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하나님의 존재 방식
고전 13:1-13, 주현 후 넷째 주일,
2016년 1월31일
/ 정용섭 목사(대구/서울 샘터교회)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요즘 젊은 연인들과 부부들은 ‘사랑해요.’라는 말을, 또는 그런 문자를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거 같습니다. 더 나가서 아버지가 딸에게, 딸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들이 어머니에게도 ‘사랑해요.’라고 합니다. 티브이 드라마에서는 물론이고, 교회에서도 목사님, 사랑해요, 또는 아무개 집사님 장로님 사랑해요, 하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이런 언어 현상에는 미국 문화의 영향이 큰 거 같습니다. 그들은 툭 하면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고, 허그도 하고, 남녀 불문하고 뺨을 댑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때로는 상투적이라고 해도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니까 가능하면 자주 표현하는 것도 좋아 보입니다. 심리학자들과 교육학자들도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런 표현이 입에 붙지 않아서 잘 못합니다. 간혹 설교 때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무엇일까요? 옛날 가요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일리가 있긴 합니다. 사랑이 늘 성취되는 것도 아니고, 짝사랑도 있고, 사랑이 뜨거웠다가 곧 시들해지기도 하니까요. 사랑이 왜곡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장 흔한 게 부모의 자식 사랑입니다. 가장 강렬하면서도 그런 정도로 위험합니다. 부모와 자식은 평등관계가 아니라 가장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관계에서 시작됩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유무형의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제법 됩니다.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면서 ‘이게 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야.’라고 합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은 자식에게 과도한 교육을 시키면서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사랑이 뭔지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교 학부 다니던 시절인 1970년대에 에릭 프롬은 인기 있는 저술가였습니다. 그의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e)입니다. 그는 헬라 사람들이 사용한 단어를 설명하는 것으로 자신의 논리를 펼칩니다. 헬라 사람들은 사랑을 세 가지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가 그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대목에도 아카페와 필로스가 나옵니다.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을, 필로스는 친구 사이의 우정을, 아가페는 신을 향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원래 사랑은 총체적인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에 분리해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어쨌든지 에릭 프롬은 가장 기초가 되는 사랑을 평등한 관계에 기초한 필로스라고 하면서, 사랑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손가락 연습과 아울러서 예술적인 안목을 길러야 하는 것처럼 사랑도 일종의 예술과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책 제목을 『The Art of Love』라고 한 겁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점에서 가족끼리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성경은 사랑에 대해서 뭐라 말할까요? 사도 바울은 오늘 제2 독서인 고전 13장에서 사랑을 감동적인 필치로 묘사합니다. 고전 13장은 소위 ‘사랑예찬’이라고 불립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로 시작해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로 끝납니다. 그 중간에 사랑이 무엇이냐에 대한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젊은 사람들이 연애편지를 쓸 때 인용하면 큰 효과가 날 겁니다. 4절만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감동적인 내용이지만, 솔직히 말해 이런 구절을 읽으면 뭔가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삶을 요구당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속을 썩일 때도 이 구절을 기억하면서 그래 참아야지, 온유해야지, 시기하지 말아야 하면서 자기를 달랩니다. 그래봤자 미운 마음이 금방 없어지지 않고, 없어졌다가도 다시 튀어나올 겁니다. 아름다운 말이지만 현실성이 없고 너무 이상적인 가르침으로 들립니다.
바울은 고전 13:1-3에서 기독교인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은사들을 열거하면서, 그것이 사랑에 근거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꽹과리가 되고...’ 방언과 천사의 말은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특별한 언어입니다. 주로 열광적인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언어 능력입니다. 고린도교회에서 흔하게 있었던 종교현상입니다.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방언 현상은 근동의 이교적인 종교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다를 게 없다고 본 겁니다. 2절에는 한 단계 올라가서 예언, 비밀, 지식, 믿음이 나옵니다. 믿음에 대한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마저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아주 극단적인 표현입니다. 도대체 바울이 말하는 사랑이 무엇이기에 당시 교회에서 귀한 것으로 인정받던 신앙행태들이 다 상대적인 차원으로 떨어지는 것일까요? 3절을 보면 이런 질문이 더 많아질 겁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3절에 가치 있는 두 가지 행동이 나옵니다. 하나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면서까지 어려운 이들을 돕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겁니다. 구제와 자기희생입니다. 이 두 가지는 앞에서 나오는 것과 비교할 때 훨씬 더 고상하고 덕스럽고 인정받을만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구제와 자기희생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구제와 자기희생을 통해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사랑이 없으면...’이라는 문구를 통해서 사랑과 구별합니다. 이상하지요?
바울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고전 13장의 사랑예찬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건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 12장에서 은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합니다. 은사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으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저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어, 하는 말은 저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사람이야, 라는 뜻입니다. 그 은사의 종류가 고전 12:8-10절에 나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등등입니다. 고전 13:1-3절에 나오는 것들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모든 활동을 은사로 본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의 역할도 은사이고, 반주자의 역할도 은사이고, 주일학교 교사, 청소, 반찬 준비 등등이 다 은사입니다. 더 나가서 기독교인들에게는 세속의 직업도 다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소중합니다. 그 은사가 자신의 삶에서 더 풍부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이 은사 문제를 언급한 이유는 고린도교회에서 이게 실제로 문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1:17절 이하에 따르면 성찬식에서도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당시에는 모든 신자들이 참석하는 애찬식과 세례 받은 사람들만 참석하는 성찬식이 있었는데, 그게 다 성찬식입니다. 애찬식은 신자들이 집에서 먹을거리를 가져와서 함께 나누어 먹는 방식의 성찬식입니다. 부자들은 비싼 걸 가져오고 가난한 사람은 값싼 걸 가져옵니다. 그걸 함께 나누어먹으면 괜찮지만 부자들은 자기들끼리 자기들이 가져온 것을 먼저 먹었습니다. 거기서 가난한 신자들이 느꼈을 소외감은 교회를 흔들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11:22절에서 왜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 책망하고, 12장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니...’라고 했고,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다.’고 말합니다(12:25). 고린도교회가 은사 문제로 인해서 서로 상처를 주고 반복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고린도교회 신자들의 인격이 삐뚤어졌다거나 지적인 수준이나 교양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겁니다. 결정적인 이유는 은사 자체의 한계입니다.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은사는 인간 욕망의 수단으로 쉽게 전락될 수 있습니다. 신비로운 말과 설득력 있는 말, 예언, 설교, 성경지식, 강렬한 믿음, 구제와 자기희생 등등, 모든 은사를 사람들은 소중하게 여깁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한 순간에 자기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교회에서 서로 싸우고 갈라지는 것은 대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 데서 벌어집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하면서도 서로 싸우고 배척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다투는 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저항해야 하고, 신학적인 논쟁도 교회 안에서 필요합니다. 문제는 은사를 이용해서 자기를 내세우기 때문에 벌어지는 대립과 반목입니다. 특히 목회를 하는 목사에게는 이런 위험성이 더 많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목사들이 흔히 이렇게 반론을 폅니다. ‘나보다 교회를 더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는 24시간 교회만을 생각한다 말이야.’ 목사라는 은사를 이용하는 태도입니다.
둘째,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모든 은사는 사라집니다. 은사는 다 상대적인 겁니다. 바울은 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예언, 방언, 지식이라는 은사도 언젠가는 끝납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과 자랑거리는 시한부라는 뜻입니다. 아주 사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가까이 올수록 모든 은사는 가물가물한 곳으로 사라집니다. 여기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있다고 합시다. 노래 잘하는 은사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요. 신학자도 나이가 들면서 신학지식을 잃게 됩니다. 구제와 자기희생을 포함한 모든 은사들은 잠정적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다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를 다음과 같이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능력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면 사랑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시들해지고 낡고 형해화되고,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매너리즘에 빠지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고, 그래서 고집스럽게 만들고, 반목하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사랑처럼 보이는 은사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사를 은사답게 만들 수 있는 사랑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설교 앞 대목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저의 입에 잘 붙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게 습관이 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두렵게 여긴다는 데에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라는 오늘 설교 제목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좋은 말을 하고, 관용을 베풀고, 사람들 사이를 화해시키는 인격과 교양 자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은사에 생명력을 부어넣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만이 명실상부하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보았습니다. 본문 4-7절의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사랑의 능력입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여기서 묘사된 사랑(아가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삶의 내용입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모두 이렇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구절은, 앞에서 남간 언급했듯이 우리에게 뭔가 불편하고 어색하고 비현실적으로 들립니다. 이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것, 즉 신적인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인 십자가에서 마저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에게 맡긴 예수님에게서 사랑은 ‘현실’(reality)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해받는 걸 감수하면서 ‘사랑이 없으면’ 기독교인들의 모든 은사가 공허한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아가페 ‘없이’가 아니라 아가페와 ‘함께’ 함으로써 은사를 은사답게, 즉 실제로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바울은 본문에서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자기 은사에 떨어져서 교회를 분열에 빠뜨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만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선언적으로 말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에서 간접적으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과 희망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2절에 나온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아니라 사랑의 원천으로 살았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희망은 종말에 하나님이 이루실 부활 생명을 향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사랑과 결합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과 희망이 깊어지는 사람들은 사랑의 깊이로 이끌림 받습니다. 자기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바울의 이런 말이 실제로 삶의 내용으로 다가오는지요.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는 경험이 있으신지요. 대답하기 곤란하지요? 거꾸로 저에게 묻고 싶은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설교하는 당신의 삶으로 증명해보라고 말입니다. 증명할 자신이 저에게 없습니다. 여전히 부분적으로만 알고, 거울을 통해서만 보고 있어서 지금 제가 알고 있고 경험한 것에 대해서 늘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동의를 기대하면서 저는 바울의 가르침에 기대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능력이자 존재 신비인 사랑이 저의 인격과 실존 전체를 사로잡아주기를 바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에 평생 전념하는 중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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