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의 이중성
/ 윤용진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신학 교수)
제 34차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 박형용 박사) 논문 발표회가 지난 10/22(금)-10/23(토)까지 양일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열렸다. '세기말과 기독교종말론'이란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 "여호와의 날의 이중성"(윤용진, 웨신대 구약학 교수)의 논문을 비롯, "새로운 천년을 위한 팔복 연구"(배종수, 서울신대 신약학 교수), "지옥과 하나님의 속성"(송인규, 합신대 조직신학 교수), "한국교회 종말 신앙 역사적 개관"(박용규, 총신대 역사신학 교수), "종말론 설교를 위한 제언"(이명희, 침신대 실천신학 교수), "세기말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선교학적 고찰; 팔레스틴 언약에 나타난 '이방인의 때'를 중심으로"(이원옥, 한국성서대학교 선교학 교수), "포스트모더니즘 경향에 대한 기독교 교육학적 대응"(김승곤, 성결대 기독교교육학 교수), "종말론과 사회윤리; 위르겐 몰트만과 리차드 마우 신학윤리학의 비교 연구"(신원하, 고신대 윤리학 교수) 등의 폭넓은 논고가 발제되었다. 이중 "여호와의 날의 이중성"의 논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 주>
여호와의 날의 이중성
- 선지자 요엘의 종말론을 중심으로 -
🎈서 언
1999년에 들어서면서 한국사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현상 중의 하나가 새로운 천년을 향한 희망과 기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릇된 종말론자들-세대주의 종말론자들, 시한부 종말론자들, 점성술사, 사교집단 등-로 인하여 각국의 사회적 분위기는 다소 불안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지난 여름을 불안한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던 노스트라다무스 증후군이다.
한국사회에서도 비성경적 종말론을 신봉하는 이단들의 극성스러운 행태로 인하여 소중한 인명을 빼앗기고 재산을 갈취 당하며 가정이 파괴되는 등의 심각한 사회 문제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이것이 일부 개인적인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 가출, 집단 자살 등의 대사회적인 문제로 확대되며 한국교계에 비상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최근 터어키, 타이완, 멕시코 등지에서 발생한 지진, 세계 도처에 발생된 홍수와 기근, 거대한 돌풍과 해일 등을 보며 마24장에서 예수님이 예언하신 세상 끝날의 징조들이 그 빈도와 강도에 있어서 점차 강화되고 있음에 다소 불안해하는 성도들이 많다.
한국교회는 사회를 어지럽히는 비성경적 종말론의 이단들과 사교집단에 대한 대책과 종말론에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신속하게 대응함으로써 하나님께 받은 사명의 수행에 차질이 없어야 할 것이다. 20세기말의 끝자락에 서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필자는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소개함으로써 한국교회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의 주요 내용
구약성경은 현대인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미래 종말론에 관한 것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자들이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구약성경에는 종말론적 사고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는 안토니 A. 후크마 박사는 그의 역작 「개혁주의 종말론」(원제: The Bible and The Future) 제 1장에서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강변한다.
구약이 오실 메시아를 계시의 중심에 놓고 있다면 신약은 다시 오실 구세주 그리스도를 계시의 중심에 놓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신구약 성경은 종말론에 있어서 구조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종말론의 범주는 어떻게 되는가? 학자들마다 답변을 위한 접근 방법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에 대한 궁극적 대답은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장차 오실 구속주
2) 하나님의 나라(왕국)
3) 새 언약
4) 이스라엘의 회복
5) 성령을 부으심
6) 여호와의 날
7) 새 하늘과 새 땅
이 글을 통하여 위에 열거한 주제들을 모두 고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계시의 점진성이라는 수평적인 역사의 시간대 위에서 종말론의 주제들이 예언되고 성취되는 시점을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 시점을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날'이라고 선포한다. 필자는 요엘서를 중심으로 하여 고찰하며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 사상의 일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요엘이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
요엘서의 문학적 구조
선지서들 중에 '여호와의 날'을 최초로 선포한 자는 요엘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날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지서 중에는 '여호와의 날'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여러 본문들이 있으나 욜1:1-3:21을 통해 그 이중성을 확인해 보기로 하자. 요엘서 본문의 분량은 짧지만 여호와의 날이라는 핵심 어휘를 통하여 종말론적 분위기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먼저 요엘서 전체의 구조를 살펴보자.
+--- 1:1 - 2:17 // 하나님의 심판(징벌)의 날
'여호와의 날' --+
+--- 2:18 - 3:21 // 하나님의 구원(회복)의 날
위의 구도에서 보듯이 요엘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여호와의 날'이 전반부(1:1-2:17)에서는 심판의 날로 나타나고, 후반부(2:18-3:21)에서는 구원의 날로 나타난다. 전반부에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한 대적의 침공과 그로 인한 비극적 상황을 예고하고, 후반부에서는 먼저 번영과 안전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다는 축복을 강조하고 다음으로 모든 대적들을 심판하여 멸망시키고 예루살렘과 유다를 회복시킬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전쟁 차원에서 볼 때 전반부는 '징벌의 전쟁'을, 후반부는 '승리(구원)의 전쟁'을 보여주는 것이다. Stuart가 세분한 전체의 내용이 이와 같은 구조를 입증해 준다.
1:1 서두
+- 1:2-20 [ 단락 I ]
전 | 2-7절 : 대적의 침략 서술(메뚜기 비유)
반 | 8-20절 : 애곡하라는 요청과 구체적인 침략 서술(궁핍과 황폐함)
부 |
+- 2:1-17 [ 단락 II ]
1-11절 : 대적의 침략 서술(1절 - 경계 요청 / 11절 - 대적의 정체)
12-17절 : 회개하라는 요청(특별 금식성회)
+- 2:18-2:32 [ 단락 III ]
후 | 18-27절 : 대적의 후퇴와 농경지의 회복의 이중 약속
반 | 28-32절 : 성령의 새 시대에 대한 특별한 약속
부 |
+- 3:1-21 [ 단락 IV ]
1-16절 :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과 궁극적인 군사적 패망
17-21절 : 예루살렘과 유다에 임할 평화와 번영의 축복
위의 구조에서 전반부(단락 I, II)의 내용은 하나님의 징벌을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심판의 날)을, 후반부의 내용(단락III, IV)은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회복과 구원의 날)을 보여준다. 여호와의 날의 관점에서 볼 때 신명기에 나타난 '모세의 노래'(신32장)는 이미 발생했던 사건(1-21a절)으로부터 장차 일어날 사건들(21b-43절)에 이르기까지 구조나 주제의 차원에서 요엘서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Stuart는 욜1:1-2:27만 '모세의 노래'(신32:1-43)와 비교했지만 욜2:18-3:21까지의 내용은 신32:39-43에 해당되는 여호와 전쟁의 승리, 즉 구원(회복)의 날로서의 여호와의 날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요엘서의 전, 후반부에서 선포되는 여호와 날에 관하여 고찰해 보자. 먼저 전반부(1:1-2:17)에 나타난 징벌로서의 여호와의 날부터 살펴보자.
전반부(1:1-2:17)에서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
전반부에서 선포되고 있는 여호와의 날이 여호와께서 주도하시는 징벌의 전쟁 성격을 갖기 때문에 여호와의 전쟁신학적 관점에서 그 주요 요소와 내용을 먼저 정리해 보자.
위의 주요 요소들 중에 전쟁의 대상을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강조하는 것은 요엘 선지자의 관심이 항상 하나님의 백성에게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주고(3:6,7) 이 어구의 반복적인 언급은 오랫동안 구축되어 온 언약의 중심(신12장)이요 요엘시대의 정치적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날 선포의 핵심 대상임을 강조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적대하여 치시는 전쟁의 원인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전쟁의 원인을 암시하는 어구들(1:2,5,11,13a,13b)과 회개를 촉구하는 2:12-14의 간곡한 메시지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이 범죄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이와 같이 요엘이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의 성격은 우선 위협의 요소, 즉 죄에 대한 심판의 성격이 강하다.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욜1:15)
여호와의 날이 전능하신 여호와로부터 "멸망같이)" 임한다는 선포는 이스라엘이 당하는 재앙의 원인이 그들의 범죄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욜1:5-14은 불시의 국가적 재난에 대해 온 백성의 '공동적 애도'(Communal Lamentation)를 요청하는 탁월한 본문 중의 하나이다.
범죄한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적하는 여호와의 전쟁 방법은 1:1-2:17안에 세 가지 저주로써 묘사되어 있다. 첫째는 대적의 침략(1:4)이다. '메뚜기'(1:4)로 묘사된 대적의 정체성에 대한 해석적 입장이 문자적인 해석과 비유적 해석으로 양분되지만 후자가 옳다고 본다. 왜냐하면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께서 지휘하시는 북편 군대는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군대(2:20;3:4) 아니면 애굽이나 에돔(3:19)의 군대들로서 그들을 통하여 범죄한 자기백성을 공격하시기 때문이다(2:4-10). 그리고 욜2:25("내가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결정적 내증을 통해 볼 때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를 멸망시킨 앗수르나 바벨론의 침략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Cf. 삿6:5;7:12;렘46:23;나3:15-16).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께서 북편 군대, 즉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군대(2:20;3:4) 아니면 애굽이나 에돔(3:19)의 군대를 지휘하여 자기 백성을 공격하시기 때문이다(2:4-10).
둘째는 초목이 마르고 곡식은 시들어지며 시내물은 고갈된다는 진술(1:10,12,17-18,20)과 이러한 황폐함으로부터의 회복 약속(2:22-23)을 통하여 선고된 기근의 저주이다. 셋째는 기근(1:11-12)의 결과로 인하여 야기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대적의 침략으로 말미암는 황폐함의 저주이다(1:9,16,19-20;2:3,5). 이와 같은 세 가지 저주들을 모세언약의 파기에 대한 주요 형벌들이라고 본 Stuart의 관점은 옳다. 모세의 율법에 계시된 저주 조항들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대적하여 치시는 실제적인 전쟁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율법의 저주들이 시행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여호와의 날에 임할 재앙과 형벌로써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시행된 것이다. 이사야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사 63:10)
요엘서 전반부, 특히 2:1-11에 나타난 전쟁의 성격은 율법언약을 파기한 자기백성에 대하여 여호와의 주권적 간섭으로 말미암는 징벌의 전쟁이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곳은 2:11이다.
a 여호와께서 그의 군대 앞에서 그의 소리를 발하시니
b [진실로] 그의 진(陣)은 심히 크고
c [진실로]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d [진실로]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e 그를 당할 자가 누구이랴
('그의 군대', a), ('그의 陣', b), ('그의 명령을 행하는 자', c) 등이 지시하는 것은 문자적인 메뚜기 재앙이 아니라 여호와의 결심으로 말미암는 실제적인 대적의 침략을 가리킨다. 이러한 침략 세력의 근본적인 주체가 여호와라는 사실을 주어가 나타내주고 세 번씩 반복되는 ('진실로' / b, c, d)는 '여호와의 날'의 실제성을 강조하여 서술하고 있다.
전반부에 나타난 징벌의 전쟁에서 엿볼 수 있는 여호와의 이미지는 '군대'를 지휘, 통솔하시는 '용사'요(2:5,7,9,11,cf.25),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며 인애가 크신'(2:13) 우주의 주권자 '왕'(1:6;2:17,19;참.3:2,9,11,12)이시다. 다음으로 후반부(2:18-3:21)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날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후반부(2:18-3:21)에서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
전반부에서 살펴 본 것처럼 후반부의 내용도 여호와의 전쟁 구도로써 분석해 보기로 하자.
위의 도표를 통해서 우리는 후반부에서 선포되는 여호와의 날이 전쟁의 주체이신 여호와의 주권적 섭리하에 자기 백성의 구속을 위한 전쟁으로 전개될 것을 알 수 있다(3:9-12). 이 사실은 전쟁의 주체이신 여호와가 주어로서 후반부(2:18-3:21)에만 22회 출현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전쟁의 대상은 전반부(1:1-2:17)에 나타났던 이스라엘의 대적들이다. ("북쪽에서 온 족속들", 20절)는 ("나의 큰 군대", 25절)과 동의적 댓구를 이룬다. 1:4의 '메뚜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자들 중에 K. Budde(1919)는 20절을 '북풍'으로 수정하기를 원한다. K. Jensen(1941)은 20절 Antiochus IV Epiphanes(2 Macc 9:5-10)를 가리킨다고 보아 요엘서의 연대를 후기로 잡는다. 그러나 예레미야(1:14-15;4:6;6:1,22)나 에스겔(38:6,15;39:2)의 외증과 욜2:11;3:3,19의 내증으로 미루어 볼 때 여호와께서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던 역사적인 이스라엘의 대적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주로 북쪽에서 왔다. 북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페르시아만에 이르기까지의 광활한 지역에 산재한 대적들은 아모스 시대에 이스라엘을 또 다른 대적에게 포로로 팔아 넘겼고(암1:6-9) 최소한 에스겔 시대에도 두로는 헬라와 노예매매를 거래했었다(겔27:12ff.).
이 전쟁의 성격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여호와의 전쟁이다.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2:20,21)는 것은 현재의 난관들이 점진적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 극적으로 해결될 것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언약파기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대적에게 포로로 잡히고 온갖 고난을 겪다가 여호와의 이적적인 간섭으로 말미암아 예상치 못하는 때에 궁극적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율법언약(레26:42;신4:25-31;사40:1)의 성취이다. 그 날은 '여호와의 날'로서 자기백성을 위하여 간섭하실 초자연적 '이적들'(2:30;Cf.출4:21;7:3,9;신4:34;34:11;사8:18)이 하늘과 땅에서 베풀어질 것이다. 일련의 극적이고 격변적인 여호와의 행위들은 자기백성의 '구속'(2:32)을 위한 여호와 전쟁의 성격을 잘 묘사해 준다.
그 날은 승리의 기쁨이 극에 달한 날이다. 여호와의 이적적 간섭으로 인하여 '패배의 수치'에서 '승리의 기쁨'으로, '황폐함'에서 '풍성함'으로, '포로'에서 '자유'로 역전될 것이기에 선지자는 반복적인 평행법을 사용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라'(21,23절)고 요청하며 '여호와를 찬양할 것'(26절)이라고 선포한다.
전쟁의 방법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하여 하신 일을 의미한다. 압축하여 말하자면 '심판/회복' 또는 '추수/심판'의 양대 구도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전반부(1:1-2:17)에서 살펴 본 징벌의 전쟁 방법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예고되어 있다.
첫째는 대적들의 패퇴이다. '북쪽에서 온 군대들'을 '멀리 떠나게'하고 '쫓아내시며'(2:20), 열국의 악행을 그들에게 그대로 '돌려 갚으시고'(3:7) 그들을 모아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심판하실 것이다(3:2,12).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여호와 전쟁의 전형적인 모티프는 3:9-12에서 발견된다.
9절 : 열국의 '용사들'에게 '전쟁'을 준비시킴
10절 : 보습을 쳐서 칼을, 낫을 쳐서 창을 만들라(참.사2:4;미4:3)
11절 : 열국과 여호와의 '용사들'을 공동 소집함
12절 : '용사-왕'이신 여호와께서 전쟁을 통해 '열국'을 '심판'하심
둘째는 기근을 물리치시고 풍성한 추수를 거두게 하신다(2:19,22,24-26;3:13,18).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여호와의 전쟁에 있어서 전쟁행위의 양면성, 즉 '추수/심판'의 이미지는 구약(사17:4-6;63:3;호6:11;미4:13)과 신약(막4:29;마13:39-40;계14:20)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황폐한 유다를 영원히 번영케 하실 것이다. 여호와의 떠나심으로 인하여 황폐했던 유다가 여호와의 돌아오심으로 인하여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며 영원히 번영할 것을 선포한다(2:21-23,26-32;3:16-21).
후반부(2:18-3:21)에 나타난 여호와의 날의 특징은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다시 함께 거하실 것(출8:22;17:7;33:5;민11:20-21;신17:20)이고 2) 여호와만 홀로 그들의 하나님 되신다(사45:5-6,18,22;46:9)는 것이다(2:27). 이 두 가지는 언약 관계의 핵심 내용인 임마누엘의 원리(창17:7;출6:7;29:45;레11:45;26:12;신29:13)로서 장차 회복될 여호와-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보여준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깨어진 언약 관계가 회복될 것을 예고하고 있다(레26:42,45;신4:30-31;30:6,8). 이 사실에 평행되는 어구로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낼 것이라"(3:16a),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될 것이라"(16b), "나는 내 성산(聖山)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17a) /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21b) 등이 연속적으로 등장한다. 이와 같은 메시지는 '구속한 자기백성을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신다'고 노래한 '바다의 노래'(출15:13,17)와 평행을 이룬다.
요엘서 후반부에 나타난 여호와의 이미지 역시 '용사/왕'으로서 이중성을 띠고 있다. '큰 군대'(2:20,25)와 '주의 용사'(3:11)는 여호와가 최고 지휘관이신 전쟁의 용사임을 보여준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거하시고'(2:27)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하시며(32), 온 세계의 '심판주로서 좌정'하신 하나님(3:12,14)의 모습에서 자기백성 이스라엘 중에 함께 계셔서(2:27) '피난처와 산성'(16-17,20-21)이 되시는 '왕'으로서의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용사 - 왕'이신 여호와의 함께하심으로 이스라엘은 이제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2:26b,27b). 여기에서 우리는 자기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즉 징벌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자기 백성의 회복을 통한 여호와의 승리에 있음을 깨달으며 여호와의 날이 지니고 있는 이중성의 묘미를 발견한다.
🎈요엘이 선포한 여호와의 날의 종말론적 특성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을 띠고 있다.
요엘서 전체의 문학적인 구조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책에 선포되는 여호와의 날은 이중성을 띠고 있다. 전반부(1:1-2:17)에서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은 죄에 대한 심판의 날로서 위협적이고 절망적이다. 그 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2:2)로서 평소에 이스라엘의 대적으로서 위협적인 존재인 이방세력들('북편군대', 2:20;3:4,6)을 여호와께서 자신의 군대로 사용하셔서 범죄한 자기 백성을 치시는 전쟁의 날로 나타나 있다.
한편 여호와의 날은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날이기도 하다. 평행을 이루고 있는 두 구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2:21/2:23)이 그 날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 날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의 날에 사용하셨던 '북편 군대'를 멀리 쫓아내시는 날이요(2:20), 자기 백성들을 열국에 팔아 흩어버린 원수들을 '심판하시는 날'이다(3:2,12,14). 그 날 이후로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2:19,26)는 선포는 구원의 날로서의 여호와의 날이 어떠한 성격을 띠고 있는지 잘 드러내 준다.
다른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나타난 여호와의 날도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다. 선지자 오바댜는 도래하는 그 날의 임박성을 강조하되(15-16절) 그의 안목은 여호와의 날을 뛰어넘어 최후에 있을 여호와의 왕국을 내다보고 있다(21절). 아모스 선지자는 일부 백성들이 잘못 인식하고 있는 축복받는 날로서의 여호와의 날을, 심판과 재난의 날이라고 선포하였다(암5:18-20).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적 전망을 통하여 가까운 주의 날과 먼 주의 날을 바라보고 있다(사13:9-11).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재림을 말씀하시며 사13:10을 인용하셨고(마24:29-31) 요한도 여섯째 봉인을 뗄 때에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계6:12-17).
미가의 메시지의 핵심은 '그 날'의 이중성에 있다. 즉, 임박한 그 날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몰고 올 심판의 날(3:9-12;6:13-15)이요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들 위에 왕으로 군림하여 통치(4:1-8)하시는 구원과 승리의 날이다. 그의 강조점 역시 먼 장래에 메시야가 영원토록 통치하시는 하나님 왕국의 승리에 있다. 이것은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욜3:20)는 요엘의 메시지와 일치하고 있다. 분노와 환란과 고통의 날로서 "여호와의 큰 날"(습1:14-15)을 선포하는 선지자 스바냐는 그 날이 유다 민족에 대한 심판의 날인 동시에 전 세계의 인류에게 닥칠 최종적인 종말의 날임을 예고하고 있다. 동시에 그 때는 '이방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 처소에서 여호와를 경배'하게 되고(습2:11),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섬기게 되는' 날이다(3:9).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요 최종적인 승리의 날임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는 종말론적인 파국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선포했다. 그것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는 복음적 메시지이다. 그는 문제의 시대, 즉 말세를 복음을 통하여 분명하게 정의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복음으로 인하여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2:14)고 종말론적 전망을 하였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3:18,19)라고 하여 장차 도래할 여호와의 날이 구원과 회복의 날임을 내다보게 하였다.
스가랴는 '그 날'과 '여호와의 날'이라는 용어를 매우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의 용법은 역시 심판과 구원의 날이라는 이중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시기를 말함에 있어서는 미래적이다. 14장에서는 주로 말세(the Latter Day)를 언급하는데 여호와의 날과 더불어 혼합되어 나타난다. 다른 선지자들의 용법에 의하면 말세란 여호와의 날을 훨씬 지나서야 도래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스가랴는 말세를 여호와의 날의 유기적인 일부로 간주하였다. 그 증거로서 14:5,8-11을 들 수 있는데 특히 9절("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은 최후 심판 후에 있을 하나님 여호와와 그리스도의 통치(계11:15)를 바라보고 있으며 여호와의 날과 말세를 묶는 슥14:10-11은 계22:3과 종말론적 평행을 이루고 있다. 선지자 말라기는 포로 후시대의 죄악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되 '크고 두려운 날'(4:5)로 언급하며 여호와의 날이 저주의 날이 될 것을 선포한다.
🎈여호와의 날은 장차 오실 구속주를 중심으로 도래할 것이다.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하고 있다. 요엘이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도 구속주 메시야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죄에 대한 심판으로 임했던 재앙이 멀리 물러갈 날이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고 그의 백성을 긍휼히 여길 '그 때'가 있을 것이다.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이제는 '두려워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2:21a,23a)고 명령하는 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2:21b이 밝히는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여기에 평행을 이루고 있는 2:23의 이유가 그 '큰 일'이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한글개역에는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2:23b)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번역은 흡족하지 않다. 욜2:23의 히브리 원문을 보면 한글개역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를 가리키는 접속사 '왜냐하면'이 생략되어 있다. 또한 '이른 비', '적당하게'라고 번역한 것은 '의(義)를 위한 교사(敎師)'(the Teacher for Righteousness) 또는 '의(義)의 교사(敎師)'로 번역해야 한다. 이스라엘이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이유가 무엇이겠으며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획기적인 사건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성육신하여 십자가 구속을 수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실 '의의 교사' 메시야의 오심을 가리킨다. 어떤 이는 한글개역이 '전과 같을 것이라'고 번역한 것도 '먼저'라고 번역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먼저 의의 교사를 보내주시고(23절)...그 후에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는 것(28절)"이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기는 하지만 다소 무리한 번역이다. 오히려 위의 세 번째 줄(23c)은 "그리고 그가 너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이전처럼 내려주실 것이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로 뒤에 이어지고 있는 24절의 내용과 의미상의 조화를 이룬다.
"[그 결과] 마당에는 밀이 가득할 것이고 또한 항아리들은 새 포도주와 기름으로 넘칠 것이다"(24절)
그 뿐만 아니라 위의 구절에 나타난 두 개의 동사 "... 가득할 것이고... 또한 넘칠 것이다"는 모두 완료형으로서 앞 구절의 동사 "그가 비를 내려주실 것이다"와 관련된 와우(Waw) 계속용법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문법적으로도 자연스럽다. 따라서 23c절은 앞의 23a, 23b절과 구분하여 24절에 귀속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메시야 예언 사실을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간과하고 있다. 요엘이 선포하는 여호와의 날, 그 날의 희망적 성격은 역시 구속주 메시야의 오심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구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날은 불확실한 미래의 일이었다. 오늘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날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already) 성취되었다. 그러나 종말적인 그리스도의 재림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not yet).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과 그 때를 그 누가 알 것인가? 재림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모른다고 직접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다만 그 날이 가까왔음을 알 수 있는 징조들을 알려주실 뿐이다(마24:3-31). 여기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날이 심판과 구원이라는 내용상의 이중성 뿐만 아니라 시간의 지평선 위에서도 성취하는 시점의 이중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의 부으심은 여호와의 날에 있을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2:28-29)이라는 예언은 '의의 교사'로서 오실 메시야 예언(2:23)과 더불어 요엘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그 후에'(28절)라는 용어는 앞서 무엇인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성령강림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에 이어지는 구속사의 흐름이라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와 같은 구도에서 '의로써 통치하실 메시야의 오심'(사32:1)과 '위에서부터 부어주실 성령'(사32:15)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이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성취한 것이라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구약의 성도들이 대망하던 종말론적 사건들이었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려니와"(2:30-31)
위의 구절에 대하여 후크마 박사는 문자적인 해석의 입장을 취하되 성령 부으심 이전 오랜 세월 속에 일어날 수많은 사건들을 하나의 환상을 통해 바라본 요엘 선지자의 예언적 전망(prophetic perspective)으로 조심스레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과 땅에 나타날 불길한 사건들의 암시는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발생할 종말론적 징조들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마24:29;눅21:25).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당시(행2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승천 이후의 성령시대(요16:7-15), 즉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부터 세상에 오셨다가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로부터(요16:28) 다시 오실 그 때(행1:11)까지의 역사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요엘을 통하여 밝히신 하나님의 구속사의 목표는 성령을 세계 만민에게 부어 주심으로써(28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32절)이라는데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혈통적 이스라엘을 뛰어 넘어 세계 만민에게 있으며 그들 중 자기 백성을 불러 구원하심으로써 건설하시려는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이다(요3:16;롬3:23-24;8:28-30;고전1:24). '과연 그 날이 언제일 것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여호와의 날의 종말론적 성격, 즉 알 수 없는 미래 먼 시점에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고 있다
심판의 날로서 임한 여호와의 날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비극의 날이었다(레26:33-39;신28:25-68). 선지자들의 절망적인 예언 속에서도 구원과 회복의 날로서의 여호와의 날도 선포되었다. 특히 이사야와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회복의 언약(레26:40-45;신30:1-10)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회복, 다시 말해서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의 본토 귀환을 선포하였다(사11:11;40-66;렘23:3;30:3,18-20;겔40-48). 특히, 예레미야는 70년이 차면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이 있을 것을 분명하게 선포하였고(렘25;11;29:10), 에스겔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내가 너희를 물로 정결케 할 것'이고 '새 영'과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내 신(영)을 너희 속에 두어 내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라'고 하여 그 날의 새로움을 말씀하셨다(겔36:22-31). 예루살렘을 떠나갔던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예루살렘 동편 문으로 돌아오는 환상과 새 예루살렘성의 문지방으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와 만물이 소성케 되는 환상은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을 잘 묘사해 준다(겔10:18-22;11:22-24;47-48).
장차 회복될 시온의 영광을 노래하는 사60-62장은 문자적인 의미와 더불어 묵시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에 가서 메아리치고 있다(계3:9;21:25-26). 특히 제 I의 출애굽 때 허락하셨던 '제사장 나라'(출19:5-6)로서의 특권과 사명이 여호와의 날의 심판으로 인하여 상실(호4:6)되었지만, 제 II의 출애굽이라 할 수 있는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즉 여호와의 날의 구원과 더불어 회복되리라(사61:6)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거룩한 제사장(벧전2:5,9)이라는 베드로의 메시지를 통하여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요엘은 여호와께서 자기 땅,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어(2:18)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라고 예언한다(2:27;3:17). 구약 언약의 핵심은 메시야를 통한 자기 백성의 구속, 즉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 함이니라"는 임마누엘 원리가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임마누엘의 결과는 무엇인가?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2:26)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의 피난처요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실 것이다(3;16). 그리고 그는 '영원히 시온에 거하실 것'이다(3:21).
과연 이와 같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기이하게(기적적으로) 대해 주신'(aylip]h'l] !k,M;[i hc;[;Arv,a})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찬송할 때는 언제 도래할 것인가? 요엘은 그 때를 여호사밧의 골짜기, 곧 판결골짜기에서 이스라엘 사면의 열국을 심판하시는 때라고 선포한다(3:1-2,12,14). 그렇다면 그 심판의 때는 언제일까? 요한계시록은 그 때를 그리스도의 최후 심판의 날로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모든 대적들이 다 멸망한 후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통치하시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다(계11:15).
이사야 선지자와 사도 베드로 그리고 사도 요한은 종말론적인 여호와의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을 선포(사65:17;66:22;벧후3:13;계21:1-4)하고 있다. 다른 선지자들의 메시지에서 이 용어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새 예루살렘에 관한 메시지 속에서 그 영광스러움을 엿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이 소개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장엄함과 화려함은 우주적 종말론의 클라이막스를 보는 것 같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결 언
구약의 종말론을 논할 때 다룰 수 있는 요소들은 매우 다양하다. 구약성경 자체가 처음부터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구약시대의 다양한 모든 계시들은 종말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약의 계시들은 언약사적 틀 속에서 점진적으로 확대되었고, 그 중심인 구속주 메시야는 다양하면서도 통일성 있게 예언되었다. 선민 이스라엘의 언약 수행여부에 따른 미래의 약속들은 심판과 구원 또는 징벌과 회복이라는 양대 축을 중심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이 곧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이었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의 언약파기 가능성과 여호와의 언약 파기 불가능성이라는 상반된 개념의 긴장 속에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약속들과 경고들은 '미래'라고 하는 시간의 지평선 위에서 성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미래는 '주의 날', '그 때', '마지막 날들'이라고 하는 모호한 용어로서 표현되었으나 이스라엘의 역사상 분명한 사건들, 예를 들면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 메시야의 오심과 오순절 성령 강림 등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양대 축 사이에 여호와의 날은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의 이중 좌표를 그리고 있다. 예를 들면 겔38-39장에 나타난 마곡 땅에 있는 곡에 대한 예언과 계20:7-10에 나타난 곡과 마곡의 언급은 악한 세력의 침략과 그에 대한 응전이라는 구도 속에서 '아직 아닌'(not yet) 시점에 좌표를 그려야 할 것이다.
종말론에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는 성경의 예언이든 비성경적 예측들이든 간에 과연 이루어질 것이냐, 이루어진다면 그 시기는 언제냐 하는 문제일 것이다. 비성경적 예측들이야 일고의 가치도 없지만 성경의 예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 심판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여호와의 날의 성취시점이 당시로서는 불확실하게 보였으나 '이미' 이루어진 부분들이 있는 것처럼, '아직 아닌' 부분들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만다는 사실이다. 단지 그날과 그 때가 징조로서만 예측 가능할 뿐 하나님 아니고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마24:3-44).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기쁘게 맞이해야 할 복된 날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먼 미래에 건설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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