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묵상(5)
정용섭20155) 2월23일(월)
<본문읽기>
시편 77편
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4 주께서 내가 눈을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내가 괴로워 말할 수 없나이다 5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6 밤에 부른 노래를 내가 기억하여 내 심령으로, 내가 내 마음으로 간구하기를 7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8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9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 (셀라) 10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11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12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 13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14 주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이시라 민족들 중에 주의 능력을 알리시고 15 주의 팔로 주의 백성 곧 야곱과 요셉의 자손을 속량하셨나이다 (셀라) 16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 깊음도 진동하였고 괴로워하며17 구름이 물을 쏟고 궁창이 소리를 내며 주의 화살도 날아갔나이다 18 회오리바람 중에 주의 우렛소리가 있으며 번개가 세계를 비추며 땅이 흔들리고 움직였나이다 19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곧은 길이 큰 물에 있었으나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나이다 20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욥 4:1-21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6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12 어떤 말씀이 내게 가만히 이르고 그 가느다란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13 사람이 깊이 잠들 즈음 내가 그 밤에 본 환상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느니라 16 그 영이 서 있는데 나는 그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에 내가 조용한 중에 한 목소리를 들으니 17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 18 하나님은 그의 종이라도 그대로 믿지 아니하시며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 앞에서라도 무너질 자이겠느냐 20 아침과 저녁 사이에 부스러져 가루가 되며 영원히 사라지되 기억하는 자가 없으리라 21 장막 줄이 그들에게서 뽑히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은 지혜가 없이 죽느니라.
엡 2:1-10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집중 묵상구절>
시편 77: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문자만 읽어서는 시편기자의 심정과 생각을 우리가 다 따라갈 수 없다. 언어는 신앙의 실체를 온전히 담아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언어로 인해서 오히려 오해될 수도 있다. 성경의 언어를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부르짖는다는 것을 실제로 고함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진정성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부르짖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옳은 것도 아니다. 아내에게 행패를 부리면서 고함치는 사람도 있고,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밤새 부르짖으면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소중한 신앙적 태도다.
눅 18:1-8절에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 이야기가 나온다. 과부는 원한을 풀어달라고 재판장에게 매달렸지만, 재판장을 무시하다가 나중에 들어주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어서 ‘인자가 올 때 이런 믿음을 보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눅 18:35-43절에는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을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장면에서도 시각장애인이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예수님의 관심을 끌어냈다. 과부와 시각장애인이 이렇게 부르짖고 소리 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른 길이 그들에게 없었다는 데에 있다.
위 본문에 나오는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이 사람에게도 다른 길이 없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주실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2절과 3절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환난을 당해서 하나님을 찾았고 밤새도록 손을 들고 기도했지만 ‘내 영혼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2절)고 한다. 그는 왜 하나님의 위로를 거절했을까? 하나님의 위로가 아무 소용이 없을 정도로 그의 상황이 절망적이었는지 모른다.
더 나가서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고 근심이 되었고, 심령이 상했다.’고 한다. 하나님을 기억하면 마음이 평화로워져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에게 뭔가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분명하다. 그게 뭔지를 우리는 모른다. 다만 그가 영적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고, 우리가 거기에 동참하는 절기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 동참하는 첫 걸음은 십자가에 이르는 그의 운명을 우선 이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컴퓨터 프로그램에 입력된 인류 구원의 과정을 기계처럼 따라간 게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걸고 자신의 운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당당히 맞섰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큼 우리는 사순절 영성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체포와 피의자 심문과 십자가 처형이라는 운명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모든 복음서가 똑같이 전하는 내용이다. 기도할 때 몸에서 흘러내린 땀이 마치 피처럼 보였다고 한다. 단순히 자신이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한 것은 아니다. 그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면 국가를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애국자들보다 예수님의 정신세계가 훨씬 뒤떨어진다는 증거다.
십자가 처형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부정당하는 사건이다. 더 나가서 하나님 자체가 부정당하는 사태다. 하나님의 통치가 승리하는 게 아니라 세속의 질서가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들이닥친 십자가 처형을 피해서 도망갈 수도 없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즉 백척간두에 올라서서 기도한 것이다.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언제 이런 부르짖음의 경험을 하는가? 지난 평생 동안 이런 경험이 있기나 한 것일까? 각각의 사연들이 많을 것이다. 실연을 당해서, 사업이 망해서, 배신을 당해서 죽어버릴까 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런 특별한 불운을 제외하면 대개는 이런 절박한 경험을 하지 않고 산다. 이런 인생을 행복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이들의 영혼은 오히려 불행하다. 부르짖지 않는 영혼이 어떻게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팔복의 말씀에서 가난하고 우는 자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부르짖는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실제로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만은 부르짖어야만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 또는 하나님을 직면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행복한 조건에서 일상을 살아간다고 해도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직면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마치 외줄 타는 곡예사처럼 동시에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
주님,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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