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부강하에 대한 개혁파 교회의 입장
"음부에 내려가셨으며"
1. 왜 한국교회 사도신경에는 없는가?
한국교회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1)라는 말이 없다. ‘음부 강하’라고도 하는 이 부분은 사도신경 내용 중 어려운 것 중 하나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이 부분을 고백해 본적이 없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이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굉장히 낯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한국교회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이 말이 없는가?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도신경의 라틴어 원문과 영어번역에는 이 말이 있다는 것이다.2) 라틴어 원문에 보면 ‘descendit ad inferna’라고 되어 있고 영어 번역에는 ‘descended to hell’이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새 번역 사도신경은 ‘장사된 지’라는 말 뒤에 난외주가 있는데 거기 보면 “‘장사 되시어 지옥에 내려가신 지’가 공인된 원문(Forma Recepta)에는 있으나 대다수의 본문에는 없다.”라는 설명이 있다. 원래의 원문에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사도신경에서 이 말을 빼버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원래의 한글 사도신경에도 있었다.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도신경 번역판이나 1905년 장로교 선교사 협의회에서 번역한 사도신경에는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1897년, 1902년, 1905년에 번역된 감리교 사도신경에는 음부강하 구절이 빠져있다. 그것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1784년 감리교 신조를 작성하면서 사도신경에 ‘그리스도의 음부 강하’가 전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08년 이후부터는 한국 장로교 사도신경에도 이 말이 빠지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 이유는 이렇다. 1908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면서 찬송가 앞뒤에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포함시켜야 하는데 주기도문과 십계명은 성경 본문에 근거한 것이니 상관없었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경우는 번역이기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감리교는 ‘음부 강하’ 부분을 빼기를 원했고 장로교는 넣기를 원했다. 그런데 여기서 장로교가 감리교에 양보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도 한글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빠져 있는 것이다.
2. ‘음부에 내려가셨으며’의 의미가 무엇인가?
먼저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로마 가톨릭의 견해
로마 가톨릭은 우리와 같은 서방교회 전통에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을 동일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천주교의 경우 사도신경을 번역하기를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라고 번역했다.3) 이렇게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사도신경에 ‘음부 강하’을 담고 있어 우리와 같은 입장에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들이 번역을 할 때에 ‘저승에 가시어’라고 한 것을 볼 때에 분명해 진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개혁교회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예수님이 저승(지옥, 地獄)에 가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다른 관점에서 이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그들은 자신들의 비성경적인 연옥(煉獄, purgatory) 교리와 연관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천주교의 연옥 교리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천주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예수를 믿는 신자라 할지라도 하늘(천국, heaven)에 갈 만한 완벽한 성인(聖人)은 극히 적다고 한다. 그래서 죽은 후 곧바로 천국에 가지 못하는 불완전한 신자들(?)이 일정 기간 다른 곳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연옥이다.4) 이렇게 연옥에서 영혼이 깨끗해 져야 비로소 ‘하늘(천국, heaven)’에 가게 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연옥 외에 또 다른 장소가 있다. ‘선조 림보’(Limbus Patrum)다.5) 이 림보는 지옥의 양쪽 가장자리(limbus)에 있는 곳으로 구약시대 신자들이 죽어서 그 영혼이 ‘구원계시의 완성’을 기다리는 장소라고 한다. 구약시대의 사람들 역시 믿음이 완전하지 않았다고 보고 그들이 바로 천국(하늘)에 가지 못하고 대신 ‘림보’로 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선조 림보’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가신 ‘음부’라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 ‘선조 림보’에 가셔서 그가 십자가에 이루신 구속의 공로로 구약의 성도들을 풀어 해방하셔서 그들을 데리고 ‘하늘’(heaven)로 가셨다고 해석하는 것이다.6) 그래서 한국 천주교의 사도신경 번역에는 ‘저승에 가시어’라고 되어 있다.7)
그러나 성경은 ‘선조림보’라는 장소에 대한 어떠한 암시조차도 주지 않고 오히려 구약시대에 죽은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민 23:10; 시 16:10-11; 73:24-25)8) 구약시대에 죽었다고 해서 지금 죽는 것과 다르게 ‘림보’라고 하는 성경이 말하지도 않는 장소에 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선조 림보’에 가셨다는 것은 틀린 것이다.
(2) 제2의 기회설(second probation)
이 견해는 천주교의 생각에 반대하면서 어떤 개신교도들이 주장하는 견해이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실 때까지 지옥에 내려가셔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그들에게 두 번째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9) 이는 앞서 살펴본 로마 가톨릭의 생각과 비슷한 경향이 있다. 차이점은 로마 가톨릭은 지옥이 아닌 ‘선조 림보’라는 중간 정도의 장소에 가신 것으로 보았고 모든 영혼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 죽었던 영혼만을 본다는 점이다.
그런데 제2의 기회설(機會設)은 예수님이 지옥에 가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이전에 죽었던 모든 지옥의 영혼들에게 두 번째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고 해석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러나 성경 전체 어디에서도 이런 가능성을 찾아볼 수 없다.10) 복음은 죽은 자가 아닌 오직 살아있는 자에게만 전파된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가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히 9:27)
(3)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에 그 영으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음부에 가셔서 하신 일이 구약의 성도들을 하늘로 데려 가신다거나 혹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셔서 회개할 또 다른 기회를 주셨다고 보기보다는 그곳에 있는 사탄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드러내셨다고 본다.
루터파들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신 것은 맞는다고 보지만 지옥에 있는 선조 영혼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은 반대하기 때문에 취한 어중간한 입장이다. 그래서 이미 죽은 영혼들을 구원하시지는 않으셨지만 그 대신 지옥에 가셔서 자신의 승리를 주장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개혁파가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비하(卑下)의 마지막 부분으로 보는 것과 달리 루터파는 이러한 견해에 따라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승귀(昇貴)의 첫 부분으로 본다.11)
< 오해의 근거인 베드로전서 3:18-22의 바른 해석 >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 잘못된 견해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직접 지옥에 가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12) 그런데 대부분의 이러한 오해의 이유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표현을 지옥에 가신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해하는 가장 근본적 이유는 베드로전서 3:18-22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이 구절을 예수님이 지옥에 가신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 중 하나다.13)
19절에 보면 “그가 또한 영(靈)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이 바로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구절의 의미가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그의 영혼이 지옥에 가서 지옥에 있는 영혼들에게 선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루터파나 천주교의 오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셨으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베드로전서 3장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이 아니다.14)
먼저 18절 하반절의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는 말을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육체는 죽으셨고 영혼은 살아나셨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본문을 피상적으로 읽으면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예수님의 육체와 영혼을 비교하는 내용이 아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영역에서 발생했으나 그의 부활은 영의 영역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대조하는 것이다.15)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이 성령에 의해 일어난 영적인 사건이라는 의미이다.(cf. 롬 1:3,4; 6:10)
그리고 19절에 나오는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는 말도 마치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그의 영혼이 지옥에 가셔서 영들에게 선포하신 것처럼 오해할 수가 있다. ‘옥에 있는 영들’이라는 말이 그렇게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뒤에 나오는 베드로전서 4:6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4:6을 보면 “….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말은 본문이 말하는 시점에서의 죽은 자들에게 이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지금 죽어 있는 자들이 과거에 살아있을 때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신 뒤에 그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도 복음이 증거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살아있을 때에 복음을 들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19절을 읽어보면 이해가 된다. 베드로전서 3:19에서 말하는 ‘옥에 있는 영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뒤의 그 시점에 옥에 있었다는 말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영으로 가서 ~ 선포하시니라.”라는 부분은 과거에 한 것이다. 19절을 재구성해 보면 “영으로 지금 옥에 있는 영들에게 그때에 복음을 선포하셨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19절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사역을 말한다. 19절의 의미는 예수님이 이미 노아시대에도 존재하셔서 자신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의를 전파하는 노아를 통하여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전파된 의(義)의 선포를 들었으나 순종하기를 거부하였다. 그 결과 홍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했으니 그들의 지금 상태가 바로 옥(獄)에 있는 것이다.
19절의 의미는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전서 3:19을 근거로 예수님이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일단 베드로전서 3:18-22의 의미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나서 지옥에 가셨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3:18-22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의 근거 구절이 아니다.
📌3. 개혁주의 견해는 무엇인가?
그러면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의 개혁주의 견해는 어떤 것인가? 먼저 앞서 말했듯이 이 구절의 근거가 되는 성경 본문은 없다. 베드로전서 3:18-20과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문구를 연결시키다보니 계속해서 오해가 생기는데 이 문구는 사도신경의 다른 문구와 달리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에 기초하지 않는다.16)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을 비유로 본다.17) 예수님이 실제로 지옥에 가셨다는 것으로 보지 않고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겪으신 ‘영적 고뇌’를 지옥과 같은 극심한 고난이었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18) 예수님은 실제로 그 영(靈)이 지옥에 가신 적이 없지만 얼마나 극심한 영혼의 고통을 당하셨는지 그가 지옥의 고통까지도 우리를 위해 당하셨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개혁파에서는 ‘음부’를 ‘지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며(창 37:35; 42:38; 삼상 2:6; 왕상 2:6) 나아가 상징적으로 ‘지옥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시 18:5)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더 심화(深化)시키는 표현이다.(cf. 시 18:5)19) 그러므로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고 표현한 것은 실제 예수님이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뜻이 아니라 지옥의 고통과 같은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시고 낮아지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이다. 또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기보다 영적 고통이라는 사실을 더욱 잘 보여주려는 사도신경의 강조라고 볼 수 있다.
<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이 주는 의미 >
그렇다면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고백은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지옥의 고통과 같은데 그것을 친히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셔서 해결해 주셨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백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사망에 의해 장악될 수 없음을 확신시켜 준다. 이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44문이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다.20)
제44문 :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왜 덧붙여져 있습니까?
대 답 :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 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 하고 거기에서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9) 그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 (anguish)과 아픔(pain)과 공포(terror)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 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10) * 9) 사 53:5 10) 시 18:5-6; 116:3; 마 26:38; 27:46; 히 5:7
이 같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이 실제로 예수님이 어디에 가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당하신 고난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여 위와 같이 고백하고 있다.
🔵맺는 말
(1) 행복한 무지
지금까지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말을 생각 해 보았는데 사실 이 부분은 매우 어려운 내용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아예 빼버려 천주교나 루터파 그 외에 여러 사람들이 이 내용을 오해했던 것처럼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유익할 수도 있다.21) 즉 일종의 ‘행복한 무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22)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아예 모르기보다는 제대로 알고 제대로 고백하여 이 부분에 대한 오해를 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더욱 좋다.23)
한국교회는 성경의 어려운 내용이나 혹은 조금이라도 곤란한 내용은 아예 가르치지 않음으로 성도들을 우민화(愚民化)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교회가 적극적으로 성경을 가르치지 않아 성경을 모르는 성도들을 양산해 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성도들에게 성경과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오늘 다룬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에 대한 부분 역시도 잘 알고 잘 고백해야 하겠다.
(2) 동일한 표현이라도 다른 고백일 수 있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은 사도신경을 동일하게 고백해도 그 고백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이 내용을 천주교와 루터파 등이 함께 고백하지만 그들의 고백과 우리의 고백은 표현만 같을 뿐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외형이 같다고 해서 그 내면도 같다고 판단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라는 이름만 갖고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주님의 교회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지 않아야 하겠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부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한다고 할 때는 그 부분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고백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음부에 내려가셨으며’라는 고백을 아무리 잘 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를 모르고 고백하게 될 때에 그 고백은 헛된 고백이 될 수밖에 없다.
(*) 글쓴 이 / 손재익 목사(서울 한길교회)
출처 / 주일 오후 사도신경 강해(10) ‘음부 강하에 대하여’ 부분 중 발췌
< 미 주 >
1) 개혁파는 이 부분을 그리스도의 비하로 보고, 루터파는 그리스도의 승귀로 본다. 그 이유는 루터 파가 ‘음부강하’로 해석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루터파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음부에 가셔서 지옥에 있는 사탄과 흑암의 세력들에게 자신의 승리를 드러내셨다고 본다.
2) 사본마다 없는 경우도 있다.
3)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톨릭 기도서』(서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7), 11-12.
4) 2013년에 사임한 교황 베네딕트 16세(Joseph Alois Ratzinger)는 연옥 개념 자체는 중요하지만, 실제로 연옥은 없다고 본다. Nicholas Thomas Wright, Surprised by Hope (London: SPCK, 2007), 양혜원 옮김,『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서울: IVP, 2009), 263-264. 교황 베네딕트 16세(=라칭거)는 고린도전서 3장을 석의하면서 연옥설을 새롭게 개정한다.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심판의 불이시며, 그 불이 사후의 인간들을 영광스런 부활체와 같이 변화시킨다고 주장한다. 그것 은 기나긴 과정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때에 일시에 이뤄지는 사건이다. 이렇게 연옥의 정화를 기 독론화 시킴으로써 베네딕트 16세는 기존의 연옥 교리를 중간 상태의 개념에서 분리시켰다. Pope Benedict XVI, Eschatology, Death, and Eternal Life, 2nd ed. (Washington, D.C.: 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Press, 2007), 218-233.
5) 천주교의 원래 교리에는 ‘선조 림보’ 외에 ‘유아 림보’(Limbus Infantum)이 있다. 이곳은 영세를 받 지 못하고 죽은 모든 영아들, 즉 원죄는 있으나 개인적 죄책은 없는 유아들이 있는 장소이다. 그 런데 2008년 이후에는 이 교리를 믿지 않는다.
6) 이러한 해석은 일반적으로 1586년의 Robert Bellarmine이 명확히 제시하기 시작한 것으로 여겨진 다. 이승구,『사도신경』, 200.
7)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톨릭 기도서』, 11-12.
8) 이승구,『사도신경』, 200.
9) 이승구,『사도신경』, 201.
10) 제2의 기회설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Berkhof,『조직신학 (하)』, 962-963.
11) Berkhof,『조직신학 (하)』, 576.
12) Ursinus, The Commentary of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229.
13) Edwin A. Blum, “1 Peter,”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12 (Grand Rapids: Zondervan, 1981), 241.
14) 이승구,『사도신경』, 208.
15) J. Ramsey Michaels, 1 Peter, WBC 49 (Waco: Word, 1988), 204.
16) Berkhof,『조직신학 (하)』, 575.
17) 이승구,『사도신경』, 197.
18) 이승구,『사도신경』, 205; Ursinus, The Commentary of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 228.
19) 이승구,『사도신경』, 198.
20) 이러한 것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8장 4절)나 소요리문답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 만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50문답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자신을 낮추신 일은 무엇입 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자신을 낮추신 일은 장사되셔서 사 흘 만에 부활하시기까지 계속 죽은 자의 상태를 계속하시며 제 삼일까지 사망의 권세 아래 계신 것이다. 이 일을 가리켜 사도신경에서는 ‘지옥에 내려가시고’라고 표현해 왔다.”라고 언급하고 있 을뿐이다. 이렇게 없는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이 사도신경 본문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21) 이승구,『사도신경』, 197.
22) 이승구,『사도신경』, 211.
23) 이승구,『사도신경』, 211.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