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15, 2017

지혜, 명철, 지식의 차이

🌻지혜, 명철, 지식의 차이

1. 지혜(智慧, 히:호크마,chokma. 헬:소피아,sophia. 영:wisdom)

관찰, 경험, 반성에 의해 얻어지는, 적절한 생활에 대한 지식과 감정을 말한다.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며(고전 2:6,7),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는 총체적 삶의 양식으로, 하나님에의 신앙과 복종을 지혜의 중심으로 생각했다(시 111:10; 잠 1:7,9:10).

 ① 습득한 지식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② 미래형(未來形)이다.

③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을 통하여 얻는다(잠8;12)

 
2. 명철(明哲, 히:비나,beenah. 헬:순네시스. 영:understanding)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예리한 분별력(욥 6:30,32:9), 어떤 주제를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적 능력(욥 6:24,15:9,18:2,23:5) 등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보다 심오한 차원의 이해력을 표현할 수도 있다. 예컨대 참 지혜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께서 '깨달으신다'(욥 28:23)는 말을 이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① 지식과 지혜를 이용하여 사물의 성질을 분별하는 것이다.

② 현재형(現在形)이다.

③ 거룩하신 자를 알고(잠 9:10), 악을 떠나는 것이다(욥 28;28)

 3. 지식(知識, 히:daath. 헬:gnosis. 영:knowledge)

 사물에 관한 명확한 인식이나 판단. 어떤 사물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또는 그 내용을 이르는 것으로, 인간의 심리적 3요소(지정의, 知情意) 중 하나로, 지식 없이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파악하여 습득하는 것이다.

② 과거형(過去形)이다.

③ 절제가 없으면(벧후 1:6),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고전 8;1)

 4. 종합(綜合)

 '지혜'와 '명철'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 '명철'은 '지혜'의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을 맞춘 글귀)로 사용되고 있다

(잠언 4:5,7,7:4,9:10,16:16; 욥 28:12,20,28;1:20; 사 11:2).

 ① 모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잠 1:7,9:10; 시 111:10).

② 모두 하늘로서 내리시는 선물이다(전 2:26)

③ 모두 긴밀한 관계에 있다(잠 18:15,4:7).

 

Friday, July 14, 2017

절기와 제사에 관한 규례(민수기 29-31장)

제 12 강

절기와 제사에 관한 규례

민수기 28:1-30:16

요 절 29:7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오늘 말씀은 제사에 관한 규례들과 서원에 관한 규례입니다. 이스라엘은 인구 조사를 마치고, 새로운 군대 장관이 취임하였습니다. 이제 가나안 진군 명령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제사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먼저 그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의 기준을 제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갈 백성은 시내산에서 주신 제사에 관한 규례를 직접 받지 못한 신세대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제 가나안 정복 전쟁이 시작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들이 지켜야 할 절기들과 각 절기에 드려야 할 희생 제사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날 신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도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절기와 제사의 규례의 근본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절기의 영적 의미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올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매일, 매주, 매월 드리는 제사들(28:1-14)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 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 '나의 예물'이란 '나의 고르반'이라는 말로 하나님께 바치는 일체의 예물을 가리킵니다(7:3). 화제(火祭)란 희생 제사 전체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제사 방식으로 불로 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나의 식물(떡)'과 '나의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을 의인화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예물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는 신앙의 표현이요,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배 드리는 사람들의 신앙과 그 정성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중에 하나님께 제물을 충실하게 드리지 않았습니다(암 5:25; 행 7:42). 이는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들의 신앙이 약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다시 한번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엄수하고, 소홀히 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매일 드리는 제사, 매주 드리는 제사, 매월 드리는 제사가 있고, 매년 드리는 제사가 있습니다.

첫째, 매일 드리는 제사(28:3-8)

3,4절을 보십시오.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되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해질 때에 드릴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매일 드릴 화제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일년 된 흠 없는 수양' 두 마리를 번제로 드리되 한 마리는 아침에 드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 저녁 해질 때에 드리라고 했습니다. 아침에 드리는 번제는 헌신과 서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녁에 드리는 번제는 사죄와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에는 각 어린 양에 대해서 고운 가루 십분지 일 에바에 빻아 낸 기름 사분지 일 힌을 섞어서 소제로 드려 합니다. 소제를 드리는 것은 온 몸이 가루가 되도록 하나님께 충성을 드리는 헌신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때 1/4 힌의 독주를 전제로 드려야 합니다. '독주'란 석류, 야자 등 열매를 발효시켜 만든, 포도주보다 도수가 높은 매우 값지고 감미로운 술이었습니다. 전제는 우리 신자들의 믿음의 제물과 희생의 봉사 위에 부어질 순교자들의 피에 대한 상징입니다(빌 2:17). 이처럼 값비싼 독주를 전제로 드리도록 명하신 것은 우리가 매일 삶 속에서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서 드리고, 순교자적인 자세로 살아야 함을 말해 줍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번제를 드리려면 한번에 3 시간씩 걸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3시간씩 번제를 드렸습니다. 상번제는 일년 365일 변함없이 드려지는 제사였습니다. 이는 제사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였으며, 제사장들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이요, 생활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매일 드리는 상번제와 소제와 전제는 우리 신자들이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기도와 찬미의 제사를 의미합니다. 복음의 제사장들이 365일 변함없이 감당해야 할 복음의 제사장의 기본사명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매일 아침에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헌신과 충성을 서약하는 기도를 드리며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저녁이 되면 그날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함으로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기도와 찬송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뒤에 나오지만 매일 드리는 제사와 희생은 안식이나 월삭이나 명절이나 빼먹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제사들은 매일 드리는 제사 위에 더해져야지 특별한 제사를 드린다고 매일 드리는 기본적인 제사가 생략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28:10,15, 24,31; 29:11). 이만큼 상번제는 모든 제사의 기본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자들의 기본생활이 중요하고,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찬송하는 생활을 365일 하루도 빠짐 없이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매 안식일에 드리는 제사(9-10)

9,10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이에 기름 섞은 그 전제를 드릴지니 이는 매 안식일의 번제라. 상번제 외에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게 하신 것에은 두 가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날을 기억하며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출 20:11-13). 다른 하나는 안식이 없던 애굽의 노예 생활을 회상하며 참 안식을 주시는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었습니다(신 5:15). 역사적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지켜 온 전통이었습니다. 안식일 제사에는 1년 된 흠 없는 수양 2 마리와 고운 가로 고운 가루 2/10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이 제물들은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제물을 합한 양(量)와 같습니다. 곧 안식일에는 평일보다 두 배의 제물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매일 매일 하나님께 헌신하지만 안식일에는 또 다른 봉사와 헌신을 드려야 함을 말해 줍니다. 복음 시대를 가리키는 성전 봉사에 대한 에스겔의 계시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소제물과 전제와 함께 어린 양 6마리와 수양 1마리를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겔 46:4,5). 이는 그리스도의 날에도 안식일의 성결이 지속되며 더 강화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막 2:28).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을 지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두 배의 제물을 드리도록 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일에는 평상시보다 배나 더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평상시와 같은 기본 생활을 잘 할 뿐 아니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준비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또 예배를 섬기는 직분을 맡은 분들은 기도로 준비하여 예배 환경을 만들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셋째, 매 월삭에 드리는 제사(11-15)

11-15절은 월삭에 드리는 제사에 대한 규례입니다. 월삭(New Moons)은 '너의 달들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달이 기울었다가 다시 차기 시작하는 매월 초하루를 가리킵니다. 매월 초하루는 달의 변화에 의존하여 사는 유목민들과 농민들의 삶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안식일이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면, 월삭은 세상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절을 따라 달을 지정하시고, 달의 변화에 따라 시간을 알려 주시고, 세상의 모든 사물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은 월삭에 모여서 서로의 친분을 두텁게 하고(삼상 20:5,8,24), 말씀을 듣기 위해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왕하 4:23). 이날에는 안식일과 같이 노동을 쉬었습니다(암 8:5). 은 나팔을 불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는 소원을 표하셨습니다(민 10:10). 월삭에 드리는 제물은 수송아지 2마리와 수양 1마리, 일년 된 흠 없는 수양 7마리를 여호와께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11). 각 송아지마다 기름 섞은 고운 가루 3/10에바의 소제를 드리고 수양에는 2/10에바의 소제, 어린 양에는 1/10에바의 기름 섞은 소제를 화제로 드려야 합니다(12,13). 그 외에 15절에 보면 수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했습니다. 이는 지난달에 지은 죄를 청산하고 새로운 달의 헌신을 마음을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월삭의 제사는 매월 드리는 헌신 예배나 우리가 드리는 소회(small paryer meeting)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달을 시작하면서 함께 모여 사죄와 감사와 헌신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배가 됩니다.

Ⅱ. 매년 드리는 제사들(28:16-29:40)

하나님께서는 이제 매년 정기적으로 드려야 할 제사가 무엇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첫째, 유월절 제사(16-25)

정월 14일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었습니다(16). 이 날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날에는 어떤 제사도 드리지 않았으며, 가족끼리 모여서 유월절 양고기와 쓴나물과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이 때 가장이 출애굽의 사건을 가족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날은 제사보다 어제의 구원과 오늘의 자유와 행복이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하고 가르치는 신앙 교육의 날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을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새로운삶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에서는 유월절 그 자체보다 다음 날부터 7일 동안 지켜야 할 무교절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또 그 달 십오일부터는 절일이니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 것이며" '절일'이란 세상 즐거움을 피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히 지켜야 할 날을 말합니다. 한 주간 동안 무교병을 먹고 쓴 나물을 먹도록 명하셨습니다(민 9:11). 첫날과 마지막 날에는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18). 하나님께서는 한 주간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제사를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무교절 제사는 수송아지 2마리와 수양 1마리, 일년 된 수양 7마리를 다 흠 없는 것으로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19). 각 제물에 따라 소제를 드리며 수염소로 속제제를 드려야 합니다(20,22). 이 모든 제사는 매일 드리는 상번제 외에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성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6:28, 눅 22:19). 따라서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유월절은 성만찬에 참여하며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유월절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 먼저 거룩함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목적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레위 11:45, 19:2).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율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후 7:1)"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받은 신자들은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불신자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말고,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롬 12:2). 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어린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전 5:7,8)."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희생이 되신 것은 우리가 누룩 없는 새 인생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은 누룩, 곧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망령된 행실을 온전히 버리고 거룩한 새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칠칠절의 제사(25-31)

칠칠절은 유월절이 지난 후 7주 후라 칠칠절(七七節)이라고 불렀으며, 50일째 되는 날이라 하여 오순절(五旬節)이라고도 불렀습니다(레 23:15). 이 때는 보리를 추수하는 때라 하여 맥추절(출 23:16)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이 날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이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이 날은 그해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처음 익은 곡식으로 만든 떡 2개를 새 소제로 드려야 합니다(레 23:17,18).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송아지 2마리와 수양 1마리 일년 된 수양 7마리를 번제로 드려야 합니다. 각 제물에 해당하는 소제물도 드리고, 속죄제물로 수염소 한 마리를 드려야 합니다. 칠칠절의 제사는 삶의 전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다스리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땅과 생산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여호와(사 42:5)"라고 찬양했습니다. 이 세상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전 영역에서 감사 조건을 찾고,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칠칠절의 의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감사의 제사, 찬미의 제사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 어떤 상황 속에서 감사하는 믿음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나팔절의 제사(29:1-6)

유대 종교력(宗敎曆)으로 7월에는 나팔절과 속죄일 초막절 등 많은 제사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월은 추수기와 파종기 사이에 있는 휴식의 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중 가장 한가한 기간 동안 대부분의 여가를 하나님을 섬기는 데 보내도록 여러 절기를 두셨습니다. 29장 1절을 보십시오. "칠월에 이르러는 그 달 초일일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칠월 1일은 유대인들의 민간력(民間曆)로 정월 초하루였습니다. 곧 우리 나라의 명절인 구정(舊正)에 해당하는 날이었습니다. 정월 초하루가 종교력으로 7월1일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그 달을 기념하여 새해 첫 달로 삼도록 명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월 1일에는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나팔을 불어 새해가 되었음을 알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날은 월삭과 겹치는 날이므로 월삭의 번제와 소제 전제 외에 나팔절의 제물을 더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나팔절에 드리는 제사는 수송아지 1마리와 수양 1마리 일년 된 수양 7마리를 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월삭 제사 때보다는 수송아지 1마리가 줄어들었습니다. 느헤미야 8장 1-1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칠월 초하루에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학사 에스라를 초빙하여 새벽부터 정오까지 여호와의 율법을 듣고 신년 수양회를 가졌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였습니다. 나팔절에는 이처럼 새해를 시작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한 해를 하나님 앞에서 새 출발하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드리는 송구영신 예배나, 신년 수양회를 통해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시에 나팔절은 복음 전파의 나팔과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날을 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나팔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살전 4:16).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 힘차게 복음 전파의 나팔을 불며 죄로 병든 세상으로 진군해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속죄일의 제사(29:7-11)

7월 10일은 속죄일이었습니다. 속죄일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레 16:11-15; 23:26-32). 여기에서는 단지 속죄일을 맞이하는 마음 자세와 그날에 드릴 제물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속죄제, 속건제'의 규례가 있습니다(레 4:1-6;7). 이런 제사는 일생 생활 가운데 짓게 되는 죄와 허물에 대해 죄 사함을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에 한 차례 7월 10일에 드리는 대속죄제는 전국민이 1년간 지은 죄를 크게 회개하고 속죄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날에는 전국민이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금식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이 먼저 자신을 위하여 수송아지로 속죄제를 드리고, 백성을 위하여 염소로 속죄제를 드렸으며,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위에 앞에 뿌렸습니다(레 16:11-15). 속죄일을 맞는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 "마음을 괴롭게"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말은 금식하며 회개의 표시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괴롭게 하는 행위를 말합니다(레위 16:29; 사 58:3-5). 이와 같은 속죄일의 절차를 지낸 후에 거기에 곁들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물은 수송아지 1마리, 수양 1마리, 1년 된 수양 7마리이며, 소제도 겸하여 드렸습니다. 대속죄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제사의 필요성을 암시해 주는 날입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는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히 4:16).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갈 때 마음을 괴롭게 하고,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는 심정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십니다(시 34:18). 구약의 성도들은 1년에 한 번씩 속죄일을 정하고 회개했지만 구원받은 우리 신자들은 매일 하나님 앞에 나가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섯째, 초막절 제사(29:12-40)

12절을 보십시오. "칠월 십오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칠 일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초막절은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8일간 지켰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백성들은 집을 떠나 초막을 짓고 초막에 기거해야 했습니다(레 23:34-43).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간 광야 생활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레 23:43). 동시에 초막절은 한해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였습니다(신 16:13). 그래서 '장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출 23:16). 초막절은 3대 절기 중에서 최대의 명절이었습니다. 제물의 양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첫날은 수송아지 13마리와 수양 2 마리와 1년 된 수양 14마리를 번제로 드렸습니다(13). 각 제물에 따라 소제물(수송아지에는 3/10 에바, 수양에는 1/10에바, 어린 양 1/10에바)을 드렸습니다(14-15). 그리고 수염소 1마리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16). 첫날에 드린 제물만 30마리였습니다. 둘째 날부터는 다른 제물은 동일한데 수송아지만 13마리에서 매일 1마리씩 줄여서 일곱째 날에는 7마리로 줄고, 여덟째 날에는 수송아지 1마리, 수양도 1마리 어린 양도 7마리만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는 율법적인 제사는 마침내 없어질 것이며, 구약의 무수히 많은 제물이 무한히 값지고 귀한 한 제물로 끝나고 말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초막절 제사에는 총 199마리의 짐승이 제물로 바쳐지고, 상번제 16마리를 합하면 총 215마리나 됩니다. 이만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완전한 헌신과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또 가장 풍성한 때에 장막에 거하면서 과거 어렵게 살던 시절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썩어질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아니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계시록 21장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사람들은 좀 잘 살면 마음이 부요해집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땅은 우리가 잠시 거할 장막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절대적인 충성과 헌신을 드려야 합니다. 가장 풍요로운 때에 가장 어렵게 살던 시절을 기억하며 고난의 떡을 먹으며 고난받는 이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이 많고, 배부를 때일수록 가난하던 시절을 기억하고, 장막에 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Ⅳ. 서원에 관한 규례(30:1-16)

나실인의 서원에 관하여 지적되었듯이(6:1-12) 사람은 여호와께 무엇을 하겠다고 서원할 수 있었습니다. 또 지정된 기간 동안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서원할 수 있었습니다(레위 27장). 30장의 기록 목적은 서원 준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첫째, 서원한 것은 다 행하라(1,2)

1,2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두령들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서원은 '맹세하다, 다짐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종교적 성격이 강한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서원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적인 성숙과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서원했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서원은 '분리의 울타리'라고 하여 신앙을 보호해 주는 담과 같다고 했습니다. 서원은 우리의 신앙을 지켜 주고 보호해 주는 담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 기도를 했습니다(창 28:19). 하나님께서는 그 서원 기도를 들으시고, 야곱을 철통같이 보호하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키우셨습니다. 그의 서원이 그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 역할을 했습니다. 또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반드시 행하라"했습니다. '마음을 제어한다'는 말은 '혼을 속박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서원한다는 것은 모든 힘을 다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붙들어 매고, 스스로 속박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서약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신 23:21-23)." 시편 기자는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는 자는 여호와의 장막에 거한다고 했습니다(시 15:4). 반면에 서원해 놓고 실수였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전 5:6). 하나님께서는 서원해 놓고 흠 있는 것으로 사기(詐欺)하는 자를 저주하십니다(말 1:14).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십시오. 서원하기 전에는 모든 재물이 자신의 소유였으며, 임의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다 드리기로 서원한 후 그 서원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행 5:4). 그러므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어떤 이유로든지 파약(破約)해서는 안됩니다. 전도서 기자는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전 5:5).

둘째, 서원의 예외 규칙(3-16)

만일 미혼인 딸이 그 아비의 동의 없이 서원을 했을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4,5절을 보십시오. "그 아비가 그의 서원이나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그 아비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서약이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 그 아비가 허락하지 않으면 그녀의 약속은 무효가 되었습니다(5). 결혼할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내가 서약을 경솔히 했을 경우 그 남편이 듣고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은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듣고 허락하지 아니하면 그 서약은 무효가 됩니다(8). 그렇지만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의 경우는 서원했으면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예외 규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 가정의 책임자요, 스스로 결정한 것이므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결혼한 아내의 서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10-11). 그런데 남편이 아내의 서원을 들은 후에 잠잠히 있다가 얼마 후에 무효케 하면 남편은 아내의 죄를 담당해야 합니다(15). 이때는 적절한 속건제를 드렸습니다(레위 5:4-13).

결론적으로 우리는 매일, 매주, 매월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합니다. 매년의 삶을 하나님의 스캐쥴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매일 드리는 제사를 기본적으로 요구하고 계십니다. 안식일에도, 월삭에도, 그 외 많은 특별한 절기에도 상번제와 소제와 전제는 변함없이 드리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본생활을 충실하게 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기본생활을 게을리 하고, 태만하게 하는 자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눈에 띄는 화려한 제사보다 보이지 않는 가운데 꾸준히 드리는 개인 기도생활고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기도와 찬미의 제사를 성실하게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출처:

http://dgcmi.org/2001/library/bible/numbers/min12.htm

Saturday, July 8, 2017

예배란 무엇인가?

기독교에서의 예배학(禮拜學), 예배(禮拜)란 무엇인가?

  Ⅰ.서언(序言)

예배란 “최상의 존재에게 표하는 경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최상의 존재에게 존경, 경의, 찬양,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예배라는 말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신약 용어는 ‘프로스쿠네오’인데 이것은 “~에게 키스하다, 손에 키스하다, 절하다, 엎드리다”라는 뜻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개념은 사람이 존경, 경외감을 갖고 최상의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이것을 기독교적 맥락에서 하나님께 적용한다. 우리2는 하나님 앞에 절하며 또 하나님께 최상의 성품에 합당한 영광을 드리며, 존경과 경의를 표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는 것이다.

 요한복음 4:20~24절은 예배에 대한 연구의 시금석이다. 이 본문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간의 대화인데 ‘예배’라는 말이 본문에서 여덟 번 나타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으려고 교회에 간다. 그런데 음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위해, 또는 설교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위해, 또는 축복을 얻기 위해 교회에 간다면 그것은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음악과 설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데 그것은 얻는 것이 아니라 드림으로써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드리기 위하여 가야 한다. 본질적으로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존경과 경의를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함께 모이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얻을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드릴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마음의 태도 및 우리의 소유물을 드리는 것을 포함한다.

본 레포트의 목적은 먼저 예배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둘째로, 실상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셋째, 그렇지 않다면 예배를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배의 중요성”, “예배의 근원”, “예배의 대상”, “예배의 영역”, “예배의 본질”, “예배의 결과”, “예배를 위한 준비”, “예배의 장애물”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Ⅱ.예배의 중요성

Ⅱ-1.성경은 예배로 가득차 있다.

예배가 중요한 첫째 이유는 성경이 예배에 대해 매우 자주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수백 번 거듭해서 예배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그 가운데 예배의우선권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의 몇 가지 구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1.구약의 구절들

 1) 제1계명의 강조(출20장)

하나님의 몇몇 표준, 원리 및 지침을 계명, 법규, 법령, 법률 및 신조의 형 태로 말씀하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애굽기 20장 2~6절까지의 제 1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제 1계명은 하나님을,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라 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2) 성막의 설립(출25장)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에 우선을 두고, 예배하는 데 집중하기를 원하셔서 예배를 행할 장소를 설립하신다. 그것이 성막인데 하나님께서 이 예배의 장소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모든 수치, 기 준, 설비를 논하는데 7장(총243절)을 할애하신 점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우 주를 비롯한 삼라만상의 창조를 묘사하는 데는 불과 31절만이 할애 되었을 뿐이다.

  성소에는 지성소가 있었고 지성소 안에는 언약궤가 있었는데, 이 언약궤 맨 위에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백성의 죄를 위한 속죄로 피를 뿌리 는 속죄소가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던 곳은 바로 속죄소인데, 출애 굽기 25장 22절을 보면 예배가 가장 우선적이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3) 성막주위의 진지(민1:52~2:2)

광야 방랑생활 40년 동안 매번 이스라엘 자손이 진지를 세우기 위해 멈춰 설 때마다, 제사장들은 성막에 가까이 있어야 했다. 제사장들 주위에는 레 위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열 두 지파가 바깥 쪽의 원을 이루었다. 제사장들 은 예배를 맡고 있었고, 다른 레위인들은 성막을 돌보는 봉사를 맡고 있었 다. 이것은 우선권이 예배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입증하여 준다.

4) 스랍의 예(사6:1~2)

이사야 6:1~2에서 날개 중 네 개가 예배와 관련이 있고, 두 개만이 봉사 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각각의 스랍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가렸으며, 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때문에 그의 발을 가렸다. 이는 천사들에게 있어서도 예배가 우선적이었음 을 나타내고 있다.

 

5)시편 기자의 권고(시편95:6~7상)

시편95:6~7절 상에서는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 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예배할 것을 권고하는 많은 시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시5:7; 29:2; 45:11; 66:4; 86:9; 96:9; 99:5,9; 132:7; 138:2)

 

2.신약의구절들

 

1) 로마서12:1~2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11장에 걸쳐 그리스도인과 그의 모든 유익을 정의 하는 교리를 논한 다음에, 로마서12장1~2절을 통하여 예배에 관해 논하 고 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받으실만한 영적 예 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산 제사로 몸을 드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런데 그것은 육체적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것은 영적 예배의 행위가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위대한 자비 때문에 영적 예배의 행 위로 그에게 우리 자신을 드릴 것을 요구하신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분께 참되고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2) 베드로전서 2장5절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구속적 은혜의 기사들을 담고 있다. 그 리고 2장 2~3절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갓난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제 구원 받은자로서 베드로전서 2:5절에서 말한다.

 

하나님은 손으로 만든 집에 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산 돌로 만든 집에서 사신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서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한다. 받으실만하고, 참되고, 영적인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 서 하나님의 변혁시키는 사역을 기초로 하여 드려진다.

 

그러므로 예배가 중요한 첫째 이유는 성경이 예배로 가득 차 있기 때문 이다. 그리고 예배가 중요한 둘째 이유는 운명이 예배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Ⅱ-2. 영생은 예배에 의해서 결정된다

예배는 생활에 추가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생활의 핵이다. 받으실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간다. 시간과 영원이 예배의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1.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예배

1) 거짓 신들의 예배세상의 물질적인 신이나(욥기31:24~28), 하늘의 초자연적인 신들(신명기 4:14~19)에 대해 예배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되고 그들 자 신이 창조한 우상들에게 예배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받지 않으 신다.

 

2) 잘못된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하나님을 형상으로, 물질적인 표현으로, 우상으로, 또는 자신의 사고의 결 과 및 산물인 어떤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3) 자기 방식대로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예배활동을 개인적 정의에 따라 격하시키는 것도 받아들여질 수 없다. 제 멋대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몇 명의 성경적 인물을 예로들면 “나답과 아비 후(레10:1~2)”, “사울”(삼상13:8~14절상), “웃사”(삼하6:1~9), “바리새인 들”(마15:1~9; 마23:23~28)등이 있는데 예배는 분명히 성경의 규정에 따라 드려져야만 한다.

 

4) 그릇된 태도로 참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우리 마음의 태도가 옳지 못하면 그 예배도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즉, 거짓 신을 예배하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예배하지도 않고 우리 자신이 고안한 방법대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올바른 태도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관련 성경 구절을 보면 “말라기1:6~14; 3:13~15; 4:1~6”, “아모스5:21~27”, “호 세아6:4~7”, “이사야서 1:11~20”, “마가복음 7:6”등이 있다.

 

4.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1) 참된 예배자들의 모습받으실만한 참된 예배자들은 “깨끗한 손”(하나님께 복종하며 청결히 하는 자)과 “청결한 마음”(동기와 욕구가 올바른 자)을 갖고 참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다. 시편 24편 3~6절은 참된 받으실만한 예배자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2) 참된 예배자들의 산출

구원의 목적은 참된 예배이며, 복음서와 바울 서신의 기록은 사람들이 예 배할 목적으로 구속받는 다는 사실을 지지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예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3) 참된 예배자들의 자세

우리는 예배하기 위해서 구원받았다. 히브리서12:28절을 보면 “섬기다”라 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을 헬라어 동사인 ‘라트레우오’로서 “예배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개념을 정립한다면 “우리가 하나님 의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받으실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우리를 예배하는 자들로 만드 신 하나님께 은혜롭게 반응하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받으실만한 예배는 구원의 결과이므로 우리는 받으실만하게 예배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그 예배를 확장시키고 그것의 충만함에 따라 사는 것은 그의 몸을 영적인 예배의 행위로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받으실 만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 기꺼이 드리는 신자의 순종하는 태도에 의 해서 가능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을 적절하게 예배하지 않는다면 염려스런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할 것이다.

 

4) 참된 예배자들의 개인적인 특성매일의 삶 가운데서 참되고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① 동료그리스도인들에게 지혜롭게 행하고(로마서14:28) ②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 도께로 인도하며(로마서15:16) ③ 필요를 따라 물질을 드리고(빌립보서 4:18) ④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며(에베소서 5:8~10) ⑤ 의의 열매로 충만하고(빌립보서1:11) ⑥ 경건하고 단정하며(디모데전서2:3) ⑦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히브리서13:15~16)하여야 한다.

 

5) 참된 예배자들이 모이는 목적

우리의 예배가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할지라도 우리는 또한 매 주 공동 예배 에 참석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주일에 드리는 예배가 나머지 육일 동안 예배하도록 고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하기 위하여 세상 가운데서 나눔과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예배드릴 목적으로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행하도록 격려 받는다.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 의인들의 회중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 시는 그 백성 가운데 우리는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과 선행 을 하도록 격려받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에 그 격려가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끼칠 때, 우리는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히 13:16). 그리고 다시 그 모임에 돌아올 때 우리는 계속적인 감사의 마음 을 갖고 충만하게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Ⅱ-3. 영원과 구속사가 예배에 의해 묘사된다

예배는 영원과 구속사의 주된 주제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1.창조전의 역사

사람이 창조되기 전 영원한 과거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천사들이 존재했는데, 느헤미야9:6절과 욥기38:4~7절 까지를 보면 그 영원한 과거에도 예배가 진행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타락 전의 역사

아담과 이브가 창조되었을 때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러나 이 브가 사단을 예배하기로 결정하고, 아담이 이브를 예배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즉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중단 했을 때, 그들은 타락했다.

 

3.타락 후의 역사

1) 가인과 아벨

아벨은 받으실만한 제물을 드렸지만, 가인의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못하여 사람 사이의 최초의 분열이 일어났다.(창세기4:5)

 

2) 족장들

족장들이 올바르게 하나님께 예배했을 때는 축복을 받았지만, 그릇되이 예 배했을 때에는 징벌을 받았다.

 

3) 이스라엘 국가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 후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못했기 때문에 시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전세대가 죽고 말았다(민14:22~23). 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예배받기 원하셨던 대로 예배하여 축복을 받았으나 결국 올바르지 않게 예 배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벌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전세계에 흩어 버리셨다.

 

4)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예루살렘에 가셔서 예배 처소에 들어가 그 처소를 정결케 하셨다(요2:13~17). 또한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을 부르셨다(요한복음4:23~24). 이와같이 예배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로 구 속사의 중심 주제였다.

 

4.현재의 역사

교회가 생겨날 당시 그것은 예배하는 자들의 모임이었다. 빌립보서 3:3은 성경에 나온 예배에 대한 위대한 진술들 중의 하나로서 교회에 대한 정의를 잘 내려주고 있다. 교회는 독특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영으로 하나님 을 예배하며, 그리스도로 자랑하는 것을 그 구성으로 한다.

 

5.미래의 역사

역사가 그리스도 재림의 영광 가운데 완성될 때, 그것은 예배에서 절정을 이 룬다. 왜냐하면 예배는 천국과 영광의 주제이기 때문이다.(계시록4:10~11; 계 시록 5:14; 계시록 11:15~17; 계시록 14:6~7; 계시록 15:4; 계시록 19:4; 계시 록 19:10; 계시록 22:8~9)

 

6.그리스도께서 예배를 명하셨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예배를 명하셨다(마4:10하). 이 말씀은 창조된 모 든 것에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모두가 하나님을 예배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Ⅲ.예배의 근원(基礎)

구원의 목표는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속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15에서 결국 예배를 낳기 위하여 모든 노력이 기울여짐을 말씀하고 있다. 

 

받으실만한 예배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주님은 누가복음 19:10절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을 요한복음 4:23절하와 연관시키면,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예배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통하여 예배하는 자들이 된다.

 

Ⅲ-1.그리스도의 죽음(시편22:22~27)

시편 22:1~21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는 묘사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는가에 대한 답은 22절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시편22편은 구속의 목표가 예배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구원이 예배의 기초라는 것이다.

 

Ⅲ-2.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린 이유(출20:22~2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백(출19:7~8)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기초하거나 그들의 자기 의(義)에 기초해서는 하나님께 접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20:1~17에서 십계명을 주신 후에 출22:22~26을 통하여 은혜로운 규정을 주신 것이다.

 

출22:22~26에 나타난 은혜로운 규정은 예배의 기초로서 제단과 그 위에 놓을 수 있는 제물들을 설정하셨으며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제사로 궁극적인 교제를 가능하도록 만드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실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만날 때, 우리의 죄가 처리되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하게 되며, 또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자가 된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의해 가능하게 된 구원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근원이다.

 

Ⅲ-3.이사야의 예언(사66:22~23)

이사야서는 놀랄만한 방법으로 구속사를 한 눈에 훑는다. 이사야서의 초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위대한 미래 - 메시야의 도래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 - 로 옮아간다. 52장과 53장에서는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어야 하는 고난받는 종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는 66장에서 는 그 이유가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영원한 예배자들을 낳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천년왕국을 넘어 영원한 상태로 나아간다.

 

Ⅲ-4.한 회심한 죄인의 반응(고전14:23~25)

고전 14:23~25는 어떤 사람이 회심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바울식 표현이다. 진실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열기를 원한다면 방언으로 말하지 말고,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고, 그리고 그로 인해 그가 죄를 깨닫고 책망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가 죄를 선고 받고, 책망을 받고, 깨달으면, 그의 반응은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로 나타날 것이다. 구원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예배이다. 이와 같이 구원은 예배의 근원 또는 기초가 된다.

 

Ⅳ.예배의 대상

예배의 대상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배의 대상이 두 가지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영으로서의 하나님과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이는 그분의 본질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본질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참된 예배의 기본적인 것이다.

 

Ⅳ-1.영이신 하나님(하나님의 본성)

 

1.하나님의 영성

요한복음4:24절상은 헬라어로 ‘영’이라고 읽는다. 영과 하나님이 용해되어 동등한 것으로 만든다. 즉, 하나님은 하나의 영광스러운 영이신 하나님이시 다.

 

1) 하나님은 형상으로 전락될 수 없다.

이사야서40:18~26의 말씀을 보면 영으로서의 하나님의 본질적인 특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 가운데 18, 19, 25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암시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 어떤 형상과도 비길 수 없으며 세상에 서 가장 중요하고 강한 자도 하나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또는 신학적 관점에서 또는 성경적 관점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자칫 하나님을 형상으로 전락시 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으로서 예배되어야만 한다.

 

2) 하나님은 한 장소에 제한되실 수 없다하나님은 한 장소에 제한되는 우상이 아니시다(예레미야 23:23~24).

하나님은 특별한 장소 또는 시간에 제한 받으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특정한 시간에 특별한 정소에만 계시다고 생각 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시간과 공간을 충만하게 채우신다.

 

2. 하나님의 거룩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하게 예배를 받으셔야만 한다 하나님의 거 룩하심은 “하나님의 독특한 타자성” 또는 “인간 피조물과 하나님의 상이성” 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은 흠이 없으시며, 오류가 없으시며, 죄가 없으 시며, 실수가 없으시며, 또 완전히 의로우시며 전적으로 거룩하시다. 그러므 로 참된 예배를 위한 기본적인 이해는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선의의 노력과 또 하나님을 거룩하게 존중하지 않으며 진행 되는 - 그러므로 잘못된 - 많은 예배들이 있다. 많은 멋진 노래가 불려지고, 멋진 감정들이 느껴지며, 멋진 생각들이 떠오르고, 또 멋진 정서들이 표현되 고 있다. 구러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는 관점에서 그런 것이 아니기에 이 러한 “멋진”것들은 사람을 기분좋게 만드는 정서 활동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당연히 수반되 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이해로 경건한 두려움의 반응을 낳는다는 것이다.

 

1) 경건한 두려움의 반응

시편 96:2~9까지의 말씀을 보면 모든 예배와 찬양후에, 9절에서 핵심 진 술에 이르는데 여기에 예배의 태도 또는 관점이 있다. 결국 거룩하심은 두 려움과 분리되어 이해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매우 거룩한 존재 이심을 인식하게되면 자신이 매우 부정적인 존재임도 분명히 인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룩한 경외감을 낳는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부정한 피조물에 대해 거룩한 반응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 정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압도적인 부정함을 느끼 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함과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개념이 단지 구약의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히브리서 12:28절 하~29, 이사야서 6:1~8, 디모데후서 2:22등과 같은 성경 말씀에서 확인 할 수 있다.

 

2) 감사의 반응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 하심이 우리에게 감사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에 따라 보 응하시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는 이러한 하 나님의 자비조차도 우리에게 문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롬2:4).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보여주 셨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개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롬6:23). 즉 우리가 죄를 지닌 채로 하나님의 임재 가 운데로 달려나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남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죄에 대해 의로운 분노를 발 하실 날이 온다.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행동할 권리를 갖고 계신다. 우리 는 은혜와 자비에만 익숙해져서 하나님이 의로운 것을 행하실 때 그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가 있는 가?”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삶이 어렵게 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가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생각이 반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죄에 가득찬 사람들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실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공의로 인한 저주와 사망의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께 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부정함에 대 하여 거룩한 방법을 행동하셨던 것이고 또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께 약속했던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을 때 왜 우리가 죽지 않았나? 하는 은혜와 자비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부당하신 분이 아니라 자비로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때때 로 하나님께서 의로운 것을 행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을 생각나게 하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기 위하여 그것 을 예 또는 표지로 행하신다(고전10:5~12). 그러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부당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침해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자비로우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요, 초점인 것이다.

 

Ⅳ-2.아버지이신 하나님(하나님의 본질적인 관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관련하여 아버지라는 용어를 볼 때, 사람들은 즉시 하나님을 자신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광대하시고, 편재하시고, 영원한 영으로서 뿐만 아니라 또한 친밀하시고, 사랑하시고, 개인적인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시고 또 우리가 그의 자녀라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요한복음 4장에서 토론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도 아니고, 또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강조점도 아니다. 그 강조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하나님의 삼위일체 칭호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그분은 하나이신 세 인격 즉, 삼위일체 (三位一體, TRINITY)이시다. 이 삼위일체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이 여기서 “아버지”로 불리워 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를 우선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내에서 하나님의 본질적인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자의 아버지시다. 그리고 성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 므로 우리가 아버지로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모든 인류의 아버지(자 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를 모호하게 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칭호와 별개로 예배되실 수 없다.

 

1) 예수님께서 “아버지”라는 말을 사용하신 의미

신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논의될 때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 리스도의 아버지를 나타낸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언급하셨을 때 예수님이 그의 신성,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진술하고 계신 것이다.(요한복음 5:17~18; 요한복음10:29~33; 요한복음 17:1~5; 마태복음 11:27; 요한복음14:6~11)

 

2) “아버지”란 용어에 대한 사도들의 이해

서신서(書信書) 전체에 걸쳐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에 배되고 동일시 된다.(에베소서1:3상; 에배소서1:17상; 고린도후서 1:3; 빌립보서2:9~11; 로마서 15:6; 베드로전서 1:3상; 요한 2서 3절)

 

2.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

1) 아들에 대한 예배

요한복음 5:23은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동등성에 대한 논리적 결론을 내 려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에배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아 들을 예배하여야 한다. 이는 아들의 이름으로 나아오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예배할 수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연합가운데 정의 되며, 초대교회 내에서 나타났고, 요한복음 20:38에서 사도 도마에 의해서 선언 되었다.

 

2) 성령에 대한 예배

성령님을 예배하라고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성경 아무데에도 없다. 하지만 모든 에배는 성령의 권능 가운데 고무된다. 우리에게 하나님 의 임재 가운데 나아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롬8:15; 갈4:6).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님의 권 능과 임재 가운데서 이다. 그는 에배의 중요한 부분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실재를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삼위일체적으로 성령님은 아들과 아버 지와 동등하시기 때문에 그 또한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

 

그러면 요한복음 4:20~24에 따르면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영이신 하나님이다. 어떤 모호하고둥둥 떠다니는 정의되지 않은 영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나님이다. 누구의 아버지이신가?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신가?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 하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게 되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소중한 것이다.

 

Ⅴ.예배의 영역(場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히 성전, 성막 그리고 매우 특별한 지리적 장소에서 예배했다. 이 때문에 요한복음 4:20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본래 그녀는 예배드려야 하는 곳이 어디냐고 묻고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라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이 곧 모두 제거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장소도 예베 처소가 되지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Ⅴ-1.옛 언약의 상징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는 더 이상 그리심 산이나 예루살렘에서 드려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성막이나 성전 또는 의식 및 희생 제도의 중요성을 부인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셨던 모든 상징, 표상 및 그림들을 부인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모든 상징들이 사라지고 물질적인 성전, 제물 및 제사장들이 필요하지 않게 될 때가 노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각자 살아있는 성전과 살아있는 제사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신 제물은 단 하나의 완전한, 최종적인, 영구적인 - 모든 다른 제사들을 종식하는 - 제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상징에는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 그것들은 그저 상징일 뿐이었고 하나님은 결코 성막이나 성전에 제한되거나 한정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상징은 마음의 자극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새 언약에서 상징들은 실제가 되었고 또 외적인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으로 옮아갔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을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어떤 사람이든 지성소로 곧바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막15:38)

 

- 그렇다면 이와 같이 前制度가 끝나고, 성전이 있지 않다면 그리고 특별한 물질적 건물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예배를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다음에 있다.

  

Ⅴ-2.새 언약의 실재

1.우리의 개인적 몸인 성전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은 성령의 살아있는 성전들이다. 이는 사도 바울도 고 린도전서 6:19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해변에서, 산에 서, 시골에서 또는 당신의 거실에서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또한 길을 따라 운전하면서, 나무 아래 앉아서, 숲 가운데를 걸으며, 베 란다에 앉아 별들을 바라보면서, 아침에 신선한 꽃 내음을 맡으면서 하나님 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러면 이로인해 내가 교회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라는 의 문이 생기게 될 것이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맞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교회에 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차 원을 분명히 살펴보아야 한다.

 

2.우리의 집단적 모임의 성전

오늘날에는 예배 처소 -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그분의 백성을 만나는 건물 - 가 있다. 이를 성경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매우 생생한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 리고 그는 그들을 연결되지 않은 개인적 성전들로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권속에 속해 있어 공동 시민권에 의 해 연결되어 있고 또 가족으로 공동 혈연에 의해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 라 건물로서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에배소서2:19~22). 하나님은 특별한 건물을 갖고 계신다. 그것은 구속된 성도들의 가시적이 고 살아있는 모임이다. 함께 모일 때에 우리는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구성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개인적 성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집 단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의 거대한 성전인 것이다.

  

2)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우리를 “산 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함께 모일 때 하나님께서 독특한 방법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시는 예배 처소를 구성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혼자 있을 때는 그 자신을 나타내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 우리에 게 움직이시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2:5)

  

3)바울은 고린도후서 6:16에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모일 때 우리 가운 데서 움직이신다고 밝히고 있으며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 하다고 권면하고 있다(고린도전서 3:9; 3:16~17)

 

4)우리가 함께 모여야 하는 이유는 놀랄만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 님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돌로 만들어진 성전이 아니 라 살아있는 육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히브리서10:24~25). 우리는 어떤 장소에서나 하나님을 에배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혼자서 예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모임 가운데서 예배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집단적인 모임이 필요한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산 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구속된 백성의 임재 가운데 있을 때 오는 자극과 확인,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성취하시는(우리가 혼자있을 때는 성취하실 수 없는) 독특하고 놀라운 사역에 대해 반드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을 에배하는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Ⅵ.예배의 본질(本質)

 

Ⅵ-1.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벗어난 것들

 

1.사마리아인의 예배(진리없는 신령)

요한복음 4:22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 을 예배하고”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 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몇몇 진리들을 알 만큼은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구원 의 계시를 전부 알 정도로 충분한 지식은 없었다.

 

사마리아인들이 드리는 예배는 적절한 지식이 없는 열광적인 예배였다. 그 들이 드리는 예배는 정열적이고, 열광적이고, 흥분되어 있었고, 충성된 것이 었지만 그들에게는 올바른 내용이 없었다. 즉, 그들은 신령으로 예배했지만 진리로 예배하지는 않았다.

 

2.유대인들의 예배(신령없는 진리)

요한복음 4: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유대인)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유대인들의 태도는 사마리아인들과 정반대이다. 그들은 구약의 39권 모두를 받아들이며 구원의 가르침에 대한 전체계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들에게는 신령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차갑고 율법적이며 위선적이었고(마태복음6:1~8), 예배 동작을 모두 행했으나 그 안에 그들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들의 예 배는 생명이 없는 것이었고 그들은 진리는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비어 있었다.

 

Ⅵ-2.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1.신령으로 드리는 예배

1) 의미

신령으로 드리는 에배는 인간의 영 - 속 사람을 뜻한다. 우리는 안에서부 터 밖으로 에배를 드려야 한다. 그것은 적절한 장소, 적절한 시간, 적절한 말과 적절한 태도, 적절한 의복, 적절한 형식, 적절한 행동, 적절한 음악, 적절한 분위기 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부 - 영혼에 무엇이 있는가 의 문제이다. 바울과 다윗은 심령과 내부로부터의 예배 그리고 회개하는 예배와 마음 속이 찬양으로 가득차 있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로마서1:9; 시편103:1; 시편51:15~17)

 

2) 방법

어떻게 하면 신령으로 예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찬양으로 가득차서 우리 입이 열려질 때 찬양이 쏟아져 나오게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냉 랭한 마음, 즉 지루하며 무관심한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몇 가지 원리를 제시해 보면

 

(1) 성령께 사로잡힘

성령께 사로잡히는 것(고린도전서2:11; 고린도전서12:3)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신령으로 예배드릴 수 있으려면 그 전에 성령께서 거기 계셔 그것을 고무해야 한다. 즉, 성령께서 예배를 북돋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구원 받은 것이다. 일단 구원을 받으 면,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께 향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촉구하고, 찌르 며, 밀어부치고, 가르치며,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 그것이 성령님의 사역이다.

 

(2)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함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 새로워진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 다. 하나님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는 것은 예배를 시작하는 방아쇠가 된다. 즉, 온 마음을 한 가지 주제인 하나님께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 다. 효과적인 예배에 있어 핵심이 되는 것은 온 마음을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할 수 있는 것 즉, 하나님에 대해 묵상 할 수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묵상함

묵상은 지식에 기초하는 것인데 만일 어떤 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자 한다면 생각할 주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순 수하며, 가장 참되고, 가장 멋지고 복된 묵상은 발견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발견했을 때 그것이 우리의 모든 사 고과정을 완전히 사로잡을 때까지 그 진리를 묵상하라는 것이다. 이러 한 묵상이 진정한 예배를 하도록 한다.

 

(4)나누이지 않는 마음 

우리 심령을 예배에 집중시키려 애쓸 때, 한 가지 주된 방해거리가 나 타날 것이다. 그것은 자아(自我)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 예배는 방해를 받는다. 우리에게는 종종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이 있어서, 발견이나 기도, 묵상, 예배 등을 위한 시간이 없다. 또한 나누이지 않는 마음을 갖기도 어렵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계획, 우리의 행동, 우리의 필요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自我)는 항상 예배를 방해한다. 우리가 자아를 완전히 제거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에 빠져들 때까지는 진정 하나님을 자유롭게 에배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진정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기에는 너무 게으르다 는 사실로 귀착되어진다. 찬양이 고정되고, 견고하며 하나님의 기사에 집중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필요, 이익, 축복 등 보다 항상 하나님을 위에 모시고 그분을 우선해야 한다.(시편86:5~ 11; 요일2:27; 요한복음16:13; 시편108:1~3; 시편112:7~8; 시 편57:7~11)

   

⑤ 열리고 회개하는 심령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접근할 때, 우리는 열리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다 가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탐조등을 켜서 당신께서 한구석에서 발견 한 것들을 드러내어 주소서”라고 기꺼이 말하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만일 예배하는 것이 어렵고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면 분명 그 사람의 삶에는 오랫동안 간과되어졌고 하나님 만 알고 계시는 영역들이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러한 영역들을 찾아 그것을 보여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런 후에 상 하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 죄들을 고백하고 그 죄를 처리하여 야 한다(시편139:23~24; 사6:6~7)

 

2. 진리로 드리는 예배

모든 예배는 진리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느낀 감 정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진 반응이다. 만일 우리가 진리로 예배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가운데 예배드 려야 한다. 우리가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하신 곳은 그분의 말씀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요한복음17:17;시편119:142,160)

 

1)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피조 세계와 양심 속에서 드러내셨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명백하게 자신을 게시하셨다. 우리가 진리로 예 배하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규정된대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창조와 양심의 하나님에 대해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 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분의 계시와 떨어져서 예배를 받으실 수 없다(로마 서1:18~19,25)

 

2) 모든 예배는 반드시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시편 47:7)

예배는 단지 손을 모아쥐고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아니면 아무 의미나 내용 없는 황홀경에 빠진 경험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심지어 좋은 감정도 아니다. 물론 감정 자체는 좋은 것이지만 예배는 말씀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드리는 찬양의 표현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 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이는 참된 예배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임은 어떤 모임이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 - 하나 님을 예배할 수 없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신령으로 또 진리에 따라 예배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3) 예배에 있어 모든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결코 속 임수로 성경을 오용해서는 않될 것이며 또 우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정직하여서도 안된다. 우리는 오직 진리 가운데로 행하여야 한다.(고린도후서4:2)

 

4) 초대교회 교인들이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것은 사도들의 저술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 자신에 대한 계시였 다. 그것은 진리의 실체로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것에 대해 예배드렸다 (사도행전2:42)

 

5)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르쳤다(디모데전서4:13)

 

6) 초대교회가 예배드릴 때 그들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이용했으며 찬양과 감사의 시간을 가졌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우리 의 찬양이 규정되며, 우리의 예배는 신적 기준에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골 로새서3:16~17)

 

7) 무지(無知)한 가운데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다(사도행전17:23)

 

예배의 특성은 찬양과 기도, 노래, 헌금 그리고 생활 가운데서 우리 속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항상 그분의 계시된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가 항상 그렇게 되도록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감상 적이고 광신적이며,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두편의 한 가 운데가 조화를 이루는 지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받으셔야하기 때문이다.

 

Ⅶ.예배의 결과(結果)

  

Ⅶ-1.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시편50:23). 우리 삶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레위기10:3)

 

Ⅶ-2.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된다

예배하는 교회는 정결한 교회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때 거기에는 우리의 죄됨에 대한 인식과 그 죄됨을 포기하려는 기꺼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거기에는 깨끗하고 정결하게 되려는 불타는 열망이 있다(시편24:3~4).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의 죄에 더욱 더 압도되어 다윗과 같이 이렇게 외치게 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시편139:23~24절상)

 

교회에 있어서 성찬식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우리의 죄된 모습에 직면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사실상 바로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그토록 자주 성찬식을 행했던 것이다. 참된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된다.

 

Ⅶ-3.교회가 세움을 받는다

초대교회가 예배를 드렸을때 그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칭송 또한 받은 것을 알게 된다(사도행전2:47). 그리고 그들은 성읍을 완전히 그들의 교리로 가득차게 했다(사도행전5:28)

 

예배하는 교회는 쌓아 올려지는 교회 - 즉 세움받은 교회이다.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자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세워지고, 강해지며, 변화되어 진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예배가 거룩한 기대와 함께 시작하는 것처럼, 그것은 거룩한 기대로 끝을 맺는다.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리스도인들이 깨끗하게 되며, 교회가 세움받는 것이다.

 

Ⅶ-4.안 믿는 자들이 구원 받는다

예배하는 공동체의 심오한 증거는 어떤 단독적인 설교가 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예배하는 사람들은 안믿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고린도전서 14:23~25)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그리스도인이 깨끗하게 되며 교회의 품성이 높아지고 잃어버린 자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Ⅷ.예배를 위한 준비(準備)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갈 때, 문제는 성가대나 설교가 얼마나 잘 준비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준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의 한 구절인 히브리서 10:22절 말씀이 성경전체에서 예배에 대한 가장 위대한 최종 변론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Ⅷ-1.부르심

“…나아가자…”

이는 예배에 대한 부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라, 지금은 예배할 때이다. 하나님께로 향해서 가까이 나가자”

 

Ⅷ-2.점검표

1) 진지함

“…참마음…”

우리는 진정으로 진지한가? 우리의 마음은 모아져 있고 온 마음을 다해 예 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2) 충성됨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가 더 이상 노력이나 의식의 체계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 에서 온전한 믿음을 갖고 나온다고 하는 충분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는 것이 충성을 의미한다.

 

3) 겸손함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악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겸손과 무가치함을 위식하게 된다. 주 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죄로부터 우리를 뿌려서 깨끗하게 하셨다는 사실 외에는 하나님 임재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깨끗함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마음을 씻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날마다 씻는 것이다. 예배할 수 있기 전에 우리는 고백을 통하여 생활 가운데 짓는 죄 를 처리해야 한다. 비록 우리 마음은 십자가에서 깨끗하게 되었지만 우리 의 발은 여전히 이 세상의 먼지를 묻히고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죄를 고백해야 한다.

 

 

Ⅸ.예배의 장애물(障碍物)들

  

Ⅸ-1.회개의 예배

만일 우리의 삶속에 죄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죄를 고백해야 한다. 사무엘상 12장을 보면 ‘밧세바’와 간음을 저지르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한 후, 또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태어난 아이가 죽은 후의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모든 일 후에 20절을 보면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궁으로 돌아와서 명하여 음식을 그 앞에 베풀게 하고 먹은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회개의 예배이다.

  

다윗은 비극적인 상황 - 자신의 어린 아기를 잃음 - 한 가운데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예배했다. 이는 그 자신이 마땅히 받을 것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회개의 예배란 징벌의 와중에서마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죄를 고백하며, “나는 마땅히 받을 것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죄를 결코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 회개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진솔한 회개가 없는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방해하는 첫번쩨 장애물이다.

  

Ⅸ-2.받아들임의 예배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에 가져오신 환경들 중 일부를 받아드릴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한다. 그러한 환경들은 그들을 비통하게 만들고 결국 예배를 드릴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욥’을 보면서 분명한 받아들임의 예배를 배울 수 있다(욥기1:20~22). 또한 ‘죠지 뮬러’의 말을 상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내가 죽는 날이 왔다. 인간의 칭찬과 인간의 비난에 대해 죽는 날,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에 대해 죽는 날이 왔다.” ‘욥’ 역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하고 있다.

 

받아들임의 예배는 우리의 상황 - 지위, 경력, 노력, 배우자, 자녀 - 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내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사랑하는 자를 잃는 것, 자녀를 잃는 것, 직업을 잃는 것, 질병의 고통 등)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가운데서도 저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허락하신 모든 것을 받아 들일 수 없는 마음이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두번째 장애물이다.

 

Ⅸ-3.헌신의 예배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자기 아들을 이삭을 데리고 간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의 생명을 기꺼이 취하면서 여전히 그것을 예배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창세기22:4~5). 이것은 그 댓가가 무엇이든지 간에 자신을 예배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그러므로 헌신적인 마음과 정신이 없는 우리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X.結言(맺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에배의 정의와 중요성, 근원, 대상, 영역, 본질, 결과, 준비, 장애물등을 살펴 보았다. 본 결론에서는 참된 예배를 위한 자기 점검을 위에 기술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매번 예배 드릴 때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진지한가? 나의 마음은 모아져 있는가? 내 온 마음은 하나님께 바쳐져 있는가? 나는 그분께 집중하고 있는가? 나는 발견과 묵상을 통해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분을 봄으로써 갈급한 마음으로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려 하고 있는가?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면서 나아갈 수 있다고 분명히 믿는가? 나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피흘리신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내 삶에 있는 모든 죄를 처리하고 깨끗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예배를 드리기 전에 조금만 성의를 갖고 성경을 펴서 히브리서 10:22를 읽고 점검표대로 살펴 보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예배를 위해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키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나는 진지한가? 나는 새 언약이라는 진리에 전념하는가? 나는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사역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권리를 평가하고 있는가? 나는 순수한가? 나의 삶에 있는 죄를 처리해 왔는가? 이렇게 해나간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4:8절상)고 말할 수 있게될 것이고 이를 근간으로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參考文獻

1.죤 맥아더(한화룡 옮김) , 참된 예배, 도서출판 두란노, 2000

2.벧엘 성경 편찬위원회, 벧엘 성경, (주) 종로서적출판, 1997

3. 기타 논문자료 다수

http://kcm.kr/dic_view.php?nid=4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