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성경 교리를 살펴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면서 주님의 인격을 고찰하였다. 하지만 특별히 구속의 교리를 살펴볼 때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접할 때 첫 번째로 마주치는 것은 바로 이 성육신(聖肉身, incarnation)의 교리이며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복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스스로 인간의 본성을 지니셨다는 일반적인 진술을 했다. 이 말의 의미는 새로운 인격이 발생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며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하셨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운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분에 대한 정확하고 분명한 개념과 사고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신약성경과 교회사를 보면 마귀의 주된 관심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에 대해 사람들을 미혹시키는데 최고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성육신의 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1. 성육신 교리의 요점
(1) 성육신(聖肉身) 교리는 삼위일체의 교리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는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체 기독교가 복되신 삼위일체 교리에 의해 좌우된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못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구속의 교리 또한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성자의 인격을 논함으로 알게 된다.
(2)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삼위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성경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막연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말하고 우리가 말하는 내용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취하신 것은 진정한 육체였다.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취하신 것은 단순한 겉모습이나 형태가 아닌 진정한 성육신이었다. 예수님은 실제로 육체(肉體)로 오셨다. 영지주의 이단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육체의 모양만 가졌다고 주장하였다. 몸의 형체만 있을 뿐 허깨비 같은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실제 육체로 오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신 것이다.
(4)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성육신에 의해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인간적 본성과 결합해 한 인간을 형성한 것이 단순한 신적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을 초대교회 이후 수 세기동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성과 인성이 결합해 혼합되고 새로운 인격을 형성한 존재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분은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셨다. 이 교리가 가르치는 바는 이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5) 성육신에 의해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요점은 성육신 교리는 성자의 인격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가르치지도, 그런 개념을 포함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겉모습에는 변화가 있었고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상태에는 변화가 있었으나 성자의 인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분은 언제나 동일한 위격이시다.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서도, 힘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워계실 때도 그분은 언제나 성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시다.
(6) 성육신은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우리는 성자가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인상을 주도록 이 교리를 설명해선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the word was made flesh, and dwelt among us)라는 문구에서 우리는 ‘was made’라는 문구가 종종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변화했다고 믿게 만든다. 이것은 번역이 최선의 상태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가 육신이 되어’(he becomes flesh) 또는 ‘그가 육신을 입어’(he took on flesh)로 번역되어야 한다. ‘made’ 즉 ‘만들다’라는 개념은 일종의 변화의 의미를 암시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것은 영원하신 두 번째 위격이시다. 이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7) 성육신에서 성자는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인간 본성의 모양만 취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 구약 성경에는 천사들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나타난 기록이 있는데 이 천사들은 분명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천사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말할 때 우리는 성육신이 아니라 그들의 모양을 이야기 한 것이다. 천사들의 본성이 변하거나 무엇인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단지 모양만을 취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이런 방법으로 여러 차례 구약에 나타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즉 언약의 사자로 나타나셨다. 구약에서 언약의 사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한번 이상 여러 사람들에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셨는데 이를 ‘신의 현현’(顯現, theophany)이라고 한다. 신의 현현은 성육신과는 완전히 다르다. 신의 현현은 잠시 동안만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육신 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양이 아닌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며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히 2:14)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요이 7) 예수님이 영으로 오셨다거나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실 때만 메시아가 그에게로 들어왔다가 십자가에서 다시 떠났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다. 이런 주장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8) 성육신에서 성자는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
성육신 교리는 우리 주님이 완전한 인성을 입으셨다고 주장한다. 본성의 일부가 아닌 완전한 사람의 본성을 입으신 것이다. 단순히 몸만 입으신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성자가 단순히 몸만 입으셨다고 주장하거나 몸과 동물적인 혼만 성자가 취하시고 영은 영원하신 위격에 의해 공급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이단적 주장이다. 성육신 교리는 성자가 완전한 인성, 즉 영을 포함한 몸과 혼을 취하신 참된 사람이었다고 가르친다.
(9)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취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같은 인성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취하셨다. 이 말은 새로운 인성이 성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인성의 창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새로운 인성이 창조되었다면 절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
이처럼 성육신 교리가 너무도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교리 즉 구원에 대한 교리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인성을 입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2장에 분명하게 밝히듯 우리가 혈육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와 같이 되셔야 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성육신 교리가 조금이라도 변질되는 것을 용인한다면 우리 자신의 구속에 대한 교리를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2. 동정녀(童貞女) 탄생
신비로운 성육신의 교리가 사실이라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바로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다룰 수밖에 없다. 교리를 공부하는 데 있어 그 순서도 매우 중요하다.
(1) 동정녀 탄생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최초의 위대한 신앙고백서인 ‘사도신경’을 보자.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여기서 다시 한 번 신비로 가득 찬 위대한 주제와 만나게 된다. 이 교리에 접근할 때는 우리가 이전까지 배웠던 교리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을 확실히 하였다면 우리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성경, 계시, 하나님에 대한 교리, 삼위일체의 교리 등)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성경과 기적에 대한 교리에도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이 어려움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이성을 모든 진리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나의 작은 이성이 항상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의지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며 말씀을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교리를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자세이다.
(2)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성경에는 동정녀 탄생 교리의 기초가 되는 두 구절이 있다.
– 누가복음 1:26-38 : 동정녀 탄생이 마리아에게 고지되는 장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주목하자. 천사에 대한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벌써 어려움에 봉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의 교리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리아가 놀랐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에 대해 마리아는 놀라 주저 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놀란 마리아에게 천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 마태복음 1:18-25 : 동정녀 탄생이 요셉에게 고지되는 장면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처녀가 아이를 가진 것을 알고 놀랐다. 요셉은 선하고, 의롭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소문을 내지 않고 조용히 그녀와의 관계를 끊고자 하였으나 꿈속에 천사가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 우리는 요셉의 놀라운 믿음에 대해 잊고 지나간다. 그는 아무런 반대나 망설임 없이 믿고 그대로 행동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다.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살펴볼 때 무엇보다 우리는 이 교리가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이 교리는 무엇을 부정하는가? 이 교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에 남자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남자가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창세기 첫 부분의 교리들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남자에게 있고 여자는 그 남자의 아래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데 남자가 한쪽 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남자 는 이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 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타 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약속을 기억해보자. 그 약속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 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자, 이제 위의 창세기 3:15의 원복음의 은혜 언약 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남자 는 성육신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과 창조의 결과에 의해 특별히 타락의 결과로 인해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성육신 사건에서 한쪽으로 완전히 밀려났다. 하나님은 오직 여자만 사용하셨다.
이 사실은 다시 한 번 타락이후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요셉을 통해 사람의 전적인 무능력과 실패가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위한 인성을 만들어 내시기 위해 가장 연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다. “주님의 신성에 어머니가 없었던 것처럼 주님의 인성에는 아버지가 없었다.” 이 말은 매우 훌륭한 표현이다.
2) 동정녀 탄생은 성령님이 행하신 위대한 신비다.
누군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없다. 아무도 대답 못한다. 이것은 위대한 신비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에게 임하셔서 마리아로부터 그녀의 세포 하나로부터 우리 주님의 인성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말해야만 하는 내용들이 있다.
– 성육신은 성령님의 전적인 역사의 결과이다.
– 성령님은 성자가 취하신 인성이 죄가 없도록 하셨다.
“나실 바 거룩한[(죄가 없고 순결한) 이는”(눅 1:35) – 이것은 마리아가 죄 없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그녀의 일부분이라도 거룩하게 되었음을 암시하지도 않는다. 성령님은 마리아로부터 주님의 인성을 위해 무언가를 취하셨고, 그것을 정결하게 하셔서 모든 죄와 오염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의미다.
(3) 동정녀 탄생 교리의 의미
1) 성육신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분명한 모양이 되었다.
당신이 정말로 성육신의 교리를 믿는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피할 수 없다. 당신은 베들레헴 구유에 누운 아기가 정말로 영원하신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것은 사실이다)이심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신비의 표적이다. 주님에 대한 모든 것이 신비하다. 주님의 탄생도 그러하고 세상을 떠나가신 일도 그러하며 부활하심도 그러하다. 동정녀 탄생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부활에 대해서도 걸려 넘어지게 될 것이다.
2) 주님은 동정녀 탄생을 통해 죄 없는 인성을 입으셨다.
만일 당신이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어떻게 믿겠는가? 그가 만약 요셉의 아들이었다면 그도 역시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아담의 직접적인 후손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고전 15:22)라는 말씀이 적용되는 존재였을 것이다. 따라서 아담의 원죄와 죄책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우리 주님을 위해 특별한 인성을 새로이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이단적 가르침이라 미리 말했다. 주님은 인성을 마리아를 통해 받으셨고 그의 인성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와 모든 오염에서 자유롭게 된 인성이었다.
우리는 그런 주님 앞에 서있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경건의 비밀 앞에 서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행위 중 가장 최고의 행위였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할 수 있으며 일찍이 일어났던 모든 일중 가장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남자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요셉은 이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성육신 사건은 우리 죄가 사함을 받고 구원받기 위해 벌어진 일이란 것을 깨닫고 기억하자.(*) < 다음에 계속 >
< 참고 >
제22문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습니까?
답 :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을 취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습니다. 또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5문 :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으며 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 : 하나님의 영원한 아드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여전히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성령의 사역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또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고 모든 일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십니다.
제48문 :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마다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 라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나뉜다는 것입니까?
답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아무 곳에도 갇히지 않고 어디나 계십니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가 취하신 인성을 초월함이 분명하며 그러나 동시에 인성 안에 거하고 인격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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