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19, 2019

율법의 기능과 목적  

🎈율법의 기능과 목적  
/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

당신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압니까?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입은 닫혀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복음의 솔직성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을 다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에 관해 말하며 하나님을 비평하며, 왜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실까에 대해서 거드름을 피우며 이야기하길 '왜 하나님은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두시는가?' 등의 질문을 내뱉곤 합니다. 당신의 입이 닫혀져 함봉되고 할 말이 없어지기 전에는 아직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의 주장을 내걸고 당신의 모든 의를 내 보이십시오. 그러면 율법은 그 모든 것을 쓸모 없는 지푸라기이며 '더러운 넝마'와 '분토(糞土)'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그것이 율법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함이니라."

바울은 이 점을 좀더 나가서 다시 반복합니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9). 사죄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의(義)를 내세우는 바리새인과 같은 현대의 도덕적인 사람은 앞으로 걸어 나와서는 행한 것과 범하지 않을 계율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느뇨?' 하나님 영광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당신은 이런 점들을 행위의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전체 태도와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당신의 처지에서 음미해 보아야만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곤란한 문제는 율법의 기능과 목적에 관한 잘못된 개념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전에 이 율법을 주셨습니까? 제가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우리들 마음에 쓰여진 율법과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답변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 결코 아니란 것입니다. 그 점은 유대인에게 불합리한 생각입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도 역시 같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말씀하시되 '너희들은 온 힘을 기울여 율법을 지켜야 하며, 그럼으로써 내 앞에서 너희가 구원받을 것이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런 이유로써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죄 안에 있는 인간이 그것을 지키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8:3에서 죄에 빠진 사람이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이유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그 원리에 대한 완벽한 진술이 이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우리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율법을 구원할 목적으로 주셨던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불합리와 비복음적인 노선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구원사역에 있어서 첫 단계로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셨고 결국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궁리 끝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관한 것을 도입하셨다는 것입니다. 궁리 끝에 나온 것이 십자가라니! 얼마나 비성경적인 개념입니까? 그것은 성경을 아주 여러 부분으로 나눠놓고는 아주 치명적으로 주요한 그 모든 부분들에 대한 통일성을 무시한 가르침의 특징입니다. 

참으로 우리들에게 제시한 율법을 주신 이유에 대한 영 단번(once and forever)의 진술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지식'(knowledge of sin)을 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의 가공(可恐)할 성격에 대해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이 점을 다시 언급합니다. 가장 명백한 진술들 중 하나는 롬5:20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 율법이 들어옴에 따라 (이것은 바울이 즐겨 쓰는 '율법이 들어온 이유'란 문구입니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 온 것은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 많게'하려 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것을 덧붙여 말합니다.

롬7:7에서 그 점을 다시 대하게 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7:5에서 율법의 주요 목적이 그로 하여금 죄를 더욱 많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해 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율법에 의해서 죄에 대한 정욕이 일어난다는 것-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런 무서운 상태에 있다는 것이며, 죄를 짖지 않도록 경고하는 바로 그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죄를 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7에서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점이 바로 율법의 기능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전에 법이 없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의 전 기능은 정죄(定罪)하며 죄의 본성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무리들이 어떠한 핑계도 할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원래 율법은 우리 마음에 있으나 그것은 충분하게 명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밝히 드러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정하고 그것을 새겨서 기록된 율법으로 명백하게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또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진술들 중에 가장 위대한 진술인데 롬7:13의 말씀,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입니다. 바로 이 점이 율법이 수행하는 바입니다.

율법은 바늘구멍 만한 죄에 대하여도 정죄하고, 죄의 은밀한 면을 들추어 내어 그것이 더 큰 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사람 안에 있는 죄가 어느 정도 깊은고 하니,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하나님의 율법마저도 그를 더욱 악하게 만들어 그로 인하여 죄짓도록 충동질하며, 결국 율법을 죽음의 방편으로 변하게 할 정도로 깊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행한 것 만큼 죄의 넘치는 악성을 잘 보여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본성이 어리석고 비열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알았을 때뿐입니다. 그 때 그는 비로소 자기가 '악한 불신앙의 마음'을 가진 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은 탐심과 비열과 어리석음 즉, 수치와 죄로 가득찬 것인데, 율법 이외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으로 그 점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준 것이 아니고, 다만 구세주에게로 사람을 데려다 주는 몽학선생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율법의 전체 대상과 목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결코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과 그것의 영적인 내용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그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너희 마음과 뜻과 목숨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섬기며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그렇게 했으며 그런 식으로 율법을 지켰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점이 율법이 말하는 바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전적인 무능력과 절망을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고 구속하며,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시키며 영원토록 안전을 보장하는 오직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이며, 율법으로는 죄의 죄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이렇게 선포하며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Monday, March 18, 2019

요한 1서 요약

요한1서

저자: 요한 1, 2, 3서는 그 서신들이 쓰인 맨 처음부터 요한복음을 쓴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이 세 서신의 내용과 문체, 그리고 어휘를 보면 요한복음의 독자와 동일한 독자를 위해 쓰였다고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저작 연대: 요한1서는 주후 85-95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록 목적: 요한 1서는 독자들이 요한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추정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확신을 주기 위해 복음을 요약해 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 1서는 2세기에 심각한 문제가 되었던 그릇된 영지주의에 독자들이 직면해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영지주의는 종교 철학으로서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둘 사이의 긴장에 대한 해결책은 영지(gnosis) 또는 지식인데, 사람은 이 지식을 통해 세속적인 자리에서 영적인 자리로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영지주의적인 복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두 가지 그릇된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는 가현설(Docetism)인데 사람 예수는 단지 유령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케린투스설(Cerinthianism)로 예수님은 두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 때로는 인간으로, 때로는 신으로 활동한다는 이론입니다. 요한 1서의 핵심 목적은 믿음의 내용에 경계를 정하고 신자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핵심 구절: 요한1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1서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1서 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요한1서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핵심 용어는 “지식”으로, 관련 어휘와 함께 요한1서에서 적어도 13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약: 거짓 영적 교사들은 초대 교회에서 큰 문제였습니다. 신자들이 참조할 수 있는 완성된 신약 성서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자신의 생각을 가르치고 스스로 지도자인 척하는 사람들에게 먹잇감이 되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 편지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문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에 관한 부분을 바르게 알렸습니다.

요한 서신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기초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서신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정직하게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신자입니까? 요한은 우리가 자신들의 행동을 보고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 언제나 헐뜯고 싸운다면, 또는 이기적인 자세로 서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무심코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완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 요한은 신앙이 우리의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한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죄책을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잘못을 고치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또 다른 중요한 부분입니다.

연결: 죄와 관련해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는 요한일서 2장 16절입니다. 이 구절에서 요한은 죄와 관련하여 성경 전체에서 가장 처음에 있었던 온 세상을 뒤흔드는 가장 끔찍한 유혹의 세 가지 측면을 묘사합니다.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한 처음 죄는 창세기 3장 6절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세 가지 유혹에 의해 무너진 결과였습니다. 즉, 육신의 정욕("먹음직도 함"); 안목의 정욕( "보암직도 함"), 그리고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움")입니다.

적용: 요한일서는 사랑과 기쁨의 책입니다. 이 서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 및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를 설명합니다. 이 서신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행복과 진정한 기쁨을 구분 지으면서 어떻게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줍니다. 만일 우리가 요한이 기록한 이 말씀을 취하여 우리의 일상 생활에 적용한다면, 우리가 갈망하는 참된 사랑, 헌신, 친교와 기쁨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요한1서는 예수님과 직접 만나서 개인적인 접촉을 가진 사람들의 증거입니다. 복음의 저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에 든든한 기반을 둔 증거를 제시합니다.

자, 어떻게 그들의 증거를 우리 삶에 적용합니까? 이 서신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용납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와의 연합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을 설명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저 멀리 떠나 계시며 실제로는 우리의 일상적인 갈등과 문제와 염려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은 바로 이곳에서 우리 삶의 단순하고 평범한 부분 가운데 함께 하시고 또한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영혼의 문제에도 함께 하심을 알려줍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신 것을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해 이곳에 오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요한과 함께 이 땅을 걸으셨듯이 지금은 날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우리 삶에 적용함으로 예수님이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 옆에 계신 것처럼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진리를 실천에 옮긴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삶에 거룩함을 더하여 주실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그분을 닮게 만드실 것입니다.

(Gotquestions.org)

Wednesday, March 13, 2019

구약의 제사와 예수 그리스도

✔️질문: 구약의 하나님은 왜 동물제사를 요구하셨는가? 동물희생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가?

✔️답변: 하나님은 죄를 임시적으로 덮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하고 완전한 희생을 예표하기 위해 동물 희생을 요구하셨습니다(레 4:54, 5:10).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에”(참조, 히 9:22) 동물 희생은 성경 전반에 걸쳐 중요한 주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옷을 지어 입히시기 위해 동물을 죽이셨습니다(창 3:21). 가인과 아벨은 주님께 희생 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창 4:4-5)였기 때문에 받아들여졌지만 가인의 제물은 열매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물러난 후에 노아는 하나님께 동물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창 8:20-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일정한 절차에 따라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첫째, 동물은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둘째, 희생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그 동물과 동일시 되어야 했습니다.
셋째, 동물을 바치는 그 사람이 그 동물을 죽이는 일에 가담해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이 일들이 행하여졌을 때, 그 희생은 일시적으로 죄를 가려주었습니다.

또 다른 희생 제사는 레위기 16장에 설명된 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로서 죄 사함과 죄의 제거를 보여줍니다. 대제사장은 두 마리의 숫염소를 가져다가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염소 중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속죄 제물로 희생되었고(레 16 :15), 다른 염소는 광야로 보내어졌습니다(레 16:20-22). 속죄 제물은 죄 사함을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염소는 죄의 제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왜 더 이상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이고 완전한 희생 제사이기 때문에 동물 희생은 끝이 났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하면서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왜 동물이 희생되어야 하지? 동물이 무슨 잘못을 했나?’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동물들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희생 제사를 드리는 그 사람을 대신하여 죽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잘못한 것이 없으시지만 기꺼이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죽음에 넘기셨습니다(딤전 2: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에 고린도후서 5장 21절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것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약하면, 동물 희생은 각 개인이 죄 사함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명하여졌습니다. 동물은 대속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죄인을 위해 대신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 제물은 단지 임시적인 것이라서 계속 반복적으로 드려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물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멈추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히 드려진 궁극적인 대속 제물이었으며(히 7:27), 지금은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딤전 2:5).

동물 희생은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였습니다.

동물의 희생이 죄의 용서를 제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근거는 동물 희생이 묘사하고 예표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신 그리스도입니다.

(Gotquestions.org)

Tuesday, March 12, 2019

멜기세덱, 그는 누구이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멜기세덱, 그는 누구이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아브함 시대의 예루살렘 제사장(창 14:18). 후대에 이상적인 왕의 전형이 되어 이러한 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 사장"이라고 칭하게 되었다(시 110:4). 히브리서에서 그의 특이한 지위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하고 있다(히 5:6-10, 7:).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1)
                                                  
📍자료 1

멜기세덱과 그의 행한 일에 대한 역사적 언급은 창세기 14:18-20에 나온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면서 전장을 이 멜기세덱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왕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평화의 왕이란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부모가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으며 영원한 제사장으로 있는다 하였다(7:2-3).
  
그러면 여기 멜기세덱은 역사적 인물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나? 또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면 왜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비교하고 있는가? 그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먼저 역사적 인물로서 멜기세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중간 청동기 시대로서 B.C. 1500년 이전의 일이었다. 그 시대는 다양한 도시 국가들로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돌라 오멜 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왕을 사로잡고 거기서 살았던 롯도 포로로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그의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가서 그 동맹군을 격파해 롯을 구하고 탈취 당했던 물건과 많은 노략물을 얻어 돌아온다(창 14:1-16). 그러나 거기서 중심 인물은 그돌라 오멜 왕에게서 회복을 바랐던 소돔 왕과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다. 특별히 멜기세덱은 제사장 왕으로서 아브라함에게서 1/10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역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디의 누구였는가? 멜기세덱의 뜻은 나의 왕은 의롭다거나 정의롭다는 뜻으로 합법적인 왕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으나, 의의 왕이란 해석이 적합하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도 멜기세덱을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라 불렀다. 이 의의 왕이란 말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살렘이란 말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완성하다, 다 지불하다는 뜻으로 보는 이가 있으나 평화란 뜻이 옳다. 그러므로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해 사본이나 랍비들 그리고 조세프스는 시편 76:2을 따라 살렘을 시온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볼 때 멜기세덱은 시온 즉 예루살렘의 왕이었을 것이다.
  
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아브라함이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서 선물을 받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해석된 그리심 산의 성전으로 한 손님을 맞이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살렘은 그리심 산과 동일시되며 이곳에서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다스리며 사역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은 창세기 14:18의 칠십인 역을 지지한다.1)
  
그런데 멜기세덱은 이 사건 후에 곧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는 사독 계열 제사장이 생겼고 이들이 아론 제사장 계열과 합치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사독과 멜기세덱은 같은 어근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 유대주의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 하스모니아 왕조의 유대 제사장 왕들에서 어떤 증거를 찾을 수가 있다(B.C. 164ㅡ 63)고 생각하며 거기서부터 사두개 파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멜기세덱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다른 견해는 사해 사본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멜기세덱은 천사장 전사로 나타난다.2)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멜기세덱은 살렘 즉 예루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정종이 분리되기 이전의 신정 정치체제에서 역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그는 분명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론 그의 사역자(제사장)까지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역사성에 보다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멜기세덱을 소개하고 있다. 그를 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며 출생과 부모와 족보가 없으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에 적합한 분임을 지적하였다. 모세와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도 레위 계통의 아론보다 더 근원적이시며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는 적어도 아래 세 가지 사실에서 레위의 제사장직을 초월하신다.

   1.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더 넓힌다면 레위인에게서 받은 것이다.
   2. 그는 그보다 열등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3. 그는 레위같이 죽을 인간과는 대조적으로 영원히 사신다.3)

이렇게 하므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게 다스리시며 평화를 구축하실 것으로 기대되었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사 9:5-6; 32:17; 렘 23:5-6; 33:15; 단 9:24; 슥 9:1-10; 말 4:22).4)

🔹주 
   1. George W. Buchanan, To the Hebrews(New York: Doubleday, 1972).  p.117
   2. Peter H. Davids, More Hard Sayings for the New Testament,  p.104
   3. George W. Buchanan, Op,cit., p.122
   4. Ibid.,
http://www.revdavidsuh.com/

📍자료 2

창세기 14:18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나타나 제사장의 직능으로 떡과 포도주를 상징적으로 써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있다.

멜기세덱과 같이 제사장과 왕의 두 직능을 한 몸에 겸비한다는 것은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이상적 왕자로 되고, 따라서 이상적 왕자는 '멜기세덱과 같은 자'라고 칭함을 받았다(시 110:4).

이것은 히브리서 5:6, 7에 있어서 그리스도에의 적용에 대성(大成)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엘람 왕˙고임 왕˙시날 왕˙엘라살 왕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했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정병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추격하여 다메섹 좌편 호바에서 롯과 부녀, 그리고 재물을 다 찾았다. 돌아올 때 소돔 왕이 나와 그를 영접하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상술한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줌으로써 십일조의 창시자가 되었다.

멜기세덱에 대해 보는 관점이 많고 구구하지만, 히브리서 7:1- 17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는 영원한 제사장(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한다.

그의 제사장직은 조계(祖系)를 전연 가지지 않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유사하다. 그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탄생 2,000년 전에 이미 멜기세덱이란 인물로 예표되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히브리서 7:4, 7, 특히 7절에 "폐일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리만큼 영전이 컸다. 즉,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창 12:3).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한 점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증표다.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의한 축복을 암시한다(마 26:26- 29).

그리고 '살렘'은 예루살렘일 것이다. 그 이유로써,

ⓧ 살렘은 이스라엘 사람의 가나안정복 전부터 예루살렘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으며,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 시편 76:2에서 살렘은 예루살렘(평화의 성읍, 평화의 소유란 뜻)의 단축형으로써 쓰이고있다.

ⓩ 만일 멜기세덱이 다윗처럼 같은 이 도성의 왕이라면 시편 110:4에서 다윗의 주가 멜기세덱과 대비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①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호바와 다메섹에서 귀환하는 도상에 있었다는 것(창 14:15, 17, 18) 등의점을 들 수 있다.

📍자료 3

1. 창세기에 등장하는 멜기세댁

창14장에 보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자기를 섬기는 이웃 나라들이 자신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나라를 쳐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울 때 소돔과 고모라 왕이 그에게 패하여 병사들은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왕들은 겨우 도망했습니다. 엘람 왕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그 성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도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롯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러온 용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쫓아가 엘람 왕을 기습했습니다. 이 기습전에서 대승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과 모든 사람들과 재물도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올 때 소돔 왕이 친히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마중 나왔으며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습니다. 그의 축복은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너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지로다'고 했습니다. 

2. 멜기세댁의 신분

 멜기세댁의 신분을 보면 그는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말은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진바 없지만 지금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도시로 아마도 그 지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살렘이란 지역을 지배하는 왕의 신분으로 있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지고 그도 아브라함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면 신분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의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칠 이유도 없었거니와 멜기세댁에게 축복 기도를 받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풀어보면 멜기란 말은 왕, 세댁이란 말은 의란 의미로 멜기세댁이란 의의 왕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그를 살렘의 왕이라고 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했습니다. 히7장을 보면 멜기세댁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로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11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성경에 등장해야 할 인물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인 증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의 직분에 대해 증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면 그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반드시 레위 지파의 자손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유다 지파이신 예수님이 무슨 성경적 근거로 대제사장 직분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일은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하셨으며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실 수 있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는 것은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멜기세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제물과 제사장 직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멜기세댁이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레위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될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까? 멜기세댁은 레위 자파도 아니요 아론의 자손도 아닙니다. 아론이나 레위란 인물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을 만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직분은 반드시 레위지파의 자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멜기세댁이란 사람이 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은 동시에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의 반열을 따라 제사장이 된 예수님은 멜기세댁처럼 왕과 제사장이 동시에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으시기 위해 율법적인 대제사장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창세기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신분은 멜기세댁과 같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에게 간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히브리서 7:1-10) 

1) 멜기세댁이란 이름에 담겨진 메시야적인 의미
멜기세댁이란 이름에는 메시야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의의 왕인 것처럼 사3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의로 통치하는 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장차 의로 통치할 왕'이란 그리스도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예언은 유대인이 소망하고 있는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이란 이름은 그 이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에 대한 예언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직분은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살렘 왕이란 평화의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또 사9장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에서 '평강의 왕'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 평화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멜기세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에 대하여 히7:26절에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멜기세댁은 그의 이름이나 그의 직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다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 적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멜기세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 가를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은 가졌지만 그 분의 위치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정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   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시니 그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멜기세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왕과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멜기세댁의 신분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멜기세댁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란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아담의 자손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댁은 천사였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사가 왕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제자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일은 성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멜기세댁의 인간적인 계보가 전혀 없다는 데서 한 말입니다. 

멜기세댁이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족보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성경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멜기세댁을 성경에 등장시키실 때부터 그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관계를 계보로 만든 것이지 그 분은 원래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족보에 해당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멜기세댁은 육신적인 예수님의 예표가 아니라 그의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서열로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족보가 성경에서 삭제되었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등장시킨 것입니다. 

결론 :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넘겨 드림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의 성경적인 사명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멜기세댁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짐으로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며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출처: 기독일보 From 목양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