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pril 7, 2018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바벨론 1차 포로 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된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 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것이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이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다. 제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2차 포로 귀환

제 1차 바벨론 포로 귀환이 있은 지 79년 후인 주전 458년에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의 지도하에 제 2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음에도 거룩한 선민 공동체로서 합당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유다인들에게, 2차 귀환을 통해 인적·물적으로 큰 지원이 이루어지고, 에스라의 대대적인 개혁 운동으로 유다인들 내부의 영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신앙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① 성전을 중심으로 한 언약 신앙의 공동체를 온전히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바벨론을 출발한 에스라는 귀환자들을 조사한 결과, 그 가운데 성전 제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해야 할 레위인이 귀환에 전혀 응하지 않았음을 알고(스 8:15), 성전 봉사자들을 모았다.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으로 38명의 레위인이 확보되었고 레위 사람을 수종들게 한 느디님 사람 중에 220명을 데려왔으며 그들의 이름을 다 기록하였습니다. 에스라 8:16-20에서 보듯이 제 2차 귀환에 동참할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을 모은 사실을 중점적으로 기록한 것은, 제 2차 귀환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 신앙의 공동체가 온전히 회복되게 하려는 데 있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② 성전 제사의 회복에 필요한 큰 물질을 보충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는 바사의 왕과 모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은금과 바벨론 온 도에서 은금을 얻었고, 또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와 제사장들이 드린 예물을 받았습니다(스 7:15-16, 8:25-27). 그 예물로는 각종 제사에 쓰이는 제물과 전제의 물품을 구입하도록 했습니다(스 7:17). 또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기명을 받았고, 그 외에도 성전에서 필요한 무엇이든지 왕의 내탕고에서 가져가라는 파격적인 허락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는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받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스 7:18-20, 23-24). 이러한 조치들로 귀환자들의 공동체가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재정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③ 에스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종교 지도자로서 율법을 가르치라는 명령과, 행정 지도자로서 왕이나 유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큰 권세까지 부여받았습니다(스 7:25-26).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왕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스 7:27-28), 에스라는 제 2차 귀환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시기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458년 바사(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주전 464-423년) 때 제 2차 귀환을 하였습니다(스 7:7-9). 이때는 제1차 귀환 후 79년이 지났을 때이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주전 516년)되고 58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3) 귀환 계기

아하수에로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발생한 ‘에스더 사건’은 제 2차 바벨론 포로 귀환을 준비케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의 결과였다. 당시 아하수에로 왕이 가장 높은 지위에 올렸던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인 ‘유다 민족’을 말살할 계획을 세웠다.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는 이 모든 일을 알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하고 각 지방의 유다인도 애통하여 금식하며 부르짖었다(에 4:1-3). 자초지종을 알게 된 왕후 에스더에게 모르드개는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3-14)라고 전했다. 에스더는 3일 동안 금식의 기한을 정해놓고 수산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도 금식하도록 부탁했다(에 4:15-16).

에스더는 누구든지 왕의 부름 없이 안뜰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일사각오로 왕께 나아갔다(에 4:16). 왕과 하만을 초대한 잔치 자리에서 에스더는 유다인들이 하만에 의해 진멸될 위기에 있음을 왕에게 알렸고, 왕이 심히 노하여 하만과 그 일가를 완전히 진멸하게 되었다.결국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만든 50규빗(약 22.8m) 되는 나무에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고, 하만이 유다인들을 말살할 날로 정한 12월 13일과 14일은 유다인 대적의 최후의 날이 되고 말았다(에 7-9장). 그리하여 해마다 12월 14일과 15일을 명절로 지키도록 하였는데, 유다인들을 없애기 위해 뽑았던 제비를 뜻하는 ‘부르’라는 말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에 9:20-28).

바사 제국 127도에 흩어져 있던 유다 전 민족이 몰살당할 뻔했다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섭리 가운데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은 이 사건이, 제 2차 포로 귀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바사의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기명들을 에스라가 제사장 12인에게 달아 준 것은, 은 650달란트(22,100kg), 은 기명 100달란트(3,400kg), 금 100달란트(3,400kg), 금잔 20개(1천 다릭, 8.4kg: 금잔 1개당 420g),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 2개였습니다(스 8:25-27, 참고-스 7:15-16).

제 2차 귀환자들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하며 평탄한 길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스 8:21). 그리고 1월 12일에 아하와 강을 떠나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스 8:31). 아닥사스다 왕 제 7년 1월 1일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5월 1일에 도착했으므로 약 4개월이 걸린 것입니다(스 7:9). 실제 여행 거리는 약 1,500km가 넘는 험한 노정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귀환하는 자들을 도우셔서,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스 8:31).

(3) 에스라의 개혁 운동

①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

제 2차 귀환의 지도자 에스라(뜻:여호와께서 도우신다)는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스 7:1-6, 참고-대상 6:3-15, 49-53) 제사장이었으며 학사(서기관)를 겸한 지도자였습니다(스 7:6, 11, 12, 21, 10:10, 16). 에스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즉위한 해인 주전 464년에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스 7:1, 6), 1차 귀환 시기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아들 요야다(느 12:10, 26), 3차 귀환의 지도자 느헤미야의 활동 시기에도 함께 사역을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출생하였지만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귀환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 율법에 익숙한 학사 겸 제사장(스 7:6, 10)으로, 국가적 대혼란 시기에 유다 역사에 변화의 첫 물꼬를 튼 위대한 개척자였습니다.

② 에스라의 개혁 운동

바벨론에서 귀환한 에스라는,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방과 결혼하고 방백과 두목이 앞장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과 혼잡시키는 것을 알고, 그 죄를 걸머지고 자복했다. 그때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며, 이방 여인과 그 소생을 내어 보내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며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기를 바랬다(스 9:1-15, 10:1-14).

10월 1일부터 1월 1일까지 석 달간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 이스라엘 중에서 이방 여인과 통혼한 자들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그 명단을 낱낱이 공개하였다(스 10:16-44). 이 명단을 보면,백성보다 지도자들 가운데 죄가 더 크게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스 9:2). 또 에스라 10:44에는 “... 그 중에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라고 했으니, 이 개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아내뿐만 아니라 자녀와도 생이별해야 하는 쓰라린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기 위해 말씀의 뜻대로 하는 개혁은, 육정을 끊는 아픔까지도 능히 참고 견디며 이겨 내야 한다(마 10:37).

제 1차 귀환 이후 어렵게 성전 건축을 마치고도 타락의 길을 걷고 있던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제 2차 귀환과 함께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러 올리셨습니다(스 7:6-9).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통해 온 백성이 회개하고 각성하여 믿음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크신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바벨론 3차 포로 귀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제 1차 귀환 때 성전을 건축하게 하심으로써 유다 백성을 구속사의 주역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 2차 귀환 때는 에스라 선지자의 개혁을 통하여 내면적인 신앙 회복을 이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제 3차 귀환 때는 성벽 재건을 통하여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고, 개혁과 부흥 운동을 통하여 선민의 성결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제 3차 귀환은 느헤미야를 유다 땅의 총독으로 세워,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케 하고 유다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느 2:5-8, 5:14, 13:6). 제 1차 귀환과 제 2차 귀환은, 제 3차 귀환 때 이루어진 성벽 재건과 개혁 운동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유다는 다시 구속사를 이끌어 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시기

아닥사스다 왕 20년(주전 444년. 느 1:1, 2:1), 제 2차 귀환(주전 458년) 이후 14년째에 제 3차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던 느헤미야(느 1:11)가 형제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소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9월)이었고(느 1:1-3), 느헤미야가 왕에게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한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니산월(1월)이었습니다(느 2:1). 시간 순서상 9월 다음에 10월~12월이 지나 다음해 1월이 오기 때문에 1월은 아닥사스다 왕 제 21년이 되어야 하지만 느헤미야서에서는 티쉬리(7월) 기준 달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월’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 자료 ‘통치 연대 계산에 필요한 이해 2’ 참조)

또 한 가지, 에스라 7:7에서 2차 귀환년도를 ‘아닥사스다 왕 7년’으로 표기해 2차 귀환년도가 마치 주전 457년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느헤미야서가 티쉬리월 기준 달력을 쓰고 에스라서가 니산월 기준 달력을 쓰기 때문에 생긴 연도 차이입니다(느 1:1, 2:1, 학 1:15, 2:10, 스 4:24).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3차 귀환 시에 몇 명이 돌아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고, 느헤미야 한 사람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보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느 2:5-8, 5:14). 아닥사스다 제 20년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면서(느 2:1, 5:14, 13:6), 그들의 정착과 신앙개혁을 힘있게 이끌었습니다.

(2) 귀환 계기

당시 유다는 바사 제국에서 파견된 총독의 관할 지역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성벽을 짓는다는 것은 곧 반란이나 폭동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방백 르훔(사마리아 총독)과 서기관 심새를 중심한 강 서편의 아닥사스다의 신하들의 고소장을 받고(스 4:6-16) 예루살렘 성곽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스 4:17-23).이 때 대적들은 부분적으로 세워졌던 성벽을 무너뜨리고 분명히 불을 질렀을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20년 기슬르월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타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느 1:1-3) 아닥사스다 20년 니산월까지 4개월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느 1:4-2:2). 마침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느 2:8, 18),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벽을 중건하게 되었습니다. 성벽 재건을 심하게 방해했던 왕은 느헤미야의 간청을 듣고 귀환을 허락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도와주었습니다(느 2:3-8). 왕이 자기가 내렸던 조서를 번복해서 다시 조서를 내리는 일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3) 성벽 재건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

귀환한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끊이지 않는 대적들의 심각한 훼방과 위협으로, 성벽 공사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① 내부 귀환자들 중의 방해 세력

▸ 담부(擔負. 등에 지고 어깨에 멤)치 않은 드고아 귀족들(느 3:5) - 드고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귀족들은 성벽을 쌓는 데 있어서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았습니다. 구속 사역의 가장 중대한 때에, 주의 일보다 자신들의 체면을 앞세운 것입니다.

▸ 예루살렘 근처에 있으면서 성벽 재건에 협조하지 않은 귀환자들(느 4:12) - 성벽 재건은 지역을 초월해서 이루어졌는데(느 3:2-18), 예루살렘 근처에 살면서도 자기 신변의 안전만 먼저 생각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② 대적들의 방해 공작 – 성벽 재건 초기

느헤미야가 치밀하게 성벽 전체를 42구역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자(느 3:1-32), 산발랏과 도비야 등의 대적들은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라며(느 4:3) 유다 민족을 조롱하고 노골적으로 방해했습니다(느 4:1-4).

③ 대적들의 방해 공작 – 성벽 공사 절반 진행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자(느 4:6), 대적들이 군사적 방법까지 동원하려 했습니다(느 4:8, 11). 큰 위기에 직면하자 유다 백성들은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느 4:10).

④ 느헤미야의 빈틈없는 작전(성벽 건축과 병행한 철통 수비태세)

대적들의 위협이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오자 느헤미야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신속하게 실행에 옮겼습니다.

▸ 건축 공사와 함께 전쟁 무기 준비를 병행(느 4:16-17)

▸ 전쟁 시 신호와 군사 집결을 위해 나팔 부는 자가 느헤미야 곁에 섬(느 4:18-21)

▸ 각 사람이 공사하는 동안 그 종자(노비)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자도록 함(느 4:22)

▸ 느헤미야와 그 곁에서 파수하는 자들은 잘 때도 옷을 벗지 않고 병기를 손에 잡음(느 4:23)

⑤ 대적들의 막판 방해 공작(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

성벽 공사가 마무리되어가자 대적들은 급기야 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느 6:2). 산발랏 제사장 스마야를 매수하여 거짓 예언을 통해 느헤미야를 해치려 하였으나, 느헤미야가 요동치 않으므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스 10-14).

(4) 성벽 재건의 기적적인 완성과 낙성식

① 6(엘룰)월 25일,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의 완성(느 6:15)

성벽 재건 공사는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주전 444년) 아브월(5월) 4일에 시작하여, 모든 방해와 음모를 이겨 내고 52일 만인 엘룰월(6월) 25일에 전격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느 6:15). 성벽 완성은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서 국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② 에스라를 통한 율법책 낭독과 초막절 준수

성벽을 완성한 유다인들은 에스라를 청하여 율법을 듣고 온 백성이 눈물로 회개하였으며(느 8:1-12), 초막절을 규례대로 성대하게 지키고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느 8:13-18).

③ 언약에 인침

7월 24일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였고, 인을 쳐서 언약을 갱신하였습니다(느 9:1-38).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이방인과 같은 신세였던 이스라엘은 성이 중건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④ 성벽 낙성식

엘룰월(6월) 25일에 공사는 마쳤지만 낙성식은 예루살렘 거민이 너무 적었던 탓에 낙성식은 계속 연기되었는데,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의 거주지를 재배치하는 현명한 정책으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게 됨으로(느 11:1-24) 비로소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느 12:27-43). 느헤미야는 감사 찬송하는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한 떼는 에스라가 인도하고 다른 한 떼는 느헤미야가 인도하면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여 성벽 위를 걷는 독특한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느 12:27-43). 낙성식이 거행되었던 날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신 23;3-6) 이스라엘 가운데서 섞인 이방인을 분리하여 언약 공동체를 새롭게 하였습니다(느 13:1-3).

(5) 느헤미야의 재귀환과 개혁

느헤미야가 12년의 총독 임기(주전 444-433년)를 끝내고 바사로 돌아간 후에, 유다인들이 다시 타락하자 1년 만에(주전 432년) 돌아와 개혁 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느 12:4-31).

느헤미야는 성전 안에 거주하던 도비야를 추방하고 (느 13:4-9), 자신의 직무를 포기하고 떠난 레위인들을 복직시켰습니다(느 13:10-13). 그리고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게 하고(느 13:22), 이방 여자와 혼인한 사람들을 책망하고 쫓아내었습니다(느 13:23-28).

이러한 느헤미야의 개혁은 말라기 선지자와 함께 성경에 나오는 마지막 개혁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스라엘의 가슴에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츨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igs2010&logNo=220406452741&proxyReferer=http%3A%2F%2Fwww.google.com%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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