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19, 2018

복 / 송인규 목사

🔵복(福)

송인규 교수의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 왜 기복신앙에 빠져드는가? 
2.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3. 구약의 복 vs 신약의 복 
4.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구절들 
5. 성경적 근거 없는 ‘삼박자 구원’ 
6.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우리나라 사람들이 ‘복‘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가 겪어 봐서 익히 잘 알고 있다. 해마다 연초가 되어 인사를 주고받을 때면, 예외 없이 “올해도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며 상대방에 대해 복을 기원한다.

고풍이 도는 오랜 연륜의 생활 품목들(밥그릇, 옷, 발, 돗자리 등) 치고 福이라는 글자 무늬가 선명히 새겨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사람들이 자신의 운세에 대해 그토록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는 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복에 대한 동경 심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러한 기복(祈福) 현상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아니,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비신자들보다 더한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식의 마술 공식(magic formula)이 난무하는 일이나, 그리스도인의 가정과 사업장에 걸려 있는 장식패들이 한결같이 복의 희구를 자극하는 성구 내용(예를 들어,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삼하 7:29) 등)을 담고 있는 것을 보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물론 복이나 번영의 추구가 한국 그리스도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집착 증세는 가히 전대미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그리스도인들이 기복신앙에 빠져 드는 요인으로서 세 가지 서로 맞물린 항목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모든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실현(self-realization)의 욕구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삶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있다.

둘째, 한국인의 전통 문화나 종교가 가지고 있는 무교적 배경 또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무교적 세계관은 길흉화복에 대한 조치(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는 일)를 삶에 있어 초미의 관심사로 삼게 만들었다.

셋째, 성경의 복 사상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이 복에 대한 광적 집착 현상을 낳았다. 이것은 특히 구약에 빈번히 등장하는 ‘복’의 의미를 곡해하고 또 잘못 적용해 온 데서 문제의 핵심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중첩된 세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결국 기복신앙의 수호자와 전파자가 되고 말았다. 필자는 이제 성경적 복 개념을 밝힘으로써 세 번째 항목의 교정에 만전을 기하고자 한다. 

2.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인가?

우선 ‘복’의 어의(語義)부터 알아보자. 히브리어 베라카는 ‘좋은 것’(good)을 뜻하는데, 주로 물질적 은택(material good)을 의미한다. 희랍어 율로기아(eujlogiva)는 주로 복음이 가져다주는 영적 선/유익을 의미하지만, 때로 물질적 유익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에 비해 마카리오스(makavrio)는 복된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복은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선의(善意, good will)로서 영적·물질적 은택을 통하여 나타나고 또 그로 인해 향유하는 행복한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복과 연관한 성경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자. 복은 성경에 가장 빈번히 언급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구약의 초두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복이라는 개념이 전면에 부각되는 가장 획기적인 계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1~3)

이러한 복의 향유는 아브람뿐만이 아니고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창 26:12~14)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창 28:3~4)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은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으로서 △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정점은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는 것”에 있었다. 그런데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실현되었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행 3:25~26)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8~9, 13~14)

상기 구절을 통해 우리는 복과 관련해 다섯 가지 중요한 사항을 발견한다. 

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절정은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는 것이었다. (창 12:3; 갈 3:8) 
② 땅의 모든 족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씨)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 (창 22:18; 행 3:25; 갈 3:14)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저주를 받음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 (갈 3:13) 
④ 우리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 (행 3:26; 갈 3:9) 
⑤ 이러한 구원의 은택이 곧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의 내용이다. (행 3:26; 갈 3:12, 14)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왜 바울이 구원의 은택을 설명하면서 그토록 ‘복’이란 단어를 강세적으로 사용했는지 납득이 간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3~5)

바울은 예수를 믿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확대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복을 누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복과 관련해 네 가지를 가르쳐 준다. 

첫째, “하늘에 속한”이라는 표현이 말하듯, 이 복은 근본적으로 땅에 기원을 둔 것이 아니다. 둘째, 복을 묘사하는 형용사로서 “신령한”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이 복이 “자연적 복들”과 구별됨을 말하고 있다. 셋째, “모든” 복들이라고 함으로써 복의 포괄성과 총체성이 강조되고 있다. 넷째, 문장 구조를 보면 “복 주다”라는 동사에 다시금 “복으로써”라는 부대(附帶) 성격의 부사구가 따라붙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복 받은 사실은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이라는 표현과 개념이 이 구절만큼 심층적으로 등장하는 곳은 아마 성경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엄청난 복의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실현(“거룩함,” “흠이 없음,” “아들들이 됨” (엡 1:4~5) 등)에 있다. 이렇듯 신약 시대의 복은 구약과 달리 철두철미하게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3. 구약의 복 vs 신약의 복

그렇다면 복의 특징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왜 이런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일까? 왜 구약의 복이 주로 물질적·현실적·가시적인 것인 반면, 신약에서는 복의 초자연적·영적·내면적 성격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근본적 답변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를 특징지운 종교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종교가 주로 인간의 표면에 치중하는바 형식적이고 외양적인 것이었다면, 신약에 와서는 종교의 핵심이 인간의 중심에 초점을 맞춘 신령하고 내면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물론 구약은 표면적·형식적일 뿐이고 신약은 내면적·영적이기만 하다는 식으로 대조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이 두 면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공히 나타나는 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은 전자에 신약은 후자에 착념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내면적 차원, 곧 ‘마음’에 대한 강조는 이미 구약 시절부터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인간 내면의 심층적 변화를 미래의 어느 시점, 곧 새 언약의 시대에서 찾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을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1~33)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율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 36:26~27)

이런 맥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갖는 근본적 제약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 9:9~10)

바울 사도 역시 복음 사역의 차이점을 구약 시대와 대조시켜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3) 

바로 이 시점에서 필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의미 구조의 문제를 도입하고자 한다.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신앙적 주제는 그 의미의 발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내용과 형식이라는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용’은 어떤 주제가 속에 담고 있는 영적·내면적 알맹이 혹은 정수(精髓)이고, ‘형식’은 그러한 주제의 의미를 실제로 발현시키는 가시적·외형적 얼개나 틀을 말한다. 그리하여 구약 시대에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두 요소가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고, 또 내용은 반드시 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을 ‘복’의 의미에 적용시키면 다음과 같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이 본질적으로 연접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의[내용]는 반드시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그 의미가 살아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물질적 은택(자녀의 생산, 소유물의 증식, 민족의 번성, 영토의 획득)을 한껏 누렸고, 그렇게 향유하는 물질적 은택은 그가 하나님의 선의를 누리고 있다는 표시가 되었다. 이것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해당되는 신적 작동 원리였다.

그러나 신약으로 오면서 하나님의 선의[내용]와 물질적 은택[형식] 사이의 이와 같은 긴밀한 연접 현상은 종지부를 찍는다. 오히려 신약 시대에는 내용(하나님의 선의)만이 극명히 드러나고, 형식(물질적 은택)은 별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약은 신앙의 자태에 있어 내면과 영적 실상을 현저히 드러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제 형식은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내용의 노정을 유도하는 긴밀한 수단이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선의를 충만히 누리면서도 물질적 은택은 전혀 향유하지 못하는 수가 있는가 하면, 물질적 은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의와는 거리가 한 없이 먼 삶의 모습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먼저, 하나님의 선의를 심령으로 충만히 누리면서도 외적 번영 조건이 결여된 경우부터 살펴보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0~12)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 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벧전 3: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4) 

또 물질적 은택은 상당한 정도로 누리면서도 하나님의 선의(곧 구원의 은택 및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와는 거리가 먼 경우도 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많이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21)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약 5:5)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노라.” (계 3:17)

4.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구절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발전에 무지하고 무관심할 뿐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꿈을 이루거나 성공과 번영을 기약해 주는 것 같은 성구 내용에 대해서는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그런 경우 인용되거나 회자되는 구절들은 성경의 문맥이나 정당한 해석의 과정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여기저기에서 뽑혀 나와 우리의 욕망을 한껏 부추기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런 구절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이요, 둘째는 번영의 욕구와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절들이다. 엄밀히 말해서 첫 부류의 구절들은 기복신앙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욕망 성취를 지향하도록 자극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다루고자 한다.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

자, 그러면 먼저 적극적 사고방식과 연관된 구절들부터 하나씩 고찰하도록 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이 구절은 우리가 욕망의 성취를 희구한다면 적극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감초처럼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러한 언명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이 구절은 결코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본문에 의하면 어떤 아버지가 벙어리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예수께 데리고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막 9:17), 이는 제자들이 못 고쳤기 때문이었다 (18절). 그 아버지는 예수께 “…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2절) 라고 외쳤다. 이 말 속에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에 대한 평가 절하의 멘탈리티가 깔려 있다.

사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 (막 1:24) 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막 5:7)로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었고, (마 12:28) 심지어 그 권능을 사도들에게 부여하기까지 하셨다. (마 10:1) 그런데도 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께 무엇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귀신 쫓는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불신과 의문의 마음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정황에서 마가복음 9장 23절의 언명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9장 23절에 언급된 믿음은 “예수께서 자기 아들을 괴롭히고 있는 귀신을 내쫓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이든 큰 꿈을 가지고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그런 식의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이 구절도, 우리가 가진 꿈과 욕망을 이루어 주십사 하며 끈질기게 매달리면 성취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데 자주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오직 그의 뜻대로 구할 때만 그렇다 (요일 5:14).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으면 응답이란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러난 예수님 자신의 기도(마 26:39)나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은 바울의 간구 경험(고후 12:8~9)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하물며 우리의 모든 욕망과 꿈에 있어서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아마 적극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하는 데 이보다 더 많이 제시된 구절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주창자들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념만 있으면 못 이룰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도전한다. 그러나 바울은 빌 4:10~13 사이에서 자신의 사도적 임무 수행과 재정 형편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어떠한 재정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무엇 하나 하지 못할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결코 자기가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모든 것이 아니다.

번영의 욕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

이제 둘째 부류(번영의 욕구과 성공 심리를 정당화하는 구절들)로 넘어가도록 하자. 먼저,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구절들부터 살펴 볼 것이다.

“이제 청컨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삼하 7:29)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장식패를 채우는 단골 성구로서, 그리스도인 개인보다도 자신이 속한 가족 전체를 염두에 두고 복을 희구할 때 안성맞춤인 것으로 인용되곤 했다. 그러나 상기 절에 나타난 바처럼 다윗의 가문에 약속된 복은 소위 다윗 언약-“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 7:16)-을 언급하는 것으로써,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구속 사역을 통해 현시된다. (눅 1:32~33) 따라서 자신의 가정에 물질적 복이 내리기를 고대하며 삼하 7:29을 간직하는 것은 빗나간 처사요, 무의미한 종교 행위이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에서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를 허락하셨더라.” (대상 4:10) 

상기 내용은 “야베스의 기도”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구절이다. 야베스의 간구를 보면 ‘복’이 언급되어 있고 그 구체적인 사항으로서 “땅의 확장,” “환난에서 벗어남” “근심이 없음” 등으로 되어 있다. 이 구절에는 구약적 의미 구조의 패턴(하나님의 선의[내용]가 물질적 은택[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문제인즉 신약 시대에는 이 두 가지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야베스와 달리 구원의 사실과 은택에 초점을 맞추어 복 얻기를 구해야 할 것이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히 6:14)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창 22:17)을 인용한 것에 불과하므로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각 개인에게 물질적 복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없다.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또 다른 구절들

이제 ‘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기복신앙을 자극하는 데 기여해 온, 몇 가지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여호와께서는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신 28:13) 

위 성구는 필자가 우스개로 ‘머리-꼬리 콤플렉스’라 명칭을 붙이게 된 근거 구절이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자녀들의 입학, 취직, 결혼 등과 연관하여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적용은 두 가지 면에서 그릇되었다. 첫째, ‘머리’와 ‘꼬리’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나 민족을 가리킨다. 신 28:1에 보면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라고 되어 있고 11절에도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로 되어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성실한 관계가 외적 은택을 발현시킨다는 것은 구약 시대의 가르침이다. 누차 말하거니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 사이의  긴밀한 연접은 구약 시대로 끝났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7)

이 구절도 장식패의 단골 내용인데 주로 사업장에 많이 걸려 있다. 보통 가게나 업소가 새로 생겨 출발을 할 때,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보잘 것 없더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크게 번성하기를 바란다는 희망의 메시지로 사용되곤 한다. 이 내용은 원래 욥의 친구인 빌닷이 욥에게 하는 충고(욥 8:1~8) 가운데 들어 있다. 그런데 욥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은 자녀들의 범죄 때문이므로(4절) 그런 영적 문제를 해결하면 머지않아 물질적 은택이 도래할 것(5~6절)이라고 설명한다.

빌닷의 처방은, 복에 있어 내용과 형식의 연접이라는 구약적 공식에 입각해 볼 때, 구구절절이 타당하다. 단지 자녀들의 신앙이 욥에게 문제를 초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성경은 그의 자녀들이 범죄했다고 명확히 말하고 있지 않고, 혹시 범죄했다 할지라도 욥으로서는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리곤 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혹시 욥과 자녀들에 대한 빌닷의 판정이 정확했다고 해도, 그것은 앞에서 몇 번이나 언급한 복 개념의 그리스도 중심적 변화 때문에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당될 수가 없는 것이다.

5. 성경적 근거 없는 ‘삼박자 구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상기 성구는 형통 신학을 토착화한 신토불이 용어 ‘삼박자 구원’의 근거 구절이다.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경우 ‘영혼이 잘 되는 것'(영적 성숙)은 필연적으로 ‘범사에 잘 되는 것'(경제적·사업상 번영) 그리고 ‘강건한 것'(신체적 건강)과 함께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세 가지 항목으로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요삼 1:2의 내용을 잘못 나누었다. 이 구절은 흔히 생각하듯 세 부분이 아니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영혼이 잘 됨”이 한 부분이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이 또 한 부분이다. 또 삼박자 구원에서는 후반부의 내용과 관련해 “범사에 잘 되고”와 “강건함”을 별도의 사항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정당한 처사가 아니다. 오히려 “잘 되고”와 “강건함”은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

둘째, 본문에 대해 무리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조금 전에 설명했듯 “잘 되고”와 “강건함”이 함께 범사에 걸려 있다면, 이 부분으로부터 경제적·사업상 번영과 신체적 건강이라는 별도의 두 내용을 도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먼저 “범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 전반을 지칭하는 단어이지, 꼭 경제적이거나 사업상 번영에 국한된 것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또 “잘 되고”와 “강건함” 역시 각각 물질적 번영과 신체적 건강으로 대별해서 이해하기보다는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중복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함”은 마땅히 “신앙생활의 전반적 면모가 풍성하고 건전한 상태에 있음”으로 해석해야 한다.

셋째, 삼박자 구원은 불합리한 추론(non sequitur)의 전형적 예이다. 만의 하나 이 내용들이 삼박자 구원의 주창자가 주장하는 대로라고(즉 필자의 첫째와 둘째 비판이 틀렸다고)해도, 이 구절에서 “삼박자 구원”의 교리를 도출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아다시피 이 구절은 가이오라는 개인(요삼 1:1)에 대한 간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게 되기를 바란다”[간원]와 “~해야 한다”[당위]나 “반드시 ~하게 된다”[필연]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논리적 간극이 존재한다. 이처럼 요한삼서 1장 2절은 그저 ‘바람’의 차원이기 때문에 삼박자 구원이 요구하는 당위나 필연의 차원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따라서 이상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오늘날 유행하는 ‘삼박자 구원’은 실상 성경적 근거가 결여된 가르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6. 기복신앙을 극복하는 길

기복신앙은 생각보다 훨씬 깊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침투해 들어와 있다. 이러한 신앙의 경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그 폐해는 우리 각 개인과 공동체에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삼위 하나님께서 그리도 중요시하시는 구원의 복(특히 예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이 복을 주시고자 하셨는데)을 값싸게 여기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구원의 복을 등한시하면 이와 긴밀히 연관된 여타의 신앙적 면모들(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 고난 중 즐거워함,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감)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현저히 약화되고 급기야 자취를 감추게 된다.

본질적인 복은 ‘구원의 복’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복을 마다하면 곧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항목들(주로 경제적 번영, 세상에서의 성공, 사업의 번창, 안락한 삶 등의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물질적 은택들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cf. 약 1:17) 그러나 이것들은 복의 핵심이 아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이런 것에 마음 뺏기기를 원치 않으신다. 

이처럼 물질적 은택을 복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또 우리가 지속적으로 그런 신앙의 패턴에 노출될 때, 우리는 탐심의 노예가 되며 이 세상 신이 군림하는 신전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보다 자기 왕국의 건설에 분주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이용하기에 바쁠 것이다.

기복신앙 극복을 위한 세 가지 방법

이 비극적이고 비참한 개인적·공동체적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경적 개혁의 기치를 들 수 있을 것인가? 

첫째, 복과 관련하여 올바른 성경 해석과 적용이 있도록 줄기차게 가르치고 순종의 마음으로 배우는 일이 있어야 한다. 

둘째, 배우고 이해한 참된 복의 내용이 실제로 우리의 심령에 내면화되도록 힘써야 한다. 구원의 복이 의미하는 신앙 내용(하나님의 자녀됨, 영생, 하나님을 앎, 성령님의 내주,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음, 주님과 친밀히 사귐 등)으로 인해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에 변화가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복의 문제와 관련하여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회개하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참된 복의 내용을 배우고 내면화했다 할지라도 실제 삶의 상황에 들어가서는 시험을 받고 유혹에 빠지는 수가 빈번하다. 그때마다 그 속에 질펀히 앉아 있지 말고 즉각 회개하고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방침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다 해당되지만, 특히 신앙의 공동체 내에서 지도력을 행사하도록 부름 받은 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그들의 가르침과 모범이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기복신앙, 그 내력과 연조가 워낙 깊어진 바람에 극복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좌시만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또 그 극복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요는 우리 각 개인(특히 지도자)과 공동체에 수시로 각성의 계기가 마련되느냐 하는 것과 이 거대한 내면의 적에 대해 지속적으로 투쟁의 의지를 발휘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송인규 목사 /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과 조직신학전공 부교수, 새시대교회 목회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쉽지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2가지’라는 글입니다.

Friday, May 18, 2018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이사야 65:17-25)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사 65:17-25)

성경에 나타난 사상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사상 하나를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원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천국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오래 못산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들을 모두 놓고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고 나면 어디로 가는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가. 이것은 모든 인류 초미의 관심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이 세상은 끝이 아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은 때가 되면 누구든지 떠나는 것이다. 그 후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히 9:27)

이사야 전체의 주제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구약적 의미에서의 천국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비하고 약속하신 것이지만 두 번째는 모든 인류를 위해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 다음에 올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을 다 살고 나서 죽은 후에 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당신이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이 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유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하나님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일은 기억나지 않을 것이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다.”(17절)

새 하늘과 새 땅은 사람이 만든 것도 사람이 상상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첫 번째 특징은 창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도 상상해본 일이 없는, 한 번도 경험해본 일이 없는, 한 번도 우리가 가져본 일이 없는 아주 새로운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를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순간, 하나님을 만난 순간 제일 먼저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 뜨기 시작하고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하기 시작하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세상에 없는 평화와 기쁨과 환희와 감격을 죽어서 천국 가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 순간부터 그것이 경험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창조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창조라는 말을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발견했다, 창조했다’라는 것에는 실제로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몰랐던 것이고 발견하고 안 됐던 것을 알았을 뿐이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것을 인간이 그 후에 발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기록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겠다고 할 때 사용한 단어는 우리가 말하는 창조라는 것과 다릅니다. 성경에서 굉장히 독특하게 쓰는 창조라는 단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을 때 쓰는 ‘바라(Bara )’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셨을 때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창조입니다. 인간이 만드는 창조는 유(有)에서 유(有)를 만드는 창조고 하나님이 만드는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창조입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니까 빛이 생겼습니다. 그 전에는 빛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우주만물 모든 것은 무(無)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해와 달, 우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또 인간도 어떤 선(先) 물질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것이 아담과 이브입니다.

항상 새롭고, 새로운 나라 이렇게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천지창조처럼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만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해보지 못한,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나라

18절에서도 창조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그러니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기뻐하고 영원히 즐거워하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의 성읍으로 창조하고 그 백성을 즐거움의 백성으로 만들겠다.”(18절)

두 번째 새 하늘과 새 땅은 기뻐하고 영원히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영원히 기뻐해야 할 것이 있고 영원히 찬양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새 나라인데 거기에 중심 도시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도 두 개가 있습니다. 헌 예루살렘이 있고 새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헌 예루살렘은 지금 이스라엘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이 있다고 했습니다. 신랑을 위해서 신부가 단장을 하는 것처럼 새 예루살렘이 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라가 있고 도성이 있고 그 도성에 사는 백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 백성은 새 백성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백성 이렇게 삼박자가 맞춰지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별명이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새 하늘과 새 땅, 기쁨의 예루살렘입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팔레스타인과 싸우는 비극적 예루살렘입니다. 폭탄이 터지고 테러가 일어나는 예루살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예루살렘일까요. 아닙니다. 새 예루살렘은 그런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살롬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습니다.

📌세 번째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비규환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루살렘을 보고 기뻐하고 내 백성을 보고 즐거워할 것이니 울음소리와 절규가 그 안에서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다.”(19절)

다른 말로 하면 눈물과 통곡과 슬픔과 절망이 없는 곳입니다. 상상만 해도 전율이 올만큼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네 번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두가 영원히 삽니다.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20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새로 창조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생명이 충분히 보장됩니다. 생명이 충분히 보장될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는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어린 아이, 노인, 백세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계시의 관점에서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영원이라는 설명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우리는 병들고 여러 가지 재앙과 재난으로 인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 다섯 번째 새 하늘과 새 땅은 안녕과 안정과 번영이 약속된 정직한 나라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가 지은 집에서 살고 자기가 심은 포도원에서 열매를 따 먹을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살거나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손수 만든 것을 닳을 때까지 쓸 것이다.”(21-22절)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는 불법의 나라입니다. 다 안 그런 척하고 살 뿐입니다. 정도 차이만 있고 모두 비슷합니다. 잘 사는 사람은 상상하지 못 할 만큼 잘 살고 가난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이 가난하게 살고, 억울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이 억울하고 악한 사람은 상상할 수 없이 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람마다 자기가 지은 집에서 자기가 산다고 했습니다. 대개 세상에서는 자기가 집짓고 자기가 못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기가 지은 집을 적군이 와서 빼앗아 가지 않고 전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가 농사지은 것을 자기가 먹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심은 포도나무를 내가 따 먹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백향목과 상수리나무와 같이 잘 뻗은 나무처럼 쑥쑥 뻗은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 불행의 씨앗이 없는 나라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여섯 번째 특징을 보겠습니다.

“그들은 헛고생을 하지 않을 것이고 불행의 씨앗이 될 자식은 낳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백성이 되고 그들과 그 자손도 그렇게 될 것이다.” (23절)

사람들은 다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자식을 낳기 원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이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죄악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비규환의 세상이고 불합리와 부조리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나온 삶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는 순간 불행의 씨앗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복 받는 백성이 되고 그들과 그 자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저주가 없고 불행이 없고 실패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불행은 끝났습니다. 이 세상의 불행의 파도를 아무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막아 주셨습니다. 사탄을 뿌리째 뽑아 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대답하고 그들이 아직 말하고 있을 때 내가 들어주겠다. 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짚단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을 것이다. 그들이 내 거룩한 산 어디서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24-25절)

24절에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으면 기도는 이미 응답됐고 응답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대답하고 여러분이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이미 대답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신비스럽습니까. 세상은 늑대가 어린양을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어먹는다고 했습니다. 사자는 고기를 먹지 풀을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되면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어먹는다고 했습니다. 죽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거룩한 산 어디서나 서로 해치거나 죽이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아비규환, 생존경쟁 속에서 서로 죽이고 먹고 먹히는 비참한 살육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이 세상은 서로 음모를 꾸미고 사기치고 속이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를 말하면서 안 그런 척하고 삽니다. 인간의 속은 전쟁입니다. 인간의 속은 이미 죽음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외롭습니다. 절망적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 불안하기에 눈을 뜨고 죽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고 인간의 모습입니다.

구원과 회복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려지기를 바랍니다. 경험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승리하면서 살고, 웃으면서 살고, 사랑하면서 살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죽이고 미워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실 영원한 나라, 새 하늘과 새 땅ㄹ 마음에 품고, 용서하면서 살고, 베풀면서 사는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https://godpeople.or.kr/mopds/2785058

Thursday, May 17, 2018

천년왕국

천년 왕국을 중심으로 한 종말론에 대한 견해를 적어봅니다.

-후천년설은 보수주의적 후천년설과 자유주의적 후천년설로 나뉩니다.

- 전천년설은 역사전 전천년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나뉩니다.

-그리고 마지막 무천년설입니다.

현대의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주로 무천년설의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한국 교회는 전천년설, 특히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경향이 많습니다.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님이 세대주의자가 많았다고 해요.)

세대주의를 포함하는 전천년설이든 무천년설이든, 위의 견해 중 어떤 입장에 있다고 해서 함부로 비난하거나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소설에 근거한 음모론을 바탕으로 성경 끼워맞추기를 시도하는 극단적인 세대주의에 대해서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해석은 계시록 20:1~6절의 신천지(과천의 그 신천지가 아닙니다.) 도래의 과정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왕국 간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나누어집니다.

그림 출처는 톰슨2 (보고 그렸습니다.)


 1. 후천년설

A. 보수주의적 후천년설(Conservative Post-millennialism)

그리스도께서 천년 왕국 후 짧은 배교의 시기, 즉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간의 극심한 싸움을 기시를 거쳐 오신다고 가르칩니다. 천 년 동안 마귀는 결박 당해 있습니다. 아직 천년 왕국은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며, 복음이 이 세상과 역사를 강력하게 변화시킨 뒤 영광스러운 천년 왕국이 올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거스틴, 핫지 등이 주장했으나 종말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많은 모순을 안고 있어서 현재엔 인기가 없는 이론입니다.

B. 자유주의적 후천년설(liberalistic Post-millennialism)

자유주의신학에서는 예수를 신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든가 영적 세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도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위대한 도덕가인 예수의 교훈으로 세상이 점점 진화되어서 지상 낙원이 세워지게 되는데 그것을 천년 왕국이라고 합니다. 천년 왕국은 최후 지상 낙원에 대한 상징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2. 전천년설

A.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al Pre-millennialism, 환란 전 재림설)

역사적 전천년설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천년 동안 다스릴 것을 기대합니다. 아직 최후의 심판 전이기 때문에 성도와 불신자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천년 왕국 이전에 재림하시며, 성도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7년 대 환란을 겪습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환난 후 그리스도의 재림


(2) 죽은 성도의 부활(계20:5,6)


(3) 부활 성도 및 생존 성도의 공중 영접(살전4:16,17)


(4) 사단의 감금(계20:2,3) 과 적그리스도의 멸망(계20:3).


(5) 천년왕국의 건설 진행과 이스라엘의 대거 회심.


(6) 1000년 끝에 곡과 마곡의 전쟁 및 소멸(계20:8,9).


(7) 사단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짐


(8) 악인의 부활과 심판(계20:11-15).


(9) 새 하늘과 새 땅 건설


B.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lism, 환란 후 재림설)


세대주의전 전천년설도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천년 동안 다스릴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께서 먼저 비밀스럽게 오셔서 믿는 자들을 7년 대환란 이전에 데려가신다고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이후에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던데 좀 설득력은 약한 것 같습니다. 대 환란 이후 그리스도께서 공개적으로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신다고 주장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2) 죽었던 성도들이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공중에 들림


(3) 휴거된 성도들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


(4) 적그리스도 출현과 7년환난


(5) 이스라엘의 대거 회심


(6)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천년왕국 건설


(7) 1000년 후 사단의 석방


(8) 곡과 마곡의 전쟁 및 소멸


(9) 사단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짐


(10) 악인의 부활과 대심판


(11) 새 하늘과 새 땅 건설


 
3. 무천년설 (A-millennialism)


무천년설은 현재 일반적인 장로 교회나 감리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종말론입니다. 이 견해는 루터, 칼빈, 카이퍼, 바빙크, 머레이, 벌코프 등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견해입니다. 실제 개교회로 오면 담임 목사의 견해에 따라 갈리거나 성도들도 나름대로 자기가 믿고 있던  종말로대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은 교회 수십년 다녀도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에 대한 설교는 듣기 힘든 게 현실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단들이 열심히 가르쳐서 헷갈리게 하죠.


설명할게요. 무천년설은 천년 왕국을 상징적 의미로 해석합니다. 숫자적인 천년 왕국을 부정하고,  천년 왕국을 신약 교회에 대한 상징으로 봅니다. 계시록의 다른 것들은 상징으로 풀면서 천년이라는 기간만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거죠.


근거로는 첫째, 계시록 20:1~6이외의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천년 왕국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그 구절 자체도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현재의 교회 시대로 보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둘째, 성경이 전체적으로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동시에 일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무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의 부활, 최후 심판의 시기를 모두 일치하는 것으로 봅니다.


순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천년 왕국 기간 (신약시대)


사단이 결박되고(20:2,3) 첫째 부활(중생)에 참여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복음의 권위로 영적 왕노릇을 합니다. 여기서의 왕노릇은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삶으로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의미합니다.


2) 대배교와 대환난.


천년기가 끝나갈 무렵 사단이 잠깐 놓임을 받아 대배교와 환난이 일어납니다.(20:3절)


3)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기가 끝납니다.


4) 부활과 성도의 공중 영접.

이미 죽은 신자와 불신자가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하고, 부활한 성도와 생존한 성도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하여 공중으로 끌어올림을 받습니다. (살전 4:17). 

5) 심판.

악인이 심판을 받고 '둘째 사망 곧 불못'에 던지움을 받습니다.(20:14). 

6) 새하늘과 새 땅 (21:1). 


https://dongtanms.kr/xe/board_HgTC69/10819


 


Wednesday, May 16, 2018

시편 119(김효성 목사)

119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함18)

1-24절, 행위 완전함, 범죄치 않음, 말씀 사모함

[1-8절]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나차르)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솨마르)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솨마르)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솨마르)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도덕적 온전함을 원하신다. 우리는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불의를 행하지 말고 주의 도를 행하며 그것을 근실히 지키고 우리의 길을 굳게 정하고 그의 모든 계명에 주의하고 그의 의로운 판단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온전한 성도의 모습이다. 그런 자가 복이 있다.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다. 또 우리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할 것이다. 또 우리가 주의 율례를 지킬 때 주께서는 이 고난이 많은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복이다.

[9-16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성도는 젊을 때부터 행실을 깨끗케 해야 한다. 사람은 젊을 때에 실수와 연약이 더 많을 수 있다. 그가 젊을 때 행실을 깨끗케 하면 나이가 들 때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욱 성숙한 모습을 가질 것이다. 죄짓지 않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의 일차적인 목표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 우리의 행실이 실제적으로도 깨끗해지는 것 곧 우리의 거룩함이다(살전 4:3).

젊은 성도가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삼가는 것이다.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는 그의 계명에 거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두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기를 힘써야 하며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남에게 전해야 한다. 가르치는 것은 배운 것을 확실케 하는 좋은 방법이다. 또 우리는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을 즐거워해야 하고 또 그의 법도를 묵상하고 그의 길에 주의하고 그의 율례를 즐거워하고 그의 말씀을 잊지 않기를 결심해야 한다.

[17-24절]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에서 떠나는 자를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니 훼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방백들도 앉아 나를 훼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를 묵상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의 현실에 처해 있었다. 그는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가 지금 죽음의 위험 속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죽을병으로 고생하든지 원수들로 인해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었다. 또 그는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 방백들에게 따돌림과 훼방과 멸시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살게 하시면 그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고백한다. 또 그는 “내 눈을 열어 하나님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마음이 상하였다. 그러나 방백들이 앉아 그를 훼방하였을 때도 그는 하나님의 율례를 묵상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증거의 말씀을 그의 즐거움과 조언자로 삼았다.

성도가 고난 중에 승리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교만하여 주의 계명에서 떠난 자를 주께서는 꾸짖으시며 주의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서는 사람들의 훼방과 멸시를 떠나게 하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행위 완전한 자가 복되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구하며 그 모든 말씀을 지키는 자가 그런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로 부끄럽지 않게 하실 것이다.

둘째로,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자가 범죄치 않는다. 성도의 삶의 일차적 목표는 행실을 깨끗이 하고 범죄치 않는 것인데, 성도가 범죄치 않고 깨끗이 사는 길은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가는 길뿐이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즐거워해야 한다. 극심한 고난 중에도 또 사람들의 훼방과 멸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묵상하며 지키는 자에게 기쁨과 지혜와 승리가 있다.

 

25-48절, 고난 중에도 말씀을 붙듦

[25-32절] 내 영혼이 진토[흙먼지]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내가 나의 행위[길들]를 고하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으니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奇事)를 묵상하리이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에 밀접하였사오니[꼭 붙들었사오니] 여호와여, 나로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의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는 “내 영혼이 흙먼지에 붙었다”고 표현했다. 또 그가 자기의 길들을 고한다는 말은 자신의 부족한 행위들과 고난의 현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또 그는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해 녹사오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내 영혼이 슬픔 때문에 흐느끼오니”라고 번역하는 것(NASB)이 더 나아보인다. 그는 원수들의 훼방 때문에 심적 고통이 컸던 것 같다(22-23절). 그는 거짓된 행동을 할 위험이 있었고 수치를 당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이런 고난의 형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길을 구하였다. 그는 거짓되고 죄악된 사람의 길과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하나님의 길을 대조하며 바른 길을 강조한다. 그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또 그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거짓된 행동을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를 내 앞에 두었나이다”라고 말하며 “내가 주의 증거를 꼭 붙들었사오니,”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리이다”라고 고백한다.

[33-40절]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 나의 두려워하는 훼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주의 규례는 선하심이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시편 저자는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또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좋은 선생님이시며, 또 우리는 그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사모해야 한다.

시편 저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 목적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주의 계명의 길로 행케 하소서”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전심으로 지켜야 한다. 또 그는 “주를 경외케 하는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세우소서”라고 말한다. ‘세운다’는 말은 ‘견고케 한다’는 뜻이다. 주의 말씀이 그의 삶 속에 견고케 되기를 구한 것이다.

그는 또한 탐욕과 허탄한 것을 멀리하기를 원한다. 그는 “탐욕으로 향치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소서”라고 말한다. 탐욕과 허탄한 것은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악이다.

시편 저자는 또 “주의 도 안에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의로 말미암아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고 말한다. ‘소성한다’는 말은 ‘심신의 회복과 부흥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또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기를 원한 것이다.

[41-48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훼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뢰함이니이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 또 열왕 앞에 주의 증거를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겠사오며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시편 저자는 그를 훼방하는 자들로부터 하나님의 인자하심 가운데 구원을 얻기를 구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심한 비방으로 마음의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또 그는 지금 원수들의 비방 때문에 자유롭게 생활하지 못하고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할지도 모를 처지에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받으면 자유롭게 행하며 수치를 모면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붙들고 앙망하며 그것을 영영히, 끝없이 지키기를 결심했고 또 그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였다. 그는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영영히 끝없이 지키리이다,”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또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의 길, 바르고 확실한 길을 택하고 꼭 붙들고 그 길로 달려가자.

또 우리는 탐욕과 허탄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께 말씀을 배워 그 말씀을 끝까지, 전심으로 지키며, 그로 말미암아 새 힘 얻기를 구하자.

또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도하고 그의 말씀을 의지하고 붙들고 지키기를 결심하며 그것을 사랑하고 즐거워하자.

 

49-72절, 위로, 계명 지킴, 고난

[49-56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나로 소망이 있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교만한 자가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를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하여 내가 맹렬한 노에 잡혔나이다. 나의 나그네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시편 저자에게 하신 말씀은 그로 소망이 있게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약속하는 소망의 말씀이다. 떠 하나님의 말씀은 곤란 중에 위로가 되었고 그를 살리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의 말씀이다. 시편 저자는 교만한 자가 그를 심히 조롱하였지만,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성도의 승리의 비결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함이 그의 위로가 되었다.그는 하나님의 옛 규례를 기억하며 자신을 위로하였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인해, 그들의 악행들을 인해 맹렬한 분노에 잡히기도 하였으나, 그의 나그네된 인생길의 거처에서 하나님의 율례는 그의 노래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에게 기쁨과 위로와 힘이 되었다. 또 그는 해이해지거나 두려움을 가질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다. 그의 소유는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다. 그것은 장차 불타 없어질 재물보다 값지다.

[57-64절]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의 은혜를 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악인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악한 자들의 무리가 나를 둘러쌌으나](KJV)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그의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고백한다. 또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의 말씀대로 긍휼히 여김 받기를 기도한다. 사람이 평안과 복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밖에 없다. 또 시편 저자는 자기의 행위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의 발을 돌이켰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의 부족하고 잘못된 행위를 고치고 하나님의 교훈으로 돌아왔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회개를 원하신다.

시편 저자는 특히 하나님의 말씀 지킴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였고 지체치 아니하였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지체할 수 없는 일이다. 또 그는 악한 무리가 그를 둘러 쌌을지라도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한다. 성도가 그 고난 중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다면 승리할 것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를 인해 밤중에 일어나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말한다. 이 세상이 무법천지가 아니고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계신 것은 의인들에게는 큰 행복이다. 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자와 그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친구라고 표현한다. 참 우정은 참 믿음에서 가능하다. 또 그는 하나님 말씀 배우기를 원한다.

[65-72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저희 마음은 살쪄 지방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말씀대로 시편 저자를 선대하셨다. 그것은 그의 긍휼로 그를 도우시고 구원하심을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믿었고 ‘명철’(투브 타암ם������������ בוּט)[선한 판단력, 분별력]과 ‘지식’을 그에게 가르쳐주시기를 구하였다. 고난은 그에게 유익하였다. 그는 고난 당하기 전에 그릇 행하였으나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고백하였다. 그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과거를 반성하고 계명을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선을 행하신다고 말하면서 그의 율례로 그를 가르치시기를 구한다. 또 그는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그를 치려 하였지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겠다고 결심한다. 악인들의 마음은 살쪄 지방 같지만, 그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였다. 그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질병이나 궁핍, 대적자의 비방이나 전쟁 등의 고난은 그 자체로는 힘든 일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고 그 말씀대로 행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깨닫게 된 그는 하나님의 입의 말씀이 그에게 천천 금은보다 낫다고 고백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알자. 그것은 많은 재물보다 가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읽기와 듣기와 배우기를 원하고 힘쓰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고 다 지키자.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서도 그 말씀만 지키기를 힘썼다. 그것은 고난을 통해 그가 깨달은 바이었다. 그는 그 말씀을 잊지 않고 떠나지 않고 믿고 지켰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곤란 중에 소망과 위로와 기쁨과 힘이 된다. 그 말씀을 붙든 자는 늘 위로와 기쁨과 힘을 얻고 승리할 것이다.

 

73-96절, 고난과 핍박 중에 말씀을 붙듦

[73-80절]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형성하셨사오니] 나로 깨닫게 하사 주의 계명을 배우게 하소서. 주를 경외하는 자가 나를 보고 기뻐할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연고니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판단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니이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나로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교만한 자가 무고히 나를 엎드러뜨렸으니[걸고 넘어졌사오니] 저희로 수치를 당케하소서. [그러나] 나는 주의 법도를 묵상하리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의 증거를 알리이다[주를 경외하는 자들과 주의 증거를 아는 자들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KJV, NASB).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에 완전케 하사 나로 수치를 당치 않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손이 그를 만드셨으므로 그의 계명도 깨닫고 배우게 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육의 삶을 주관하신다. 또 시편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그를 보고 기뻐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진실한 형제를 볼 때 기쁨을 얻는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판단이 의로우시며 그가 자신을 괴롭게 하심이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의 공의와 진리에 의한 것임을 인정한다. 그는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의 위안이 되고 또 그의 긍휼하심으로 그가 살게 되기를 간구하며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법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또 교만한 자들이 무고히 그를 걸고 넘어졌으나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그의 법도를 묵상한다. 그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증거를 아는 자들로 그에게 돌아와 교제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그는 또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고 행함으로 완전케 되기를 원한다.

[81-88절]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오히려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연기 중의 가죽병같이 되었으나 오히려 주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나이다.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국문[심판]하시리이까?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주의 모든 계명은 신실하니이다. 저희가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니[핍박하였사오니] 나를 도우소서. 저희가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명령]를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로 소성케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증거를 내가 지키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지만 오히려 그의 말씀을 바라고 있다. 참된 믿음은 인내를 동반한다. 그는 하나님의 안위를 구하며 그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였다. 그는 고난 중에 참고 하나님의 말씀을 앙망하였다. 또 그는 자신이 연기 중에 검게 그을린 가죽병같이 심신으로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율례를 잊지 아니하였다. 그는 괴로움 중에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를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법을 좇지 않는 교만한 자들이 그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고 무고히 그를 핍박하였고 그를 거의 멸했으나, 이런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신실함을 인정하고 그의 법도를 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의 도움과 심신을 회복케 하시는 그의 은혜를 간구한다.

[89-96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판단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내가 주의 법도[명령]를 영원히[결코]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를 찾았나이다[연구하였나이다]. 악인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엿보았으나] 나는 주의 증거를 생각하겠나이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말한다. 그것은 천체의 제도와 그 규칙적 운행을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또 그는 그의 성실하심도 영원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다고 말한다. 안정된 땅이기 때문에 우리는 땅 위에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이처럼 만물, 곧 하늘과 땅 전체가 하나님의 종이므로 그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변함 없이 존재한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이 그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그는 고난 중에 멸망하였을 것이라고 간증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살게 하셨기 때문에 그의 법도를 영원히[결코] 잊지 않고 지키겠다고 말한다. 사람이 영육으로 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구원하실 것이다. 악인이 그를 멸하려고 엿보았으나 그는 하나님의 증거를 생각하겠다고 결심한다. 또 그는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하나님의 계명은 심히 넓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풍부하고 그 효력은 영원하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그가 그의 긍휼로 우리를 고난에서 구원하실 수 있음을 알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고 즐거워하고 온전히 순종하기를 힘쓰자.

우리는 핍박과 위험 속에서 피곤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의 구원을 기다리며 그 말씀을 잊지 말고 붙들고 버리지 말고 끝까지 지키자.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알고 그 말씀을 믿고 즐거워하고 잊지 말고 연구하고 생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자.

 

97-120절, 종일 묵상, 내 발에 등, 말씀 사랑

[97-104절]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므로 그 말씀을 종일 묵상했다. 그 말씀이 항상 그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그를 원수들보다 지혜롭게 하며 그의 스승들보다 또 노인들보다 명철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인간적 지혜보다 낫고 그의 어떤 선생의 가르침보다 낫다. 이 세상 어디에도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갈 사람은 없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의 발을 금하여 계명을 어기는 모든 악한 길, 즉 우상숭배와 불효와 미움과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거짓말과 탐심 등의 악한 길로 가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가르치셨으므로 그가 하나님의 규례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성도는 악을 멀리하도록 그의 발걸음을 항상 조심해야 한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하였다. 우리는 성경말씀의 진미(珍味)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치 않은 자는 그 맛을 모른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법도로 인해 그가 명철케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 모든 불의하고 악한 행위를 미워하겠다고 말한다.

[105-112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NASB 각주, Poole)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악인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길이 끝까지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발에 등이요 우리의 길에 빛이다. 인생의 여정에 죄악된 유혹, 의심, 슬픔, 낙심, 고난 등의 어두운 날들이 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의와 선을 지시하고 믿음과 확신을 주고 또 위로와 기쁨과 힘도 준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환경과 처지를 따라 지키고 안 지키고 해서는 안 된다.

시편 저자는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심신으로 회복되고 구원얻기를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규례로 그를 가르치시기를 기도한다. 그는 그의 생명이 항상 원수들의 위협 속에 드러나 있지만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았다. 악인들은 그를 해치려고 올무를 놓았으나 그는 하나님의 법도에서 떠나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 짓는 것과 그로 인해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즐거움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영원한 기업으로 삼았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요 경건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율례를 끝까지 행하려고 그의 마음을 기울였다. 사람은 마음을 어디 두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진다.

[113-120절]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를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말게 하소서.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주의 율례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저희 궤사는 허무함이니이다.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시니[버리셨나니](NASB)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를 사랑하나이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

시편 저자는 두 마음 품는 자, 곧 의와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이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자를 미워했고, 또 행악자를 멀리했다. 두 마음을 품는 자나 행악자는 권면의 대상이지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자와 교제한다면 의심과 악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율례를 떠난 자들을 다 멸시하셨다. 그들의 행위는 허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악인을 찌끼같이 버리셨다.

시편 저자는 오직 하나님을 은신처와 방패로 삼았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과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큰 복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율례에 항상 주의하고 두려워했다. 그의 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떨었고 그의 판단을 두려워하였다. 이것이 바른 성도의 모습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대로 그를 붙들어 죽지 않고 살게 하시고 그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시기를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기를 다시 기도한다. 그는 악인들의 미움과 비난과 핍박과 해하려 함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다. 구원과 영생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 

우리도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종일 묵상하자. 하나님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단 것을 체험하자. 또 그 지혜의 말씀을 힘써 지키자.

우리는 우리 발에 등이며 길에 빛인 하나님의 말씀의 지도만 받자. 우리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그 말씀을 즐거움으로 삼고 힘써 행하자.

우리도 두 마음을 품는 자나 행악자를 멀리하고 하나님만 은신처와 방패로 삼자. 또 고난 중에도 그의 말씀을 사랑하며 지키며 실천하자.

 

121-144절, 주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함

[121-128절] 내가 공(公)과 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주의 인자하신 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주의 율례로 내게 가르치소서. 나는 주의 종이오니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편 저자는 교만한 자들의 압박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평소 의롭게 살았고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믿었고 그의 보호와 복을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였고 그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눈이 피곤하였다. 하나님의 구원은 때때로 더디다.

또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그의 말씀을 가르쳐주셔서 자신이 깨닫고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은 행위의 열매를 맺게 할 것이다. 또 그는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징벌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금보다 귀함을 알아야 한다.

[129-136절] 주의 증거가 기이하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사람의 압박에서 나를 구속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주의 얼굴로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놀라운 내용이며 시편 저자는 그것들을 지켰다.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말씀하심, 성경의 예언과 성취, 그 기적들은 다 놀라운 일들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의 해설은 어리석은 자들에게 비취어 깨달음을 준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과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복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즉 도우심과 구원으로 그를 향하셔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도한다. 그는 사람의 압박에서 그를 구원해주시기를 기도한다. 또 그는 그의 행보를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셔서 말씀대로 행케 하시고 아무 죄악이 그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성도는 성경말씀대로만 살고, 그것을 떠나고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죄악된 일은 버려야 한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께서 그의 얼굴 빛을 비추셔서 그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기를 구한다. 말씀의 바른 지식이 경건의 시작이다. 또 그는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눈물을 시냇물같이 흘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의분의 눈물인 동시에 긍휼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137-144절]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정직하시니이다. 주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도소이다. 내 대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精美)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주의 증거는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그의 판단들은 정직하시다고 말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명하신 증거는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시다, 즉 진실하고 믿을 만하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하고 있으므로 그의 마음의 열심, 즉 그 진리를 전하고 변호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열심은 그를 삼켰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다고 말한다. ‘정미(精美)하다’는 원어(체루파ה������וּר������)는 ‘단련되다, 깨끗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극히 순결하시다. 시편 저자는 그러므로 그 말씀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또 그는 자신이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지만 하나님의 법도를 잊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남에게 멸시를 당할 때 인간적으로 대응하기 쉬우나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교훈하신 대로 사랑과 긍휼의 원리로 행해야 한다.

시편 저자는 다시 하나님의 의는 영원한 의요 그의 법은 진리시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영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도 그러하다. 또 하나님의 법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시편 저자는 환난과 우환이 그에게 미쳤으나 하나님의 계명이 그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하며, 또 하나님의 증거들이 영원히 의로우시므로 그로 깨닫게 하셔서 생명을 얻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시편 저자는 고난을 당하고 있다. 교만한 자들은 그를 압박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폐하였고 지키지 않았고 잊어버렸다. 그는 미천해졌고 멸시를 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고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행하였다. 그는 공의를 행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하며 사모했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소원하였고 그 말씀을 잊지 않았고 즐거워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의롭고 기이하고 지극히 진실하고 심히 깨끗하다고 증거하였다(시 19:7-8; 요 17:17; 롬 7:12).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그것을 정금보다 더 사랑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읽고 묵상하고 배우고 그 말씀을 지키고 보수하고 잊지 말고 즐거워하고 실천하자.

 

145-176절, 주야로 묵상, 말씀 사랑, 큰 평안

[145-151절]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를 지키리이다.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 악을 좇는 자가 가까이 왔사오니 저희는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시편 저자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며 전심 기도는 큰 믿음의 표현이다. 또 그는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겠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지만 회개하며 순종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시편 저자는 또 새벽 전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의 말씀을 바랐다. 새벽기도는 정성과 자기 부정과 간절함의 표현이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그의 눈이 밤이 깊기 전에 깨었다. 그는 밤이 깊기 전에 성경을 읽고 또 읽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은 유익과 복이 크다.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따라 그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를 죽음에서 살려주시기를 구했다. 악을 좇는 자들이 그에게 가까이 왔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서 먼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가까이 계심과 그의 모든 계명이 진리임을 믿었다. 그는 예전부터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임을 알았다.

[153-160절]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救贖)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구원이 악인에게서 멀어짐은 저희가 주의 율례를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나를 핍박하는 자와 나의 대적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궤사한 자를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가 영원하리이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나의 고난을 보소서,” “나를 핍박하는 자와 나의 대적이 많으나”라고 말한다. 그의 주위에는 그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한다. ‘원한’이라는 원어(리브)는 ‘송사’라는 뜻이다. 그는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는 말을 세 번 했는데, 그것은 심신을 회복시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건강과 힘과 위로 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았고 그의 증거에서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사랑했다.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의 율례를 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구원이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궤사한 자들’ 즉 ‘배신자들’(보그딤)을 보고 슬퍼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소성케 되기를 기도한다. 또 그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이며 의롭고 영원함을 고백한다.

[161-168절]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을 행하였나이다. 내 심령이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이다.

시편 저자는 방백들이 무고히 자기를 핍박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핍박 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 경건한 성도도 고난을 당한다. 시편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크게 즐거워하고 지극히 사랑하고 행하고 힘써 지켰다. 161절,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162절,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63절,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64절,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67절,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166절, “[내가] 주의 계명을 행하였나이다.” 167절, “내 심령이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며.” 168절, “내가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시편 저자는 이제 큰 평안을 확신하며 증거한다. 165절,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평안(솰롬)이라는 말은 심리적 평안, 육체적 건강, 물질적 안정과 여유, 환경적 평안 등을 다 포함한다. 이것은 확실히 이 세상에서 경건한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이다.

[169-176절]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찬송을 발할지니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가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간구한다. 169절,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소서.” 170절,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173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174절,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175절, “내 혼을 살게 하소서. . . 주의 규례가 나를 돕게 하소서.” 176절, “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시편 저자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 깨닫기를 원하며 그 말씀을 붙들며 그 말씀을 택하고 잊지 않았다. 169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171절,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173절, “내가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176절,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도 그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였다. 170절,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시편 저자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찬송하였다. 172절,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 174절,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75절, “주를 찬송하리이다.” 성도의 즐거움의 찬송은 진실한 믿음의 표시일 것이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전심으로 또 새벽에 부르짖어 기도하자.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의 부르짖는 기도를 잘 들어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를 죽음의 문앞에서 건지시고 우리를 살리시고 심신에 회복과 새 힘을 주실 것이다.

또 우리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랑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잊지 말고 떠나지 말고 그 말씀을 즐거워하고 노래하고 그것을 실행하자. 그것이 승리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며 그들의 앞에 장애물이 없을 것이다.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대로 사는 자들은 큰 평안을 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