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서론
1. 표제
사사기라는 표제는 여호수아 사후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사람들의 직함에서 취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그들을 다스릴 방법을 지시하는 중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 것이요”(신 16:18)라고 명하였다. 모세가 죽음으로 더 이상 입법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고, 여호수아도 행정 기능을 못하게 됨에 따라 사사들이 임명되어 국가 최고 권위를 행사하였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사후 곧 이어지는 기간에 일어난 역사이다. 그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의 통치 권위가 사사들에게 부여되었다.
이 책의 이름을 따온 사사라고 불린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된 사사의 공민적 기능보다 더 광범위한 직무를 수행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임명을 받고 그들의 큰 사업에 직접적으로 부름받았으며(삿 3:15; 4:6; 6:12), 내정(內政) 통치자보다는 외세의 속박에서 구원하는 자로서 더 많은 일을 하였다. 사실 그들의 부르심과 위대한 공적이 필요했던 것은, 널리 퍼진 배교와 압박을 물리치기 위한 모든 정규적인 절차가 무정부 상태로 무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두드러진 면모는 국가적 및 종교적 지도자로서보다는 민족적 영웅으로 나타났다. “장군” 또는 “대장”이 아마 그들에게 더 적합한 명칭일 것인데, 그들의 업적이 주로 군사적인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마다 백성을 “구원한” 다음, 여생 동안 백성을 다스렸다. 그러므로 사사라는 이름은 기록 당시에 이 책의 이름에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여러 세기 후, 히브리인과 같은 언어 계통과 혈통에 속하는 사람들이 사는 카르타고(Carthage)에서도 정치 지도자가 “사사”를 의미하는 수페트(sufet, 히브리어 샤파트[s∨apat.], 영어 suffete)로 알려졌다.
2. 저자
사사기를 누가 썼는지 알 수 없다. 고대 유대 전승에 따르면, 사무엘이 기록했다고 한다(참조 Babylonian Talmud, Baba Bathra 14b, 15a). 이것은 분명 추측이며, 따라서 많은 사실과 부합되지만 다른 요인들은 그 견해와 상충된다. 사사기의 저자가 좋아한 말은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참조 삿 17:6; 21:25; 18:1; 19:1)이다. 이것은 저자가 왕정에 호의적이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치 그의 말은 사실 “그와 같은 일들은 묵인되지 못할 것이지만 이스라엘에는 질서를 유지할 왕이 없어서 사람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행할 수도 있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한 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했기 때문에 그가 이런 말들을 기록한 저자는 아닐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생각한다.
내적 증거는 사사기가 기록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는 시기의 한계를 지적해 준다. 앞서 인용한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삿 17:6)라는 진술은 그 책이 사울의 통치 하에 왕정이 수립된 후에 기록되었음을 가리킨다. 다른 편으로 그 책이 틀림없이 다윗의 통치 이전이나 최소한 그의 통치 초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증거가 있다. 삿 1:21은 여부스 족속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지 않고 “오늘날까지” 베냐민 자손과 함께 거했다고 말한다. 성경 역사는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동안 통치한 후에 그가 그 성을 빼앗을 때까지 여부스족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시온성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삼하 5:6~9; 대상 11:4~9). 그러므로 사사기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전 그의 치세 첫 7년 기간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역사적 배경
사사기에 기록된 사건들이 근동 역사의 어느 시점에 발생했는지 정확한 시간을 정할 수는 없으나 BC 1400~1050년의 기간을 포괄한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정확한 시간은 출애굽 시기가 확정되기까지는 확실하게 정할 수 없고 현재로는 대치되는 이론들 사이에 절대적 확실성으로 결정할 만한 역사적인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은 제2권, 91~105을 참조하라.
아마르나(Amarna) 서판이나 다른 명각들에는, 그 땅을 소유했던 가나안 족속들이 히브리인의 침입에 앞서 수 세기 동안 그곳에 정착해 있었다고 나타난다. 그들의 문명은 오래된 것이었고 애굽과 메소보다미아 대제국들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발전했다. 백성은 바로와 동맹 관계를 맺은 군소 통치자들의 지배 아래 조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끊임없이 싸웠기 때문에 전술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공공의 위험에 직면하면 한 지도자 아래 연합하기도 하였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그들의 문명의 유물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처럼, 산지에서는 요새화된 성읍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었고 평지에서는 철병거가 그들을 막강하게 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술과 건축은 히브리인들의 침략 후에 즉각적이고도 현저한 쇠퇴를 보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영적 진리의 영역에서 그리고 인생의 도덕과 철학에서 히브리인들은 원주민들보다 탁월함을 보여 주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근동 전역에 상인과 무역업자로 알려졌으나(후에 히브리어에서 가나안인에 해당하는 말은 “상인”을 뜻하게 되었다), 그들은 농사 기술에도 능란하였다.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필수적인 믿음이 부족하여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고, 그렇게 하여 전쟁이 시작되고 수 년이 지나자 가나안 족속 곁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 기간 내내 히브리인들은 일치 연합된 민족이 아니었다. 경우에 따라 두세 지파가 공동 적에게 대항하여 일시적인 연합을 이룰 수 있었다. 삿 5장에 나타난 드보라의 노래는 큰 위기의 때에도 모든 지파가 하나로 연합되는 것이 불가능했음을 보여 준다. 지파 사이에 알력이 편만했다(삿 8:1~3; 12:1~6; 20:1~48). 가나안족의 요새들이 사슬처럼 그 땅을 갈라 놓아서 지파간의 상호 교통과 왕래가 부족했던 것이 이렇게 된 부분적인 이유이다.
새로 온 이들은 원주민에게서 농사 방법을 상당히 신속하게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는 히브리인들이 지금까지 주로 유목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가나안 종교는 땅의 다산을 보장받기 위한 의식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농사 신들이 주는 풍요한 수확을 얻기 위하여 그들을 높이는 의식이 많았다. 많은 히브리인은 그 땅의 백성들의 농사 방법을 전수하면서 이 방법들과 결합된 종교까지도 받아들였다.
4. 주제
이 책은 여호수아의 사망 후부터 왕정이 시작된 사무엘 시대까지 히브리 백성의 갖가지 흥망성쇠를 열거한다. 여호수아는 특별한 의미에서 모세가 시작한 계획을 수행하고 완성하도록 택함을 받았다. 여호수아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권위 있는 지도나 여호수아의 행정적 경험을 다 잃자, 독립적인 관리의 시대로 들어서서 그들이 새로 얻은 땅을 견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전까지 히브리인들은 먼저 노예로 있다가 광야에서 유랑생활을 하고 마침내 병영 생활과 정복의 신고(辛苦)를 겪는 등, 갖가지 동요와 불안정한 상태에서 살아 왔다. 주로 위대한 지도자의 전기로 꾸며진 여호수아서는 이 정복의 마지막 단계를 기술한다. 사사기는 그 다음 단계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며, 그들이 방랑하는 유목 생활에서 정착하여 농업을 하는 민족으로 전환하는 도전을 맞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책을 펴노라면 우리는 전쟁의 도가니 속에 있음을 느낀다. 여호수아의 지도를 받아 연합 전쟁을 치른 후 지파들이 흩어지면서 곧 전쟁 태세에 돌입하는 것을 본다. 작전 회의가 열리고 지파들이 요단 골짜기에서 그들에게 정복하도록 분배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올라갈 때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철병거들이 골짜기를 요란스럽게 지나가며, 산허리는 무장한 군인으로 가득하다. 노래는 싸움과 정복에 대한 것들이며 이스라엘의 대적을 도륙한 자들은 영웅이 된다. 히브리인들이 산지에서는 승리했지만 평야 지대에서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낼 수 없었다.
전투의 소음이 사라진 후에도 가나안 족속은 여전히 헤레스산에서부터 아얄론, 사알빔, 기브온, 브에롯, 기럇여아림,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동서로 연이어 뻗어 있는 강력하게 요새화된 성읍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또 다른 장벽인 돌, 하로셋, 므깃도, 다아낙, 이블르암으로 이어지는 바다에서 요단강에 이르는 요새지 때문에, 멀리 북쪽으로 잇사갈, 스불론, 아셀, 납달리 지파와 가나안 중부에 있는 지파들이 분리되었다. 강력한 요새 벧산 근처 요단까지 뻗어 있는 기름진 이스르엘 계곡은 아직도 가나안 족속에게 속해 있었다. 그 땅을 가로지른 연쇄적인 요새지로 이루어진 두 개의 사슬 때문에 지파 간의 교통과 연합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같이 아직 정복되지 않은 성읍들 때문에 서로 단절되어 있었으므로 히브리 지파들은 공격에 노출되었고, 적대적인 주민이 사는 한복판에서 취한 중심지들을 수호하기 위해 그들의 대적에 대항하여 부분적인 연합밖에 이룰 수 없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적대적인 백성들의 침략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투쟁과 속박을 가져왔다. 북동쪽에서 메소보다미아인들이 침략해 오고, 남동쪽에서는 모압인들이, 동편에서는 미디안과 암몬 사람들이 그리고 남서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침략해 왔다. 배교와 우상숭배가 그들의 종교에 대한 충성이 이루어 놓은 국가의 결속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이러한 맹렬한 공격에 저항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속박의 고통이 회개를 일으켰고 다시 한 번 여호와를 경배하도록 백성들을 돌이켰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구원자, 곧 “사사”를 일으키고, 그는 속박의 멍에를 깨뜨리고 나서 죽기까지 백성들을 다스리곤 하였다. 이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사사기의 저자가 설명하는 중심 주제는, 참 종교를 저버리는 죄와 배교가 한 민족에게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하여 고통과 재난을 허용하시며, 참된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만 그것을 돌이킬 수 있다. 참된 회개가 일어날 때 하나님은 구원과 평화를 가져다줄 사람과 여건을 준비한다. 이 기간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명제들을 밝히는 체계 위에 기록된다. 의는 한 나라를 고양시키지만 죄는 백성의 수치이다. 악한 친구는 선한 의도와 훈련을 망쳐 놓는다. 도덕적 타락은 언제나 민족적 쇠퇴를 동반한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직접적인 돌보심 아래 있었다. 민족적인 죄는 하나님의 처벌을 가져온다. 죄에 대한 처벌은 여호와께서 교육적인 차원에서 내린 것이지 보복적인 것이 아니다. 응징은 그것이 참된 회개를 일으켰을 때 철회된다. 구원은 무력한 인간의 노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고취된 힘과 열심에서 나온다. 저자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원칙들은, 배교와 속박이 회개와 구원으로 바뀌는 이 기간 역사의 특징을 설명한다고 한다.
저자가 열거한 이야기들 가운데 아주 훌륭하게 예증된 이러한 명제들은 사사기를 역사 문서의 영역에서 거룩한 역사 철학의 위치로 높여 준다. 그 책의 영감받은 저자는 역사 자체보다는 그가 기록한 역사에서 배워야 할 교훈을 지적하는 일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사사기를 대충 읽어보기만 해도 저자가 이스라엘이 새로 얻은 땅에서 만난 사건들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난 것을 보여 줄 의향이 있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들의 유일한 행복과 안전이 그분을 섬기는 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그들의 경험을 지도하였다.
이 책의 부수적인 주제는 이스라엘의 문제들이 주로 그들의 주변 이방 민족의 악한 감화에서 기인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그 땅의 우상숭배하는 주민들이 히브리인들을 유혹에 빠지게 하는 역할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족과 아모리족을 몰아내어 당신의 백성이 배교하는 것을 예방하지 않았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다. 저자는 그 책의 한 부분(삿 3:1~4)에서 이런 이의에 대해 분명히 대답한다. 여기에서 그가 진술하는 것은 품성 형성에 끼치는 역경의 가치를 여호와께서 아신다는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그 땅에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어 이스라엘이 그를 섬기는가의 여부를 입증하고자 하셨다.
저자의 목적은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 즉 하나님의 지도와 축복 아래 어떻게 소수의 지파들이 낯설고 적개심이 가득 찬 땅에서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는지, 그들의 영웅들은 어떻게 명성을 얻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양한 이해관계와 영향력들 사이에서 그들의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그들을 다른 백성들에게 흡수되지 않도록 지켜 주었는지를 서술하는 것이었다.
사사기는 다섯 부분으로 뚜렷이 구분된다. 일반적인 역사적 서문(1:1~2:5), 즉 여호수아가 그 땅을 여러 지파에게 분배한 후에 그것을 부분적으로 정복하는 이야기로 장을 연다. 지파들은 각기 정해진 그들의 유업을 단독으로 공격하거나 때때로 강한 저항을 받을 때는 몇 지파가 연합하여 공격하기도 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오직 그들에게 분배된 땅을 소유하는 일에 부분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저자는 백성들의 실패가 그들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뢰와 성실이 부족한 탓이라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독자에게 뒤이어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며,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 머물도록 허용한 이유를 밝힌다. 이스라엘과 남은 가나안 족속들의 관계는 계속 이어지는 장들의 역사적 배경을 형성하며 왜 사사들이 필요했는지 설명해 준다.
이 역사적 개요에 이어 제2의 서론(2:6~3:6)이 나오는데, 그 목적은 여호수아 사후에 뒤따른 종교적 배교가 어떻게 계속 감소되지 않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지고 하나님의 응징을 격동시켰다. 백성들이 회개할 때는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계속 일으켜 그들을 구원했다.
저자는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열두 사사가 다스리던 지파들의 역사를 계속 열거한다(3:7~16:31). 그것은 반복되는 죄와, 계속하여 새로운 구원의 방법을 고안해 내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다. 이 구원자들 중 여섯 명의 영웅적인 행동은 충분히 서술되고 나머지 여섯 명의 이야기는 간단하게 언급된다. 아비멜렉의 찬탈에 대한 이야기를 소상히 다룬 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일치하지 않는 군주를 택하는 데 따르는 위험(참조 신 17:15)을 백성들에게 경고하기 위함이다.
이 책은 두 편의 부록으로 끝을 맺는데, 둘 다 사사 시대 초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묘사한다. 첫째는(17, 18장) 미가의 우상숭배에 대한 이야기와 엘리가 죽을 때까지 그 우상을 보관해 둔 단지파의 북방 성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두 번째 부록(19~21장)은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의 악행 그리고 다른 지파들이 그 지파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로서, 베냐민 지파가 사악한 기브온 사람들을 지지한 것 때문에 거의 절멸되다시피 한 그들이 완전히 멸족되지 않도록 막기 위하여 취한 수단에 관한 이야기로 끝맺는다.
5. 개요
Ⅰ. 일반적인 역사적 서문: 역사가 시작될 때의 사건에 대한 진술, 1:1~2:5
A. 지파들이 팔레스타인에서 그들에게 분배된 땅을 확보하려고 노력함, 1:1~36
1. 유다와 겐 자손, 1:1~20
2. 베냐민, 1:21
3. 므낫세와 에브라임, 1:22~29
4. 스불론, 1:30
5. 아셀, 1:31, 32
6. 납달리, 1:33
7. 단(남부), 1:34~36
B. 그들이 실패한 이유, 2:1~5
Ⅱ. 주제 서론: 이 기간의 히브리 역사에 대한 저자의 개요와 해설, 2:6~3:6
A. 여호수아서와 연결되는 역사적 서문, 2:6~10
B. 이제 시작되는 역사에 대한 저자의 해설, 2:11~3:6
Ⅲ. 사사들의 이야기, 3:7~16:31
A. 옷니엘이 북동쪽에서 온 침략자들(메소보다미아인)의 압박을 끊음, 3:7~11
B. 에훗이 남동쪽에서 온 침략자들(모압인)에게서 백성을 구원함, 3:12~30
C. 삼갈, 3:31
D. 드보라와 바락이 북방 가나안 족속들의 압박을 끊음, 4:1~5:31
E. 기드온, 6:1~8:32
1. 동편에서 온 미디안 족속의 침입을 격퇴함, 6:1~8:21
2. 기드온의 생애의 후속 사건들, 8:22~32
F.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찬탈, 8:33~9:57
G. 돌라, 10:1, 2
H. 야일, 10:3~5
I. 입다, 10:6~12:7
1. 동편 암몬 족속의 침입을 격퇴함, 10:6~11:33
2. 딸을 제물로 드림, 11:34~40
3. 입다의 사사 재임 기간에 나타난 지파간의 투쟁, 12:1~7
J. 입산, 12:8~10
K. 엘론, 12:11, 12
L. 압돈, 12:13~15
M. 삼손의 출생과 모험, 13:1~16:31
Ⅳ. 두 가지 부록: 사사 시대에 일어난 두 사건, 17:1~21:25
A. 미가의 우상숭배와 단(북방)에 있는 신상(神像) 성소의 내력, 17:1~18:31
1. 우상을 주조함, 17:1~6
2. 배교한 레위인이 제사장이 됨, 17:7~13
3. 단 자손이 이주하면서 신상들을 단(라이스)으로 옮겨감, 18:1~31
B. 베냐민 사람들의 악행과 그 끔찍한 결과, 19:1~21:25
1. 기브아의 베냐민 자손들의 만행과 레위인에게 속한 첩의 죽음, 19:1~28
2. 다른 지파들이 베냐민 백성을 처벌함, 19:29~20:48
3. 베냐민 지파의 멸족을 방지할 수 있도록 지파들의 맹세 이행을 회피하는 방법, 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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