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ly 18, 2018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

조광호 (서울장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들어가는 말

     R. 페쉬는 바울이 아덴에서 행한 아레오바고 연설을 "(아마도) 세계문학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구절"이라고 평가하고 있다.1) 이 연설은 “기독교와 헬레니즘이 처음으로 만난” 사건이라는 D. 즈벡의 설명처럼,2) 기독교 신앙이 이방의 문화, 철학 사상과 접촉하여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린 한 전형으로서 높이 인정되고 있다.3) M. 피도로비츠도 최근의 논문에서4)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은 기독교 신앙을 성공적으로 문화와 접목시키고, 토착화시킨  예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행전 17장이 특별히 선교학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하겠다.5)

    아레오바고 연설은 신약학자들 간에도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비중 있게 다루어져 왔다. 일찍이 M. 디벨리우스는 아레오바고 연설이야 말로 사도행전의 백미 중에 하나라고 평가 했으며, 또한 이 연설 안에 저자가 사도행전에서 말하고자 하는 모든 요소들이 다 들어있다고 극찬했다.6) C.K. 바렛은 누가가 쓴 바울의 아덴 방문 기사만큼 그렇게 완전히, 그리고 자주 토론된 신약의 구절은 별로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7)

    이 아레오바고 연설이 어떤 형식에 속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학자들 간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왔다. 예를 들면 E. 노덴은 선교설교(Missionspredigt)로8), M. 디벨리우스는 이방인을 위한 설교(Heidenpridigt)의 한 정형9)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이 연설의 배경에 어떤 사고가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유대 선전문서에 영향을 받은 헬라적 사고가 배후로서10) 그 기본 정신은 유대-기독교적이라고 보는 E. 노덴으로 대표되는 입장과, 다른 하나는 스토아 철학이 배경이라고 보는 M. 디벨리우스로 대표되는 견해가 바로 그것이다.11)

    한편 K.O. 샌드네스는12) 고대 희랍의 수사학적인 양식에 따른 분류를 적용하여 (아리스도텔레스, Rhet 1.3.1-4; 키케로, Her. 1.2.2) 아레오바고 연설을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연설의 종류에는 법정(forensic), 토의(deliberative), 칭송(epideictic)연설이 있는데,13) 아덴에서의 연설은 그곳 사람들의 호기심이 동기가 되어 행해졌다는 점에서 법정연설이 아니며, 또한 칭송이나 애도와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칭송연설도 아니라는 것이다.14)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도행전 20:21에 따르면 바울의 말씀 증거 활동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아레오바고 연설은 그 종류가 토의연설이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사도행전 17장은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연구되어져 왔다. 하지만 우리 신약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15) 따라서 본 소논문은 이를 보완하는 의미에서, 우선 아레오바고에 대한 지리적인 내용을 탐구한 후 (몸말, I.A.),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몸말 I.B.). 이어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어떤 형태의 심문을 당했는지 살핀 후(몸말 I.C.), 다음 장에서 아레오바고 연설을 (22-31절) 분석하고 그 의미를 파악한 다음 (몸말 II.), 마지막으로 누가의 아레오바고 연설 기록과 실제 바울과의 관련성에 대해 (몸말 III.) 고찰해 본다.

몸말

I. 아레오바고

A. 위치

    “아레오바고”(#Areio" Pavgo")는 전쟁의 신 #Arh"에서 유래된 형용사 #Areio"(“호전적인, 전쟁의, 아레스 신의”)와 언덕이라는 단어 Pavgo"가 연결된 용어이다. 아레스는 남신 제우스와 여신 헬라 사이에서 태어난 전쟁과 학살, 역병의 신이다. 따라서 “아레오바고”라는 뜻은 전쟁과 재난의 신, 아레스의 언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아덴 시의 광장인 아고라(Agora)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m, 그리고 아크로폴리스(ajkrov-poli" 문자적으로는 "the upper city" 즉 "citadel")의 중심부인 판테온 신전에서 북서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아레오바고는 해발 80-90m이며 아크로폴리스는 110m이다.16)

    아덴의 북서쪽에 위치한 디필론(Dipylon) 성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판테온이라 불리우는 거리를 따라 아덴시 중앙에 위치한 아고라 광장에 이르게 된다. 이 광장은 시민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나 또는 공공 회합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특별히 아고라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던 Stoa Poikile는 (“채색된 주랑”이라는 뜻) 철학자들의 쉼터로 유명하였다. 저명한 철학자 제논은 그곳에서 토론을 하거나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후계자들은 “스토아 철학자”라고 불리워지게 되었다.17) 이 아고라는 해발 60-70m에 위치하고 있다. 아고라를 지나 남동쪽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다 보면, 오른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길이 200m, 폭 100m 정도의 자그마한 언덕이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아레오바고 언덕이다.18)

B. 아레오바고: 언덕인가 기관 이름인가?

    바울이 연설을 했던 ‘아레오바고’가 실제 무엇을 뜻하느냐는 질문은 사도행전 17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17:34에 따르면 바울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자 중에서 아레오바고 관헌 (#Areopagivth") 디오누시오가 거론되고 있다. “관헌”이라는 명칭에 근거할 때, ‘아레오바고’는 지명 이름이 아닌, 기관의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아레오바고’가 앞에서 말한 단순한 언덕을 지칭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관청을 일컫는 것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아레오바고’의 뜻을 파악하는 문제는 또한 ‘바울이 어디서 아덴사람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변론 했는지’라는 물음과도 연결이 된다. ‘아레오바고’가 언덕이라고 할 때에, 바울의 연설 장소는 앞에서 언급한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 사이에 위치한 언덕이 된다. 하지만 ‘아레오바고’를 기관의 이름으로 본다면, 바울이 연설한 곳은 이 기관의 소재지나, 회합을 가진 장소가 어디였느냐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바울이 연설을 했다고 보는 대표적인 학자는 M. 디벨리우스이다.19) 그는 언덕 위가 협소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운집하기 힘들다면20) 거기서부터 아크로폴리스 방향으로 남동쪽의 공간에 모였을 수 있다는 주장까지도 한다.21)

    한편 W.M. 람세이22), F.F. 브루스는23) 아고라 광장에 위치한, 주요 주랑(柱廊 Colonnade) 중의 하나인 Stoa Basileios(‘왕의 주랑’)에서 바울이 연설을 행했다고 본다. C.J. 헤머도 자신의 소논문에서24) 고대의 저술 중에서 아레오바고와 관련되는 부분을 검토한 결과, 그 회합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열렸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고대 희랍 시대부터 의장 Archon Basileus가 주재한 회의, 아레오바고가 있었는데, 이것은 왕을 위한 고문단이 발전된 형태였다. 이 회합은 재판을 관할했으며 정치적인 사안을 결정하기도 했다.25) 플루타크(Sol. 19)에 따르면 아레오바고는 예로부터 아덴의 ‘살인 법정’ 역할을 수행했으며 솔론 시대에는 풍습과 규율을 관장하는 최고의 기구였다.26) 풍부한 경험을 지닌 사람들(Archonten)만이 회원이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모임은 대단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민주정 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페리클레스의 동료인 Ephialtes는 주전 462년에 아레오바고가 부패되었다는 이유로 이 기구가 갖고 있던 대부분의 정치적인 권한을 박탈했다. 또한 재판권도 다른 기관으로 이양했고 단지 피의 재판정과 종교적인 영역을 관할하는 권리 등 만 남겨두었다. 로마인들이 그리스를 점령하자 그들은 귀족적이고 보수적인 요소들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레오바고는 정치적인 권한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27) 제정 시대의 금석문들을 살펴 보면 아레오바고는 가장 많이 거론되는 기구 중의 하나로서, 아덴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처럼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28)

    아레오바고는 일반적으로 Stoa Basileios에서 회합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이 주랑은 정방형의 모양인 아고라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었다.30) P.M. 프래서의 발굴 보고에 따르면31) Stoa Basileios는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의 연구를 종합해 볼 때,32) 아레오바고는 바울 당시 아덴 시 아고라의 한 편에 위치한 Stoa Basileios에서 모임을 가졌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모임은 시의 주요 문제, 특별히 종교, 교육에 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다.33) 따라서 새로운 종교를 전파하려는 바울이 호기심 많은 아덴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했다고 할 때, 이 아레오바고는 아레스의 언덕이 아니라 기관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34)

C. 아레오바고와 바울: 재판, 심문, 토론?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사람들로부터 어떤 형태(재판, 심문, 논쟁)의 닦달을 당했는지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아레오바고 연설 및 그 정황과 관련하여 사용된 주요 단어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가 붙들려 아레오바고로 보내질 때 쓰인 동사 ejpilambavnmai(“붙들어 가지고” 19절)는35) ‘체포’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동사 ejpilambavnmai가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끌려갔다”는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W. 바우어의 사전에36) 따르면 이 단어는 여러 곳에서 나온다 (막 8:23; 마 14:31; 눅 9:47; 14:4; 23:26; 행 9:27; 16:19; 17:19; 18:17; 21:30, 33; 23:19; 히 8:9). 그 외에 전의(轉意)적 의미로 몇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눅 20:20, 26; 딤전 6:12, 19; 히 2:16). 그중에서 다음 곳에서 (마 14:31; 막 8:23; 행 23:19; 히 8:9; 눅 9:47; 14:4; 행 9:27; 그리고 전의의 의미로 사용된 눅 20:20, 26; 딤전 6:12, 19; 히 2:16에서) 단어 ejpilambavnmai는“강압적인 분위기 가운데 사람을 끌고(데리고)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러한 경우는 다음의 곳들 뿐이다 (눅 23:2637); 행 16:19; 18:17; 21:30, 33). 따라서 19절의 헬라어 동사 ejpilambavnmai에 근거하여 바울이 아레오바고에 끌려갔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38) 그리고 22절의 첫 단어 Staqeiv"도 4:7와 연관하여 생각할 때, 바울이 피고로 법정에 세워진 것이라고 해석될 여지는 있다39). 하지만 사도행전 2:14; 5:20; 27:21 등에서 보듯이 이 동사는 바울이 연설할 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에 근거해 바울이 법정에 세워졌다고 주장하기는 힘들다.40)

    바울이 아고라에서 만나 토론한 자들은 스토아 철학자나 에피큐레스 철학자들인데41)(17:18), 이들은 바울이 예수와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하자 그를 이방 신들(xevnwn daimonivwn)을42) 전하는 자 라고 판단하고 (18절) 아레오바고에 데려가서, 그에게 새 교(hJ kainh; au{th hJ ... didachv)에 대해 알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19절). 이어 나오는 절에서도 (20절) 계속 그들은 이상한 것에(xenivzonta tina) 대한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는 21절에는 아덴 사람들과 이 도시에 머무는 외국인들(xevnoi)이 가장 새로운 것 (ti kainovteron) 외에는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자들이라는 보충 설명이 등장한다.43) 여기서 저자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복음을 선포한 바울에 대해, 오직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아덴에 거하는 자들이, 어떻게 반응 하는 지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44) 32절에 따르면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로 요약되는 연설을 끝내자 한편의 사람들은 조롱했지만(ejcleuvazon “기롱도 하고”)45), 다른 사람들은 다시 말을 들어보자고 한 점, 그리고 33절에 의하면 바울은 별다른 제재 없이 아레오바고를 떠날 수 있었다(ejxh'lqen ejk mevsou aujtw'n)는 점46), 또한 연설을 들은 자들 중 몇몇은 바울의 편이 되어 (kollhqevnte" aujtw'/) 믿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헌(oJ !Areopagivth")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리(Davmari")라고 하는 여자도 있었다는 점에서, 바울은 수인이나 혐의자의 신분으로 재판이나 심문을 받았다기 보다는47) 토론 형식을 통해서 아덴에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33절의 ejk mevsou aujtw'n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바울의 연설을 들은 청중들이 누구인지 추측할 수 있다.48) 문맥상으로 볼 때, 이들은 다름 아닌 새로운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스토아, 에피큐레스 학파에 속한 철학자들이거나 (18a절) 아덴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이다 (21절). 이러한 점도 바울이 아레오바고에 의해 심문을 당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II. 아레오바고 연설

    M. 디벨리우스는 아레오바고 연설(24-31절)을 크게 22-23절의 서론, 24-29절의 본론, 그리고 30-31절의 결론, 세 부분으로 나눈다.49) 그에 따르면 본론은 다시 24-25절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창조주이시자 세상의 주님이신 하나님’), 26-27절 (‘인간은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진 존재’), 28-29절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이므로 우상숭배를 해서는 안된다’)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와 달리 H. 콘첼만은 준비 부분(22-23절)에 이어, 첫 째(24-26절), 둘 째(27-29절), 세 번째 부분(30-31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50) 한편 박응천은 아래와 같이 구분한다51): 22b-23절 (Exordium, 서두), 24-25절 (Propositio, 연설의 주제), 26-29절 (Confirmatio, 논증), 30-31절 (Conclusio, 결론). 본 장에서는 이처럼 학자마다 다르게 구분되고 있는52) 아레오바고 연설의 구조 및 내용에 대해 분석해 봄으로서, 본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22-23절이 서론 부분에 속한다는 사실은 학자들 간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53) 바울은 우선 아덴 사람의 신앙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22절). 이로서 ‘그가 새로운 신을 소개하려는 것은 아닌가’라는 아덴 사람들의 의혹을 불식시키고, 연설을 듣는 청중들로부터 호의를 얻음으로서 그들의 마음과 귀를 열도록 유도하고 있다.54)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 대해55) “종교성이 많도다”라고 할 때의 단어(deisidaimonestevrou")는 이곳 외에 다른 신약성서에서는 나오지 않고 있다. “경건한”, “종교적인 (deisidaivmwn)”이라는 뜻의 명사형(deisidaimoniva “종교”)도 사도행전 25:19에 오직 한 번 나오고 있다. 따라서 단어군 deisidaivmwn는 신약에서 누가 만이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 단어군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초자연적인 것, 즉 신(qeov")을 의미하는 명사 daivmwn에서 유래되었다.56) 따라서 deisidaivmwn(deisidaimoniva)은 신에 대한 경건한 태도, 즉 종교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57) 이 단어가 아덴인들을 칭찬하는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고는 볼 수 있다.58)

    바울은 도시를 두루 다니며 아덴 사람들이 위하는 것들(sébasμα)을59) 보던 중,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壇)도60) 보았는데, 이에 대해 설명하겠다고 선언한다(23절). 이로서 그는 헬레니즘 종교와 기독교 간의 접촉점을 찾아, 그것을 기반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설명 한다.61)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내용이 쓰여 있는 제단이 아덴에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62) 하지만 문학 작품이나 비명을 통해 볼 때 이와 같은 내용이 확인 된다63). 아덴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바울 자신이 전하려는 하나님이라는 논지인데,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누가는 바울의 입을 빌어, 이방사람인 아덴인들도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신에 대한 인식은 갖고 있다고 보고 있다.64)

    본론에서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65) 이야기로 말문을 열고 있다 (24-25절): 하나님은 세상(kovsmo")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신 분(oJ poih́sa" 사 42:5; 사 45:18 LXX; 행 4:24)이시다 (24a절). 따라서 그분은 손으로 지은 전에 거하지 아니하시며 (24b절, 참고: 행 7:48; 사 66:1f)66),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아니하시는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시다 (25a절, 참고: 시 50:8-13; 막하비2서 14:35; 막하비3서 2:9; 필로, Spec Leg I 271). 재차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25b절의 내용(“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은 신약성서 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표현이다 (참고 사 42:5; 창 2:7; 지혜서 1:14; 막하비2서 7:23).

    다음으로 바울은 앞에서 서술한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대해 어떤 일을 행한 분이신 지에 대해 설명 한다 (26-27절): 하나님은 한 사람(ejx eJno;")67)으로부터 모든 민족(pa'n e[qno" ajnqrwvpwn)을 만드사 (창 1:28; 5:1ff; 참고 롬 5:12ff), 온 땅에 거하게 하신 분으로서 (26a절),인류를 위해 연대를 정하시고 거주의 경계를 한하신 분이시다 (26b절68), 참고: 시 73:17 LXX ejpoíhsa" ... ta; o{ria th'" gh'": qe;rο" kai e[ar, ... plasa").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까닭은 만약 사람이 그를 더듬어 찾으면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7ab절, 참고: 사 45:19; 55:6; 지혜서 1:1). 27b절에 나오는 표현 “혹 더듬어 찾아”는 eij + a[ra + 희구법 과거 (yhlafhvseian)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기대감’을 표현하고 있는 구문이다.69) 이어서 나오는 설명,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 (27c절)”는 스토아 철학에서 종종 언급되는 내용이다 (세네카 Epistolae 41,4; 참고 시 139; 145:18; 렘 23:23).

    다음으로 (28-29절)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긴밀한 관련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28a절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하나님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kinouvmeqa) 존재한다 (28a절).70)이 상반절의 내용을 더욱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해 바울은 아덴의 한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28b절 “우리는 그의 소생[gevno"]71)이라”). 이 시인은바울과 동향인인 아랏(Arat 대략 주전 270년 경 사람)으로, 그가 지은 파이노메나(Phainomena)의 한 구절이 인용된 것이다. 이로서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다시 강조한다. 29절은 앞 절의 언명을 근거로 우상숭배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생이므로, 하나님을 금, 은, 돌에 인간의 기술이나 생각으로 새긴 것들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참고 지혜서 15:16; 사 40:18f; 44:9ff).

    연설 마지막 부분에서(30-31절) 결론적으로 바울은 먼저, 시대를 두 부분으로 나눈다 (30절). 앞의 시대는 무지의72) 때였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고 계시는 때이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인, 전자의 시기에 (참고 지혜서 12:20; 14:16) 하나님은 눈감아 주셨지만 (uJperidwvn73) 30a절), 그가 계시된 때인 (참고 벧전 1:14) 지금은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74) 명하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보는 (눅 24:47; 행 2:38) 누가에게 있어, ‘회개’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누가가 파악한 인류 역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신학적인 통찰은 미래에 대해서 까지 (31절) 미친다75):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을 정하셨다 (시 9:7ff; 96:13; 98:9). 천하76)(oijkoumevnh)를 심판하실 때의 기준은 “의(dikaiosuvnh)”이다. 심판은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 진다. 여기서 비록 직접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77) 이 ‘한 사람’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자의 역할(참고 10:42)을 담당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부활 사건(13:30, 34)에 의해 확증 된다78) (31c절).

    

III. 아레오바고 연설과 바울

    바울이 행했던 아레오바고 연설이, 어떤 경로로 사도행전에 현재의 형태로 보존되게 되었는지의 과정에 대한 정확한 규명은 불가능하다.79)하지만 누가가 기록한 아레오바고 연설과 실제 바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80) 이 둘의 관계란 다시 말해, 누가가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두 번 째 글에서, 어느 정도로 바울의 전도설교의 내용을 수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검토를 의미한다. 바울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연설을 비교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이것이 바울과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81)

    아레오바고 연설과 바울 서신 간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음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아덴의 철학자들은 예수와 몸의 부활을 전하는 바울을 일컬어 “이방 신들을 전하는 말장이(xevnwn daimonivwn kataggeleu;" 18절)”라고 한다. 이때 사용된 단어 daimonivwn는 사도행전에서 단 한번 밖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서 앞(몸말 II.)에서 살핀 바와 같이, 단어군 deisidaivmwn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란 점에서, 중립적인 뜻을 내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82) 이에 반해 고린도전서 1:20, 21에서 바울은 이방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아닌 귀신들에게(daimonivoi")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재차 주의 잔과 귀신들의 잔을, 주의 상과 귀신의 상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으로 다신교의 신들이 언급되면서 하나님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바울 서신에 나타난 daimonivon에 대한 입장은 아레오바고 연설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83)

    23절에 나오는 단어군84) eujsebéω (위하는, ehrfürchtig sein, fromm sein)는 신약성서 중, 사도행전과 목회서신에서 만 사용되고 있다. 아덴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위해’왔던 신이 바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사도행전의 내용(24ff절)이 바울 서신과 조화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과거 고린도 교인들의 상태를 일컬어 “말 못하는 우상(ta; ei[dwla)에게로 ... 끌려 갔느니”라고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고전 12:2), 이 세상의 신(oJ qeo;" tou' aijw'no" touvtou)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추이는 것을 방해한다고 말하고 있다 (고후 4:4). 그리고 이방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사고가 바울에게 기본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살전 1:9). 이는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에 대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한 상태 (tovte ... ejdouleuvsate toi'" fuvsei mh; ou\sin qeoi'")” 라고 표현한 내용에서도 (갈 4:8) 확인된다. 즉 바울이 볼 때, 우상을 믿던 과거와 (갈 4:8),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살전 1:9) 섬기는 지금 간에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이 둘 간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만이 존재한다. 이와 비교할 때,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비록 과거에 알지 못했지만 ‘위했다’고 설명함으로서 (23절) 복음이 선포되기 전과 후 사이의 연속성을 인정하고 있다.

    사도행전 17:22-31과 로마서 1:18-32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방인들이 과거 섬겨온 신들 중에는 알지는 못했지만 하나님도 있었다’라는 아레오바고 연설과, 인간의 무신성을 낱낱이 고발하고 모든 불의는 핑계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선언되고 있는 로마서 1:18 이하의 심판 내용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85)

 

    하지만 아레오바고 연설은 선교설교의 정형이며,86) 바울도 바로 이러한 형식의 설교를 했다는 점에서 둘 간에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 바울의 대표적인 선교설교의 구절로는 데살로니가전서 1:9f을 들 수 있다. 이곳에 등장하는 테마들, 예를 들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아들”, “장래 노하심” 등은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각각의 내용들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회개” (30절),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 알게 하리라” (23절),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 (31절), “심판할 날” (31절).

    여러 관점에서 바울의 사상과 아레오바고 연설을 비교한 W. 나욱도87) 무엇보다도 누가가 바울의 선교설교의 내용을 충실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레오바고 연설은 실제 아덴에서 선포된 바울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물론 아레오바고 연설에는 바울이나 신약성서에 나타나지 않는, 주로 스토아 철학에서 사용되는88) 생소한 개념들이 등장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 분’89),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분’90), ‘인간은 과거에 하나님을 몰랐다’91) 등.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은 이미 헬레니즘과 접촉을 한 유대교에 알려져 있던 것들이다. 아레오바고 연설에서 이러한 사상들이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는 까닭은 바울보다는 누가가 헬라화 된 상황을 좀더 반영했기 때문이다.92) 누가의 기술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그것이 바울 서신의 내용과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이유이다.93) 즉 사도행전에서의 바울은 선교설교라는 상황 가운데, 진리를 논증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이방인들인 아덴 사람들의 입장에서 출발하여, 호교론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단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이 소개한 복음을 받아들인 교인들을 대상으로 바울이 직접 쓴 서신의 내용과 누가의 아레오바고 연설과는 그 접근하는 방식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94)

나가는 말

    아덴에서 행한 바울의 연설은 그가 사도회의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인정을 받은 후에 한 최초 설교이며, 이방인을 대상으로 한 본격적인 장문의 연설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일찍이 A. 하르낙은 이 본문을 일컬어, 사도행전 저자가 작품 중에서 가장 정점으로 끌어올려 19개의 주요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평하였다.95)

    사도행전 17장에서의 ‘아레오바고’는 아고라(廣場)를 지나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오른 쪽에 위치한 언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Stoa Basileios에서 회합을 가졌던, 아덴의 종교나 살인죄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는 의결 기관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누가가 사용한 용어들을 살펴볼 때, 바울이 이 기관에서 취조와 심문, 더 나아가 재판을 받았던 것은 아닌 듯 하다. 바울이 호기심 많은 아덴 사람들에게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자, 양자 간에 논의와 토론이 아고라에 위치한 Stoa Basileios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연설에는 바울 서신이나 여타 신약성서에 나오지 않는 사상들이 엿보인다. 따라서 사도행전 17:22ff은 실제 바울과 상관없다는 의견까지 제기된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아덴을 방문했으며 (살전 3:1), 따라서 그곳에서 선교설교를 행하였을 것이다. 이 연설이 여타의 바울 서신과 달라 보이는 이유는, 헬레니즘의 중심지요 이방 신들을 잘 숭배하기로 유명한 아덴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리스도 복음을 소개하고 그들의 관심을 우상들에서 유일신 하나님에게로 이끌고자 하는 특별한 상황 때문이다.96) 누가는 확보한 원자료를 데오빌로 각하에게 보내는 자신의 두 번째 저술에서, 전술한 상황에 맞게 그리고 수록한 여타의 연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첨삭, 윤색 등의 손질을 가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과 누가의 기록 사이에 서로 상이한 점들이 생기게 되었다.

http://nt.re.kr/artikel/Areopa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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