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복음:
기독교 신앙을 위한 구약의 가치
/ 차준희 교수(한세대)
1. 들어가는 말
구약성경은 기독교인에게 쉽게 이해되는 책은 아닌 것 같다. 흔히 기독교 정경의 첫 번째 부분인 구약은 두 번째 부분인 신약보다는 덜 중요한 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구약성경이란 기독교에서 본질적으로는 필요하지 않고, 구약성경이 없이도 기독교 신학이 가능하다고 보는 편견이 일반적인 기독교인과 적지 않은 신학자들에게도 널리 퍼져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볼 수 있는 구약의 의미상실성은 설교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한국 교회 강단에서 구약설교가 빈약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 강단에서 구약이 설교의 본문으로 사용되는 비율은 개신교 1백년 역사 동안 평균 26%에 불과하며, 그것도 창세기, 출애굽기, 이사야, 시편 등 네 책 정도에 그 선호도가 집중 되어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신구약 전체 66권 분량 가운데 구약은 실제로 불과 3% 정도만 한국 교회 강단에서 설교 본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의 의미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앞서서 선포하고, 그를 미리 묘사하고, 그를 다양한 방식으로 지시하는 예언적인 면밖에 없는 것인가?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의 머리 말과 전 단계에 불과한가? 과연 구약성경의 독자적인 의미는 없는 것인가? 구약성경에는 기독교적 케리그마(복음)가 없단 말인가? 이 논문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구약성경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논증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약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구약에 대한 부정
주 후 1세기의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게 있어서 오직 구약성경만이 그들의 유일한 성경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교회는 구약을 의심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자신 에게 적용하였으며, 그들의 모든 선포는 구약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그와 같 이 할 수 있게 된 것은 다음의 세 가지 기본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째, 구약의 하나님은 예수의 아버지이다. 둘째, 예수는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며 그리스도이다. 셋째, 새로운 공동체(교회)는 참되고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물론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성전파괴 등과 같은 심각한 사건을 통하여 구약과의 차이점도 부각시켰다. 예를 들면 구약의 희생제사 는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무효화되고, 공동체의 일원을 상징했던 할례는 세례로 대체되었다. 또한 구약의 의식규정들과 법규정들은 더 이상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전반 적으로 율법은 공동체를 통일시키는 의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은 아무런 문제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서 구약이 소중한 책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논란이 되는 책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구약은 일찍부터 인정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비판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다. 기독교는 구약과 상당한 긴장관계에 있다. 이러한 긴장관계는 구약에 대한 거부라는 극단적인 입장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구약에 대한 부정적 입장가운데 대표적인 학자들의 주장을 간략하게 보기로 한 다.
1) 마르시온(Marcion: 주후 85-160년경)
소아시아 출신의 선주였던 마르시온은 구약을 완전히 포기하고 신약을 탈유대화하 려고 했다. 그에 따르면 구약에서는 율법이, 신약에서는 복음이 선포되었다. 예수는 자신을 통해서 계시되고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했다. 그에 비해 구약의 하나님 은 복수심에 불타는 야웨였다. 마르시온에게 있어서 심판과 전쟁의 유대적인 하나님은 예 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동일시 될 수 없었다. 그는 과격한 바울주의자로 구약을 신약의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의 율법과 문서로 간주하여 결국 구약 전체를 거부하였다. 그가 인정하는 정경은 그에 의해서 탈 유대화된 10편의 바울서신(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과 누가복음 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의 하나님은 복음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었다.
2) 델리취(F. Delitzsch: 1850-1922)
저명한 앗시리아 학자였던 델리취는 두 권으로 된 『대 사기극』(Die grosse Taeuschung)이라는 유명한 저작을 남겼다.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한 가장 중요한 비판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역사서들은 그 서술방식으로 인하여 역사적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없다. 2) 위대한 예언자들을 비롯한 모든 중요한 인물들이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 3) 야호(Jaho: 원문 그대로 인용)는 특정한 민족의 신으로서 도덕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최 고로 높으신 세계의 하나님으로 인정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하나님과 동일시한 것은 잘못된 신앙이다. 4) 따라서 유대교를 전 세계에 전파한다는 것은 미친 생각이다. 5) 예언들 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점은 예언이 쓸데없음을 보여준다. 6) 시편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저급한 사상을 갖고 있다. 7) 예수는 유대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갖고 있다." 즉 델리취는 구약의 내용을 사기의 연속으로 간주한다.
3) 하르낙(A. von Harnack: 1851-1930)
독일 개신교 교회사가였던 하르낙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마르시온: 이방의 하나 님에 대한 복음』(Marcion: Das Evangelium von fremden Gott)에서 그가 구약의 정경성을 부인하게된 것은 오로지 기독교적인 하나님 개념의 본질에 대한 자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후에 유명하게된 다음과 같은 테제를 주장하였다: "주후 2세기에 구약을 거부한 것은 오류였다. 당시의 중심 교회가 이러한 오류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옳았다. 16세기 에 구약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그 때까지만 해도 벗어날 수 없었던 당시 종교개혁의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와서도 개신교에서 구약을 여전히 정경의 문서로 보 존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교회가 불구가 된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다." 즉 하르낙은 구약 을 기독교 정경에서 제거하지 못한 것은 종교와 교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라고 본다.
3) 불트만(R. Bultmann: 1884-1976)
불트만은 구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구약은 유대인들에겐 계시로 받아들 여졌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약은 더 이상 계시가 아니다. 교회 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역사는 이미 흘러갔고 끝이 났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에게 더 이상 계시의 역사가 아니다." 그에 따르면 구약은 "유산된 역사"(Geschichte des Scheiterns)이다. 이러한 역사의 유산은 특히 언약(Bund), 하나님의 왕권 통치 (Koenigsherrschaft Gottes)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Gottesvolk)이라는 영역에서 일어났다. 결국 이러한 실패가 일종의 약속이 되었다. 따라서 구약성경은 약속이며 "신약의 전제 (presupposition)"로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이와 같이 불트만은 구약과 신 약의 완전한 신학적 불연속성을 주장한다.
4) 바움게르텔(F. Baumgaertel: 1888-1981)
바움게르텔의 경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약의 진정한 의미는 오직 부정적인 방 식(via negativa)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구약은 일차적으로 종교에 대한 증 언이고, 이 종교는 비기독교적인 종교이고, 구약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 구약은 원래 복음과 는 전혀 관계가 없다." "구약은 복음 밖에 있는 종교로부터 온 증언이다. 따라서 구약은 우리에게는 이질적인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은 기독교 종교와는 다른 자리에서 생긴 것이다." 그에 주장에 의하면 구약은 오직 실존주의적 이해로 우회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기독교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증언이다.
구약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입장은 구약성경학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 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신약성경학자들의 글에서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필 하우어(P. Vielhauer)와 헨센(E. Haenchen)같은 신약학자들은 구약의 근본진술들은 그 본래의 의도로 본다면 기독교 정경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린다스(B. Lindars)는 구약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으며, 구약은 "오직 복음에 이르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재촉하는 종으로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 길을 인도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라고 판단하고 있다. 던(J. D. G. Dunn)의 견해도 이와 유사하다. 그는 "구약이 (신약에) 인용된 것은 그것이 의도적인 진술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 다......요약하면 첫 번째 기독교인들은 구약을 독립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았고 이 보다는 해석된 권위를 가진 것으로서 그 가치를 부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신약학자들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구약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으며 신약의 수용에 의해서만 구약은 '교회'의 성경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3.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기존 모델
구약에 대한 부정적 입장은 자연스럽게 구약과 신약의 단절로 이어졌다. 그러나 기 독교는 그 동안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켜서 구약의 의미를 보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시도 가운데 대표적인 모델 세 가지만 추려서 그 의미와 한계점을 간략 하게 검토하기로 한다.
1) 약속과 성취 모델
이 약속(Verheissung)과 성취(Erfuellung) 모델은 구약성경 자체에서 이미 언급되고 사용되고 있다. 특히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 그리고 예언서에서 그러하다(왕상 17:16; 사 44:26; 55:11; 겔 37:14 등등). 신약은 구약을 "약속"이라는 개념으로 특징 지운다(롬 4:13-25; 15:8; 갈 3:14; 참조. 마 1:22-23; 요 19:24-25 등). 따라서 이 모델은 구약을 약속으 로 신약을 성취로 설명한다.
사실 이러한 사고는 구약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인 미래개방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약속이 구약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예언서 등). 또한 약속과 성취 모델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확증하는 긍정 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해서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여러 약속들이 참 약속인 것으로 확증되고 성취가 되어 도 그 약속은 그 뒤로도 계속해서 존속된다. 이 모델은 신약을 중심으로 구약과 연결시킨 것이다. 그러나 구약을 중심으로 보면 구약의 여러 약속들이 개별적인 경우에 국한하여 신약과의 연결 가능성이 있을지 몰라도 그러한 경우를 제외하면 신약과 필연적으로 연결시켜 야할 이유는 없다. 따라서 구약을 약속으로 신약을 성취로 그 기능을 단순화하는 것은 적지 않은 위험과 오해를 가져다줄 수 있다.
2) 모형론 모델
모형론(Typologie)이란 먼저 "상응"의 현상과 관련된다. 구약의 말씀, 사건, 인물 그리고 제도들은 모형들(Typen)으로 간주되고, 그 모형들과 상응하는 것이 신약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형(模型, Typos: 구약)과 원형(原型, Antitypos: 신약)의 대조를 통하여 구 원역사의 연속성이 드러난다. 구약은 모범(Vor-Bild)이나 예비적인 제시로 신약은 완성된 실제로 간주된다. 구약 자체에서도 이런 모형론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이사야 40장 이후 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이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는 것을 새 출애굽 으로 보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사 52:12과 출 12:11 그리고 사 48:21과 출 17:5-6을 각 각 비교하라). 신약에서도 이러한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표현하며(롬 5:14), 고린도후서 3장이나 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와 그리스도를 모형과 원형으로 대조시킨다.
모형론적인 모델은 구약과 신약의 두 가지 사건의 뚜렷한 공통점들 때문에 시간적 간격을 뛰어넘어 서로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해석학적인 장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전부를 이렇게 모형론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또한 한 사건의 본래적 의미를 넘어서서 그 사건이 본래 가지고 있지 않은 미래적 의미를 도 출할 수 있는가하는 의문점도 생긴다. 더 나아가 구약 본문이 원래 구체적인 역사 가운데서 지니고 있었던 본 뜻을 놓칠 위험도 있다. 모형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종종 오해되고 잘못 사용되어서 구약을 평가절하하고 급기야 구약을 거부하는 일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모형론적 해석은 구약성경의 의미를 평가절하시키거나 구약 성경을 편파적이고 독단적으로 기독교화 시키려는 무리한 경향을 막을 수만 있다면, 특정한 본문에서는 사용 가능한 해석학적 시도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 기독론 모델
기독론적 해석 모델은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행해지는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흔한 구약 해석 방법이다. 신약은 구약 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내용을 자주 전해주고 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 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이러한 해석의 대표자 중의 하나인 피셔(W. Fischer)는 그리스도가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지만 구약의 선포에 담겨 진 사상과 구약에서 설명된 사건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고 본다. 또한 구약은 그리스도가 무엇인지를, 신약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말한다고 주장 한다. 이는 기독교회 안에서 흔히 듣는 '구약은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메시 야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최근에 베커(J. Becker)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편바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성경에서 예고되었고, 미리 묘사되었으며 (이 미) 현존한다." 그는 "구약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단정 짖는 다. 이는 오래 전에 자콥(E. Jacob)이 "구약신학은 오직 기독론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과 유사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구약성경을 기독교적으로 읽어야함은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 적으로 구약의 모든 부분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또한 구약에서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본문은 기독교회나 기독교 신학에서 무가치한 것일까? 이 해석 방법에서는 구약성경의 독자적인 의미가 무시되는 위험성이 있다. 원시 기독교회는 구약 과 신약의 통일성을 입증하기 위해 이성적인 시도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시도에 비추 어 본다면 오늘의 기독론적 해석은 신앙의 이성적이고 지적인 의무, 즉 신앙의 해명이라는 책무를 소홀이 하고 더 이상 그 배경을 질문할 수도 없는 신비에 대해서만 말하도록 강요하 는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언급한 기존 모델들이 기독교 정경인 구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만 어느 모델도 구약의 모든 본문을 아우를 수 있는 해석 방법론은 될 수 없 다. 이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가 한 두 가지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라 는 사실을 보여준다.
4. 기독교 신앙을 위한 구약의 독자적 가치
기독교 신앙을 위한 구약의 의미를 파악하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구약설교의 기피현상을 낳은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구약성경의 각 내용들은 보통 신약에 비해서 열등한 것으로, 때로는 동등한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신약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약의 가치에 대하여 한마디로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구약의 목소리는 각각의 본문에서 객관적이고 철저하게 검토되어야 한다. 구약의 본문 가운데 신약과 비교하여 열등한 것, 동등한 것 그리고 넘어서는 것 그 모두가 빠짐없이 기독교회에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수용되어야 하며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구약 해석학 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세 가지의 경우를 나누어 각각의 해석학적 의미를 살펴보 기로 한다.
1) 구약이 신약과 비교하여 열등한 경우
구약성경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행위가 아직은 알려 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서 구약은 흔히 신약에 비해 부족한 것으로 간주된다. 부족한 것으로 전쟁과 폭력에 대한 평가, 종교와 정치의 직접적인 연결, 행위 보상관계 (Tun-Ergehen-Zusammenhang)에 따른 인간의 평가 그리고 이방나라, 특히 이스라엘과 적 대관계인 나라들의 구원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 등이 언급된다.
그러나 이러한 본문들을 기독교 정경으로부터 제거하는 마르시온적 태도는 그 동안 기독교 신학이 추구해온 방향과 모순되는 것이다. 성경의 메시지를 어떤 특정한 기준에 의 해서 단순화하려는 시도는 '게으른 이성'에 따른 것이다. 이미 신약의 등장으로 극복된 구약의 희생제사, 할례 그리고 법규정들도 기독교 신앙에서 그 자체적으로는 의미부여가 쉽지 않지만 성경 신학(Biblische Theologie)적 해석을 통하여 그 의미를 재해석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 나타난 저주라는 주제도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르낙은 개신교에서 구약을 여전히 정경의 문서로 보존 하고 있는 것은 종교와 교회가 불구가 된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구약을 제거하면 종교와 기독교는 불구가 되고 마비가 될 것이다."
2) 구약과 신약이 동등한 경우
구약과 신약의 내용이 유사하고 동등한 것으로 보이는 본문들이 있다. 즉 구약과 신약이 구조적인 유비를 보여주는 본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 이해, 인간 이해 그리고 세계 이해에 있어서 그러하다. 또한 한 예로 구약의 중심 계명("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웨는 오직 하나인 야웨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 웨를 사랑하라", 신 6:4-5)과 이웃 사랑("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 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야웨니라", 레 19:18) 및 이방인 사랑 계명("너희와 함께 있 는 타국인을 너희 중에서 낳은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레 19:34)은 신약(마 22:37-40; 막 12:29-31; 눅 10:26-27)과 동일하게 선포될 수 있다. 이런 경우 구약은 기독교적(기독론적은 아님)으로 적용이 가능하다.
또한 개념상 동일 한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영(靈), 의(義), 하나님의 왕권통치, 죄, 믿는다, 용서하다 등등이다. 물론 구약은 이러한 개념들을 개념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현상으로 인식한다. 아무튼 동일한 개념이라 할지라도 구약과 신약의 표현 방식이 다르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신약의 개념은 구약의 도움이 없이는 보다 명확하게 이해될 수 없다. 더 나아가 구약적 표현의 풍부성이 무시되고 신약에만 의존한 다면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상당히 빈곤해질 것이다.
3) 구약이 신약을 초과하는 경우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약의 독자적 가치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구약이 신약을 초과하는 경우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흔히 구약성경과 무관한 오직 신약성경과 관계된 사건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 사건은 충분하고도 포괄적인 구원사건이지, 이것이 곧 신약은 아니다. 신약에 기록된 그리스도 사건은 여러 가지 주제들과 관련하여 구약성경 을 통한 보충에 의존하기도 하고 또한 기초하기도 한다. 이 사건은 이미 구약성경을 유효한 것으로 전제한다(눅 24:13-27). 이는 "성경"(구약성경)을 통한 보충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신약성경에서 더 이상 전개되지 않고 오직 구약성경에 의해서 알려지고 구약성경이 구속력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주제들이 많다는 사실이 간과되거나 그 중요성이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된다.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신약에서는 찾아보기 힘드는 구약의 주제들이 이미 언급된바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즉 유일신사상(Monotheismus), 창조신앙, 인격적인 하나님 이해, 기도의 말, 세계와 삶에 대한 긍정, 자연에 대한 만족, 부인에 대한 남편의 즐거움, 남편에 대한 부인의 즐거움, 그들의 자녀에 대한 두 사람의 기쁨,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시는 즐거움,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회의, 하나님에 대한 절망적인 비난/고발 그리고 고난과 죽음 등등이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과 세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들을 명시적으로 제시한다는 면에서 기독교 정경에서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구약성경이 담고 있는 이러한 "아름다운 세상성"(die schoene Weltlichkeit)이 기독교 신앙에서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경을 너무 일방적으로 계시의 원전과 종교적 교과서로만 간주한다면 이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삶의 높낮이를 모두 드러내서 보여주는 인생의 거울로서 절망 속에 빠져 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의하여 삶의 방향성을 잡도록 도움을 주는 책이다 . 따라서 교회 는 "그리스도에 관한 책"으로서의 신약성경과 더불어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책"으로서의 구약성경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놀랄 정도로 확산되고 있는 구약의 포기는 교회에게 극도의 황폐화를 가져다 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약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는 구약 본문 들은 무조건 제거할 것이 아니라 성경 신학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해석학적 노력이 요구된다. 신약과 동등한 구약 본문은 기독교적인 적용과 의미 파악에 문제가 없어 보인다. 또한 신약이 담고있지 않은 구약만의 독특한 본문은 대체적으로 현세적인 삶에 관련된 주제가 주종을 이룬다. 이러한 부분들은 기독교가 자칫하면 너무 신약에만 기초한 나머지 초월적이고 영적인 면으로만 치우치기 쉬운 위험성에서 벗어나 내재적이고 현세적인 면을 갖추어 균형을 잡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브라운(H. Braun)의 지적은 눈 여겨 볼만하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적이고 유대적인 사고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면 헬레니즘적인 기독교는 황홀경과 신비에 빠져버렸을 것이다."
5. 나가는 말
이미 폰 캄펜하우젠(von Campenhausen)이 말한바와 같이 초기 교회의 문제는 구약성경을 복음의 빛 안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였다. 즉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유대인의 성경의 빛 안에서 예수 그리 스도에 관한 복된 소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초기 교회는 구약의 빛 안에서 신약을 보려고 하였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에게 구약성경의 본문은 그들이 연구해야할 단순한 과거의 종교문헌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복종해야 할 살아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담고있는 매개체였다. 구약성경은 의심할 바 없는 계시의 말씀이었다. 구약은 정경으로서 의 특성과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예수 메시지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구약의 말씀을 끌어다 들인 것이다(눅 24:13-35). 따라서 구약이 신약을 기준으로 읽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네(신약)가 뿌리(구약)를 보전하 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롬 11:18).
신약이 구약을 토대로 쓰여졌기 때문에 신약이 구약의 빛 아래에서 읽혀져야 한다. 신약에 인용된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의 어머니요 스승이다(mater et magistra Novi Testamenti). 고대 교회의 학자요 성경번역가인 히에로니무스(Hieronimus)의 "구약을 모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라는 유명 한 명제를 남긴바 있다. 이를 약간 변형하여 "구약을 모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 이고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무튼 신약성경이 기독교인에게 단순히 구약성경의 첨부나 부록이 아닌 것처럼 구약성경도 단순히 신약성경의 머리말이나 전역사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다음성(多音聲)으로 된 전체를 형성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둘은 전세계의 구속이라는 드라마틱한 사건 을 선포하고 이러한 구속의 마지막 행위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되어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약의 가치는 신약에서는 찾기 어려운 구약 고유의 본문에서 극대화된다.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구약에 나타난 "아름다운 세상성"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은 삶의 거울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결정적인 삶과 신앙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외에도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구약성경의 가치는 기독교 교의학 (Dogmatik)에 끼친 영향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영향은 크게 세 주제에서 나타난다.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살아 계신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창조, 하나 님의 계시의 역사성 등의 신론의 주제이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인간의 전체 성, 창조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 인간의 죄성과 용서 등의 인간론의 주제이다. 셋째, 메시야의 기대와 하나님의 나라 등과 같은 종말론의 주제이다. 이와 더불어 예언자, 대제사 장 그리고 왕으로서의 세 가지 직임에 대한 기독론 이해와 성령론에도 구약은 영향을 주고 있다.
만약 기독교에서 구약의 신학적 중요성과 유용성이 축소된다면 그것은 의식적이든 아니면 무의식적이든 간에 잠재적인 마르시온주의(Markionismus)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 다. 구약의 가치를 망각하고 구약 설교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의식적으로 이를 기피하는 사 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가 마르시온의 제자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아무튼 구약이 전하는 하나님 메시지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기독교 신학과 선포는 하나의 단편이요 미완성의 작품(Torso)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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