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30, 2015

기독교인 완전 / 정용섭 목사

정말 입으로만 인정하는 인식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내 영혼과 맘을 다해서 존재론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만나고 그 안에서 자유롭고 싶습니다.

헌데 예수님 안에 붙어서 자라는 존재론적인 나무가 된다는 것도 성령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불가능함을 요즘 새삼 절감합니다. 물론 그 은혜에 대해 나의 지정의가 순종하며 반응해야 겠지만 내 신앙의 그릇으로는 온전히 담아내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새롭게 더 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감사합니다. 내 신앙이 위선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가짜가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주일설교)

/ 정용섭 목사 (2015-12-27)

골 3:12-17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믿음과 삶의 불일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곤란한 점은 믿음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당연히 나타나야 할 삶이 뒤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들끼리 사소한 것으로 다툴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서로 적개심을 품기도 하고, 심지어는 세속 법정에 고소고발 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이런 험악한 일들은 접어놓고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아도 믿음과 삶의 일치를 말하기 어렵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살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나만 문제가 있는 걸까요?믿음과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성격도 바뀌지 않고 언행이나 습관도 바뀌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가끔 예수 믿고 자기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간증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술과 담배와 도박을 끊었다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급하던 성격도 고쳐졌다고 합니다.그런 변화는 좋은 거지만 실제로 변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잠시 달라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엄격하게 말해서 믿음과 실제 삶은 완전하게 일치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믿음과 삶, 또는 인격이 일치하지 않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는 인물들이 모두 인격적이고 교양이 풍부하고 남에게 본이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개중에는 이상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에 부도덕한 사람들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야말로 인격적인 모범생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을 잘 받아들인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삶이나 인격과 차원을 달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과 그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 즉 총체적 인격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의 요약이라 할 십계명을 보십시오. 크게 두 대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말하고, 후반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신약의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약 2:17) 주장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믿음을 강조한 바울도 역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을 소홀하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바울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천착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다운 삶과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1) 교회 공동체에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윤리적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는 파괴됩니다. 교회 신자들끼리 다툰다고 가정해봅시다. 이게 진리 논쟁이 아니라면 대게는 감정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이럴 때 한쪽에서라도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참거나 관용을 베풀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2) 선교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은 중요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삶이 보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의 부도덕하고 비인격적인 삶으로 인해서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는 걸 크게 염려했습니다.

악덕과 덕목

바울은 오늘 제2 독서인 골로새서 3장에서도 기독교인이 버려야 악덕과 지켜야 할 덕목을 자세하게 언급했습니다. 각각 다섯 항목인데, 합하면 바울의 십계명이라 불릴 만합니다. 골로새 교회에 이런 윤리 도덕적인 문제들이 크게 불거진 것으로 보입니다.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당시 대다수 교회는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생활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로마 문명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 문명은 겉으로는 고상하고 세련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도덕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악덕 다섯 가지를 골 3:5절에 다음과 같이 짚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다섯 가지 단어가 아주 강렬합니다. 듣기만 해도 모멸감이 느껴질 정도로 기분 나쁜 단어들입니다.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파괴적이고, 향락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단어들은 당시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로마 시대에 귀족들은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걸 즐겨했습니다. 산해진미를 배부르게 먹고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따로 시설을 갖춘 방에 가서 먹은 걸 다 토한 후에 다시 식탁으로 와서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식탐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성매매 문제도 소란스러웠습니다. 요즘처럼 피임 기술이 없을 때였기 때문에 몸을 파는 여자들은 사생아를 낳는 일이 많았습니다. 신생아들이 로마 광장에 버려졌습니다. 포주들은 그 중에 여자 아이를 데려다가 키워서 창녀로 만들었습니다. 사창가를 자주 드나드는 남자들 중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이지만 자기 딸을 상대할 가능성도 열려 있었습니다. 로마 콜로세움에서 격투사의 피 흘리는 싸움을 보면서 귀족과 귀부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으로 얼룩졌다는 말이 과장된 게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2천 년 전 당시 로마 문명은 유달리 악하고 부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21세기 문명도 그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2천 년 후에 우리 후손들은 오늘의 우리를 바울이 열거한 것과 비슷한 단어로 평가할 겁니다. 테러와 반(反)테러로 인한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 입시 과열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 에너지 과소비로 인한 지구생태계의 위기 등등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 시설이 자기 마을로 들어오는 걸 주민들이 반대하는 일이 흔합니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게 그들의 논리입니다. 이런 행태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의 일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던 로마 문명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문명이나 본질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이방 문명권에서 살던 골로새 교인들을 가리켜 옛 사람이라 했고, 예수를 믿은 뒤의 그들을 가리켜 새 사람이라 말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이방 문명의 악덕을 버리고 새 사람답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 새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5절이 거론하는 다섯 개의 악덕과 대별하는 다섯 개의 덕목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입니다. 문장 형식도 5절과 비슷합니다. 두 문장이 똑같이 ‘그러므로’라는 부사로 시작됩니다. 5절의 ‘그러므로’는 기독교인들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12절의‘그러므로’는 기독교인들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악덕과 덕목을 똑같이 옷 입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악덕이라는 옷을 벗고, 덕목이라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몸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 본질에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본질도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요점은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즉 본질이 달라졌다면 당연히 삶의 태도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거되는 항목을 다시 보십시오.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입니다. 이런 항목은 반드시 기독교인들에게만 나타나야 하는 건 아닙니다. 바울은 당시 건전한 로마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덕들을 여기에 언급한 것입니다. 갈 5:22,23절에서도 바울은 소위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언급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골 3:12절의 항목과 겹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아무리 멋있어 보여도 ‘공자 왈’로 들립니다.그리고 과연 이게 가능하기나 할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천사처럼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갈라디아서나 골로새서가 말하는 이런 수준의 삶은 우리에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능하지 않은 차원의 삶을 강요받으면 내면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나는 왜 이런 수준밖에 되지 않나?’ 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분열증상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업적을 쌓아야 하나님에게 인정받는다는 율법주의 신앙이 불러오는 반(反)구원 현상입니다.

이런 문제는 종교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세상살이에서 성취해야 할 목표가 주어집니다. 그게 점수로 평가됩니다. 그 점수는 훗날 연봉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평생 쉼 없이 달리면서 점수를 높이다가 늙습니다. 부모의 점수가 부족하면 자식들에게서 그걸 보상받기 위해서 자식 교육에 매달립니다. 그게 삶이라고 확신하는 겁니다. 우리가 뉴스나 여론 등을 통해서 듣는 이야기가 다 이런 겁니다. 약간만 시각을 바꿔도 이게 삶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게 보입니다. 지난 성탄절 아침 천문학에 조예가 남다른 어떤 교우에게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지구에서 보는 태양의 크기와 비교해서 해왕성에서 보는 태양은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요?’ 시간이 짧아서 간단한 대답만 들었습니다. ‘지구에서 보는 거와는 다르게 보이지요. 지금 우리가 보는 별보다는 크겠지만요. 태양 빛이 너무 멀리서 오기 때문에 해왕성에는 낮과 밤이 없어요.’ 태양계만 놓고 보더라도 지구의 삶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한데, 우주 전체를 놓고 본다면 지금 우리가 점수에 목숨을 거는 삶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인 삶의 존재론적 토대

바울도 율법으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뚫어보았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격한 어조로 업적주의 신앙인 율법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삶의 태도를 다른 곳에서도 그렇고 오늘 본문 골 3:12절에서 분명하게 거론했습니다. 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걸까요? 성경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읽어야 합니다. 한 구절만 따로 떼어서 읽으면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12절에 나오는 다섯 개의 덕목은 그것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그것 자체를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덕목들은 헬라와 로마 스승들, 그리고 동양의 스승들도 다 말할만한 것들입니다.

5절과12절 문장의 특징이 ‘그러므로’라는 부사에 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옷을 벗듯이 벗어야 할 악덕 다섯 가지나, 옷을 입듯이 취해야 할 덕목 다섯 가지는 모두 ‘그러므로’에 달려 있는 겁니다. 어머니가 딸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시다. ‘너는 내 딸이야.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해.’ 여기서 딸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거짓말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까? 둘 다 똑같이 중요할까요? 이건 물론 선택 사안이 아닙니다. 둘 다 중요한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병렬로 놓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딸이라는 사실은 존재론적인 차원이라면, 거짓말 하지 않는 건 인식론적 차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바꾸면, 딸이라는 사실은 나무이고, 거짓말하지 않는 건 열매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좋은 나무가 되는 것, 즉 기독교인의 <존재론적 근원>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로마 문명권의 이방인으로서 살다가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기독교인다운 삶의 품성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그걸 긍휼, 자비 등등의 다섯 가지 항목으로 요약한 겁니다. 다섯 개가 아니라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아홉 개로, 또는 스무 개로 말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새 사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기독교인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삶은 이전과는 차원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달라진 그 차원이 뭘까요? 악덕을 벗어버리고 덕목을 입어야 한다는 진술의 출발점인 골 3:1-4절을 발췌해서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해왕성에서 태양이 어떻게 보일지를 상상하면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생명에 이미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생명은 지금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전체 시간과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분이기에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처럼 부활 생명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성될 마지막 때에 영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허황된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다만 실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게 실감되어야만 바울이 나열한 다섯 가지 덕목을 일상에서 추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러므로’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즉 그것을 알아야만, 거기에 의존해서만, 거기에 실제로 마음이 가야만 기독교인으로서 덕목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데 억지로 따라가면 병만 생깁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섯 덕목을 나열한 뒤에 골 3:14절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그 모든 덕목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고전 13장에서 바울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온갖 방언을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은사들이 무의미하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신비에 눈 뜨게 하고 거기에 매진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에 의존하는 기독교인의 삶이 바로 ‘완전’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 완전’은 도덕군자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사랑의 능력에 휩싸여 일상을 구도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일상을 예배처럼(골 3:16)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비밀한 방식으로 완전한 사람입니다.

Sunday, December 27, 2015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25) 독생자의 성육신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성경 교리를 살펴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면서 주님의 인격을 고찰하였다. 하지만 특별히 구속의 교리를 살펴볼 때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접할 때 첫 번째로 마주치는 것은 바로 이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의 교리이며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복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일반적인 진술을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새로운 인격이 발생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며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분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개념과 사고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보면 마귀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에 대해 사람들을 미혹시키는데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성육신의 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 성육신 교리의 요점

(1) 성육신(聖肉身)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는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기독교가 복되신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 좌우된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못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속의 교리 또한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성자의 인격을 논함으로 알게 된다.

(2)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삼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막연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내용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은 진정한 육체였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취하신 것은 단순한 겉모습이나 형태가 아닌 진정한 성육신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肉體)로 오셨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육체의 모양만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몸의 형체만 있을 뿐 허깨비 같은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실제 육체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4)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인간적 본성과 결합해 한 인간을 형성한 것이 단순한 신적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초대교회 이후 수 세기동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혼합되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분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셨다. 이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이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5) 성육신에 의해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요점은 성육신 교리는 성자의 인격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그런 개념을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겉모습에는 변화가 있었고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상태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분은 언제나 동일한 위격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도,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계실 때도 그분은 언제나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6) 성육신은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인상을 주도록 이 교리를 설명해선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라는 문구에서 우리는 ‘was made’라는 문구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믿게 만든다. 이것은 번역이 최선의 상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육신이 되어’(he becomes flesh) 또는 ‘그가 육신을 입어’(he took on flesh)로 번역되어야 한다. ‘made’ 즉 ‘만들다’라는 개념은 일종의 변화의 의미를 암시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것은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7) 성육신에서 성자는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 본성의 모양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구약 성경에는 천사들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기록이 있는데 이 천사들은 분명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육신이 아니라 그들의 모양을 이야기 한 것이다. 천사들의 본성이 변하거나 무엇인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모양만을 취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이런 방법으로 여러 차례 구약에 나타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즉 언약의 사자로 나타나셨다. 구약에서 언약의 사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한번 이상 여러 사람들에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를 ‘신의 현현’(顯現, theophany)이라고 한다. 신의 현현은 성육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의 현현은 잠시 동안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 2:14)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 7) 예수님이 영으로 오셨다거나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만 메시아가 그에게로 들어왔다가 십자가에서 다시 떠났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8) 성육신에서 성자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

성육신 교리는 우리 주님이 완전한 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본성의 일부가 아닌 완전한 사람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단순히 몸만 입으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성자가 단순히 몸만 입으셨다고 주장하거나 몸과 동물적인 혼만 성자가 취하시고 영은 영원하신 위격에 의해 공급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이단적 주장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자가 완전한 인성, 즉 영을 포함한 몸과 혼을 취하신 참된 사람이었다고 가르친다.

(9)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취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같은 인성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취하셨다. 이 말은 새로운 인성이 성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성의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새로운 인성이 창조되었다면 절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성육신 교리가 너무도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교리 즉 구원에 대한 교리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장에 분명하게 밝히듯 우리가 혈육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되셔야 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성육신 교리가 조금이라도 변질되는 것을 용인한다면 우리 자신의 구속에 대한 교리를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2. 동정녀(童貞女) 탄생

신비로운 성육신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바로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다룰 수밖에 없다. 교리를 공부하는 데 있어 그 순서도 매우 중요하다.

(1) 동정녀 탄생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최초의 위대한 신앙고백서인 ‘사도신경’을 보자.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신비로 가득 찬 위대한 주제와 만나게 된다. 이 교리에 접근할 때는 우리가 이전까지 배웠던 교리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을 확실히 하였다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성경, 계시, 하나님에 대한 교리, 삼위일체의 교리 등)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성경과 기적에 대한 교리에도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이성을 모든 진리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나의 작은 이성이 항상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의지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며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이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경에는 동정녀 탄생 교리의 기초가 되는 두 구절이 있다.

– 누가복음 1:26-38 : 동정녀 탄생이 마리아에게 고지되는 장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주목하자. 천사에 대한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벌써 어려움에 봉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놀랐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마리아는 놀라 주저 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놀란 마리아에게 천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 마태복음 1:18-25 : 동정녀 탄생이 요셉에게 고지되는 장면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놀랐다. 요셉은 선하고, 의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소문을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의 관계를 끊고자 하였으나 꿈속에 천사가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믿음에 대해 잊고 지나간다. 그는 아무런 반대나 망설임 없이 믿고 그대로 행동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다.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살펴볼 때 무엇보다 우리는 이 교리가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 교리는 무엇을 부정하는가? 이 교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에 남자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남자가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창세기 첫 부분의 교리들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남자에게 있고 여자는 그 남자의 아래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남자가 한쪽 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남자 는 이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 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타 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약속을 기억해보자. 그 약속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 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자, 이제 위의 창세기 3:15의 원복음의 은혜 언약 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남자 는 성육신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과 창조의 결과에 의해 특별히 타락의 결과로 인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성육신 사건에서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하나님은 오직 여자만 사용하셨다.

이 사실은 다시 한 번 타락이후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요셉을 통해 사람의 전적인 무능력과 실패가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위한 인성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가장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다. “주님의 신성에 어머니가 없었던 것처럼 주님의 인성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이 말은 매우 훌륭한 표현이다.

2) 동정녀 탄생은 성령님이 행하신 위대한 신비다.

누군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아무도 대답 못한다. 이것은 위대한 신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하셔서 마리아로부터 그녀의 세포 하나로부터 우리 주님의 인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내용들이 있다.
– 성육신은 성령님의 전적인 역사의 결과이다.
– 성령님은 성자가 취하신 인성이 죄가 없도록 하셨다.

“나실 바 거룩한[(죄가 없고 순결한) 이는”(눅 1:35) – 이것은 마리아가 죄 없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그녀의 일부분이라도 거룩하게 되었음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성령님은 마리아로부터 주님의 인성을 위해 무언가를 취하셨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셔서 모든 죄와 오염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다.

(3) 동정녀 탄생 교리의 의미

1) 성육신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분명한 모양이 되었다.

당신이 정말로 성육신의 교리를 믿는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피할 수 없다. 당신은 베들레헴 구유에 누운 아기가 정말로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것은 사실이다)이심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신비의 표적이다. 주님에 대한 모든 것이 신비하다. 주님의 탄생도 그러하고 세상을 떠나가신 일도 그러하며 부활하심도 그러하다. 동정녀 탄생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부활에 대해서도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2) 주님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죄 없는 인성을 입으셨다.

만일 당신이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가 만약 요셉의 아들이었다면 그도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직접적인 후손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라는 말씀이 적용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원죄와 죄책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위해 특별한 인성을 새로이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이단적 가르침이라 미리 말했다. 주님은 인성을 마리아를 통해 받으셨고 그의 인성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와 모든 오염에서 자유롭게 된 인성이었다.

우리는 그런 주님 앞에 서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경건의 비밀 앞에 서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행위 중 가장 최고의 행위였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으며 일찍이 일어났던 모든 일중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남자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성육신 사건은 우리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받기 위해 벌어진 일이란 것을 깨닫고 기억하자.(*) < 다음에 계속 >

< 참고 >

제22문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5문 :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으며 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제48문 :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 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아무 곳에도 갇히지 않고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을 초월함이 분명하며 그러나 동시에 인성 안에 거하고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Saturday, December 26, 2015

칭의와 성화에 대한 바른 이해 / 박영돈 교수

칭의와 성화'에 대한 바른 이해

 < 박영돈 목사,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따라서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종교개혁이 재정립한 칭의론의 부요한 함의와 풍성한 복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작금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전통적인 입장을 도외시함보다는 이를 바르게 깨닫고 전파해야 한다.”

 작금에 이르러 '칭의와 성화'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마치 한국교회의 문제가 전통적인 '칭의와 성화'의 구원론으로부터 발생한 것처럼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이와 관련해 ‘칭의와 성화’는 중대한 구원의 복음에 관한 것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1.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단계적으로 이어진다고 함으로써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주장에 대해

 이러한 주장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이며,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부요하고 치밀하며 성경적이다. 칼빈은 칭의론이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따 논 당상이라는 식으로 왜곡될 위험성을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따라서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이와 관련해 칼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하였다.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연합하여 병행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2. “우리 구원의 현재 단계를 의인됨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고,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칭의가 최후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주장에 대해

이런 논리에 따르면, 칭의는 실제 의롭게 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종말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까지 유보된 칭의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비록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연합해버린 중세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유사한 논리적인 맥락으로 회귀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렇게 칭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는 종교개혁 전에 신자들이 겪었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우리의 불완전한 성화에 따라 우리의 의인됨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만큼 거룩해졌는지 자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어느 정도라도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그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 루터가 겪었던 영적 고뇌였다. 만약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 생활한다면 교인들은 하루도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살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연합되어 있지만 날카롭게 구별되지 않으면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처럼 복음의 핵심이 심각하게 변질된다고 보았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 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의로움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로움,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리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의로움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영 단번에 내려진 은혜로운 법적 선언이다.

 우리는 이 칭의의 영원한 바탕 위에서만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반면에 이 칭의의 바탕을 떠나서 우리가 이룬 보잘 것 없는 거룩함을 의존해서는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영원한 칭의의 반석은 우리의 연약함과 성화의 부진으로 인해 결코 흔들릴 수 없고 변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로움으로 보완되고 강화될 수도 없다. 라일(J. C. Ryle)이 말했듯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우리보다 더 칭의되지 않았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을 생활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서만 감사와 확신과 자유함과 계속되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진정한 성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종말론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칭의를 기독론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도(already and not-yet)"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곧 칭의는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되었고, 종말론적으로 최종 확증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진 선언과 앞으로 내려질 선언의 근본 내용은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

 3. “칭의받은 신자들은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 성화는 실패를 통한 성화이다.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신자는 연약하여 수없이 쓰러진다. 그 때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영적인 회복의 바탕과 다이내믹이 바로 칭의의 은혜이다.

비록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가운데 살지라도 하루도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날은 없다. 그래서 성인은 다른 이들보다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더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보다는 칭의의 은혜만을 더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 칭의의 복음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아 애초부터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 그래서 결국 멸망할 자들에게는 악용될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 죄에 대해 예민해진 신앙 양심을 가짐으로 작은 죄에도 고통 받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신자들에게는 유일한 위로이며 피난처이다.

칭의론의 남용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 진리를 악용하는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사실 칭의의 복음이 망하는 자들에게나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되지만,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안식의 유일한 근원이며 경건의 바탕으로 순기능 하는 면이 훨씬 더 많다. 칭의론의 남용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참된 신자의 위로와 성화의 원동력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4. 전통적인 구원론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교회

결국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위로와 유익을 유실하게 된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구원뿐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영원불변한 사랑 가운데 진행된다는 구원의 선물적인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교리이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귀한 선진들의 통찰을 영적유산으로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강단에서조차 이러한 가르침과 동떨어진 값싼 은혜의 복음에 가까운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통의 틀에 갇혀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좋은 전통을 모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신앙의 선진들로부터 전수된 역사적 신앙의 진귀한 유산을 섭렵한 바탕위에서만 참된 진보가 가능하다.

 마치는 말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 정도가 매우 우려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잘 알고 있듯이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500년 개혁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때마다 교회가 부흥하고 건강하게 세워져갔다. 반면에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는 개혁주의 칭의론 때문이 아니라 이 교리가 바르게 전수되어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재정립한 칭의론의 부요한 함의와 풍성한 복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작금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전통적인 입장을 도외시함보다는 이를 바르게 깨닫고 전파해야 한다.

복음 사역자들은 여러 가지 신학적 도전 앞에서 개혁교회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의 복음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