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30, 2015

기독교인 완전 / 정용섭 목사

정말 입으로만 인정하는 인식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내 영혼과 맘을 다해서 존재론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만나고 그 안에서 자유롭고 싶습니다.

헌데 예수님 안에 붙어서 자라는 존재론적인 나무가 된다는 것도 성령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불가능함을 요즘 새삼 절감합니다. 물론 그 은혜에 대해 나의 지정의가 순종하며 반응해야 겠지만 내 신앙의 그릇으로는 온전히 담아내기가 힘드네요...

그래도 정용섭 목사님의 설교를 읽으면서 새롭게 더 하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감사합니다. 내 신앙이 위선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가짜가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하면서....

기독교인 완전 (골 3:12-17) (주일설교)

/ 정용섭 목사 (2015-12-27)

골 3:12-17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믿음과 삶의 불일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곤란한 점은 믿음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에게서 당연히 나타나야 할 삶이 뒤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들끼리 사소한 것으로 다툴 뿐만 아니라 때로는 서로 적개심을 품기도 하고, 심지어는 세속 법정에 고소고발 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이런 험악한 일들은 접어놓고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아도 믿음과 삶의 일치를 말하기 어렵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살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데 나만 문제가 있는 걸까요?믿음과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성격도 바뀌지 않고 언행이나 습관도 바뀌지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가끔 예수 믿고 자기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간증처럼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술과 담배와 도박을 끊었다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급하던 성격도 고쳐졌다고 합니다.그런 변화는 좋은 거지만 실제로 변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잠시 달라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엄격하게 말해서 믿음과 실제 삶은 완전하게 일치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믿음과 삶, 또는 인격이 일치하지 않으면 예수 믿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과 그 주변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르는 인물들이 모두 인격적이고 교양이 풍부하고 남에게 본이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개중에는 이상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에 부도덕한 사람들로 낙인찍혀 있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야말로 인격적인 모범생들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을 잘 받아들인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삶이나 인격과 차원을 달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과 그 윤리적 책임에 대해서, 즉 총체적 인격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의 요약이라 할 십계명을 보십시오. 크게 두 대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말하고, 후반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신약의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약 2:17) 주장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믿음을 강조한 바울도 역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을 소홀하게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바울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천착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인다운 삶과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입니다.
1) 교회 공동체에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는 윤리적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는 파괴됩니다. 교회 신자들끼리 다툰다고 가정해봅시다. 이게 진리 논쟁이 아니라면 대게는 감정적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이럴 때 한쪽에서라도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참거나 관용을 베풀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2) 선교적인 차원에서 기독교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은 중요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삶이 보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의 부도덕하고 비인격적인 삶으로 인해서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는 걸 크게 염려했습니다.

악덕과 덕목

바울은 오늘 제2 독서인 골로새서 3장에서도 기독교인이 버려야 악덕과 지켜야 할 덕목을 자세하게 언급했습니다. 각각 다섯 항목인데, 합하면 바울의 십계명이라 불릴 만합니다. 골로새 교회에 이런 윤리 도덕적인 문제들이 크게 불거진 것으로 보입니다.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당시 대다수 교회는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생활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당시는 로마 문명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로마 문명은 겉으로는 고상하고 세련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부도덕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악덕 다섯 가지를 골 3:5절에 다음과 같이 짚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다섯 가지 단어가 아주 강렬합니다. 듣기만 해도 모멸감이 느껴질 정도로 기분 나쁜 단어들입니다.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파괴적이고, 향락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단어들은 당시의 구체적인 삶의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로마 시대에 귀족들은 좋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걸 즐겨했습니다. 산해진미를 배부르게 먹고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따로 시설을 갖춘 방에 가서 먹은 걸 다 토한 후에 다시 식탁으로 와서 게걸스럽게 먹었습니다. 지금 우리 눈에 이상하게 보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식탐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성매매 문제도 소란스러웠습니다. 요즘처럼 피임 기술이 없을 때였기 때문에 몸을 파는 여자들은 사생아를 낳는 일이 많았습니다. 신생아들이 로마 광장에 버려졌습니다. 포주들은 그 중에 여자 아이를 데려다가 키워서 창녀로 만들었습니다. 사창가를 자주 드나드는 남자들 중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이지만 자기 딸을 상대할 가능성도 열려 있었습니다. 로마 콜로세움에서 격투사의 피 흘리는 싸움을 보면서 귀족과 귀부인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으로 얼룩졌다는 말이 과장된 게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2천 년 전 당시 로마 문명은 유달리 악하고 부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뭔가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21세기 문명도 그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2천 년 후에 우리 후손들은 오늘의 우리를 바울이 열거한 것과 비슷한 단어로 평가할 겁니다. 테러와 반(反)테러로 인한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 입시 과열로 인한 청소년들의 자살, 에너지 과소비로 인한 지구생태계의 위기 등등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 시설이 자기 마을로 들어오는 걸 주민들이 반대하는 일이 흔합니다. 집값이 떨어진다는 게 그들의 논리입니다. 이런 행태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정욕과 탐심의 일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던 로마 문명이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문명이나 본질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이방 문명권에서 살던 골로새 교인들을 가리켜 옛 사람이라 했고, 예수를 믿은 뒤의 그들을 가리켜 새 사람이라 말했습니다. 새 사람이 되었으면 이방 문명의 악덕을 버리고 새 사람답게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 새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5절이 거론하는 다섯 개의 악덕과 대별하는 다섯 개의 덕목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입니다. 문장 형식도 5절과 비슷합니다. 두 문장이 똑같이 ‘그러므로’라는 부사로 시작됩니다. 5절의 ‘그러므로’는 기독교인들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속했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12절의‘그러므로’는 기독교인들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악덕과 덕목을 똑같이 옷 입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악덕이라는 옷을 벗고, 덕목이라는 옷을 입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몸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 본질에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본질도 드러나게 됩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요점은 기독교인이 되었다면, 즉 본질이 달라졌다면 당연히 삶의 태도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거되는 항목을 다시 보십시오.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입니다. 이런 항목은 반드시 기독교인들에게만 나타나야 하는 건 아닙니다. 바울은 당시 건전한 로마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덕들을 여기에 언급한 것입니다. 갈 5:22,23절에서도 바울은 소위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언급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골 3:12절의 항목과 겹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단어들은 아무리 멋있어 보여도 ‘공자 왈’로 들립니다.그리고 과연 이게 가능하기나 할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천사처럼 완벽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갈라디아서나 골로새서가 말하는 이런 수준의 삶은 우리에게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능하지 않은 차원의 삶을 강요받으면 내면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나는 왜 이런 수준밖에 되지 않나?’ 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분열증상에 떨어집니다. 그것은 업적을 쌓아야 하나님에게 인정받는다는 율법주의 신앙이 불러오는 반(反)구원 현상입니다.

이런 문제는 종교생활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세상살이에서 성취해야 할 목표가 주어집니다. 그게 점수로 평가됩니다. 그 점수는 훗날 연봉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평생 쉼 없이 달리면서 점수를 높이다가 늙습니다. 부모의 점수가 부족하면 자식들에게서 그걸 보상받기 위해서 자식 교육에 매달립니다. 그게 삶이라고 확신하는 겁니다. 우리가 뉴스나 여론 등을 통해서 듣는 이야기가 다 이런 겁니다. 약간만 시각을 바꿔도 이게 삶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게 보입니다. 지난 성탄절 아침 천문학에 조예가 남다른 어떤 교우에게 제가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지구에서 보는 태양의 크기와 비교해서 해왕성에서 보는 태양은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요?’ 시간이 짧아서 간단한 대답만 들었습니다. ‘지구에서 보는 거와는 다르게 보이지요. 지금 우리가 보는 별보다는 크겠지만요. 태양 빛이 너무 멀리서 오기 때문에 해왕성에는 낮과 밤이 없어요.’ 태양계만 놓고 보더라도 지구의 삶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한데, 우주 전체를 놓고 본다면 지금 우리가 점수에 목숨을 거는 삶이 얼마나 작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기독교인 삶의 존재론적 토대

바울도 율법으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뚫어보았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격한 어조로 업적주의 신앙인 율법주의를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시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삶의 태도를 다른 곳에서도 그렇고 오늘 본문 골 3:12절에서 분명하게 거론했습니다. 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걸까요? 성경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읽어야 합니다. 한 구절만 따로 떼어서 읽으면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12절에 나오는 다섯 개의 덕목은 그것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바울이 그것 자체를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덕목들은 헬라와 로마 스승들, 그리고 동양의 스승들도 다 말할만한 것들입니다.

5절과12절 문장의 특징이 ‘그러므로’라는 부사에 있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옷을 벗듯이 벗어야 할 악덕 다섯 가지나, 옷을 입듯이 취해야 할 덕목 다섯 가지는 모두 ‘그러므로’에 달려 있는 겁니다. 어머니가 딸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시다. ‘너는 내 딸이야.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해.’ 여기서 딸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거짓말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까? 둘 다 똑같이 중요할까요? 이건 물론 선택 사안이 아닙니다. 둘 다 중요한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병렬로 놓고 볼 수는 없습니다. 딸이라는 사실은 존재론적인 차원이라면, 거짓말 하지 않는 건 인식론적 차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로 바꾸면, 딸이라는 사실은 나무이고, 거짓말하지 않는 건 열매입니다. 여기서 초점은 좋은 나무가 되는 것, 즉 기독교인의 <존재론적 근원>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로마 문명권의 이방인으로서 살다가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기독교인다운 삶의 품성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그걸 긍휼, 자비 등등의 다섯 가지 항목으로 요약한 겁니다. 다섯 개가 아니라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것처럼 아홉 개로, 또는 스무 개로 말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새 사람이 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기독교인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삶은 이전과는 차원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달라진 그 차원이 뭘까요? 악덕을 벗어버리고 덕목을 입어야 한다는 진술의 출발점인 골 3:1-4절을 발췌해서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해왕성에서 태양이 어떻게 보일지를 상상하면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부활의 생명에 이미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 생명은 지금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전체 시간과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는 분이기에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처럼 부활 생명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성될 마지막 때에 영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허황된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없을 겁니다. 다만 실감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게 실감되어야만 바울이 나열한 다섯 가지 덕목을 일상에서 추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러므로’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즉 그것을 알아야만, 거기에 의존해서만, 거기에 실제로 마음이 가야만 기독교인으로서 덕목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데 억지로 따라가면 병만 생깁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섯 덕목을 나열한 뒤에 골 3:14절에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이 그 모든 덕목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고전 13장에서 바울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온갖 방언을 할 줄 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런 은사들이 무의미하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를 생명의 신비에 눈 뜨게 하고 거기에 매진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 사랑에 의존하는 기독교인의 삶이 바로 ‘완전’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 완전’은 도덕군자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사랑의 능력에 휩싸여 일상을 구도적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일상을 예배처럼(골 3:16)살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여러분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비밀한 방식으로 완전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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