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편 강해
/ 정용섭 목사(대구/서울 샘터교회)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시편은 119편입니다. 굉장히 길지요? 굉장히 긴 정도가 아니라 아주 깁니다. 시편 중에서 가장 긴 시편입니다. 자그마치 176절까지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서 절수가 가장 많은 장, 혹은 편이죠, 이 구절을 다 읽기는 이 시간에 힘들고요. 읽기만 하더라도 족히 10분 이상 걸릴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집에서 다 읽어 온 거로 전제하고 이 말씀을 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서기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119편은 일관성이 좀 떨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시, 혹은 시편들을 적당하게 편집한 거라고 보면 됩니다. 양적으로도 길기 때문에 여기서 일관성을 찾기는 쉽지 않지요. 그리고 시편이라고 하는 것이 각 편이 완전하게 된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은 것들도 있어서요, 어떤 완성도라고 하는 점에서 떨어지는 것들이 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119편이 형편없는 거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각각 구절은 다 의미가 있고요, 어떤 것도 소홀하게 다루어질 수 없는 그런 말씀 들입니다.
여기서 일관성이 떨어진다고 하는 말은 전체흐름이, 완성도라고 하는 점에서 다른 것에 비해 좀 떨어진다고 하는 거지요. 예, 그래서 이 119편을 전체주제를 하나로 묶어서 얘기하기는 좀 쉽지 않습니다. 예, 그런 걸 전제하고 보도록 하겠습니다. 119편은 그래도 이러한 부분들은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전체흐름을 우리가 생각한다고 할 때, 이렇습니다. 핵심주제가 다음과 같은 거죠,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사는 사람들에게 복이 임한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복이 임한다는 거예요. 이러한 전체주제는 119편만이 아니라 시편전체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상투적인 말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법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복이 임한다고 하는 거예요. 실제적으로 그렇게 복이 임하냐, 하는 것을 우리가 따라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결론처럼 말씀 드리는 것이 될 텐데, 이렇게 정리하고 넘어가면 되겠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사는 삶을 보면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늘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이 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굳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만 고난 받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런데 그게 두드려 질수 있습니다. 이건 실제적으로도 그런 가능성들도 많은 거고요. 양심적으로 산다, 그건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양심이 신앙하고 다른 거지만, 양심이 무디어진 세계에서 양심이 좀 특이하다고 하는 점에서 신앙을 갖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삶의 어떤 결과들을 비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양심적으로 살다 보면 좀 손해 보는 일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장관이라든지, 장관에 버금가는 사람들이 청문회에 가끔 나올 때 보면 그런 걸 우리가 잘 알 수 있습니다. 불법적으로 토지를 구입한다거나 세금을 내지 않는다거나 그런 일들을 거의 대부분의 분들이 하시더라고요. 양심이 거리끼는 것이지만 그리 사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도 않으면서도 그런 일들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양심의 가책이 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또 되지 않습니다. 그게 관행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지난 갈 수도 있는 거고요. 그래도 뭔가 꺼림찍한 부분들이 있는 거지요. 그래도 그런 일들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양심이 아주 예민하게 산다면 그런 일들을 전혀 하지 않아야 되는 거예요. 토지를 불법적으로 매입하고 자기지위를 통해서 얻는 정보를 이용해서 그런 일들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하지 않고 양심적으로 예민하게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손해를 보는 거지요. 손해를 본다는 말이 정확하지 않습니다마는 그건 편하게 말씀 드리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의 양심을 묻어 두고, 관행이라고 하는 것으로 포장해 갖고 몇 년 만에 서너 배, 혹은 열배 이익을 남긴데 반해서 양심적인 사람들은 그런 이득을 얻지 못하니까 손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법도대로 따라 사는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복이 있느냐, 하는 그런 문제도 간단한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우리 삶에서는 손해 보는 일이 많이 있다고 하는 거지요. 그래도 이 말씀이 왜 진리인가를 우리가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잘 못된 말은 아니거든요? 이런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 그러한 말씀이 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어졌고, 우리가 받아드리느냐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해명해야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단순히 손해다 이익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이 말은 설득력이 없는 겁니다.
다른 시각이 필요한 거죠, 그걸 우리는 영적인 시각이라고 합니다. 터무니없는, 허무맹랑한 혹은 자기만족에 처하는 아전인수의 관점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는 것을 가리켜서 영적인 시각이라고 하는 거거든요? 우리 신앙이 깊어질수록 세월이 갈수록 그런 것들이 많아져야 되는 거죠. 그런 것이 없으면 우리는 늘 피곤합니다. 신앙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우리를 괴롭힐 수 있습니다. 아니면 신앙생활이 왜곡 되어서 하나의 처세술로 떨어질 수 도 있고,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뚫고 나가겠느냐 하는 것들이 계속되는 질문이기도 하고 도전이기도 하고, 풀어야 될 숙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기 119편이 전체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요, 몇 구절만 찾아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 34절, 175절입니다. 이게 긴 시편이라서 어느 정도를 정리해서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일관성이 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 세 구절만 제가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절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기서 행위가 온전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마음이 온전하다고 표현하지 않고 행위가 온전하다고 했습니다. 마음은 어떻게 된다고 하더라도 행위만 온전하면 되냐, 그런 질문이 또 가능하겠지요. 율법은 기본적으로 행위를 다루고 있습니다. 복음은 행위보다는 속 중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게 딱 이원론적으로 구분되거나 대립되는 건 아닌데 크게 구분하자면 일관하자면 그게 가능합니다. 율법은 무엇을 해라 하지 말라, 그런 관점으로 사람들을 끌어가는 말씀이거든요? 이것에 반해서 복음은 받아 드려라, 믿어라 하는 관점으로 사람들을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끌어 드리려는 가르침이예요. 율법은 당연히 행동을 이야기하게 되고, 복음은 당연히 존재를 이야기하게 되는 겁니다. 행위와 존재의 관계인 거지요. 행위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다룬다고 한다면 존재는 무엇이 될 것인가를 다루는 거지요.
크게 구별하자면 그런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을 배격한다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고요, 복음이 또한 바르게 사는 것을 대단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그게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나 기본적으로 어떤 방향을 놓고 본다면 율법은 행위이고 복음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위가 온전하다고 하는 말은 그러한 것을 뜻하는 거지요. 이거는 윤리에 대한 문제예요. 행위, 윤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 행위에 대한 가치론적 판단이거든요? 이런 인간의 행위가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겁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하는 그런 규범들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평가하는 게 윤리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윤리 문제를 이야기 할 때 몇 가지 문제가 따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될 관점들이 있습니다.
한 4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윤리적으로 살기 보다는 이기적으로 삽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윤리적으로 살아라, 이런 말은 부담이 되는 거죠, 힘든 거죠, 어떻습니까, 사람이 물론 윤리적으로 살려고 하는 생각은 많이 있습니다. 측은지심도 있고요, 약자에 대한 보호본능도 있습니다. 그런 윤리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밑바탕에는 이기적인 힘이 작동된다고 볼 수 있어요. 예, 이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입장이 달라 질 수 있습니다.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인간에 대한 낙관론적이냐, 비관론적이냐, 그렇게 구분할 수도 있는데 그게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니죠, 양 쪽에 속한 인간들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윤리적으로 살아라 하는 말이 가능하기에는 인간이 그렇게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하는 건 분명합니다. 이기적인 거지요. 윤리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여전히 이기적인 것이 작동됩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그런 것이 자기를 만족시키는가, 인정을 받는 것에 예민하게 움직이는 거거든요, 이것이 개인이 조금 노력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이기적이거든요, 기도를 하면서도 누가 기도를 많이 했는가, 하는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바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들을 행위가 온전하냐 아니냐를 얘기하겠지요.
두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윤리적 가치는 시대에 따라서 다릅니다. 어떻게 하라, 마라라고 하는 것이 쉬운 건 아니지요. 중세기 때에 聖戰의 개념은 정당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전쟁에 참여한다고 겁니다. 이슬람을 공격해서 그들을 몰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래서 거룩한 전쟁이라고 얘기한 겁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것이 옳은 건 아니잖습니까, 칠거지악이라고 하는 동양의 윤리도 그러한 윤리기준이 있었는데 옳은 건 아니잖습니까,
미국에서 노예들을 많이 다루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 청교들이 노예들을 다루면서도 신앙적으로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전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잖아요? 행위가 온전하다고 하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문제라고 하는 겁니다.
세 번째는 사람은 자기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빚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인식의 한계를 우리가 안고 있는 거지요. 우리가, 이게 참 우리가 벗어나기 힘든 숙명적인 실존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내가 아무리 선한 뜻을 갖고 바른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늘 좋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거든요, 하나의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도와 달라고 오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돕는다고 할 때,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지만 그것이 반드시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중요한 건 아닙니다. 자칫 그것이 거지근성을 키울 수도 있는 거거든요, 아, 예, 이게 적절한 예는 아닙니다.
우리가 봉사, 동정, 구제 이런 것들을 상대화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니고요, 당연히 그런 것은 어쩌면 칸트가 얘기한 대로 당위의 차원에서 해야겠지요.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단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의 인식의 한계가 있는 겁니다. 이걸 다른 예로 더 얘기하고 넘어가야 되겠네요. 아이들을 키울 때도요, 먹을 것을 달라할 때 계속 주는 것, 마음은 계속 주고 싶지 않습니까, 아이들을 오냐, 오냐 하면서 키우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이에게 옳은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잖아요? 이게 우리 인식의 한계입니다.
네번째는 이렇습니다. 행위가 온전하다고 하는 말은 동기의 순수성에서 타당하다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완전한 행위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윤리적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것이 늘 작동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늘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꾸준하게 행위가 온전하도록 노력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동기의 순수성에서 타당한 말입니다. 그 만큼 우리가 겸손해야 되겠지요. 우리가 최선으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하지만 이것이 100% 옳기 때문이 아니라 그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도 알 수 없는 문제인데요, 우리의 선한 동기에 근거해서 그렇게 살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최선인 거지요. 우리 동기가 순수해지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하거든요, 오늘 시편 119편 1절에서 말하는 것이 그런 점에서 옳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서 행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냥 법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이예요. 그것은 율법, 법을 절대화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를 절대화하기 때문에 옳은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는 거지요.
34절입니다.
34.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대단히 바람직한 자세로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따르기 쉽긴 한데 우리가 그걸 알기 힘든 거예요. 전통들이 있으니까 알 수는 있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걸 주의 법을 준행하고 싶다, 율법을 따라 살고 싶다로 말은 할 수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것을 우리 스스로는 정말 알기가 힘든 거예요. 그 깨닫는 것 마저도 사실은 나의 개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하는 사실을 지금 말하고 있는 거지요. 이것이 바로 성서의, 그리스도교의 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주관적 판단, 생각을 넘어서 우리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활동을 우리가 기다리는 거지요. 거기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믿는 거죠, 이러한 말들이 자칫하면 궤변처럼 들릴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보통 사람들은 “내가 생각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데카르트가 말한 그 유명한 명제 코기또,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도 결국은 사유하는 것, 생각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한 인간의 속성으로, 혹은 본질로 이야기한 거거든요? 데카르트로부터 주관주의의 토대가 잡혔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존재,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강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데카르트는 이런 문제들을 신앙의 기초에서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을 거부하거다 내가 잘났다 그런 차원으로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그가 생각했든, 생각하지 않았든 예상했든, 예상하지 않았든 그것을 접어두고라도 그의 그런 명제로부터 주관주의 싹이 텄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자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고요, 거기로부터 모든 세상을 대상으로 여기게 됬습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서 과학을 발전시키고 바라보고 평가하고 판단하고 이용하고, 그런 근대주의에 흐름들이 거기에서 시작한 거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게 그럴 듯한 이야기예요. 지금 우리도 늘 자기가 생각한다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근원적인, 아주 근원적인 심층의 차원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유의 능력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데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시인들이나 예술가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경험들이예요. 자기가 무엇을 작곡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어떤 소리가 와서 나를 통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시를 쓴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나에게 말을 건다, 언어가 나에게 왔다, 그렇게 말하거든요? 이런 표현들이 문학적이고 예술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사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그건 계시라고 얘기 할 수 있고요,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성령의 조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 빈이 그런 얘기를 했고요. 성서전체가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유한다, 생각한다. 이런 것은 어떤 정보라든지 몇 가지 수를 계산하는 것이라든지 내가 어떻게 하면 인정을 받는다든지 그런 삶의 기술, 그러한 것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것을 말하는 거예요.
거기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만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고 하는 거지요. 성령과의 공명으로 가능한 삶의 태도를 가리켜 우리가 영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34절에 시편 기자가 아주 정확하게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겁니다. 34.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그 다음 175절입니다. 한 참 뒤로 넘겨야 되겠어요. 175절, 이렇습니다.
175.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예,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문장이 시편전체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영적인 상태에서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라고 말이죠, 영혼은 삶의 가장 심층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밥 먹고 사는 것 이것도 사는 건데요, 그건 그냥 동물과 비슷한 차원에서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고 하는 삶에 그러한 현상들입니다. 이제 그런 것만으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우리가 산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궁극적인 만족감, 충만감 그런 것들은 부족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취미생활도 하고 또 이런 저런 사람들과의 모임도 열고 하지요. 밥 먹고 사는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 것들을 채우는 방식들입니다. 여행도 다니고요, 그거 좋은 일들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이 충만 하겠냐,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을 등반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올라가는 힘든 과정, 올라갔을 때의 희열, 이런 것들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거든요, 그들은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거기서 경험합니다. 놀라운 삶의 충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으로 과연 충분한가 하는 겁니다. 맨 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서 살 수는 없잖아요, 올라갔다 내려와야 됩니다. 올라가 있는 순간은 오히려 짧고요, 희열의 순간은 짧고요, 실제로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야 되거든요, 그러면 올라가 있을 때만 어떤 삶의 희열을 느끼고, 내려와 있을 때는 또 공허하다면 그건 생명이 충만하다고 말 할 수 없는 거지요.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생명을 온전하게 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냥 재미있게 취미생활하고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조건 가운데 살면 되지 무슨 영혼의 충만감 이런 걸 얘기 하냐 하고 말이지요. 예, 그걸 억지로 설득시킬 수는 없습니다. 제가 제 딸에게 인터넷이라든지 그런 것만 보지 말고 네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떠는 일, 그런 것에만 떨어지지 말고, 또 그렇게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놓치지 마라라, 고전도 읽고 인문학 책도 좀 읽고, 삶에 대한 깊이도 좀 알고 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아무리 얘기 하더라도 본인이 한 편으로는 동의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는 못하더라고요. 쉽지 않습니다.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거든요? 영혼의 충만감, 그 깊이에서의 삶의 희열이 있어야 된다고 아무리 말을 한다해도 그건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걸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가능한 거지요. 아, 그러면 교회 다니면 그런 것이 된 거냐, 그렇게 질문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를 아무리 다녀도요, 그게 확보되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주로 계추모임, 동아리 모임, 종교적 동아리 모임에 머물고 말거든요,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내 영혼이 산다고 하는 사실을 이 시편기자는 뚫어 본 거예요. 그게 과연 무얼까요?
예, 그것은 제가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 두 마디로 되는 건 아니고요,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성서를 더 잘 이해 할 수 있는 신학공부 또 인간 삶에 대한 심층적 이해, 등등.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우리의 영적인 사유에서 소화 되어서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의 통치 안으로 들어 갈 때만 가능한 거거든요, 예를 들면 우리가 창조자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우리는 낱말 뜻에 머물고 말잖아요, 그걸 창조라고 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그런 행위가 우리의 영적인 세계 안에 확 다가오게 되면 우리를 다른 방식으로 자극시키거나 사이비의 방식으로부터 만족 시키려고 하는 데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칭의라고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고 하는 사실 속으로 깊이 들어가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공연한 수고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의로운 삶을 추구하려고 노력하게 되는 거지요. 지금 이런 것들이 영적인 풍요의 한 단면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풍부해지면 참된 영적인 안식이 가능한 거지요. 예, 오늘 제 강의안 그 부분을 읽는 것으로 공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 패라그래프인데, 읽겠습니다.
175절-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이 문장이 시편 전체의 핵심 주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혼은 삶의 가장 심층의 영역을 가리킨다. 사람은 영혼에 손을 댈 수 없다. 창조주이신 하나님만 가능한 영역이다. 시편기자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런 관점은 낭만적이거나 안이한 게 아니다. 인간 삶을 풍성하게 만들려는 모든 인간적인 노력은 부분적으로 성과를 냈지만 근본적으로는 무능력했다. 삶을 편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곧 심층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살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적인 차원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영적인 차원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보이지 않는 현실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밖에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들어가야만, 거기에 휩싸여야만 경험이 가능한 어떤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오늘 119편 전체 주제를 <복이 있음이여>라는 제목으로 다뤘습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겠네요.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라는 기도에 실질적인 내용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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