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28, 2018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4.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우리 신학 한마당
박종천 목사(감신대), 이찬석 교수(협성대), 조은하 교수(목원대) 공동집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사도신경 제1조).

우리는 매주 예배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첫 조항으로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창조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동서양의 많은 종교와 신화가 그려주는 조물주가 아니다. 조물주는 이미 존재하는 원초적인 물질에 형태를 부여함으로 만물을 조성하는 데 비해, 창조주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단순히 초자연적 기적만이 아니라, 우리 구원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결정적인 계시 사건이다: “아브라함이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창조주를 믿는 신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미쁘신 사랑의 아버지이시기에 천지와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시겠다는 선하신 뜻을 품으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에 그 선하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성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고, 악을 행하실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마귀와 사탄처럼 파괴적인 권력이나 폭력을 행사하시지 않으며, 만물을 창조하고 생명을 살리시는 권능을 행사하신다. 운명의 지배를 받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과 달리 성경의 하나님은 비극적 운명의 굴레를 벗기시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실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보전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역설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세계창조와 인간구원을 위해 스스로의 권능을 제한하심으로 진정으로 참된 전능성을 계시하신다. 자존하시고 자족하신 하나님이 자기밖에 타자를 창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자유를 타자의 존재에 의해 제한하신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기 위해 “인간의 도움 없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 없이 구원하시지 않는다”(어거스틴). 하나님의 전능성의 지고한 표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성육신’ 사건(요 1:14)이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유한한 피조물을 조건 없이 긍정하시고 사랑하셔서 그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원성에 참여할 기회를 주셨기에(요 3:16) 진정으로 전능하실 뿐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 1:27)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창  1:20).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창조를 끝으로 천지만물을 다 지으신 후에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하셨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에서 ‘좋다’(good)는 말은 ‘선하다’는 뜻으로서 단지 도덕적인 선함을 가리킨다기 보다 심미적으로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다’(전 3:11)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일에 만족감과 기쁨을 느끼셨다는 것을 드러낸다(브루거만, ‘창세기 주석’, 77).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셨던 세계는 하나님 심정이 그 세계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셨던 선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주목해 볼 것은 온 세상의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1, 24~25)고 하신 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양·다기한 생물종은 하나님의 기쁨이기에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2)고 하시며 축복하신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창조의 전 과정의 고비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고, 단 한 번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에 대해서만이었다(창 2:18상).

생물종의 다양성이 상호 간의 차이로 인해 성립하며, 하나님의 기쁨과 축복은 바로 그 차이를 경축하시는 것이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차이로 인하여 서로를 ‘돕는 배필’(창 2:18하)로 지으시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의 완전성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이 다양·다기한 종으로 생육하고 번성할 때 더 극대화된다는 아퀴나스 성인의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단지 하나의 피조물에 의해서 적합하게 대변될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은 다양하고 많은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전체 우주가 함께 하나님의 선하심에 더 완전하게 참여하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어떤 단일한 피조물이 하는 것보다 더 잘 대변된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시편 기자는 우주에 가득찬 피조물들을 창조주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자고 초청함으로 시편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절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온 땅의 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는 하나님의 ‘위임’(mandate)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보살피고 다스리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시고 나서, 지으신 만물과 또한 위임하신 인간을 바라보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하셨다. 실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명의 다차원적 통일성’(폴 틸리히, ‘조직신학’ III, 15)으로 연결되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로부터 물질(무기물)을 창조하시고, 다음에 유기물 즉 생명을 창조하셨는데, 무기물의 차원에서 유기물의 차원으로의 이행에는 창조주의 영의 임재와 작용이 있었다. 생명에도 여러 차원이 있는바,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에 이르는 과정에서 중대한 차원의 변화 때마다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다:“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이러한 성령의 ‘지속적 창조’(creatio continua)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자연의 창조만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 문화, 종교를 아우르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도 일어난다. 성경의 관점에서 역사는 같은 것의 반복이나 옛것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다. 그리하여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우주의 ‘새로운 창조’(creatio nova)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을 것이다. “창조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Veni, Creator Spiritus!)
1930년에 공포된 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은 “모든 선(善)과 미(美)와 애(愛)와 진(眞)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라고 고백한다. 선, 아름다움, 사랑, 진리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들인데, 이 가치들의 뿌리는 하나님에게 있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위기의 시대에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인간이 자신만의 행복과 편리함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진실하신 사랑의 가치를 구현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고백하는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며, 거룩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다(1997 감리회 신앙고백 제1조).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관하심으로 계속 창조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주의 마지막에는 새로운 창조로 우주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며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자비하시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다르게 거룩하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피조물과 소통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식별과 적용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과 우주 기원에 대한 현대 과학의 이야기는 과연 상충하는 것일까? 넓게는 창조 신앙과 현대 과학의 문제, 좁게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은 우리가 피해 갈 수 없는 난제임이 틀림없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이성과 계시의 문제로 시대마다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인간의 자연적 이성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으로서 이를 통해 인간은 우주 만물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이 이성으로 추구하는 진리와 성경이 계시를 통해 드러내는 진리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므로 상충할 수 없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토마스 아퀴나스). 이 말은 과학과 이성이 신앙과 계시에 종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시므로 이성이 세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성경에 호소함으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창조와 변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과학의 탐구 대상은 미립자로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변화하는 존재들이다. 변화하는 것들은 변화하는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다. ‘무로부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주장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 명제에서 ‘나온다’라는 동사는 변화를 의미하며, 그것은 변화하는 물질적 실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의 존재 근본 원인에 대한 것이다.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가’ 또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 문제다.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하는 신학과 변화를 설명하는 자연과학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는 사물의 존재성을 설명하는 것이지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며, 과학은 사물의 존재 의미가 아니라 사물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인 천재 우주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과학은 우주의 기원인 ‘빅뱅’(대폭발)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탐구하는 것이며, 빅뱅이 왜 일어났는지는 과시와 종교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우주는 여전히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된 우주일 뿐이다. 따라서 진화적 변화에 대한 그 어떠한 설명도 창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대체할 수 없다. 만물의 존재성이 그것의 원인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만물의 변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에 근거하여 창조를 부인하거나, 창조론을 변호하려고 진화를 거부하는 것은 창조와 진화 양자 모두를 오해하는 것이다.

우주는 대폭발 이론이 말하는 바와 같이 불균형 체계다.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아인슈타인의 역동적인 세계관으로 패러다임이 바꼈다. 또한 다윈 이후 진화론도 과거의 조건으로부터 기계적인 필요성에 의해 초래하는 진화가 아니라, 돌연변이적 진화나 유기적 진화의 개념처럼 ‘창발적 진화’, 즉 생명의 새 형태가 갑작스러운 변이와 출현에서 드러난 우연적 요소에 주목하게 되었다. 성령론의 관점에서 이것은 여전히 열려 있는 하나님의 지속적 창조 행위에 의해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창 1:11, 20)라는 말씀대로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땅의 생산성, 곧 생명의 자연 발생적 창조성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방식을 보여준다. 생명이 무기물에서 유기체 구조로 변화한 이래로 생명의 창조적인 자기 조직화는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거룩한 바람, 성령의 일하심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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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10가지 속성(김효성 목사)

신론--2. 하나님의 속성들

 2.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속성들에 의해 그를 묘사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속성들(attributes)이란, 하나님께나 그의 하시는 일들에 돌려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체와 그 속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는 각 속성에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그의 본체에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본체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을지라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통해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답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열 가지 속성으로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영(靈)이심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증거하셨다(요 4:24).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은 그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증거하셨다(눅 24:39).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사람이 그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엄히 금하신 것은 그의 영성(靈性)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거나 그런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가장 큰 죄로 간주된다.

성경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표현이 나오지만(출 3:20; 6:6; 사 37:17),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활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47)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적 표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은 그런 표현을 오해하는 것이요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48) 분명히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 “보이지 아니하는 자”(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딤전 6:16)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증거했다(요 1:18).

성경은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였다고 기록한다(창 18장, 창 32장). 출애굽기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한다(출 24:9, 10).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모습 곧 그의 영광의 한 면모를 보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표현(마 5:8)도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밝아진 영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한(有限)한 인간은 무한하신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살아계신 자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어떤 개념이나 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영이시다. 그는 인간이 만든 생명 없는 우상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라고 증거했고(렘 10:10)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다(딤전 6:16).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상징적 표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활동하심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인격적 존재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우주의 완전자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그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을 ‘인격적(人格的)’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가 사람과 같이 지정의(知情意) 즉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자이심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감정을 가지시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셨고 사람이 그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그를 내어쫓으셨다. 하나님은 역사상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손과 팔, 귀와 눈 등의 표현들도 그의 인격성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다(엡 1: 11). 하나님의 분노와 보응도 그의 인격성의 당연한 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영적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외적인 의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바른 지식과 믿음의 마음, 죄를 미워하고 통회하는 마음, 거룩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무한(無限)하심

둘째로,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시다.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체가 무한하심을 증거한다. 시편 145:3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재어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편 139:7-10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殿)이오리이까?”고 고백한(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은 옳은 말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했고(사 66:1),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증거했다(렘 23:2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라는 뜻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다 품으실 수 있다는, 그러나 그것들을 초월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물질적 몸을 가진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으므로 한 장소에 있으면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공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충만히 존재하신다.49) 그는 어디에나 계시고(遍在)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無所不在).50)

물론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下鑑)하신다’고 말했다(신 26:15).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그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신다’고 말했다(왕상 8:30). 역대하 30:27은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므로, 성경은 때때로 그가 땅에 내려오셨다고 표현한다(창 11:5). 또 에녹과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증거되었다(히 11:5; 왕하 2:11). 또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가셨다(행 1:9). 이러한 말씀들은 분명히 그들이 하늘 위로 장소적 이동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의 영광의 한 처소를 두셨다는 것을 증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히 11:16).

하나님은 또한 그의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완전하심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시고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무한하시고 선하심이 무한하시다. 즉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점에 부족이 없는 완전충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완전하심은 그의 영광으로 나타난다. 그는 영광 중에 거하시며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가장 사모할 만한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영감 중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73:25). 욥기 35:6-8,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행복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홀로 그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해 완전충족하셔서,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영광도 끌어내지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향해, 그리고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모든 것들은 그로부터,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해 존재하며; 그는 그것들 위에 지극히 주권적 통치권을 가지고 계셔서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또는 그것들 위에 행하신다.

 영원하심

셋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것은 그가 시간적으로도 무한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동시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존재하셨던 그는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신다. 천지창조 이전에 존재하신 그는 영원하시다. 욥기 36:26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모세는 시편 90:2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시간은 피조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사실상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시며 시간에 매이시거나 제약을 받으시지 않고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실 수 있는 초시간적이며 비시간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90:4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에게는 전(前)도 없고 후(後)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그에게 동등으로 또는 항상 현재이다. 그에게 ‘기간’(duration, 시간 흐름의 과정)은 영원한 현재이다”라고 하였다.51)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그가 시작이 없이 영원히 스스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제1 원인 혹은 궁극적 원인이시다. 그 자신의 존재의 근거는 자신 이외에 없으시다. 사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여호와’(예호와 혹은 야웨 )라는 그의 이름도 그의 영원자존하심을 나타낸다. 이 말은 ‘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왔고52) 그 의미는 출애굽기 3:13, 14의 말씀대로 ‘그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일 것이다.

 

불변하심

넷넷째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시편 102:27은 ‘주는 여상(如常)하시다’라고 말했는데, ‘여상(如常)하시다’는 말은 ‘동일하시다’(the same)는 뜻이다. 말라기 3:6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다. 또 야고보서 1:17은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비(非)활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17).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 즉 그가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그의 본체와 속성들의 불변하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뜻과 계획과 작정의 불변하심을 의미한다. 시편 33:11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증거한다. 또,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증거했다(사 14:24). 하나님은 그가 뜻하신 바를 변경함 없이 다 성취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께서 뉘우치신다, 후회하신다’는 표현이 간혹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예들 들어, 출애굽기 32:14는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했고, 사무엘하 24:16은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했다. 또 요나 3:10은 “하나님이 그들[니느웨 사람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인간편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 즉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이며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하심에 대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손상시킬 것이다.

무한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은 피조물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독특하신 점들이다. 실상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인간은 영원자존하시는 그 분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를 항상 인정하며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지혜로우심

다섯째로,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크심은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경도 그의 크신 지혜와 지식을 증거한다.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욥 12:13), 하나님을 ‘지혜(다임, 지식)가 온전하신 자’라고 표현하였다(욥 37:16).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말했다(삼상 2:3). 시편 139:1, 2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표현하셨다(마 10:30). 히브리서 4:13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하였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대상은 현실적인 것뿐 아니라 가상적인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은 직각적이며(욥 34:23) 독립적이고 총괄적이며 동시적이며 개별적이고 명확하고 완전하며 불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지식은 그 범위가 전(全)포괄적이므로 전지(全知)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며 원형(原形)이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본받은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다. 사람의 지식의 성격은,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과 달리, 점진적이며 의존적이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이고 불명확하고 불완전하며 가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식과 구별되는 지혜는 지식을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을 응용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최선의 목적을 이루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그를 속이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인간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완전하심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능력이 있으심

여섯째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말(엘 혹은 엘로힘)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있으시고 그의 능력은 전능(全能)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능자’(솻다이)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 창 17: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며”라고 고백했고(욥 42:2), 예레미야는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라고 했다(렘 32:17).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니라]”고 말했다(눅 1:37).

하나님의 전능은 측량할 수 없는 무제한적 능력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 안에서 스스로 능력의 사용을 제한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성질에 모순된 일들을 행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죽으실 수 없고 변하실 수 없고 범죄하실 수 없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고(딤전 6:16) 또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으며(딤후 2:13)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라고 말했다(삼상 15: 29).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주권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말(아도나이)이다(창 15:2). 모세는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라고 고백했다(신 10:17). 다윗은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主權)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 . .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했고(대상 29:11), 여호사밧은,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고 말했다(대하 20:6).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의 구원에 관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 26).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크신 능력을 믿으며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잠잠히 그를 바라볼 수 있다. 그에게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거룩하심

일곱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모세는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라고 했다(출 15:11).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카도쉬)는 ‘구별됨, 분리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모든 피조세계와 구별되며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이 엄위하심은 모든 피조물이 그를 찬송하고 경배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시 22:3), 이사야의 환상 가운데 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쳤다(사 6: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도덕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의(義)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이 도덕적 성결은 인간의 도덕적 모범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레 11:45).

 

 의로우심

여덟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라고 증거했고(스 9:15), 시편 145:17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라고 말했다. ‘의로운’(찻디크) 혹은 ‘의’(체다카)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어떤 기준에 맞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의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며,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에 항상 일치하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그가 제정하신 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할 때 의로운 자가 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했다(신 6:25).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의로우시다. 그는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그들의 행위들을 판단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이것을 ‘통치적 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의로운 통치자시며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고 고백했고(시 9:8),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불렀다(딤후 4:8).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보응적 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2:5-8).

특히,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은 복음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 요소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공의의 속성이 없었다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구주 예수께서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벌적 의’ 때문에, 구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증거했다(갈 3:13).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를 부정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가르친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땅은 그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고 그들은 죽음과 불행을 맛보게 되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그 후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이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에 대한 징벌은 그것을 증거한다. 특히 지옥 진리는 그것을 밝히 증거한다.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 외에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밝히 가르친다. 그 몇 구절들을 들어보자.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레미야 30:23, 24,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末日)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 1:2,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선하심

아홉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시편 106:1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씀했다. ‘선(善)하다’는 개념은 ‘이상(理想)에 맞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철학자들이 표현했던 대로, ‘최고선’(最高善)이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랑, 은혜, 인자(仁慈)와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선하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마 5:45).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로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데서 나타났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속적(救贖的)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했고(롬 3:24)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긍휼은 하나님께서 죄의 형벌과 고통 중에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케세드, 자비, 인자)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또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자비롭고(라쿰)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케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셨다(출 34:6).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불순종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다. 그는 자신을 ‘노하기를 더디하는’ 하나님으로 증거하셨다(출 34: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썼다(롬 2: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물들에 대해서도 선하시다. 그러므로 시편 145편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만유[모든 생물들]를 선대(善待)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 . 중생(衆生, 모든 것들, 모든 피조물들)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라고 했다(시 145:9, 15).

 

진실하심

열째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진실이란, 이름과 실질, 속과 겉, 말과 행위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참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중심과 외적인 표현, 그의 말과 행위가 항상 동일하시다. 그는 문자 그대로 참되시다. 그에게는 어떤 거짓도 없으시다. 또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시며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신실함은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요 기쁨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호와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말했다(신 7:9).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라고 말했다(시 36:5). 시편 89:14는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라고 말했고, 시편 92:2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했고(롬 3:4) 또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라고 말했다(딤후 2:13). 히브리서 10:23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였다. 심지어 이방인 선지자 발람도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거짓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민 23:19).

이와 같이, 영(靈)이심,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려진 속성들이다. 이 열 가지 중,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 즉 하나님의 ‘비공유적(非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속성들, 즉 영이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피조물들에게도 어느 정도 나누어 주신 속성들, 즉 하나님의 ‘공유적(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인 우리가 본받을 수 없지만, 공유적 속성은 우리가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것들이며 또 본받아야 할 것들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신론--2. 하나님의 속성들

 2.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의 속성들에 의해 그를 묘사할 수는 있다. 하나님의 속성들(attributes)이란, 하나님께나 그의 하시는 일들에 돌려지는 성질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본체와 그 속성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그 둘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는 각 속성에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은 그의 본체에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본체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을지라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들을 통해 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4문답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열 가지 속성으로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이십니다”라고 하였다.

 

 영(靈)이심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증거하셨다(요 4:24).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말은 그가 물질적 존재가 아니시며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증거하셨다(눅 24:39).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사람이 그의 모양을 만드는 것을 엄히 금하신 것은 그의 영성(靈性)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을 피조세계의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거나 그런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가장 큰 죄로 간주된다.

성경에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표현이 나오지만(출 3:20; 6:6; 사 37:17),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과 활동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47)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징적 표현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형상화(形象化)하는 것은 그런 표현을 오해하는 것이요 성경의 명백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48) 분명히 잘못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골 1:15), “보이지 아니하는 자”(딤전 1:17),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자”(딤전 6:16)라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증거했다(요 1:18).

성경은 때때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 창세기는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였다고 기록한다(창 18장, 창 32장). 출애굽기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장로 70인이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았다고 기록한다(출 24:9, 10). 그러나 이런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천사나 사람의 형상으로 낮추어 계시하신 모습 곧 그의 영광의 한 면모를 보았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표현(마 5:8)도 성도들이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다 밝아진 영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지 하나님의 본체를 본다는 뜻은 아니다. 유한(有限)한 인간은 무한하신 영이신 하나님의 본체를 볼 수 없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살아계신 자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생명 없는 어떤 개념이나 힘이 아니고 살아계신 영이시다. 그는 인간이 만든 생명 없는 우상들과 다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라고 증거했고(렘 10:10) 사도 바울은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다(딤전 6:16).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귀와 눈 등의 상징적 표현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활동하심을 잘 증거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또한 그가 인격적 존재이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인격적 존재이시다. 우주의 완전자 하나님은 절대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그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을 ‘인격적(人格的)’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그가 사람과 같이 지정의(知情意) 즉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자이심을 의미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감정을 가지시며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시고 행동하시는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셨고 사람이 그의 명령을 거역했을 때 그를 내어쫓으셨다. 하나님은 역사상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손과 팔, 귀와 눈 등의 표현들도 그의 인격성의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다(엡 1: 11). 하나님의 분노와 보응도 그의 인격성의 당연한 한 요소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영적으로 드려야 한다. 예배는 외적인 의식보다 마음이 중요하다. 바른 지식과 믿음의 마음, 죄를 미워하고 통회하는 마음, 거룩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무한(無限)하심

둘째로, 하나님은 무한(無限)하시다. 하나님은 본체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그의 속성들에 있어서도 그러하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체가 무한하심을 증거한다. 시편 145:3은 “여호와는 광대하시니[크시니] 그의 광대하심[크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크심을 재어볼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시편 139:7-10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殿)이오리이까?”고 고백한(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은 옳은 말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라고 했고(사 66:1), 예레미야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고 증거했다(렘 23:24).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공간적 의미를 가진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라는 뜻이 아니지만, 그것들을 다 품으실 수 있다는, 그러나 그것들을 초월하신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물질적 몸을 가진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으므로 한 장소에 있으면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공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충만히 존재하신다.49) 그는 어디에나 계시고(遍在)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無所不在).50)

물론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처소 하늘에서 하감(下鑑)하신다’고 말했다(신 26:15). 솔로몬도 하나님께서 ‘그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신다’고 말했다(왕상 8:30). 역대하 30:27은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고 말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9).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므로, 성경은 때때로 그가 땅에 내려오셨다고 표현한다(창 11:5). 또 에녹과 엘리야는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증거되었다(히 11:5; 왕하 2:11). 또 예수 그리스도도 제자들 앞에서 하늘로 올리워가셨다(행 1:9). 이러한 말씀들은 분명히 그들이 하늘 위로 장소적 이동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다는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의 영광의 한 처소를 두셨다는 것을 증거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증거하였다(히 11:16).

하나님은 또한 그의 모든 속성들에 있어서도 무한하시다. 그것은 또한 그의 완전하심이라고도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지식이 무한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시고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무한하시고 선하심이 무한하시다. 즉 그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점에 부족이 없는 완전충족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완전하심은 그의 영광으로 나타난다. 그는 영광 중에 거하시며 모든 피조물들에게서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유일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영원히 가장 사모할 만한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영감 중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고백했다(시 73:25). 욥기 35:6-8,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 그리고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행복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홀로 그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자신을 향해 완전충족하셔서, 그가 만드신 어떤 피조물들도 필요하지 않으시며, 그것들로부터 아무런 영광도 끌어내지 않으시며, 오직 그 자신의 영광을 그것들 안에,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향해, 그리고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모든 것들은 그로부터, 그를 통해, 그리고 그를 위해 존재하며; 그는 그것들 위에 지극히 주권적 통치권을 가지고 계셔서 그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그것들에 의해, 그것들을 위해, 또는 그것들 위에 행하신다.

 영원하심

셋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것은 그가 시간적으로도 무한하심을 의미한다. 그는 영원 전부터 계셨고 영원 후까지 계신다. 창세기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로 시작되었음을 보이는 동시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심을 증거한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이미 존재하셨던 그는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신다. 천지창조 이전에 존재하신 그는 영원하시다. 욥기 36:26은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연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고 말한다. 모세는 시편 90:2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시간은 피조세계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사실상 창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속하지 않으시며 시간에 매이시거나 제약을 받으시지 않고 시간 자체를 초월하는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실 수 있는 초시간적이며 비시간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시편 90:4는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영원한 현재’ 속에 계신다. 엄격히 말한다면, 그에게는 전(前)도 없고 후(後)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촬스 핫지는 말하기를,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없고, 모든 것이 그에게 동등으로 또는 항상 현재이다. 그에게 ‘기간’(duration, 시간 흐름의 과정)은 영원한 현재이다”라고 하였다.51)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그가 시작이 없이 영원히 스스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어떤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절대자’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제1 원인 혹은 궁극적 원인이시다. 그 자신의 존재의 근거는 자신 이외에 없으시다. 사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영원자존하신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여호와’(예호와 혹은 야웨 )라는 그의 이름도 그의 영원자존하심을 나타낸다. 이 말은 ‘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왔고52) 그 의미는 출애굽기 3:13, 14의 말씀대로 ‘그가 스스로 계신다’는 뜻일 것이다.

 

불변하심

넷넷째로,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시편 102:27은 ‘주는 여상(如常)하시다’라고 말했는데, ‘여상(如常)하시다’는 말은 ‘동일하시다’(the same)는 뜻이다. 말라기 3:6은 “나 여호와는 변역지[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했다. 또 야고보서 1:17은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말했다.

물론,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비(非)활동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17).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역사, 즉 그가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은 그의 본체와 속성들의 불변하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뜻과 계획과 작정의 불변하심을 의미한다. 시편 33:11은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증거한다. 또,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증거했다(사 14:24). 하나님은 그가 뜻하신 바를 변경함 없이 다 성취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께서 뉘우치신다, 후회하신다’는 표현이 간혹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예들 들어, 출애굽기 32:14는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했고, 사무엘하 24:16은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고 말했다. 또 요나 3:10은 “하나님이 그들[니느웨 사람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인간편에서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 즉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표현이며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하심에 대한 말씀과 모순된다고 볼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손상시킬 것이다.

무한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은 피조물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이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독특하신 점들이다. 실상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철학적,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이시다. 그는 우주와 인간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대답이시다. 인간은 영원자존하시는 그 분 안에서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으므로 그를 항상 인정하며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지혜로우심

다섯째로,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크심은 그의 창조하신 만물에 잘 증거되어 있다. 성경도 그의 크신 지혜와 지식을 증거한다. 욥은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면서(욥 12:13), 하나님을 ‘지혜(다임, 지식)가 온전하신 자’라고 표현하였다(욥 37:16).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말했다(삼상 2:3). 시편 139:1, 2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 다 세신다고 표현하셨다(마 10:30). 히브리서 4:13은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하였다.

지식은 어떤 대상에 대해 이해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의 대상은 현실적인 것뿐 아니라 가상적인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은 직각적이며(욥 34:23) 독립적이고 총괄적이며 동시적이며 개별적이고 명확하고 완전하며 불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지식은 그 범위가 전(全)포괄적이므로 전지(全知)라고 표현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의 모든 지식의 원천이며 원형(原形)이다. 사람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본받은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한 요소이다. 사람의 지식의 성격은, 하나님의 지식의 성격과 달리, 점진적이며 의존적이고 부분적이며 제한적이고 불명확하고 불완전하며 가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지식과 구별되는 지혜는 지식을 응용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을 응용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최선의 목적을 이루시는 지혜의 하나님이시다. 로마서 11:33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전지하시므로 인간이 그를 속이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행동은 없다. 인간은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솔직해야 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완전하심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그를 의지하며 그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능력이 있으심

여섯째로,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된 말(엘 혹은 엘로힘)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위엄과 능력이 있으시고 그의 능력은 전능(全能)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능자’(솻다이) 혹은 ‘전능하신 하나님’(엘 솻다이, 창 17:1)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며”라고 고백했고(욥 42:2), 예레미야는 “주께서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라고 했다(렘 32:17).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나타나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것도 없음이니라]”고 말했다(눅 1:37).

하나님의 전능은 측량할 수 없는 무제한적 능력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 안에서 스스로 능력의 사용을 제한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 또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성질에 모순된 일들을 행하실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죽으실 수 없고 변하실 수 없고 범죄하실 수 없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했고(딤전 6:16) 또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으며(딤후 2:13)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라고 말했다(삼상 15: 29).

전능하신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행하시는 하나님, 즉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주권성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라는 말(아도나이)이다(창 15:2). 모세는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라고 고백했다(신 10:17). 다윗은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主權)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 . .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라고 말했고(대상 29:11), 여호사밧은,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고 말했다(대하 20:6).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의 구원에 관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9: 26).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크신 능력을 믿으며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망하지 않고 그에게 기도하며 모든 일을 맡기고 잠잠히 그를 바라볼 수 있다. 그에게는 우주와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

거룩하심

일곱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모세는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라고 했다(출 15:11). ‘거룩하다’는 히브리어(카도쉬)는 ‘구별됨, 분리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그가 모든 피조세계와 구별되며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존재의 이 엄위하심은 모든 피조물이 그를 찬송하고 경배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고백했고(시 22:3), 이사야의 환상 가운데 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쳤다(사 6:3).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또한 하나님께서 도덕적으로 모든 죄와 불결로부터 떠나 계심을 의미한다. 도덕적 의미에서의 거룩은 의(義)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이 도덕적 성결은 인간의 도덕적 모범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레 11:45).

 

 의로우심

여덟째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라고 증거했고(스 9:15), 시편 145:17은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라고 말했다. ‘의로운’(찻디크) 혹은 ‘의’(체다카)라는 히브리어는 본래 ‘어떤 기준에 맞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의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완전하시며, 자신의 도덕적 완전성에 항상 일치하는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의 의의 속성은 그가 제정하신 법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일치할 때 의로운 자가 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고 말했다(신 6:25).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지극히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또한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극히 의로우시다. 그는 피조물을 다스리시고 그들의 행위들을 판단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이것을 ‘통치적 의’라고 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의로운 통치자시며 의로운 재판장이시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이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신다’고 고백했고(시 9:8),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불렀다(딤후 4:8).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가 선한 자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데서도 나타난다. 이것을 ‘보응적 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 .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말했다(롬 2:5-8).

특히, 악한 자들에게 벌을 내리는 하나님의 형벌적 의의 속성은 복음 진리를 이해하는데 매우 필수적 요소이다. 하나님께 이러한 공의의 속성이 없었다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구주 예수께서 반드시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벌적 의’ 때문에, 구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증거했다(갈 3:13).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형벌적 공의를 부정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가르친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고 땅은 그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고 그들은 죽음과 불행을 맛보게 되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이나 그 후 악하고 음란했던 소돔 고모라 성의 유황불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이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에 대한 징벌은 그것을 증거한다. 특히 지옥 진리는 그것을 밝히 증거한다. 마가복음 9: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 외에 성경의 많은 말씀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밝히 가르친다. 그 몇 구절들을 들어보자.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예레미야 30:23, 24, “보라,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나 여호와의 진노는 내 마음의 뜻한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末日)에 그것을 깨달으리라.” 예레미야 애가 2:1-4,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 . . 진노하신 날에 . . . 노하사 . . . 맹렬한 진노로 . . .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나훔 1:2, 6,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 . . .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 그 진노를 불처럼 쏟으시니.” 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선하심

아홉째로, 하나님은 선하시다. 시편 106:1은,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고 말씀했다. ‘선(善)하다’는 개념은 ‘이상(理想)에 맞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상에 완전히 부합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철학자들이 표현했던 대로, ‘최고선’(最高善)이시며 모든 선의 원천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랑, 은혜, 인자(仁慈)와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성적 피조물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모두 선하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마 5:45).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로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신다. 그 사랑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데서 나타났다.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구속적(救贖的)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했고(롬 3:24) 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긍휼은 하나님께서 죄의 형벌과 고통 중에 있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케세드, 자비, 인자)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6). 또 그는 모세에게 자신을 ‘자비롭고(라쿰)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케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증거하셨다(출 34:6).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께서 노하기를 더디하심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악인들과 불순종자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신다. 그는 자신을 ‘노하기를 더디하는’ 하나님으로 증거하셨다(출 34: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라고 썼다(롬 2:4).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생물들에 대해서도 선하시다. 그러므로 시편 145편에서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만유[모든 생물들]를 선대(善待)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 . 중생(衆生, 모든 것들, 모든 피조물들)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라고 했다(시 145:9, 15).

 

진실하심

열째로,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진실이란, 이름과 실질, 속과 겉, 말과 행위가 같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참 하나님, 곧 참되고 완전한 신성을 가진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중심과 외적인 표현, 그의 말과 행위가 항상 동일하시다. 그는 문자 그대로 참되시다. 그에게는 어떤 거짓도 없으시다. 또 그는 그의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시며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신다. 약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신실함은 성도들의 믿음과 소망의 근거요 기쁨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호와는] 신실한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라고 말했다(신 7:9).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라고 말했다(시 36:5). 시편 89:14는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라고 말했고, 시편 92:2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했고(롬 3:4) 또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항상 신실하시니]”라고 말했다(딤후 2:13). 히브리서 10:23은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교훈하였다. 심지어 이방인 선지자 발람도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食言)치[거짓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다(민 23:19).

이와 같이, 영(靈)이심,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성경에서 하나님께 돌려진 속성들이다. 이 열 가지 중, 무한하심, 영원하심, 불변하심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 즉 하나님의 ‘비공유적(非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나머지 일곱 가지의 속성들, 즉 영이심, 지혜로우심, 능력이 있으심, 거룩하심, 의로우심, 선하심, 진실하심은 피조물들에게도 어느 정도 나누어 주신 속성들, 즉 하나님의 ‘공유적(共有的)’ 속성들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은 피조물인 우리가 본받을 수 없지만, 공유적 속성은 우리가 어느 정도 나누어 가진 것들이며 또 본받아야 할 것들이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진실하심 등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들을 본받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Wednesday, July 25, 2018

전능하신 하나님

9장 어려운 일이 전혀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절대적인 지혜는 물론 그분의 절대적인 능력을 염두에 두어야만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행하실 수 없고 그 기쁘신 뜻을 이루실 수 없다면 더 이상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선하다고 판단하시는 일을 행하려는 의지를 지니고 계신다면 당연히 그러한 의지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이란 그분이 기뻐하시고, 무한한 지혜로 인지하시고, 무한히 순결한 의지로 행하시려는 일을 모두 이루실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의미한다. … 거룩함이 다른 모든 속성에 아름다움을 부여하듯 권능은 하나님의 나머지 속성에 생명과 동력을 제공한다.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모두 헛된 공약(空約)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으면 그분의 자비는 무기력한 연민으로, 그분의 약속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분의 경고는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 자신처럼 무한하고 영원하고 불가해한 성질을 지니며, 그 어떤 피조물도 방해하거나 제한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다”(스테판 차녹).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시 62:11)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한 번 말씀하시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 테지만 그분의 말씀은 영원하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는 것으로 족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유한한 인간은 여러 번 말을 해도 귀담아듣는 이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우레처럼 온 천지를 진동시킨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뇌성을 발하시고 지존하신 자가 음성을 내시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 그 살을 날려 저희를 흩으심이여 많은 번개로 파하셨도다 이럴 때에 여호와의 꾸지람과 콧김을 인하여 물 밑이 드러나고 세상의 터가 나타났도다”(시 18:13-15).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는 것으로 족하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권위를 기억하라.

“대저 궁창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권능 있는 자 중에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시 89:6).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 4:35).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의 권능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리스도께서는 문둥병자에게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 8:3)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그분은 죽은 지 이미 나흘이 지난 나사로에게 “나오라”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죽은 자가 무덤에서 살아 나왔다. 사나운 파도와 강풍도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잠잠해졌고, 귀신들의 군대도 그분의 권위 있는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하나님 = 권능자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시 62:11). 

능력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이 능력을 나눠주지 않으시면 우주의 그 어떤 피조물도 최소한의 능력조차 지닐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권위자의 인정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능력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 자신처럼 독립적이며 자립적이다. 가장 강한 인간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요새화된 성(城)에 마련된 보좌 위에 앉아 있지 않으시고, 자신을 보호해줄 다른 무장 세력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의 궁전은 신하들의 힘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그분은 피조물의 힘을 빌려 영광을 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자신이 모든 권능의 원천이자 근원이시다”(찰스 스펄전).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은 물론 그분이 철저히 독립된 존재시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하나님의 엄위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準繩, 평면의 경사를 재기 위하여 치는 줄)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욥 38:4-6).

참으로 인간의 교만을 납작하게 만드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인자(人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을 … 너희가 보리라’(막 14:62)라는 말씀에서 ‘권능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보다시피 능력이 하나님을 일컫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과 능력은 서로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의 본질은 지극히 광대해 한 장소에 국한될 수 없고, 끝이 없이 영원해 한 시점에 머물 수 없으며, 그 권능이 무한해 하나의 행동에 제한되지 않는다”(스테판 차녹).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 그 큰 능력의 우레야 누가 능히 측량하랴”(욥 26:14)라는 말씀대로, 누가 감히 하나님의 거대한 능력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이해하는 것은 고사하고 보이는 세상에 드러난 그분의 능력조차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드러난 능력보다 그분의 본질 안에 내재된 능력이 무한히 더 크다.

창조와 섭리와 구속(救贖)의 사건은 하나님의 길을 어렴풋이 드러낼 뿐이다. “그 권능이 그 속에 감취었도다”(합 3:4)라는 말씀이 이런 사실을 분명히 한다. 하박국서 3장에 묘사된 표현들보다 더 웅대한 표현을 상상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모든 표현들조차도 4절에 압축되어 있는 개념을 능가하지 못한다. 

하박국 선지자는 환상 중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산을 무너뜨리고 뒤집어엎으시는 모습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잘 보여주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기보다 오히려 “감춰졌다”라고 증언했다. 이 말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지극히 위대하고 불가해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자연 만물을 진동시키는 그분의 권능, 즉 겉으로 드러난 능력보다 그분의 무한한 권능 안에 숨겨진 능력이 훨씬 더 크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을 함께 생각하면 이런 사실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욥 9:8)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무소불위한 능력을, “그가 … 궁창으로 걸어 다니실 뿐이라”(욥 22:14)라는 말씀은 모든 곳에 편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람 날개 위에서 걸어 다니시며”(시 104:3, 개역한글성경은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라고 번역했다 - 역자 주)라는 말씀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사역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각각 묘사한다.

특히 마지막 표현은 매우 놀랍다. ‘날아다니다’, ‘뛰어다니다’라는 표현 대신에 ‘바람 날개’ 위에서 ‘걸어 다니다’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잘 알다시피 바람은 자연의 요소 가운데 가장 맹렬한 성질을 지닌다. 바람은 광포하게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모든 것을 휩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바람을 발아래 두시고 완벽하게 통제하신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들

💠창조 사역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

“하늘이 주(主)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 남북을 주께서 창조하셨으니”(시 89:11,12).

인간은 일을 하려면 먼저 도구와 재료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이 일을 시작하시고, 말씀만으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다. 우리의 지성으로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은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라고 말씀한다. 원재료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했다. 

“하나님이 …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창 1:3). 우리는 “주의 팔에 능력이 있사오며 주의 손은 강하고 주의 오른손은 높으시니이다”(시 89:13)라고 찬양해야 마땅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이성(理性)의 눈으로 그 안에서 움직이는 별들을 바라보는 사람 가운데 ‘저 거대한 천구(天球)들이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을까?’라고 궁금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입에 담기만도 너무 벅찬 사실은 그것들이 아무 재료 없이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모두 허공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웅대한 우주 만물이 무에서 창조되었다.

최고의 건축가이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도구로 만물의 요소들을 그토록 정교하고 섬세하게 지으시고, 우주 전체에 그토록 아름다운 광채를 입히셨을까? 어떻게 모든 것이 제각기 적절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어 이토록 아름다운 구조를 이루었을까?

단 한 마디의 명령, 곧 ‘있으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하나님은 그 이상의 말씀을 덧붙이지 않으셨다. 

말씀 한 마디에 온갖 아름다움으로 장식되고 수없이 많은 완전함을 지닌 이 웅장한 우주가 탄생했고, 기쁨에 찬 스랍들은 찬양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제임스 허비).

💠만물의 보존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왕골(식물의 일종으로 습한 땅에서 자람)이 진펄(늪)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욥 8:11)라고 말씀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식물을 먹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고, 식물은 열매를 맺게 하는 비가 땅을 적시지 않으면 곧 말라 죽고 만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여호와여 주(主)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시 36:6)라고 말했던 이유이다.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히 1:3). 하나님의 능력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모든 인간의 생명을 유지한다. 태아가 그렇게 비좁은 공간에서 코로 공기를 들이마시지도 않는 상태로 여러 달을 견딜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으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는”(시 66:9) 분이시다.

땅을 흉용한 바다로부터 보존하는 것도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낸다. 어떻게 그토록 사나운 바닷물이 하나님이 처음에 정해주신 한계에 갇혀 땅 위로 흘러넘치거나 낮은 곳을 휩쓸지 않고 수로를 따라서만 흐를 수 있단 말인가? 물은 땅보다 가볍기 때문에 성질상 땅 위에 존재하고,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대기 아래 존재하기 마련이다. 누가 물의 자연스러운 속성을 제한하는가?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물을 어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이다.

“(하나님께서)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였었노라”(욥 38:11).

이처럼 세상의 보존도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이다.

💠통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

이번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그분의 권능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사탄의 악한 의도를 억제하신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는 말씀대로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하고 사람들, 특히 성도를 적극적으로 대적한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시기했듯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우리를 시기한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욥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히려고 한다. 다시 말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땅의 소산을 모두 불태우고, 가축들을 죽이고, 강풍으로 집을 날려버리고, 온몸에 악창이 돋아나게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탄에게 재갈을 물리신다. 하나님은 사탄이 악한 의도를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막으시고 명령으로 그를 다스리신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억제하신다. 하나님은 창조주를 배신한 인간으로 인해 얼마나 끔찍한 재난이 초래되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해 종종 많은 죄의 도발을 묵묵히 참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제어하시는 고삐를 완전히 놓아버리신다면 인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불행을 향해 치달을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롬 3:14,15)라고 말씀한다. 아담의 후손은 모두 그러한 본성을 타고났다. 만일 하나님이 개입하시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제어하지 않으신다면 제어되지 않은 무모한 어리석음과 음탕함이 온 세상을 휩쓸 것이 틀림없다. 시편 93편 3,4절을 읽어보라.

“여호와여 큰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소리를 높였고 큰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위대하시니이다.”

💠심판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능력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도 그분의 권능을 드러낸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아무도 그분을 거역할 수 없다. 

“내(하나님)가 네게 보응하는 날에 네 마음이 견디겠느냐 네 손이 힘이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룰지라”(겔 22:14).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지는 이미 대홍수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하나님은 하늘의 창들을 여시고 깊음의 샘들을 터뜨리시어 폭풍우와 같은 그분의 진노 앞에서 그저 무기력하기만 했던 인류를 지상에서 쓸어버리셨다. 또한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평지의 도시들을 멸망시켰다. 바로와 그의 군대도 홍해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자 아무 힘도 쓰지 못했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 9:22)라는 말씀이 암시하는 대로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두렵기 그지없다. 하나님은 저주받은 자들을 그 놀라운 권능으로 지옥에 가두실 뿐 아니라 그 육체와 영혼을 죽지 않게 보존하시어 영원히 불못에서 고통받게 하신다. 

따라서 모두가 그런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어야 마땅하다. 우리가 지렁이를 밟아 죽이는 것보다 더 쉽게 우리를 으깨어 죽이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옷 입으신 분, 곧 원하시면 언제라도 우리를 갈기갈기 찢으시거나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 있는 하나님을 공공연히 대적하는 것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미치광이나 할 짓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시 2:12)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거듭난 영혼들도 그런 하나님을 우러러보아야 마땅하다. 무한히 경이롭고 완전하신 하나님은 뜨겁고 열정에 찬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세상에서 권세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세인의 찬사를 이끌어낸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외심과 존경심을 우리 마음에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여 신(神)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출 15:11)라고 찬양했다.

성도는 그런 하나님을 마땅히 신뢰해야 한다. 그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하지 않고 그분의 힘이 한계가 있다면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능하신 능력으로 옷 입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기도에도 다 응답하실 수 있고, 어떤 필요도 다 채워주실 수 있으며, 어떤 욕망도 다 가라앉히실 수 있고, 어떤 유혹에서도 쉽게 구원하실 수 있으며, 어떤 불행에서도 능히 건져내실 수 있으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1)라고 노래했다. 바울 사도도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이라고 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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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uly 23, 2018

감사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따라 다닙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따라 다닙니다


/ 강준민 목사(새생명비전교회)

토마스 아 켐피스(주: 중세 독일의 영성 수도사, 기독교 고전인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는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은혜가 따라다닌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다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복 있는 사람의 비밀을 감사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원망하고 불평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의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감사의 사람이 될 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주위에 행복한 사람들을 찾아보십시오. 그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감사에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사를 통해 기쁨을 누리는 것일까요?

첫째, 감사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족하지 못합니다. 늘 더 높은 것을 탐하고, 더 많은 것을 탐합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감사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늘 ‘과분해’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와 축복이 자신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의 ‘덕분에’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영만 교수님은 ‘덕분에’라는 말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덕을 나누어 준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덕을 많이 쌓은 분이 덕을 우리에게 나누어준 덕분에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누군가가 베풀어 준 덕을 통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부모 덕분에, 남편과 아내 덕분에, 자녀 덕분에, 교회 덕분에, 선생님 덕분에, 친구 덕분에”라는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족합니다. 더 높은 것이나, 더 많은 것을 탐하기 보다는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압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누릴 줄 압니다.

둘째, 감사하는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감사’라는 영어 단어는 ‘thank’입니다. ’thank’라는 말은 그 어원이 ‘think’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감사는 생각을 통해 옵니다. 생각이란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십자가의 사랑를 깨닫고, 사람들의 배려를 깨달은 사람이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복을 세어보는 것입니다. 반면에 질투란 다른 사람이 받은 복을 세어보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기쁨이 충만해지지만 질투하면 원망이 불 일 듯 일어납니다.

셋째, 감사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지혜는 분별을 통해 올바른 것, 최상의 것을 선택하는 능력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불평을 선택합니다. 불평을 선택하는 것이 어리석은 까닭은 불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불평하면 불만만 생깁니다. 불평하면 불행해 집니다. 불평하면 관계가 나빠집니다. 반면에 감사를 선택하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감사는 감동을 줍니다. 감사하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사람들은 감사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감사하면 최상의 것이 찾아옵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자꾸 생깁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불행할 때 감사하면 불행이 끝이 나고, 형통할 때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고 말했습니다.

넷째,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줄 압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보통사람이 감사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과 시련과 억울한 일까지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그 순종이 어떤 열매를 맺는 가를 지켜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항상 감사했습니다(엡 5:20). 그가 에베소교회에 범사에 그리고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는 편지를 쓸 때,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고난이 찾아왔을 때 그 고난을 무조건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재료를 통해 아름다운 미래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고난의 때에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고난마저도 감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그들을 더욱 영광스럽게 만드셨습니다. 우리 함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분들에게 감사합시다. 추수감사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