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사람은 죽으면 육체는 땅에 있고 영혼은 천국 혹은 지옥으로 가나요? 아니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기다렸다가 심판 받게 되나요?
[답변]
사람이 죽으면 한 명의 예외 없이 즉각적으로 구원과 심판으로 나뉩니다.(히9:27) 이 땅에서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사실은 예수를 순전히 믿고 영접하는 순간에 이미 구원 받은 것이며 천국 영광은 보장된 것입니다. 반대로 죽을 때까지 예수의 대속공로를 믿지 않은 자는 죽은 후 확실한 심판으로 떨어집니다. 죽은 후에 제2의 회개 기회는 전혀 없습니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았고 물질로 이뤄진 사람의 육신(body)은 이 땅에 남아서 썩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면 예수 믿은 신자는 신령한 육체를 입고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럼 죽은 후와 마지막 때의 부활까지 사이에 영혼은 어떤 상태로 어디에 있는지(중간기 혹은 중간상태라고 칭함)에 관해선 신학적으로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우선 유대인들은 음부(스올)라는 곳에서 마지막 심판(부활)의 날까지 아무 의식 없이 죽은 상태로 무한정 대기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카톨릭은 연옥설을 주장하며 제2의 회개 기회가 있다고 왜곡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파 중 하나인 재침례파는 단순히 잠자고 있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의식할 수 있는 존재(루터보다 의식할 수 있는 존재를 더 강조)로 대기하지만 잠정적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육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자칫 플라톤의 인간의 영육 이분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여겨져 많은 논쟁과 반발이 있어 왔습니다.
이런 중간기에 대해 성경은 거의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신자가 죽는 순간에 완전히 파멸되지 않으며 그리스도로부터도 완전히 단절되지 않는다는 점을 성경이 말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이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 안토니 후크마가 신약성경의 세 구절을 들어 변증했는데 저도 백 프로 동의하기에 간략하게 축약해서 소개하겠습니다.(“개혁주의 종말론” 안토니 후크마 저작, 유호준 역, 1986, 기독교문서선교회 page 129-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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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구절은 십자가상에 주님 우편의 회개한 강도에 관한 설명입니다.(눅23:42-43) 주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선언했습니다. 강도는 일반 유대인들처럼 먼 미래의 심판 날을 생각하고 “당신의 왕국에 임하실 때에” 자기를 생각해달라고(구원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오늘 낙원에 함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늘 가신 곳은 분명 천국입니다. 낙원이라는 용어도 바울이 고린도후서12:4에서 삼층천 즉 천국이라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죽은 후 곧바로 천국 간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빌립보서 1:21-23인데,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면서 “나의 소망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됨”이고 그것이 더 좋다고 고백합니다. ‘떠나다’는 헬라어는 죽는 것을 의미하기에 떠나서 죽는 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없어졌거나 잠만 자고 있는 상태에선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더 좋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셋째는 고린도후서 5:6-8로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다고 합니다. 땅에 있는 장막이란 육신을 입고 죄와 고통이 많은 이 땅에서의 존재양태입니다. 그것이 무너진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하나님의 영원한 집이 예비 되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은 집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서 여러 의견이 있지만 이 땅과는 전혀 다른 영광스런 존재 양식을 입는다고 봐야 합니다.
둘째 셋째 구절을 종합하면 바울은 죽음의 순간에 주님과 함께 하늘의 집에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입신하여 천국에까지 가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계시 받은 자입니다. 그가 지어낸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며 그 개인의 종교적 사상 철학도 아닙니다. 분명히 보고 들으며 체험하고 온 그 삼층천이 너무 좋아서 즉, 사실에 입각해서 자기 소망을 말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중간기에 관해선 이 세 구절 외에 예수님의 죽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눅16:19-31)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 받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비유에선 아브라함의 품)에서 평안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제발 나사로를 다시 땅으로 보내어 살아있는 자기 형제 다섯에게 이런 구원과 심판을 증거케 하여 지옥에 오직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를 안 믿는 자는 죽은 자 중에 살아나는 자가 가서 증언해도 믿지 않는다고 거절했습니다.
이 비유에선 인간이 죽은 후 부활 이전이라도 분명히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고 의식과 행동을 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단순히 비유이기에 중간기 상태로 해석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상태가 완연히 나눠지지 않는 이상, 또 믿는 자가 가는 곳이 아주 좋은 곳이라는 전제 없이, 이런 비유를 말씀하실 리는 없습니다. 또 살아있는 형제에게 지옥의 고통을 설명해달라고 하니까 마지막 부활 이전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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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진리에 관해선 예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를 갖습니다. 신자가 죽은 후 부활 때까지의 중간기 상태에 관해서도 이 비유와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하신 약속에서 주님이 말하고 있는 바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상태와 모습은 성경이 침묵하기에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물질계에서 벗어났기에 썩지 않고 영존할 것입니다. 바울의 보충 설명에 따르면 분명히 이 땅에서 육신을 입은 존재양상보다 훨씬 좋고 영화로운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잠정적이며 완성된 상태는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신령한 육신으로 입고 부활할 때에 비로소 최종적 영화가 이뤄질 것입니다.
1/29/2016
출처:
http://whyjesusonly.com/questionok/24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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