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15, 2016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주기도문 강해 / 김세윤 박사

마태복음 6장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여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를 누가판과 마태판을 비교해 보면, 마태 판에는 "우리의 빚들을(ta; ojfeilhvmata hJmw'n)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고,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ta;" aJmartiva" hJmw'n-복수)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 이렇게 복수를 쓴 것은 단순히 크게 '죄의식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누가는 왜 '죄들'이라고 하고 마태는 '빚들'이라고 했나? 원래 빚들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원래 용어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언어를 반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판의 두 번째 부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 모두를 용서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도 이 청원 두 번째 부분에서는 "빚"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마태의 "빚"이라는 언어가 원래 언어이고 이 청원에 첫 부분에 누가가 '빚' 이라는 언어를 의미상 '죄' 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고 또한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보았음을 말한다. 이것은 죄의 엄중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을 유대인적 숙어에 익숙치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서를 쓴 누가는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금전적 재무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문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누가는 '죄'라는 말로 풀어서 우리에게 써 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태의 빚이라는 말이 원어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 누가와 마태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번째 부분에 마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해 준 것 같이" (ajfhvkamen)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우리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이렇게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동사의 시제가 다르다.  또 마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해 준 것 같이"에 비해 누가는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이렇게 접속사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제일 불편한 것은 완료형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할 때 우리의 어감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모범으로 내세운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의 빚을 용서해 주십쇼".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것 같이 되어 있다. 누가 판에서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하나님도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 우리의 우리 이웃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용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 같은 어감을 준다. 그래서 사실은 상당히 주기도문을 해석할 때 원래의 뜻을 잘 모르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다.

유대교적 배경을 금세기에 가장 많이 연구한 요한 예레미야스는 셈족 언어를 가장 잘 아는 이 분은 여기 마태복음의 ajfhvkamen을 완료형을 원형으로 보고, 이것을 아람어로 번역해 보면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이것은 동시성의 완료형(perfectum co-incidentie)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뜻은 마태 판으로 하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죄 용서를 청원하는 것에 대한 부수적인 서약이다. 그러면 왜 이런 서약이 붙는가?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해 준 것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즉 이웃사랑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이웃사랑은 마태복음 5장 38절부터 이웃을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비는 자로서 저자가 나에게 나를 험담하고 나를 못살게 굴어서 내가 저자를 언제가 손을 봐주어야겠다는 그 마음을 품고  이웃에 대한 원한, 복수심을, 증오심을 품고 "하나님이여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내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죄는 내가 꽉 지고 있기에 그 죄 말고 다른 죄만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를 빌려면 동시에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죄의 용서의 효과가 나에게 있는데 나는 죄용서 안받겠습니다. 저 이웃에게 원수 갚겠다는 그 죄만은 용서받지 않겠습니다라는 태도와 같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서문과 결론의 서문에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 중어부언하지 말라 하신다. 왜 이유는 하나님께서 너의 처지를 다 알기 때문에 그 서문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을 강조하는 서문이었다면 이 주기도문 끝에 마태복음 5장 14-16절 "너희가 사람들이 너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해 주면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요. 너희들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넣음으로 죄용서 청원을 하이라이트하고 그 청원에 뜻을 새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용서 받음과 우리 이웃에 대한 죄용서함이 이렇게 구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이웃에 대한 죄 용서 없이 하나님에 대한 죄 용서 받음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하나님에 대한 우리 공로를 내세워서 그 반대 부분으로 하나님께 죄용서 받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이라면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자들로서 그것을 실천하지 않겠다고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 용서를 비는 것이 헛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비유로 이 설교를 강력하게 하신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다시 한번 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의 끝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은 주기도문 끝의 구절과 같다. 이 비유가 주기도문의 청원에 대한 설교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10000 달란트 빚진 자를 왕이 빚을 탕감, 용서해 주었다. 10000 달란트는 예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내는 1년 세금이 200 달란트 밖에 안되었다. 그것을 보면 10000 달란트는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장정의 하루 품삯)은 100일 일한 것에 불과하다. 10000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이웃에게 조그만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그 죄에 대한 탕감이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 죄 아담적 실존의 죄에 대한 용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욕하고 손해 입히고 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죄에 대한 10000 달란트와 100 데나리온 정도의 중함과 경함의 관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10000 달란트에 해당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빌면서 겨우 100 데나리온 밖에 안되는 이웃의 우리에 대한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참용서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를 받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죄 용서가 우리를 통해서 이웃에게 나타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를 이렇게 가로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용서가 우리 이웃으로 전달되게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주기도문을 우리가 다시 번역한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었듯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겠나이다"

이 청원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의 각 청원이 청원일 뿐만 아니라 서약임을 잘 보여준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은 '오늘 우리의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청원만이 아니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에 의해 살겠습니다. 우리가 아담적 존재로 살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힘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의 열매를 우상화 하지 않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그 앞의 "하나님 나라가 오소서"라는 청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담고 있다.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나도 이웃에게 죄지은 자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는 청원은 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서약부분을 늘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소서"라고 해 보았자 허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온다고 할 때는 우리 성도들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의 적극적인 제자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적 경건주의의 소극주의가 아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기껏해야 음식가리고 손닦고 그릇 닦는 것으로 경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많이 빠진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세 가지만 안하면 된다. 1.술 안마시고 2.담배 안피우고 3.제사만 안지내면 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이다. 그러면 담배 안피우고 술 안마시고 제사 안지내는 사람이 천만이 아니라 4천만 국민 전부가 그래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샬롬이 안 일어난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실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에도 담겨있지만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요구에도 담겨 있지만 예수께서는 실제로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너희들이 손닦고 그릇닦고 음식 가리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 실제로 더러운 것은, 우리를 부정타게 하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즉 부정한 음식을 먹었나 안먹었나 그런 것이 아니고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배설물을 일차적으로 말하나 그것은 무엇을 비유하는가? 우리의 안에 있는 심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거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거부, 이웃에 대한 증오심과 무시함 이것이 다 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어렵게 하고 우리와 이웃을 어렵게 한다. 그것이 우리를 부정케 하는 것이지 먹는 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제자도의 요구는 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헌신과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의지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빌어야 한다. 아담적 살려고 하는 우리의 실존을 자제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 빌어야 한다. 우리가 아담적 실존으로 빠지는 그 죄를 항상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웃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한다. 나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줄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할 때 우리에게 샬롬이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구체적으로 부가 비교적 공정하게 재분배되고 그렇게 되면 사회정의가 일어나고 그렇게 되면 관계들이 원만해져서 평화가 증진되고 스트레스도 없어져서 몸도 건강해 지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구체적으로 실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가 변화되고 공동체가 변화되고(누룩의 비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덕을 입는다(겨자씨의 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