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우리 신학 한마당
박종천 목사(감신대), 이찬석 교수(협성대), 조은하 교수(목원대) 공동집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사도신경 제1조).
우리는 매주 예배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전능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사도신경의 첫 조항으로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창조가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동서양의 많은 종교와 신화가 그려주는 조물주가 아니다. 조물주는 이미 존재하는 원초적인 물질에 형태를 부여함으로 만물을 조성하는 데 비해, 창조주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단순히 초자연적 기적만이 아니라, 우리 구원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결정적인 계시 사건이다: “아브라함이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창조주를 믿는 신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미쁘신 사랑의 아버지이시기에 천지와 더불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시겠다는 선하신 뜻을 품으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전능자이시기에 그 선하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권능을 가지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성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고, 악을 행하실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마귀와 사탄처럼 파괴적인 권력이나 폭력을 행사하시지 않으며, 만물을 창조하고 생명을 살리시는 권능을 행사하신다. 운명의 지배를 받는 고대 그리스의 신들과 달리 성경의 하나님은 비극적 운명의 굴레를 벗기시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실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보전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역설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은 세계창조와 인간구원을 위해 스스로의 권능을 제한하심으로 진정으로 참된 전능성을 계시하신다. 자존하시고 자족하신 하나님이 자기밖에 타자를 창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자유를 타자의 존재에 의해 제한하신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기 위해 “인간의 도움 없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도움 없이 구원하시지 않는다”(어거스틴). 하나님의 전능성의 지고한 표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성육신’ 사건(요 1:14)이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유한한 피조물을 조건 없이 긍정하시고 사랑하셔서 그 피조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영원성에 참여할 기회를 주셨기에(요 3:16) 진정으로 전능하실 뿐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창 1:27)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창 1:20).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창조를 끝으로 천지만물을 다 지으신 후에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하셨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에서 ‘좋다’(good)는 말은 ‘선하다’는 뜻으로서 단지 도덕적인 선함을 가리킨다기 보다 심미적으로 ‘사랑스럽고 마음에 들고 아름답다’(전 3:11)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신 일에 만족감과 기쁨을 느끼셨다는 것을 드러낸다(브루거만, ‘창세기 주석’, 77).
하나님이 태초에 창조하셨던 세계는 하나님 심정이 그 세계를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셨던 선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주목해 볼 것은 온 세상의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를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1, 24~25)고 하신 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양·다기한 생물종은 하나님의 기쁨이기에 하나님이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2)고 하시며 축복하신 것이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창조의 전 과정의 고비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고, 단 한 번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에 대해서만이었다(창 2:18상).
생물종의 다양성이 상호 간의 차이로 인해 성립하며, 하나님의 기쁨과 축복은 바로 그 차이를 경축하시는 것이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차이로 인하여 서로를 ‘돕는 배필’(창 2:18하)로 지으시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의 완전성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이 다양·다기한 종으로 생육하고 번성할 때 더 극대화된다는 아퀴나스 성인의 지적은 매우 적절한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은 단지 하나의 피조물에 의해서 적합하게 대변될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은 다양하고 많은 피조물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전체 우주가 함께 하나님의 선하심에 더 완전하게 참여하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그 어떤 단일한 피조물이 하는 것보다 더 잘 대변된다”(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시편 기자는 우주에 가득찬 피조물들을 창조주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자고 초청함으로 시편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절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온 땅의 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는 하나님의 ‘위임’(mandate)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보살피고 다스리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시고 나서, 지으신 만물과 또한 위임하신 인간을 바라보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하셨다. 실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명의 다차원적 통일성’(폴 틸리히, ‘조직신학’ III, 15)으로 연결되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로부터 물질(무기물)을 창조하시고, 다음에 유기물 즉 생명을 창조하셨는데, 무기물의 차원에서 유기물의 차원으로의 이행에는 창조주의 영의 임재와 작용이 있었다. 생명에도 여러 차원이 있는바,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에 이르는 과정에서 중대한 차원의 변화 때마다 성령의 이끄심이 있었다:“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이러한 성령의 ‘지속적 창조’(creatio continua)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자연의 창조만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 문화, 종교를 아우르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도 일어난다. 성경의 관점에서 역사는 같은 것의 반복이나 옛것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것으로의 변화다. 그리하여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 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우주의 ‘새로운 창조’(creatio nova)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의하여 이끌림을 받을 것이다. “창조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Veni, Creator Spiritus!)
1930년에 공포된 감리회의 ‘교리적 선언’은 “모든 선(善)과 미(美)와 애(愛)와 진(眞)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라고 고백한다. 선, 아름다움, 사랑, 진리는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들인데, 이 가치들의 뿌리는 하나님에게 있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위기의 시대에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인간이 자신만의 행복과 편리함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시고, 아름다우시고, 진실하신 사랑의 가치를 구현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고백하는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며, 거룩하고 자비하신 하나님이다(1997 감리회 신앙고백 제1조).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주관하심으로 계속 창조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주의 마지막에는 새로운 창조로 우주를 완성하실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며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자비하시다. 하나님은 피조물과 다르게 거룩하신 분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함을 피조물과 소통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다.
식별과 적용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과 우주 기원에 대한 현대 과학의 이야기는 과연 상충하는 것일까? 넓게는 창조 신앙과 현대 과학의 문제, 좁게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은 우리가 피해 갈 수 없는 난제임이 틀림없다.
이 문제는 이미 오랫동안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이성과 계시의 문제로 시대마다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인간의 자연적 이성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자연적 형상’으로서 이를 통해 인간은 우주 만물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이 이성으로 추구하는 진리와 성경이 계시를 통해 드러내는 진리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므로 상충할 수 없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토마스 아퀴나스). 이 말은 과학과 이성이 신앙과 계시에 종속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시므로 이성이 세계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성경에 호소함으로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창조와 변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과학의 탐구 대상은 미립자로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변화하는 존재들이다. 변화하는 것들은 변화하는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다. ‘무로부터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주장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 명제에서 ‘나온다’라는 동사는 변화를 의미하며, 그것은 변화하는 물질적 실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의 존재 근본 원인에 대한 것이다.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가’ 또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그리고 신학적 문제다.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하는 신학과 변화를 설명하는 자연과학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창조는 사물의 존재성을 설명하는 것이지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며, 과학은 사물의 존재 의미가 아니라 사물의 변화 과정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무신론자인 천재 우주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도 과학은 우주의 기원인 ‘빅뱅’(대폭발)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탐구하는 것이며, 빅뱅이 왜 일어났는지는 과시와 종교의 영역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영원하고 무한한 것처럼 보이는 우주는 여전히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된 우주일 뿐이다. 따라서 진화적 변화에 대한 그 어떠한 설명도 창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대체할 수 없다. 만물의 존재성이 그것의 원인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만물의 변화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화론에 근거하여 창조를 부인하거나, 창조론을 변호하려고 진화를 거부하는 것은 창조와 진화 양자 모두를 오해하는 것이다.
우주는 대폭발 이론이 말하는 바와 같이 불균형 체계다.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아인슈타인의 역동적인 세계관으로 패러다임이 바꼈다. 또한 다윈 이후 진화론도 과거의 조건으로부터 기계적인 필요성에 의해 초래하는 진화가 아니라, 돌연변이적 진화나 유기적 진화의 개념처럼 ‘창발적 진화’, 즉 생명의 새 형태가 갑작스러운 변이와 출현에서 드러난 우연적 요소에 주목하게 되었다. 성령론의 관점에서 이것은 여전히 열려 있는 하나님의 지속적 창조 행위에 의해 바라볼 수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창 1:11, 20)라는 말씀대로 식물과 동물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땅의 생산성, 곧 생명의 자연 발생적 창조성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방식을 보여준다. 생명이 무기물에서 유기체 구조로 변화한 이래로 생명의 창조적인 자기 조직화는 모든 피조물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거룩한 바람, 성령의 일하심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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