미국의 선교학자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을 들 수 있다. 그는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하여 복음을 가지고 문화의 경계를 뛰어 넘는 것”이라고 선교에 대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문화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문화권으로만 구분하는 것이다.
위의 세 가지 구분 가운데에도 공통적인 것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성격에는 구분이 없는 입장이다.
이와 같이 선교를 일반적인 구분으로 지리적인 구분이나 신학적인 구분으로만 가지고는 21세기 현대적인 상황에서 선교적인 개념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적 상황에서도 선교와 전도를 세 가지 구분인 지리적인 구분과 신학적인 구분, 그리고 문화적인 구분을 통합적으로 적용하여 선교를 폭넓게 이해하므로 바른 선교적인 전략과 지평을 펴나가야 할 것이다.
원문 보기:
http://www.wmnews.org/bbs/board.php?bo_table=news3&wr_id=86&page=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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