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속성들에 의해 그를 묘사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속성들(attributes)이란, 하나님께나 그의 하시는 일들에 돌려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체와 그 속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는 각 속성에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그의 본체에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본체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을지라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통해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답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열 가지 속성으로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영(靈)이심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증거하셨다(요 4:24).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은 그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증거하셨다(눅 24:39).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사람이 그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엄히 금하신 것은 그의 영성(靈性)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거나 그런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가장 큰 죄로 간주된다.
성경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표현이 나오지만(출 3:20; 6:6; 사 37:17),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활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47)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적 표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은 그런 표현을 오해하는 것이요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48) 분명히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 “보이지 아니하는 자”(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딤전 6:16)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증거했다(요 1:18).
성경은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였다고 기록한다(창 18장, 창 32장). 출애굽기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한다(출 24:9, 10).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모습 곧 그의 영광의 한 면모를 보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표현(마 5:8)도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밝아진 영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한(有限)한 인간은 무한하신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살아계신 자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어떤 개념이나 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영이시다. 그는 인간이 만든 생명 없는 우상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라고 증거했고(렘 10:10)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다(딤전 6:16).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상징적 표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활동하심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인격적 존재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우주의 완전자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그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을 ‘인격적(人格的)’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가 사람과 같이 지정의(知情意) 즉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자이심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감정을 가지시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셨고 사람이 그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그를 내어쫓으셨다. 하나님은 역사상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손과 팔, 귀와 눈 등의 표현들도 그의 인격성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다(엡 1: 11). 하나님의 분노와 보응도 그의 인격성의 당연한 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영적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외적인 의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바른 지식과 믿음의 마음, 죄를 미워하고 통회하는 마음, 거룩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무한(無限)하심
둘째로,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시다.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체가 무한하심을 증거한다. 시편 145:3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재어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편 139:7-10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殿)이오리이까?”고 고백한(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은 옳은 말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했고(사 66:1),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증거했다(렘 23:2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라는 뜻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다 품으실 수 있다는, 그러나 그것들을 초월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물질적 몸을 가진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으므로 한 장소에 있으면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공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충만히 존재하신다.49) 그는 어디에나 계시고(遍在)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無所不在).50)
물론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下鑑)하신다’고 말했다(신 26:15).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그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신다’고 말했다(왕상 8:30). 역대하 30:27은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므로, 성경은 때때로 그가 땅에 내려오셨다고 표현한다(창 11:5). 또 에녹과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증거되었다(히 11:5; 왕하 2:11). 또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가셨다(행 1:9). 이러한 말씀들은 분명히 그들이 하늘 위로 장소적 이동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의 영광의 한 처소를 두셨다는 것을 증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히 11:16).
하나님은 또한 그의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완전하심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시고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무한하시고 선하심이 무한하시다. 즉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점에 부족이 없는 완전충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완전하심은 그의 영광으로 나타난다. 그는 영광 중에 거하시며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가장 사모할 만한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영감 중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73:25). 욥기 35:6-8,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행복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홀로 그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해 완전충족하셔서,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영광도 끌어내지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향해, 그리고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모든 것들은 그로부터,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해 존재하며; 그는 그것들 위에 지극히 주권적 통치권을 가지고 계셔서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또는 그것들 위에 행하신다.
영원하심
셋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것은 그가 시간적으로도 무한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동시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존재하셨던 그는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신다. 천지창조 이전에 존재하신 그는 영원하시다. 욥기 36:26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모세는 시편 90:2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시간은 피조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사실상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시며 시간에 매이시거나 제약을 받으시지 않고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실 수 있는 초시간적이며 비시간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90:4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에게는 전(前)도 없고 후(後)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그에게 동등으로 또는 항상 현재이다. 그에게 ‘기간’(duration, 시간 흐름의 과정)은 영원한 현재이다”라고 하였다.51)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그가 시작이 없이 영원히 스스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제1 원인 혹은 궁극적 원인이시다. 그 자신의 존재의 근거는 자신 이외에 없으시다. 사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여호와’(예호와 혹은 야웨 )라는 그의 이름도 그의 영원자존하심을 나타낸다. 이 말은 ‘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왔고52) 그 의미는 출애굽기 3:13, 14의 말씀대로 ‘그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일 것이다.
불변하심
넷넷째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시편 102:27은 ‘주는 여상(如常)하시다’라고 말했는데, ‘여상(如常)하시다’는 말은 ‘동일하시다’(the same)는 뜻이다. 말라기 3:6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다. 또 야고보서 1:17은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비(非)활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17).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 즉 그가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그의 본체와 속성들의 불변하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뜻과 계획과 작정의 불변하심을 의미한다. 시편 33:11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증거한다. 또,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증거했다(사 14:24). 하나님은 그가 뜻하신 바를 변경함 없이 다 성취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께서 뉘우치신다, 후회하신다’는 표현이 간혹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예들 들어, 출애굽기 32:14는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했고, 사무엘하 24:16은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했다. 또 요나 3:10은 “하나님이 그들[니느웨 사람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인간편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 즉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이며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하심에 대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손상시킬 것이다.
무한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은 피조물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독특하신 점들이다. 실상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인간은 영원자존하시는 그 분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를 항상 인정하며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지혜로우심
다섯째로,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크심은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경도 그의 크신 지혜와 지식을 증거한다.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욥 12:13), 하나님을 ‘지혜(다임, 지식)가 온전하신 자’라고 표현하였다(욥 37:16).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말했다(삼상 2:3). 시편 139:1, 2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표현하셨다(마 10:30). 히브리서 4:13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하였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대상은 현실적인 것뿐 아니라 가상적인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은 직각적이며(욥 34:23) 독립적이고 총괄적이며 동시적이며 개별적이고 명확하고 완전하며 불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지식은 그 범위가 전(全)포괄적이므로 전지(全知)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며 원형(原形)이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본받은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다. 사람의 지식의 성격은,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과 달리, 점진적이며 의존적이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이고 불명확하고 불완전하며 가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식과 구별되는 지혜는 지식을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을 응용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최선의 목적을 이루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그를 속이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인간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완전하심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능력이 있으심
여섯째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말(엘 혹은 엘로힘)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있으시고 그의 능력은 전능(全能)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능자’(솻다이)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 창 17: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며”라고 고백했고(욥 42:2), 예레미야는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라고 했다(렘 32:17).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니라]”고 말했다(눅 1:37).
하나님의 전능은 측량할 수 없는 무제한적 능력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 안에서 스스로 능력의 사용을 제한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성질에 모순된 일들을 행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죽으실 수 없고 변하실 수 없고 범죄하실 수 없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고(딤전 6:16) 또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으며(딤후 2:13)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라고 말했다(삼상 15: 29).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주권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말(아도나이)이다(창 15:2). 모세는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라고 고백했다(신 10:17). 다윗은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主權)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 . .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했고(대상 29:11), 여호사밧은,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고 말했다(대하 20:6).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의 구원에 관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 26).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크신 능력을 믿으며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잠잠히 그를 바라볼 수 있다. 그에게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거룩하심
일곱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모세는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라고 했다(출 15:11).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카도쉬)는 ‘구별됨, 분리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모든 피조세계와 구별되며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이 엄위하심은 모든 피조물이 그를 찬송하고 경배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시 22:3), 이사야의 환상 가운데 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쳤다(사 6: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도덕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의(義)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이 도덕적 성결은 인간의 도덕적 모범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레 11:45).
의로우심
여덟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라고 증거했고(스 9:15), 시편 145:17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라고 말했다. ‘의로운’(찻디크) 혹은 ‘의’(체다카)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어떤 기준에 맞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의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며,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에 항상 일치하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그가 제정하신 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할 때 의로운 자가 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했다(신 6:25).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의로우시다. 그는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그들의 행위들을 판단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이것을 ‘통치적 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의로운 통치자시며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고 고백했고(시 9:8),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불렀다(딤후 4:8).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보응적 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2:5-8).
특히,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은 복음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 요소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공의의 속성이 없었다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구주 예수께서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벌적 의’ 때문에, 구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증거했다(갈 3:13).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를 부정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가르친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땅은 그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고 그들은 죽음과 불행을 맛보게 되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그 후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이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에 대한 징벌은 그것을 증거한다. 특히 지옥 진리는 그것을 밝히 증거한다.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 외에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밝히 가르친다. 그 몇 구절들을 들어보자.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레미야 30:23, 24,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末日)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 1:2,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선하심
아홉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시편 106:1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씀했다. ‘선(善)하다’는 개념은 ‘이상(理想)에 맞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철학자들이 표현했던 대로, ‘최고선’(最高善)이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랑, 은혜, 인자(仁慈)와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선하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마 5:45).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로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데서 나타났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속적(救贖的)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했고(롬 3:24)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긍휼은 하나님께서 죄의 형벌과 고통 중에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케세드, 자비, 인자)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또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자비롭고(라쿰)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케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셨다(출 34:6).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불순종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다. 그는 자신을 ‘노하기를 더디하는’ 하나님으로 증거하셨다(출 34: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썼다(롬 2: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물들에 대해서도 선하시다. 그러므로 시편 145편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만유[모든 생물들]를 선대(善待)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 . 중생(衆生, 모든 것들, 모든 피조물들)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라고 했다(시 145:9, 15).
진실하심
열째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진실이란, 이름과 실질, 속과 겉, 말과 행위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참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중심과 외적인 표현, 그의 말과 행위가 항상 동일하시다. 그는 문자 그대로 참되시다. 그에게는 어떤 거짓도 없으시다. 또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시며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신실함은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요 기쁨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호와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말했다(신 7:9).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라고 말했다(시 36:5). 시편 89:14는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라고 말했고, 시편 92:2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했고(롬 3:4) 또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라고 말했다(딤후 2:13). 히브리서 10:23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였다. 심지어 이방인 선지자 발람도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거짓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민 23:19).
이와 같이, 영(靈)이심,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려진 속성들이다. 이 열 가지 중,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 즉 하나님의 ‘비공유적(非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속성들, 즉 영이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피조물들에게도 어느 정도 나누어 주신 속성들, 즉 하나님의 ‘공유적(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인 우리가 본받을 수 없지만, 공유적 속성은 우리가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것들이며 또 본받아야 할 것들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신론--2. 하나님의 속성들
2.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속성들에 의해 그를 묘사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속성들(attributes)이란, 하나님께나 그의 하시는 일들에 돌려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체와 그 속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는 각 속성에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그의 본체에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본체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을지라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통해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답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열 가지 속성으로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영(靈)이심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증거하셨다(요 4:24).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은 그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증거하셨다(눅 24:39).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사람이 그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엄히 금하신 것은 그의 영성(靈性)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거나 그런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가장 큰 죄로 간주된다.
성경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표현이 나오지만(출 3:20; 6:6; 사 37:17),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활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47)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적 표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은 그런 표현을 오해하는 것이요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48) 분명히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 “보이지 아니하는 자”(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딤전 6:16)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증거했다(요 1:18).
성경은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였다고 기록한다(창 18장, 창 32장). 출애굽기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한다(출 24:9, 10).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모습 곧 그의 영광의 한 면모를 보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표현(마 5:8)도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밝아진 영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한(有限)한 인간은 무한하신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살아계신 자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어떤 개념이나 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영이시다. 그는 인간이 만든 생명 없는 우상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라고 증거했고(렘 10:10)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다(딤전 6:16).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상징적 표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활동하심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인격적 존재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우주의 완전자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그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을 ‘인격적(人格的)’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가 사람과 같이 지정의(知情意) 즉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자이심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감정을 가지시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셨고 사람이 그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그를 내어쫓으셨다. 하나님은 역사상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손과 팔, 귀와 눈 등의 표현들도 그의 인격성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다(엡 1: 11). 하나님의 분노와 보응도 그의 인격성의 당연한 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영적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외적인 의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바른 지식과 믿음의 마음, 죄를 미워하고 통회하는 마음, 거룩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무한(無限)하심
둘째로,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시다.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체가 무한하심을 증거한다. 시편 145:3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재어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편 139:7-10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殿)이오리이까?”고 고백한(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은 옳은 말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했고(사 66:1),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증거했다(렘 23:2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라는 뜻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다 품으실 수 있다는, 그러나 그것들을 초월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물질적 몸을 가진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으므로 한 장소에 있으면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공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충만히 존재하신다.49) 그는 어디에나 계시고(遍在)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無所不在).50)
물론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下鑑)하신다’고 말했다(신 26:15).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그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신다’고 말했다(왕상 8:30). 역대하 30:27은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므로, 성경은 때때로 그가 땅에 내려오셨다고 표현한다(창 11:5). 또 에녹과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증거되었다(히 11:5; 왕하 2:11). 또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가셨다(행 1:9). 이러한 말씀들은 분명히 그들이 하늘 위로 장소적 이동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의 영광의 한 처소를 두셨다는 것을 증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히 11:16).
하나님은 또한 그의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완전하심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시고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무한하시고 선하심이 무한하시다. 즉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점에 부족이 없는 완전충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완전하심은 그의 영광으로 나타난다. 그는 영광 중에 거하시며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가장 사모할 만한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영감 중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73:25). 욥기 35:6-8,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행복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홀로 그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해 완전충족하셔서,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영광도 끌어내지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향해, 그리고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모든 것들은 그로부터,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해 존재하며; 그는 그것들 위에 지극히 주권적 통치권을 가지고 계셔서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또는 그것들 위에 행하신다.
영원하심
셋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것은 그가 시간적으로도 무한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동시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존재하셨던 그는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신다. 천지창조 이전에 존재하신 그는 영원하시다. 욥기 36:26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모세는 시편 90:2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시간은 피조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사실상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시며 시간에 매이시거나 제약을 받으시지 않고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실 수 있는 초시간적이며 비시간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90:4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에게는 전(前)도 없고 후(後)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그에게 동등으로 또는 항상 현재이다. 그에게 ‘기간’(duration, 시간 흐름의 과정)은 영원한 현재이다”라고 하였다.51)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그가 시작이 없이 영원히 스스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제1 원인 혹은 궁극적 원인이시다. 그 자신의 존재의 근거는 자신 이외에 없으시다. 사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여호와’(예호와 혹은 야웨 )라는 그의 이름도 그의 영원자존하심을 나타낸다. 이 말은 ‘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왔고52) 그 의미는 출애굽기 3:13, 14의 말씀대로 ‘그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일 것이다.
불변하심
넷넷째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시편 102:27은 ‘주는 여상(如常)하시다’라고 말했는데, ‘여상(如常)하시다’는 말은 ‘동일하시다’(the same)는 뜻이다. 말라기 3:6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다. 또 야고보서 1:17은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비(非)활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17).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 즉 그가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그의 본체와 속성들의 불변하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뜻과 계획과 작정의 불변하심을 의미한다. 시편 33:11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증거한다. 또,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증거했다(사 14:24). 하나님은 그가 뜻하신 바를 변경함 없이 다 성취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께서 뉘우치신다, 후회하신다’는 표현이 간혹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예들 들어, 출애굽기 32:14는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했고, 사무엘하 24:16은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했다. 또 요나 3:10은 “하나님이 그들[니느웨 사람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인간편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 즉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이며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하심에 대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손상시킬 것이다.
무한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은 피조물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독특하신 점들이다. 실상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인간은 영원자존하시는 그 분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를 항상 인정하며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지혜로우심
다섯째로,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크심은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경도 그의 크신 지혜와 지식을 증거한다.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욥 12:13), 하나님을 ‘지혜(다임, 지식)가 온전하신 자’라고 표현하였다(욥 37:16).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말했다(삼상 2:3). 시편 139:1, 2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표현하셨다(마 10:30). 히브리서 4:13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하였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대상은 현실적인 것뿐 아니라 가상적인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은 직각적이며(욥 34:23) 독립적이고 총괄적이며 동시적이며 개별적이고 명확하고 완전하며 불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지식은 그 범위가 전(全)포괄적이므로 전지(全知)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며 원형(原形)이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본받은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다. 사람의 지식의 성격은,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과 달리, 점진적이며 의존적이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이고 불명확하고 불완전하며 가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식과 구별되는 지혜는 지식을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을 응용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최선의 목적을 이루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그를 속이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인간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완전하심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능력이 있으심
여섯째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말(엘 혹은 엘로힘)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있으시고 그의 능력은 전능(全能)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능자’(솻다이)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 창 17: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며”라고 고백했고(욥 42:2), 예레미야는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라고 했다(렘 32:17).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니라]”고 말했다(눅 1:37).
하나님의 전능은 측량할 수 없는 무제한적 능력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 안에서 스스로 능력의 사용을 제한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성질에 모순된 일들을 행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죽으실 수 없고 변하실 수 없고 범죄하실 수 없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고(딤전 6:16) 또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으며(딤후 2:13)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라고 말했다(삼상 15: 29).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주권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말(아도나이)이다(창 15:2). 모세는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라고 고백했다(신 10:17). 다윗은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主權)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 . .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했고(대상 29:11), 여호사밧은,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고 말했다(대하 20:6).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의 구원에 관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 26).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크신 능력을 믿으며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잠잠히 그를 바라볼 수 있다. 그에게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거룩하심
일곱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모세는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라고 했다(출 15:11).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카도쉬)는 ‘구별됨, 분리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모든 피조세계와 구별되며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이 엄위하심은 모든 피조물이 그를 찬송하고 경배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시 22:3), 이사야의 환상 가운데 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쳤다(사 6: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도덕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의(義)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이 도덕적 성결은 인간의 도덕적 모범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레 11:45).
의로우심
여덟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라고 증거했고(스 9:15), 시편 145:17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라고 말했다. ‘의로운’(찻디크) 혹은 ‘의’(체다카)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어떤 기준에 맞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의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며,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에 항상 일치하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그가 제정하신 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할 때 의로운 자가 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했다(신 6:25).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의로우시다. 그는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그들의 행위들을 판단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이것을 ‘통치적 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의로운 통치자시며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고 고백했고(시 9:8),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불렀다(딤후 4:8).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보응적 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2:5-8).
특히,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은 복음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 요소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공의의 속성이 없었다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구주 예수께서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벌적 의’ 때문에, 구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증거했다(갈 3:13).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를 부정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가르친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땅은 그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고 그들은 죽음과 불행을 맛보게 되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그 후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이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에 대한 징벌은 그것을 증거한다. 특히 지옥 진리는 그것을 밝히 증거한다.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 외에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밝히 가르친다. 그 몇 구절들을 들어보자.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레미야 30:23, 24,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末日)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 1:2,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선하심
아홉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시편 106:1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씀했다. ‘선(善)하다’는 개념은 ‘이상(理想)에 맞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철학자들이 표현했던 대로, ‘최고선’(最高善)이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랑, 은혜, 인자(仁慈)와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선하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마 5:45).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로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데서 나타났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속적(救贖的)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했고(롬 3:24)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긍휼은 하나님께서 죄의 형벌과 고통 중에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케세드, 자비, 인자)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또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자비롭고(라쿰)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케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셨다(출 34:6).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불순종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다. 그는 자신을 ‘노하기를 더디하는’ 하나님으로 증거하셨다(출 34: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썼다(롬 2: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물들에 대해서도 선하시다. 그러므로 시편 145편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만유[모든 생물들]를 선대(善待)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 . 중생(衆生, 모든 것들, 모든 피조물들)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라고 했다(시 145:9, 15).
진실하심
열째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진실이란, 이름과 실질, 속과 겉, 말과 행위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참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중심과 외적인 표현, 그의 말과 행위가 항상 동일하시다. 그는 문자 그대로 참되시다. 그에게는 어떤 거짓도 없으시다. 또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시며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신실함은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요 기쁨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호와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말했다(신 7:9).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라고 말했다(시 36:5). 시편 89:14는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라고 말했고, 시편 92:2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했고(롬 3:4) 또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라고 말했다(딤후 2:13). 히브리서 10:23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였다. 심지어 이방인 선지자 발람도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거짓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민 23:19).
이와 같이, 영(靈)이심,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려진 속성들이다. 이 열 가지 중,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 즉 하나님의 ‘비공유적(非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속성들, 즉 영이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피조물들에게도 어느 정도 나누어 주신 속성들, 즉 하나님의 ‘공유적(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인 우리가 본받을 수 없지만, 공유적 속성은 우리가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것들이며 또 본받아야 할 것들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 등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을 본받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