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0, 2020

신학적으로 영과 혼을 구분하려는 의도는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영과 혼을 구분하려는 의도는 무엇인가?

창조: 사람-인간의 구조 (2)

/ 조영팔 목사

사람의 구성 요소에 있어서 이분설과 삼분설을 가르는 요소는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이다. 이분설의 입장은, 속사람에 해당되는 영혼은 본질적으로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삼분설의 입장은, 영과 혼이 두 가지 본질적으로 다른 속사람의 구성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

영과 혼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궁극적인 판단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깊이 연구하는 독자들의 몫이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영과 혼에 관한 어원학적인 설명과 더불어 이분설과 삼분설을 구분하고자 하는 신학적 의도만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어원학적으로 “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르아흐”인데, 구약에서는 주로 하나님과 연결하여 “하나님의 신”으로 번역되었다. 르아흐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바람, 호흡, 영, 신, 생각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르아흐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프뉴마”이다. 마찬가지로 바람, 호흡, 영, 정신 등으로 번역된다.

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네페쉬이다. 숨, 호흡, 혼, 마음, 자아, 생각 등으로 번역된다. 창세기 1 장 20절, 21절에 나오는 “생물”도 히브리어 성경에는, 창세기 2장 7절, “생령”으로 번역된 것과 같은 “네페쉬 하야”이다. 짐승에게는 “생물”로, 사람에게는 “생령”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짐승의 혼이나 사람의 혼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도서 기자는 사람이나 짐승이 죽을 때, 사람의 혼과 짐승의 혼의 본질적인 차이점이 드러난다고 말씀한다. 

사람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 (전도서 3 장 21 절). 사람이나 짐승에게 동일한 “혼”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지만, 짐승의 경우에는 호흡이나 본능적 의식 정도로 해석하는 반면, 사람의 경우에는 영혼으로 번역한다. 죽은 후 짐승의 혼은 땅으로 내려 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사람의 혼은 하나님의 소관 아래 들어 간다는 말이다.

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프슈케이다. 일반적으로, 호흡, 생명력, 영혼, 정신, 마음, 등으로 번역된다. 

영어의 심리학 - psychology, 심리 분석학 – psychoanalysis, 정신병자 - pscho의 접두어 를 이루고 있는 “싸이크” 라는 말의 어근이 되는 말이다. 정신병자는 영혼이 병든 사람이고, 심리학은 영혼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문이며, 심리 분석학은 영혼을 분석하는 학문이 된다. 

폴 빛츠라는 심리학자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저서, 종교로서의 심리학 에서, 세상 심리학자들을 가르켜서 하나님이 없이 영혼을 치료하려는 사제들이라고 불렀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혼의 치료를 위하여 찾아야 할 사람들은 심리학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는 목회자들이다.

정리하면, 영으로 번역한 히브리어의 르아흐나 헬라어의 프뉴마, 혼으로 번역한 히브리어의 네페쉬나 헬라어의 프슈케는 기본적으로 호흡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문맥에 따라 바람, 영, 영혼, 혼, 마음, 자아, 생각 등으로 번역 할 수 있는 말이다. 

실제로 성경 도처에 영과 혼이라는 말은 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상기 전도서에 나오는 “짐승의 혼”과 “사람의 혼”으로 번역된 “혼”도 히브리어 원문에는 “영”으로 번역되는 “르아흐”이다. 

어원학적으로 보면, 영과 혼이라는 말은 같은 속사람을 지칭하는 말로서 문맥에 따라 때로는 호흡, 영, 신, 혼, 영혼 등으로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학적으로 영과 혼을 구분하려는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는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 문화의 분석적 사고 방식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고 방식이 사람을 영혼/육체로 나누지 않고 전체를 한 사람으로 본다면, 헬라적 사고 방식은 사람을 영혼과 육체로 나눌 뿐만 아니라, 영과 혼도 나누어서 고찰하려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관성있게 영혼이라고 하지 않고 때로는, 영, 때로는, 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파악 할 때, 영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혼은 정신, 혹은 “나”라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나 의식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 기인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영이 죽어 있는 사람이다. 중생은 영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영이 살아난 사람인데, 영이 강하게 살아 역사하는 사람은 혼이 영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수 있지만, 혼이 강하게 역사하여 영이 나약해지면,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체험하는 속사람의 한 부분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 불신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나”라고 이해하는 존재는 영이 아니라 혼이며, 속사람의 인격체로서의 기능인, 지, 정, 의는 영의 기능이 아니라 혼의 기능이라고 보는데서 생각에 혼란을 야기한다. 

만일, 혼이 “나”라면 영은 “나”의 어떤 부분인지를 설명하기 어렵다. 더우기 사람이 죽을 때, “영”만 하나님께 가고 몸은 땅에 묻힌다면, “나”라고 알고 있는 “혼”의 최종 소재를 말하기가 어렵다. 

뿐만아니고, 아담의 범죄시 타락의 의미가 한 개인의 “영”의 죽음만을 뜻한다면, “혼”의 불완전한 지,정, 의의 기능을 잘 설명하기가 어렵게 된다. 적어도 “혼”은 타락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가 쉽기 때문이다.

영과 혼이 같은 존재라고 하면, 이런 혼란은 쉽게 해결된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 돌아간다. 영과 혼이 같은 존재이므로 “나”라고 하는 속사람의 의식이나 존재도, 지, 정, 의를 가진 한 사람 인격체로서 살았을 때나 사후에나 변함없는 일관성을 갖게된다.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으로 쉽게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예수를 믿고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의식적으로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 속에 들어 갈 수가 없다. 

이것은 한 사람의 지, 정, 의 속에 하나님이나 그의 말씀이 없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있다하더라도, 그 사람의 속사람이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하여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생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속사람의 기능인 지, 정, 의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인격적 변화가 일어 났다고 하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속사람의 인격성이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새로 지음을 받게 되면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 자연스럽던 속사람의 기질이 바뀌어,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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