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19, 2015

성화 / 로이드 존스

성화 / 로이드 존스

새로운 본성을 소유하며, 다시 태어났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어 있으며, 의롭다고 선언되었으며, 그리고 한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이렇습니다만 우리의 죄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갑자기 완전하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삶 속에서는 여전히 죄의 문제가 있고 성화의 교리는 이것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다룹니다. 

성화에 관하여 매우 이야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성화가 무엇이냐에 대한 것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는가에 대한 매우 다양한 견해와 이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연구하여 교리의 진리에 대하여 가장 성경적인 이해가 무엇인지 그것에 도달하는 것은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항상 있는 과업입니다.

“물론 저렇고 저런 사람의 이론에 여러분은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그 사람이 군중을 모을 수 있고 그들을 그리스도에게 이끌 수만 있다면 그의 이론이 무엇이 중요합니까?”

 이런 종류의 사람은 실제로 진리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모든 사이비 종교에 문을 활짝 열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 여러분들에게 갑자기 제시될 때에 여러분 자신을 그 위험한 위치에 두는 것이며, 여러분은 아마도 그것을 믿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의 교리들을 알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왜 괴로워합니까?” 라는 식의 태도를 만약 우리가 취한다면, 그때는 필연적으로 위와 같은 결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성화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성화라는 말 속에 이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 두 가지가 바로 성화의 양면을 가리킨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라 버림이 있습니다. 또한 구분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화는 또한 빛남을 포함합니다. 신약을 여러분이 볼 때에 성화를 가리키는 그 다양한 모든 용어들의 주된 의미는 분리의 개념입니다.

 ▶ 성화의 두가지 주된 의미

성화에는 두 가지 주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그분을 섬김을 위한 구분입니다.

이것은 신구약에 있어서 성화의 위대한 의미입니다. 이 개념이 남녀뿐만 아니라 무생물들 에게까지 적용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구분하는 개념에는 이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속적이며 불결하고 부정한 모든 것으로부터(from)의 분리입니다. 이렇게 분리된 그릇들은 다시는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그것은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바로 성결케 된 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납된 것, 하나님께 드려진 것,하나님께 제공된 것을 의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고 중요한 구절인 고린도전서 6:11을 다시 봅시다. 우리의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서는 성화란 칭의 다음에 와야만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점을 볼 수 있을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씻어 주심을 받고,거룩하게 하여 주심을 받고,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성화란 칭의 이전에 오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히브리서 10:10에서 “이 뜻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을 오직 한 번 바치심으로써,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에게서 다른 예를 찾아봅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미리 아심을 따라 여러분을 택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의 피로 정결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벧전 1:2).

여기에서 다시 거룩케 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취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처분을 위하여 드리는 구분을 분명하게 뜻합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베드로전서 2:9에서도 여러분은 이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민족이요, 왕의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게 하려는 것입니다..”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히브리서 기자가 기록한 것처럼 십자가 위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서 단 한번 영원히 이미 거룩케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윤리적인 의미로 바로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구별되는 것이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make us holy)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구별된 것은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여기는 것(we are regarded as holy)입니다.

그러나 성화의 두 번째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가를 기록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 내부에서 생기는 정화와 청결을 위한 어떤 일로서, 우리가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며 또한 우리를 점점 영화롭게 하여 주님의 형상으로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석이 사람들이 성화라고 말할 때 일반적으로 염두에 두는 의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정의가 성화에 대한 좋은 정의가 될 것이라고 생각되어 제안합니다. 

성화란 /성령님의 은혜롭고 지속적인 작용으로서 그분이 죄의 오염으로부텨 의롭게 된 죄인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죄인의 전체 본성을 새롭게 하며 또한 그로 하여금 선한 일들을 행할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이 정의를 좀더 분명하게 해 봅시다. ’성령님의 은혜롭고 지속적인 작용으로서 그분이 죄의 오염으로부터 의롭게 된 죄인을 구원하며‘-여기에서 이미 죄인은 의롭게 된 자입니다.

’죄의 오염으로부터‘란 죄의 책임은 더 이상 그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칭의가 이미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권세와 오염에 대하여 좀더 관심을 갖습니다_’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죄인의 전체 본성을 새롭게 하며 또한 그로 하여금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한 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기 이전에 그들이 완전히 성화되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사람들에게 적용하실 때에 죄 가운데 있는 그들을 보시며 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입혀진(imputed)의입니다. 

▶ 세상도덕과 성화의 차이

성화는 우리의 중생과 칭의 다음에 죄의 문제를 진실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성화에 대한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그치기 전에 제가 다루어야 할 것 하나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화에 대하여 정의를 내릴때에 우리 자신의 도덕적상태와 조건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의 도덕적 상태와 조건의 용어들로 항상 조심스럽게 정의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을 수 있지만 그 말이 그들이 성화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성화란 용어는 항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다는 이런 개념과 함께 다루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성화란 도덕성과 순결함 안에 잇는 것 혹은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최고 수준의 도덕적인 인물일지라도 그와 성화되고 있는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 성화에 대한 3가지 견해

가장 먼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일종의 완전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어떤 유형 혹은 형태를 보여 주는 완전주의자들(perfectionists)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1) 첫 번째 그룹인 완전주의의 여러 학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죄가 완전히 근절된다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정원에 가서 잡초를 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여러분은 그 잡초의 머리만 자르는 것이 아니라 쇠스랑을 가지고 파서 그 뿌리와 함께 잡초 전체를 제거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우리는 능력의 삶이 주어진 어느 순간에 그렇게 완전하게 살게되며,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유명한 핀니(charles G. Finney)와 그의 위대한 동료인 메이헴(EZra Mayhem)의 가르침, 곧 미국에 있어서 소위 오벨린 학파(Obeline School)라고 하는 이들의 가르침이 그것입니다. 
존 웨슬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웨슬리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그리스도인이 어느 주어진 순간에 어느 알려진 죄를 의도적으로 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그들이 알지 못한 죄들은 범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알려진 죄를 의도적으로 범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완전을 조심스럽게 정의합니다.(우리는 그의 가르침이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성화를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마음이 죄로부터 전적으로 깨끗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완전주의자들의 한 특징은 성화란 어느 한순간에 받아야 하며 또한 받을 수 있는 무엇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성화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행하시는 그 무엇이며 우리가 할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며,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며 나아가 믿음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칭의를 받은 것처럼 여러분은 성화도 그처럼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완전하게 일어나는 경험입니다.

2) 두 번째 집단의 사람들은 소위 반작용의 원칙(the principle of counter-action)이라고 일컫는 방법에 의해서 성화된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들은 매우 분명한데, 죄의 근절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좌절속에서 싸움의 일생만 보낸다는 말입니까? 그들에 의하면 그렇지는 않고 새로운 한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8:2 그들은 ‘그렇습니다. 죄는 신자에게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러나 만약 그가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그는 믿음으로 그분 안에 거하며 그분을 의지하여, 그리스도께서 죄로부터 그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안에 죄의 권세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권세가 그것을 저항하고 이길 수 있게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반작용이 유입디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예들을 사용합니다.

이 학파의 가르침에 있어서 성화는 이렇게 간주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여러분은 붉고 뜨거우며 휘어질 수 있는 것처럼 되며 이때 여러분은 죄로부터 자유롭습니다.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이전의 상태와는 전혀 반대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조건 혹은 특별한 죄가 어찌하든지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단지 죄를 고백하는 것이며 그것을 아는 것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하며 그분안에 거하며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을 의지해야만 하며,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를 승리하도록 지키실 것입니다. 완전주의자들처럼 이제 이 가르침은 이제 다시 이런 것은 한 경험으로 정상적으로 시작하여 한 과정으로 계속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화란 받는 그 무엇이며 그리고 한순간에 받을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경험에 머무르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3) 세 번째이며 마지막 가르침에 의하면, 성화란 우리가 중생하는 그 순간에 시작하여 우리의 전 생애 동안 점진적으로 계속되며 죽음 다음에야 비로소 완전케 되는 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와 이전의 견해들과의 큰 차이점은 성화란 칭의에 이어서 받는 한 경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우리의 중생의 순간부터 성화가 시작되며 그것이 계속되어 오직 우리의 몸이 부패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히 영화될 때에만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성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8:23에서 모든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말할 때에 “그뿐만이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몸이 마지막으로 구속될 때에만 우리의 성화는 완성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강력하게 읽기를 권하는 한 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라일 주교(Bishop Ryle)의 『거룩』(Holiness)입니다. 이것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한 다양한 다른 개념들과 이론들을 다루는 데 대부분 할애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뿐만 아니라 구약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첫 번째 위대한 원칙은 성화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4:3에서 이 위대한 진술을 우리는 명백하게 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이것이 바로 출발점이며 근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성화입니다.그분께서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갈 4:4)때의 목적도 여전히 우리의 성화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셧을 때 그 목적은 우리의 완전함이었으며, 성령님을 주신 목적도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셨고 우리의 구원 역시 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성화입니다.

요한복음 17:17안에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진실로 그분께서는 19절에서 계속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여기서 주님께서 ‘내 자신을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저는 제 자신을 아버지의 처분에 맡깁니다;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하라고 주신 이 마지막 일을 위하여 제 자신을 분리시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가 성화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이것을 하십니다. 성화가 바로 모든 것 뒤에 있는 목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다시 이처럼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4).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목적입니다. 이것 이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 성화는 구원의 목적

두 번째 부분을 잃어버리고 제가 한 순간에 여러분에게 보여 드릴 것처럼, 십자가위에서 죽으심은 단지 용서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단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붙잡아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성화란 구원의 전 과정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안에서의 바울의 위대한 진술을 봅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바울은 이런 구원의 전 고정이 하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남녀 속에서 이 일을시작하실 때 그 모든 일은 이미 완성되었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칭의로부터 곧장 성화로 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리를 뜻하는 그런 구분들을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나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양자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에, 그리스도의 모든 유익은 바로 여러분의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그분과 함께 죽었고,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으며, 그리고 그분과 함게 하늘 보좌에 이미 앉아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의로움으로만이 아니라 성화와 구속으로 주어졌습니다.

▶ 바른 죄용서는 반드시 성화와 관련된다.

사람들은 죄 용서만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그 정당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왜 그들이 죄용서만을 추구합니까? 왜 누구나 그것을 원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있습니다.물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죄 용서를 추구할 때 단지 위로의 감정만을 추구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참된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용서를 추구한다는 것은 반드시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무엇과 하나님의 법의 거룩함을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죄인으로 이미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과 분리시켜 왔던 이 죄를 미워해야만 합니다.그러므로 그들이 참된 죄 용서를 추구하고 있다면, 자신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하나님께 범죄하도록 했던 것, 그리고 자신들을 위험한 위치에 빠지도록 했던 것으로부터 구원받을 것을 갈망해야만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죄용서’라는 단어 속에서 저는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참으로 여러분이 죄 용서를 생각한다면, 여러분 자신이 지옥에 합당한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죄됨을 보는 그 순간 그것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하는 그 순간, 나아가 하나님게 가까이 가서 하나님을 즐기기를 원하는 그 순간 그 자체가 바로 성화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구분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용서에서만 멈추는 복음주의는 성경적인 복음주의가 아닌데, 그이유는 죄의 본질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화해를 참되게 선포한다면, 그것과 함께 반드시 성화를 선포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만 될 기본적인 개념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값으로 사신 주님께 속해 있다는 점입니다.이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는 성화를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는 언어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 “너희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20). 성화를 전파함에 있어서 사도는 단순히 성령님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항상 동시에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성화를 전파함에 있어서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차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받을 그 은혜를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여러분이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가 되었으니, 전에 알지 못할 때에 가졌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벧전1: 13-14). 순종이 바로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의 관계를 결정합니다.“여러분을 불러 주신 그 거룩한 분을 따라 모든 행실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벧전 1:15-1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며,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될 유일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된 삶을 살 권리가 없습니다. 
구원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입니다.따라서 거기에는 어떤 틈이나 간격도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며 그분 자신에 의해서 계속되고 완성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중생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합되는 그 순간 성화의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성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그 순간 죄로부터 우리를 구분시키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태어나 성령을 받은 그 순간 우리를 구분시키는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저는 제 안에서 이미 시작된 성화의 과정이 없이는 중생될 수 없습니다. 육과 영 사이의 갈등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것은 바로 모든 부분과 모든 발걸음에서 저를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분리시키려는 싸움입니다.

▶ 성화는 하나님의 사역

중생에 있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칭의에 있어서 또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칭의는 우리를 바르고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 동일한 것이 우리의 양자 됨에서도 적용됩니다.우리의 양자 됨에 있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언이며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회개와 믿음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이런 것들이 비록 성령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우리 편에서도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기원적인 역사하심이 없이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의 시작든 바로 그분에 의한 것입니다.그러나 우리는 그 믿음을 표현해야만 합니다.그리고 이것은 성화에 있어서도 완전히 동일합니다. 
빌2:12-13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대로,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을 염원하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화란 무엇보다도 바로 우리 안에서, 주로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고 성령님에 의한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점을 참으로 강조해야 합니다. 성화란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의도이며, 하나님의 목표이며, 그분께서 자신을 향하여 구분해 두셨던 자들 속에서 행하시는 그 무엇입니다. 이것이 발생하기 위하여 우리의 주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피에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자들에게 이것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습니다.

▶ 칭의와 성화의 중요한 차이점

칭의에 있어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를 하도록 부르십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바로 성화의 전체 교리의 핵심입니다.

▶ 두 극단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두 극단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일단 중생하면 하나님의 행위가 그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셔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하지 않고 단지 그 새로운 본성만을 경험하며, 그리고 그들은 단지 성경을 일고 그것을 이해하며 적용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만을 수동적으로 바라보며 그분안에 거하기만 할 뿐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그 외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성경의 증언

성경 자체는 성화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 자신의 구원을 애써서 성취하라”.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어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에서 일하시며, 우리의 의지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일하시며, 그 행동들을 가능케 하십니다. “우리 안에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시 하시는 분”이시만, 그러나 그 의지 그리고 그 행동을 우리는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롬6:11).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여기는 것”은 어느 누구도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이 행동을 만족시켜야만 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런 인식으로 이끌어 가시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 인식을 하도록 권면을 받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요구된 성화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들을 들어야 합니다.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12절).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 안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주신 권면입니다. 바울은 또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13절). 우리는 우리 몸의 지체를 드려야만 합니다. 즉, 적극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다시 말합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절). 우리는 몸의 행실들을 죽여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합니다. 성령님이 없이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금욕주의와 모든 도덕주의의 잘못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므로, 우리 안에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함께 그리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는 육체의 행실들을 죽여야만 합니다.

 골로세서 3:5절에서 바울이 말한 것을 다시 들어봅시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해야만 합니다. 또 다른 구절들이 있습니다. “굳세게 서라”(고전16:15),“싸워라”(딤전6:12)- 바울은 우리에게 싸우라고까지 권면합니다. 이것은 매우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또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2:22)- 바울은 디모데에게 피하라고 말하지 구원받기를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디모데는 무엇인가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 전서 6:11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 디모데는 그것을 추구하고 힘써야만 합니다.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구절은 바로 고린도 후서 7:1절이라고 저는 자주 생각합니다. “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 정리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가르치는데 그 이유는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일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신다는 점과 그리고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가 일하는 방법들이라고 명백하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할 수 있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며, 이해하는 것이며, 적용하는 것이며, 극복하는 것이며, 청결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위대한 균형은 주도적으로,원인적으로, 생명적으로, 아주 중요하게 성화란 바로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점입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들”로서, “진실로 사랑받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거룩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며, 그리고 구속에 있어서 그분의 모든 목적은 우리가 그분의 자녀로서 진실로 그 이름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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