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14, 2018

음부에 내려 가신 지(사도신경)/이진오 목사

📌사도신경 강해
⑨ ‘장사되시어(음부에 내려가신 지) 사흘 만에’

/ 이진오 목사

오늘은 사도신경 본문 중 좀 난해한 구절은 “장사되시어 (음부에 내려가신 지) 사흘 만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라고 되어 있는데 “음부에 내려가신 지”(Descendit ad inferna)를 추가 한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추가한 것이 아니라 원래 원문에는 있던 것인데 우리 말 사도신경에는 생략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교파가 고백하고, 모든 번역본에 존재한다

이 구절이 생략된 과정이나 이유를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사실 좀 난해합니다. 그냥 생략된 채로 지나가면 저도 쉽고, 여러분도 쉬울 텐데 굳이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이 구절이 원문에는 있는 구절이고, 그 의미도 사실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소천하신 이정석 교수는 ‘사도신경의 음부강화론’이란 글에서 “사도신경은 전 세계 교회가 공통적인 신앙고백으로 인정하는 유일한 신앙고백문이며, 라틴어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언어로 번역된 사도신경에 이 구절이 포함되어 있고, 가톨릭, 동방정교회, 성공회, 칼빈파, 루터파,, 성공회 등 세계 모든 교회가 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19세기 독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사도신경에서 동정녀 탄생 부분을 빼려고 했고, 최근 여성신학의 영향으로 아버지라는 단어를 수정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모두 거부되었다. 그 이유는 사도신경을 훼손하는 것은 정통 기독교회로부터 탈퇴하는 결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며 사도신경의 원문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서철원 교수와 같이 초기 원문에는 이 구절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소수 의견이며 라틴어 뿐 아니라 영어,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모든 언어들에 이 구절이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 구절이 빠져있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성경을 새롭게 개역개정으로 번역하면서 사도신경 새번역을 수록하면서 원문에는 빠졌지만 난하주 2번으로 “장사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가 공인된 원문에는 있으나 대다수의 본문에는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 원문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고백에 삭제된 이유

우리나라 번역본에서 이 구절이 생략된 이유에 대해 이정석 교수는 “김용준 목사가 1963년 [기독교사상]에 2회 연재한 “사도신경의 개역의 필요성”이라는 논문에 의하면, 이 구절의 삭제가 감리교회의 영향에 의한 것임을 발견하였다. 1894년 언더우드선교사의 사도신경 번역판이나 1905년 장로교선교사협의회에서 번역한 사도신경에는 이 구절이 들어 있는 반면, 1897년과 1902년, 그리고 1905년에 번역된 감리교회의 사도신경에는 한결같이 이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그러나 1908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합동찬송가]를 발간하면서 사도신경의 통일이 불가피하게 되었을 때 장로교회는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을 양보하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가 이렇게 한 이유에 대해서 “감리교회는 교리보다는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역사적인 정통교리 중에서 난해하거나 상식을 초월하는 일부 교리를 제거하는 작업을 감행하였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John Wesley가 1784년 작성한 감리교신조는 영국교회의 신조인 ’39신조’에서 발췌한 25신조인데, 이때 칼빈주의적인 부분들이 많이 제거되면서 39신조의 제3항인 “그리스도의 음부강하에 대하여”가 전부 생략되었다. 한국 감리교회의 사도신경 번역에 이 구절이 삭제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현재 우리나라 사도신경에서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번역에서 비록 난하주이지만 이 구절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신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교단 중 하나인 ‘고신 총회’에서 이 구절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하고 이에 대해 이성호 교수(“음부에 내려가사” 개혁주의 신조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황대우 교수(사도신경의 지옥강하)라는 글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는 등 점차 이 구절은 회복되고 있습니다.

“장사되어”의 의미

여기까지 설명을 드리고,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장사되어”라는 구절을 고백하는 것의 의미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는 “음부에 내려가사”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음부에 내려가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장사되어”와 연결되어 있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음부에 내려가사”는 이런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도신경은 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에서 바로 부활로 넘어가지 않고 장사되었다는 것을 기록하였을까요?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심 즉, 매장되심을 기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예수님이 죽지 않고 기절했거나, 죽은 척 했다는 등의 소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부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빼돌리고 부활했다고 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위대한 인물들은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당시 일반적인 생각에 동조해 예수님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잘못된 소문이나 믿음을 바로 잡기 위해 성경은 예수님이 죽으셨고 장사되었다는 것을 기록합니다. 바울도 이 부분을 분명히 해서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사”(고전15:3,4)라고 기록합니다. 이 본문은 바울이 복음을 분명히 전하는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서 41번에도 이에 대한 질문에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사되심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었음을 확증해 준다.”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신경이 예수님의 죽으심 후에 부활로 넘어가지 않고 그의 장사되심을 기록하는 것은 그가 실제로 죽었음을 확증하기 위한 것이고, 이를 통해 그의 부활이 죽음을 이기신 권세 있는 역사라는 것을 분명히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장사되심을 고백함으로 그의 죽으심이 소위 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육체적 죽음이라는 것을 믿는 것은 이를 통해 부활을 소망하는 우리도 세상 가운데 죽은 존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4,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인 것처럼 그 예수의 죽음에 동참하여 구원을 받은 성도 또 옛 사람이 완전히 죽고 십자가의 삶을 따라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아울러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음부에 내려가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

“음부에 내려가사”가사는 이와 같이 예수님이 완전히 죽으시고 장사되었다는 것에 이어서 언급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해석하는 다양한 견해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실제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해석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선조 림보”(Limbus Patrum)라는 ‘연옥’의 정당성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음부에 내려가셔서 복음을 전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믿음이 부족했던 사람들이 ‘연옥’에서 있다가 살아있는 자들의 기도나 선행을 통해 다시 구원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벧전3:18~20,4:6 등에 근거를 둡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가톨릭의 교리를 상당부분 승계하고 있는 성공회에서는 음부를 죽은 자들이 종말의 백보좌 심판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거하는 낙원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낙원에 “올라갔다”고 하지 않고 왜 “내려갔다”라고 표현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루터파에서는 예수님께서 음부에 가셔서 복음을 전하심으로 사탄에 대해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하셨다고 해석합니다. 외경인 ‘에녹서’를 근거로 한 것인데, 하나님의 통치권이 하늘과 이 땅 뿐 아니라 음부와 지옥에까지 이른 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옥도 사단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통해 음부에까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를 선포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개혁파 교회의 해석에 대해서 이정석 교수는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신 것을 거부하고 상징적 것으로 해석한다고 제시합니다.

상징적 해석에는 2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3일간 죽으셨던 기간 즉,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음부”를 나타내는 “하데스”를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격리된 것, 죽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칼빈의 견해입니다. 칼빈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언급이라면 앞에 분명히 “죽으시고 장사되었다”는 표현이 있는데 굳이 이 구절을 넣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들어 이를 거부합니다. 그는 이 구절의 의미를 이 구절은 단순한 사망상태의 서술이 아니라 “음부”즉, 실제적 죽음의 공간에 대한 실제적인 고통의 영적 체험이라 설명합니다.

이 말은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어 인간의 육체적 죽음을 완전히 체험하신 것처럼, 인간의 영적인 죽음의 고통도 동일하게 체험하셨는데 이를 “음부에 내려가사”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육적 죽음과 영적 죽의 고통 두 영역에 대한 완전한 대속적 완성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이델베르크 문답은 제44문에 “나의 가장 무서운 시험 중에도 나의 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불안과 번민에서 건져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에 대해 음부 강하가 단지 영적 죽음의 고통에 대한 체험이라면 왜 “죽음” 이전에 기록하지 않고 부활 직전에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반론과 개혁파 교회의 가르침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무덤이나 음부, 낙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음부강하는 이런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음부에 직접 내려가셨다는 것은 상징적 표현

어떤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음부”가 아니라 “지옥”으로 표현합니다. 개혁개정의 사도신경 새번역도 난하주를 달면서 “지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음부를 나타내는 “하데스”는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대체로 어떤 장소를 나타내는 지옥이 아니라 “죽음의 상태”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지옥은 ‘타르타루스’(벧후2:4)라는 단어 등을 사용합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음이라”(행2:24)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2:31은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영혼이 사망과 음부에 매이거나 버림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한 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하셨고, 아버지 하나님께 영혼을 부탁하셨습니다.”(눅23:46) 이 때 “낙원”은 에덴동산처럼 “동산”이나 “숲”으로 번역된 단어로(창2:8,느2:8,전2:5,아4:13)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낙원은 복되게 죽은 자들이 처하는 장소의 시적인 표현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칼빈이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인간과 동일하게 육체적 죽음을 당하고, 영적 죽음의 고통을 맞보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범사에 인간인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히2:17) 사망이 그를 매여 두지 못하였고, 음부의 고통에서 부활 승천하심을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요19:30)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다 이루심은 음부에 있든, 낙원에 있든 모든 자를 포함합니다.

📌벧전3:18~20, 4:6 은?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직접 음부로 내려가셔서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연옥설”이나 “제2기회설” 등의 근거로 제시되는 벧전3:18~20은 무슨 의미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여기 “저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베드로전서 3장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의 삶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고난은 예수님의 승천과 부활로 승리하신 것처럼(벧전3:22) 그리스도인들의 고난도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소망을 주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옥에 있는 영”에게 전파 하셨다는 것을 노아의 방주 때 구원받은 8명의 가족 외에 불신하며 죽었던 자들(20절)에게 노아의 시대에 노아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이 말씀을 전했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은 예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구약시대에도 존재했고, 구약시대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께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 구원에 이를 길을 주었다는 것에 근거합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노아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이 전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자 중에도 “옥”(하데스)에 있다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해석해 노아 가족 외에 불신하며 죽었던 영들, 또는 4:6에서 이야기하는 “죽은 자들”을 염두해 두어 예수님 이전에 죽었던 모든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승리를 선포하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기회를 주었다고 설명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때도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이전 시대에 죽은 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인격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입니다.

두 가지 중 어떻게 해석하든, 이 본문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될 시점에 이 사건이 있었다고 적용하는 것은 조금 확대 해석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사”와 이 본문에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는 별개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4:6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 되었으니”에서 “죽은 자들”이 누구일까요?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이루어 질 것으로 믿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궁금해 했습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예수님이 재림이 임박해 곧 살아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잠자는 자”들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한 것이고, 그들은 육체로는 죽은 자들이지만 이미 복음이 전해진 자들로 영으로는 부활의 승리를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사되시어 음부로 내려가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 가지 어려운 설명을 드렸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장사되시어 음부로 내려가사”라고 고백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첫째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으로 육체적을 죽으셨고 그 죽음의 고통을 우리와 같이 겪으사 우리로 하여금 그 고통에 연합함으로 십자가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육체적 죽음의 고통 뿐 아니라 영적 죽음의 고통까지도 그대로 겪으사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대속적 죽음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지배권이 음부에까지 이르는 하늘과 땅과 땅 아래까지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적 시간과 공간을 섭리하신 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의 죽음의 고통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깊고 클수록 그의 부활의 영광 또한 더욱 크고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해석이 있고 모두 이해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이 구절은 사도신경 안에 있고, 그럼으로 우리의 믿는바 신앙고백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육체적 죽음을 확정하며 장사되시고 음부에 내려가사 우리가 겪을 영혼의 고뇌와 고통과 공포를 감당함으로서 우리를 이것들로부터 구원해 부활에 이르게 하심을 믿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 위 내용은 4.2(월) 인천 더함공동체교회 새벽기도회에서 이진오 목사가 설교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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