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도 구원이다
/ 서울신대 김성원교수(기독교사상,2010.4)
“21세기 신학 포인트”를 연재하면서 시대는 날로 각박하고 타락해 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악한 시대를 캔버스로 삼아 새로운 진리를 그려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21세기에 교회는 어디로 가야할까, 교회를 섬기는 미력한 신학자인 제게 주신 지면을 통해 찾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찍은 좌표는 다섯입니다.
첫째 좌표는 공동체적 삼위일체론입니다. 공동체를 목말라하고, 진정한 교제를 요청하는 이 모래알같은 시대에 하나님의 공동체 되심이 길을 열어줍니다.
둘째 좌표는 인간의 영적 본질입니다. 종교개혁신학의 인간본성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와 오늘날의 낙관적인 인간관이 강단에서조차 충돌하는 이 시대에, 인간의 중층적인 구조를 밝혀주는 삼분설적 인간관은 그 해결의 길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셋째 좌표는 성경해석학의 새로운 길로서 저자의 해석학을 다루었습니다. 객관적 해석학이 포기되어지는 이 시대에도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해석되고 선포될 수 있는 길을 우리는 성경의 제 1 저자이신 성령님에게서 발견합니다.
넷째 좌표는 진리 인식에 관한 5변형의 방법론입니다. 각각의 인식론들이 한계를 드러내는 이 시대에 우리는 성경, 이성, 경험, 전통의 균형적 종합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이러한 인식 과정 전체가 근대인식론의 한계인 주체 중심이 아니라 계시종교의 원칙을 따라 성령님의 조명을 의지하는 다섯 번째 방법을 포함하는 5변형의 방법론을 발견합니다.
다섯 번째 좌표는 기독교 영성의 두 길입니다. 영성의 춘추전국시대인 이 시대이지만 개신교 복음주의가 걸어야 할 영성의 길은 두 갈래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옛사람을 죽이는 한 길이며, 또한 주님께서 주신 새사람을 살리고 키워나가는 길입니다. 이 죽이고 살리는 두 길은 거듭남 속에서 시작되는 길이며 우리 안에서 늘 동시적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치우침 없이 이 둘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죽일 것은 죽이고 살릴 것은 살리는 영성의 원리 위에서 모든 영성의 각론들이 용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섯째 좌표는 교회 리더십의 세 가지 성경적 원리에 관한 것입니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리더들의 도덕적 실패로 인해서 리더십의 위기로 들어가는 한국교회는 이제 신본주의와 영적질서, 그리고 세우는 리더십의 성경적 원리를 의지할 때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번 글에서 저는 거룩한 삶을 말하고자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있지만 아무도 진심으로 강조하지 않는 계륵과 같은 것이 오늘날 거룩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을 찾아보고, 그것의 중요성을 짚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스님의 입적을 보는 열등감
어느 스님이 이승을 버리고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평소에 무소유(無所有)를 가르치시고 또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삶을 사시다가, 이제 자신의 평소 가르침대로 아무 것도 남겨놓지 않고 가셨다”고 언론은 전하고 있습니다. 운전하면서 라디오를 틀어보니 그분의 글 구절이 낭송되고 있었습니다. 잠시 듣다가 뉴스를 듣고 싶어 다른 라디오 채널로 돌렸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그분의 이야기, 그분의 말씀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졌습니다. 불편함… 제가 불편함을 느낀 한 가지 이유는, 타 종교인이 이처럼 모범적인 삶을 살았구나 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입니다. 그것은 치열한 구도자의 삶을 볼 때마다 제가 느껴온 열등감같은 것입니다. 장삼 하나, 소탁자 하나, 경전 몇 권만이 놓여 있는 선방(禪房)의 사진을 볼 때 저는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가끔 여행지에 가서 절에 들를 때, “새벽 예불은 3시입니다” 이런 글을 볼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옛날 설악산으로 신혼여행 갔을 때, 낙산사에 들러 그 망망한 바다 위 깎아지른 벼랑에서 선 암자를 보며 느꼈던 그 열등감입니다.
제가 불편하게 느낀 것은 또한 그것이 전부가 아닌데 하는 복음주의적 우려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인이 보여준 길… 그 아름다운 인생의 길이 참된 영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삶을 배울 지언정, 그분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기독교의 굴욕
위대한 구도자들 앞에서 제가 느끼는 이 도덕적 열등감, 사람들이 타종교를 칭송할 때 느끼는 이 상대적 굴욕감이 못난 저만의 문제이기를 저는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제가 느끼는 그런 감정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교회가 가진 그 영원한 약속과 확신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오늘날 교회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보여주는 실망스러운 모습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비판합니다. 핍박받았던 교회가 이제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 비판과 비난들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새벽을 깨워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밤을 지키며 북한과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수입을 쪼개어 선뜻 교회와 이웃들에게 나누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 저는 전철에서 찬불가(讚佛歌)를 틀어놓고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구걸하는 그분들이 틀어놓는 것은 늘 찬송가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교회가 없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상상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도덕적 타락, 영적 공백 그리고 정신적 공황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인정하는 것보다 교회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드높은 위상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는 느낌을 저는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내가 타종교보다 낫고,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식의 비교우위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 나누었으며 (행 2:45), 사소한 거짓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진실한 공동체였습니다.(행 5:1-5) 그 결과 온 백성들은 교회를 칭송하였으며,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려고 줄을 섰고(행 2:47),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를 두렵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칭송하였습니다.(행 5:13)
교회가 성스러운 삶을 가르치지 못하는 현실
이상한 것은 이러한 교회의 높은 도덕적 표준들을 오늘 교회가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성스러운 삶에 대한 헌신을 신학적 특징으로 하는 성결교회에서 자라났고, 그 속에 계시는 여러 지도자들을 만나 보았지만, 삶의 높은 도덕적 표준에 대해 가르치고 강조하는 분들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또 저는 미국에서 감리교단 소속 신학교를 다녔고 미국 감리교회에서 섬기기도 하면서 감리교 분들을 많이 만났지만, 역시 교회의 드높은 위상과 성스러운 삶을 확신으로 추구하는 분들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삶, 높은 도덕적 표준을 교회와 목회의 걸림돌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안모이는 법이지 (너무 성화를 강조하면 성도들이 못따라오지)” 그분들이 애정을 가지고 주시는 이러한 현실적 조언을 들을 때마다 저는 가슴의 답답함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털어서 먼지 나오는 교회 지도자들
한국교회가 높은 도덕적 표준을 가르치고 강조하지 못하는 이유로 저는 지도자들의 도덕적 한계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남들에게 확신으로 가르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물론, 설교자가 자신의 경험의 한계 내에서만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것이라도 말씀이 가르치는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옳은 설교자의 모습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서 이뤄지지 못하는 말씀은 약하고 공허한 것입니다. 설교자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메시지를 피하게 됩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설교자에게 깊은 고뇌와 아픔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욕심부리는 마음을 품고 욕심을 버리라고 설교하는 것, 간음하는 마음을 품고 간음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 앞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로써 많은 리더들의 설교에서 거룩함은 빠져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격하시킨 거룩의 교리
한국교회가 높은 도덕적 표준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의 배후에 더 깊은 신학적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종교개혁 신학의 한계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16세기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엄청난 타락과 부패에 대한 개혁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운동의 신학적 원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에 대한 고백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낙관적 견해를 정면으로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의 도덕적 능력과 책임에 대한 로마교회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가톨릭이 선행(Good Works)을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한 잘못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우리가 선한 일을 아니할지라도,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주신다는 로마서 4장 5절의 진리를 강조했습니다. 선한 행위의 필연성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개혁자 루터는 지푸라기와 같은 것으로 몰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 신학 속에서 선행은 구원에 관한 본질적인 관심에서 제외되었고, 믿음의 한 덕목으로, 또 믿음의 하나의 결과로 격하되었으며, 윤리학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종교개혁자들이 거룩한 삶과 선행에 대하여 게을렀다거나 무지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루터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율법적 행위와 훈련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믿음을 통해 이미 구원받았을지라도,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율법적으로 훈련받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칼빈도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시, 성시(聖市)화 하기 위해서 성도들과 시민들의 삶과 윤리의 문제와 집요하게 씨름하고 관여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은 행위의 가치를 구원론에서가 아니라 그 이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차원들이 구원론과 무관한 것으로 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칼빈의 신학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행위의 문제가 구원의 확신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다시금 주목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개혁주의에서 구원이란 하나님의 선택(election)에 의해 택함 받은 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선택하심의 은혜는 성도의 삶의 모습, 즉 선행 가운데서 확인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구원의 하나의 표현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교회와 성도들은 선행을 본질적으로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구원역사라고하는 대 전제 위에서 부차적으로 다뤄지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 신학에서 선행의 자리는 여전히 참으로 좁으며, 2차적인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보면, 인간의 행위와 윤리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이러한 소극적, 부정적 태도는 믿음의 절대적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참으로, 어떠한 선한 삶도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 한번, 그리고 영원히 드러내신 복음, 바울이 전한 구원의 도리였던 것입니다.
종교개혁 신앙의 부작용?
그러나, 로마 가톨릭과의 싸움 속에서 형성된 이러한 개혁자들의 인식은 한 가지 후유증을 남겼는데, 그것은 선행과 거룩한 삶에 대한 지나치게 부정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은 변증법을 피할 수 없다고 할까요? 우리 인간은 중(中)을 잡는 법이 없고, 언제나 무엇의 반대자로서 치우치는 것이 늘 있는 일입니다. 그 결과로, 개신교는 영원한 세계를 붙잡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땅에서의 삶에 취약한 교리적 특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뿌리박은 한국의 개신교가 이처럼 삶과 윤리의 문제에 취약한 것은, 이러한 교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의 뿌리를 갖고 있는 까닭입니다. 심하게 말하자면, 개신교 복음주의가 전파되는 곳에서는 윤리적 의식이 오히려 약해지는 영향이 발견된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선교사는 그것을 증거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가 복음화되면서 부정부패 지수가 더 올라가더라는 것입니다. 용서와 칭의의 복음이 면죄부의 역할을 하게 된 셈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선행의 이름으로 나돌던 면죄부가 이제는 믿음의 이름으로 나돌게 되다니 말입니다.
100년 한국기독교의 쳇바퀴
이렇게 본다면, 한국의 기독교가 윤리적으로 취약한 까닭은 이러한 종교개혁의 신학적 특징까닭이라고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주로 배운 것은 죄지음에 대한 용서의 복음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죄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관을 배웠으며, 그리고 회개와 믿음으로 용서함을 받는 복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죄짓지 않고, 죄를 이기는 거룩함의 능력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한계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죄의 굴레를 벗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웨슬리가 발견한 차이
종교개혁의 이러한 신학적 한계를 가장 절실히 느낀 사람 중에 요한 웨슬리가 있습니다. 1738년 5월의 어느날 그는 올더스게잇 거리의 신앙모임에 참석하여 누군가가 읽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들으면서 자신의 깊은 죄성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의 도리에 대한 깨달음에 도달했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개신교도가 되었으며 복음주의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믿은 복음주의자들과 교제하고 동역하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주의자들이 삶의 윤리적 요청들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의구심은 그에게 큰 문제의식으로 발전했으며, 마침내 웨슬리는 루터적 복음주의의 전통이 가진 그 중요한 “이신칭의”의 도리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졌다라고 하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함에의 약속과 부름
웨슬리가 볼 때 인간의 본질적 죄성에 대한 개혁자들의 각성은 전적으로 옳았지만, 종교개혁에서 빠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본질적 변화 가능성이었습니다. 복음은 그런 인간의 죄악된 본성 자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참된 변화(real change)를 주장했습니다. 또, 개인의 구원에 집중하는 복음주의 신앙관을 넘어서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그러나 믿음은 홀로가 아니다 (Faith alone, but faith is not alone)”라고 하면서 신앙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고 하는 성경의 성결대명(聖潔大命)을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그것들을 진지하게 가르쳤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인간의 죄성에 관한 도전뿐만 아니라, 그 죄성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부르심에 대한 증언으로 나아갔습니다.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확신과 강조는 결국 18세기 영국사회의 도덕적 갱신으로 열매 맺었습니다. 그는 다른 설교자들보다 강하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람들의 죄를 전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은 바닥을 뒹굴면서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웨슬리가 부흥회를 인도하는 지역에는 술집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역사를 변화시키고 도덕적 파탄으로부터 구원한 것이 웨슬리를 비롯한 감리교 부흥운동이었음을 역사가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웨슬리적“성화”의 조건들
우리는 웨슬리의 사역을 보면서 성도들의 삶에 성화가 이뤄지는데 필요한 토양과 조건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에게는 성결대명에 대한 깊은 각성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당시 경건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웨슬리는 거룩한 삶을 신앙생활의 본질적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도덕적인 성숙과 완성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과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복음적 각성과 회심에 들어갔습니다. 율법주의자로써 자신의 노력으로 흠없는 삶을 추구했던 웨슬리는, 이제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신성클럽(Holy Club)을 결성하고 거의 죽을 만큼 금욕적인 고행과 사회봉사의 삶을 살았지만 그는 온전함에 도달하지 못했고, 신대륙 조지아주 선교를 가기까지 헌신했지만 그는 거기에서 참된 신앙의 모습을 갖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은혜와 믿음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이로써 그는 율법주의를 넘어서게 되었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발견하는 웨슬리 성결운동의 조건은 성령님의 역사였습니다. 그의 일기는 그와 성도들이 경험한 다양한 성령체험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그 시대의 은사주의자였으며,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성화의 길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리커구스 스타키(Lycurgus Starkey)는 감리교 운동에 있어서 중심적인 교리는 성령의 감화의 교리였다고 주장합니다. 네 번째로, 웨슬리가 가진 조직적인 리더십의 은사도 그의 성결운동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을 속회로 조직하여, 그들이 정기적으로 만나서 서로를 격려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성화의 길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웨슬리의 성화운동을 성공으로 이끌었습니다.
21세기 한국교회의 성화론
지금까지의 대화를 정리해 보자면 거룩한 삶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이 있어 왔습니다. 첫째 입장은, 로마가톨릭의 율법주의적 성화론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소위 반펠라기우스(Semi -Pelagian)적인 관점에서 구원의 조건으로써의 성화를 강조해 왔습니다. 두 번째 입장은 거기에 맞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이 아닌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성화를 믿음의 한 결과로써 규정하였고, 따라서 거룩한 삶에 대한 강조점들을 2차적인 것으로 돌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삶의 문제에 취약한 신학적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세 번째로 웨슬리의 성화론은 이 둘의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입장을 단순하게 정리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거룩한 삶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성경의 명령에 따라 계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참된 변화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사역한 순회목회자요 부흥사였던 웨슬리였기에 성화에 관한 중간 길에 대해 온전히 정리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웨슬리의 길을 성공회의 길, 즉, 가톨릭적 성화론에 가까운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웨슬리가 자신의 성화론을 가톨릭과도 다르며, 종교개혁자와도 다르다고 하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길이 한국교회가 가야할 성화의 길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웨슬리 선생만큼 성결대명에 집중하며, 복음적 각성과 회심에 분명하며, 성령님께 집중하며 전진할 수 있다면, 그리고 성도들의 모임을 통해서 이것을 조직적으로 추구하며 서로를 지켜볼 수 있다면(accountability), 우리도 이러한 도덕적 성장을 누리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온전한 성화의 가능성과 모태범
저는 웨슬리의 길이 오늘날 21세기 한국 개신교회의 길이 되기 위해서 몇 가지 신학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째가 온전한 성화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입니다. 종교개혁신학은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과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발견에 대한 그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성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확신으로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 전통 위에서 그동안 한국의 개신교회도 성화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인간은 안 된다고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용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문득 이번 동계올림픽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빙상에서는 동양인은 체질적으로 약세라는 의견을 정설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체력적으로 서양인들에게 밀리기 때문에 스피드 경주에서, 또 피겨 스케이팅에서 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모태범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피겨 스케이팅에서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우리의 정설(定說)들이 그저 못난 편견이었음을 깨닫고 슬며시 내려놓았습니다. 깨닫고 보니, 우리는 서양 사람들보다 코너링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스핀과 한국적인 춤사위로 여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본질적인 어떤 제약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눈을 크게 뜨고 둘러보면, 성스럽고 고귀한 삶을 살다간 개신교의 성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비정상이 아닙니다. 그들이 정상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 모두를 성인(Saint)으로 부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하나님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에쿠아도르 선교사 네이트 세인트(Nate Saint)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Steve Saint)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를 빼앗고 어린 소년의 가슴에 메울 수 없는 공백과 불안을 안겨준 그 아마존의 살인자들을 용서했으며,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섬기고 사역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개혁의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에 매인 한국의 개신교회를 편견에서 깨우고 성도가 품어야 할 삶의 높은 표준을 보여주는 전령의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제 삶을 돌아볼 때 저도 예외없이 종교개혁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성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가져 왔습니다. “인간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사랑의 대상”이라는 체험적인 생각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죄인들을 끝까지 믿어 주고 훈련하여, 십자가를 지기까지 헌신하는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것은 인간이 다만 사랑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극적으로 배반했던 베드로는 이 주님의 기대를 힘입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돌이켰으며, 주님의 온전한 신뢰의 대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우리에게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3-4)
허물이 많고, 연약했던 베드로였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그는 주님 안에서 성화의 길을 보았습니다. 인생은 더 이상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 우리가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의 인생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통속적인 사람 베드로가 걸어간 영광의 길입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가 주님을 붙들 때 그는 온전한 삶에 도달하였고, 영광의 문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삶으로 우리에게 증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성화의 능력, 성화의 부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의 교회는 이 구절을 그들의 중심으로 받았습니다. 서방의 교회, 로마교회가 어거스틴의 부정신학에 매어 있을 때 동방의 교회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또 하나의 복음을 붙들었습니다. Theosis! Deification!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의 신성의 불꽃을 그들은 믿음으로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는 그래서 천상의 예배입니다. 그들은 미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복음적 성화를 율법주의적 성화와 구별해 주시는 성령님
둘째로 성화에 관한 또 하나의 정리가 필요한데, 그것은 복음적 성화가 율법주의적 성화와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웨슬레의 복음적 성화운동을 가톨릭의 율법주의적 성화운동과 구별해주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웨슬리가 율법주의 단계를 넘어서서 복음적 회심으로, 또 성령님의 감화와 능력으로 나아간 것은 복음주의적 성화의 본질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성화는 거듭난 자들의 성화이기에 거기에는 구원의 조건으로써 행하는 불안감이 없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성화는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성화이기 때문에 내가 중심이 되는 절망이나 교만이 없습니다. 만일 인간의 죄성에 대한 고백과 믿음을 통한 은혜의 복음에 집중할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선행들을 성령님의 은총과 능력에 의지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공로의 사상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 속에서 나의 노력은 미미하며, 그것을 받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능력만이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다음 고백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성화도 구원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세 번째 신학작업은 성화를 구원론으로 다시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구원이라는 말을 신학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성화구원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결코 성화가 영혼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화구원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혼구원은 현세에 이어지며, 우리 본성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구원을 얻는 조건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다만 성화구원의 신학적 고백은, 하나님의 구원이 영생을 주심에 머물지 않고, 이 땅에서의 삶에도 역사하시며 현세의 구원으로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성경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구원은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즉, 위험으로부터의 구출(렘 15:20), 적으로부터의 구출(시 35:9-10), 병의 치유(사 38:20), 피흘린 죄와 그 결과로부터(시 51:14), 또 적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건짐이나 갇힌 바 된 데서 해방되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이것들 중에서 구약의 가장 중심적인 구원의 경험은 출애굽 사건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역사적, 정치적 사건이었으며, 이것은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는 한 전형이 되었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구원의 차원은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영혼의 구원에 대해 핵심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셨지만, 또한 인간의 다양한 필요에 전인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구원을 지칭하는 soteria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행 4:12, 롬 10:10), 동시에 위험으로부터 개인이나 나라가 구함을 얻는 경우에도 사용되며(눅 1:69, 71, 행 7:25), 또 현재적으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하나님이 구하시는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습니다.(빌 2:12) 또한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현재와 현세적인 성화로도 이해됩니다.(빌 2:12) 그리고 구원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우리가 받게 될 최종적인 것으로도 이해되며(롬 13;11, 살전 5:8), 여기에서 구원의 범위는 창조질서 전체를 향한 우주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롬 8:18; 빌 3:20, Vine’s Expository Dictionary of Biblical Words)
이러한 성화구원의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순종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선행입니다. 이러한 순종과 선행의 차원이 성화구원 현세구원의 차원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오병이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순종과 희생을 하나님께 드릴 때, 성령님께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 변화의 결과들을 허락해 주십니다. 이러한 순종과 희생이 없을 때 우리는 성화구원 현세구원에 실패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그 행위 없는 믿음은 큰 열매를 맺지 못하고, 다만 영혼의 구원, 그러나 부끄러운 구원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고전 3:14-15)
성화구원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된 상급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추악한 이윤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 성화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에게 주시는 공의로우신 응답입니다. 여기에는 영혼구원을 위한 어떠한 공로(Merit)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심음으로 영생구원을, 순종과 선행을 심음으로 성화구원, 현세구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성화과정의 위험들
우리가 성화의 차원을 신앙에서 강조할 때 빠지게 되는 오류와 위험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앞에서 여러 번 언급한 율법주의입니다. 율법주의란 우리의 성화의 노력, 선행들이 영혼구원의 조건으로 인식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나의 행위로 인식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오류입니다. 새벽기도에만 갔다 오면 가족들을 정죄하고 힘들게 하는 어느 권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모습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자기의 노력으로 성화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가지는 교만과 정죄함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기에 힘들고 불안한 길입니다. 이에 반해서, 복음적 선행은 이미 구원의 확신 가운데 행하고 있습니다. 복음적 선행은 성령님의 크신 손에 우리가 가진 적은 것들을 올려드리는 공동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방아쇠 당기는 예비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그래서 절망도 자랑도 없고 늘 감사가 있습니다.
성화와 선행을 강조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두 번째 오류는 성화의 과정에 대한 체험적이고 도식적인 이해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자신이 성령체험을 통해 거룩한 내적 변화를 체험하였을 때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동안 순간적 성화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그는 성령님께서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역사하시며, 서로 다른 방법으로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체험을 강하게 할수록 사람들은 순간적 성화를 주장합니다. 최근 어느 단체에서는 심지어 거듭남을 성화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거듭난 영혼들의 성장과정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거듭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류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듯이, 웨슬리가 그랬듯이, 주님께서 겨자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순간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화의 매혹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성결대명(聖潔大命)을 주셨습니다.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이 되라는 성결대명을 자녀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결대명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Numinous! 매혹의 체험들입니다. 다윗은 그 체험에 대하여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다윗은 삶의 여정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받았습니다. 반복되는 구원경험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선물보다 그 선물을 끊임없이 주시는 하나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하나님 자신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고백합니다. 그에게 성결의 명령은 이제 더 이상 욕심과 죄악에 대해 경고하는 가시철조망이 아니라, 아름다우신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웨슬리도 이러한 성화의 매혹을 알았습니다. 신학자 윈쿱(Mildred Wynkoop)은 웨슬리의 성화의 핵심에 사랑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여정은 사랑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율법주의자로 시작한 웨슬리였지만, 그는 성화의 길을 걸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의 길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자의 완전, 완전한 삶을 “사랑의 완전”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나가는 말
위대한 신앙인들은 입적하신 그 스님이 가르친 무소유가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길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으로써 소유와 무소유의 구별이 의미 없는 드높은 경지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 세상을 변혁시키고 경외감을 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이제 성화의 길을 걸어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 그러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다시 경외와 칭송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이제 성화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을 구원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 조건이 되는 순종과 선행을 마음 놓고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제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현세의 변혁과 구원으로 확장되어 나오도록 성도들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제 서로를 격려하며 성화의 길, 시온의 대로를 걸어야할 때입니다.
김성원 l 교수는 서울신대와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철학적 신학을 전공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학위 논문은 Social Trinitarian Pneumatology in Process를 주제로 하여 복음주의적 성령론을 과정철학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를 하였다. 기독교 영성과 시대정신의 이해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작년부터 서울신학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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