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묵상(9)
정용섭20159) 2월27일(금)
<본문읽기>
시편 22:23-31
23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24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 25 큰 회중 가운데에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29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 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창 16:1-6
1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롬 4:1-12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10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11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집중 묵상구절>
창 16: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묵상>
창 16장에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의 본처인 사라와 후처인 하갈 사이에 얽힌 일화다. 일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화로 보는 게 맞다. 그런데 성서 기자는 그걸 비화로 처리하지 않고 중심 이야기로 끌어들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기를 낳지 못했다. 부부 사이에 아기가 없는 게 무조건 여자 책임이 아닌데도 생리적인 지식이 부족했던 옛날에는 주로 여자의 책임으로 보았다. 사라는 부담이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남편에게 자식을 낳아주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었다. 비상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는 자신의 여종을 아내로 맞아 자식을 보라도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늘 있었던 관행이었다. 아브라함이 왜 사라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아브라함이 애처가라서 아내의 말을 그대로 따른 것인지, 자식을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 어쨌든지 아브라함은 하갈과 동침했고, 하갈은 임신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상황이 좀 미묘하게 흘렀다. 임신한 걸 기화로 하갈은 사라를 멸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멸시한 건지 아니면 사라에게 자격지심이 들어서 과민하게 생각한 건지 제 삼자는 알지 못한다. 양쪽의 가능성이 다 있을 것이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그 사정을 알린다. 고자질이라면 고자질이고, 하소연이면 하소연이다. 아브라함은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일임한다. 아브라함의 허락을 받아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고, 그러자 하갈이 도망갔다는 것이다. 그게 위 집중 묵상 구절인 창 16:6절이다.
이런 본문은 사순절에 읽기는 좀 민망하다. 그런데 왜 성서일과로 주어졌을까? 영적인 교훈을 얻으려면 그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하갈은 본처의 학대를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샘물 곁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다. 하나님의 사자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타이르고, 하갈이 낳게 될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지어주고 축복한다. 그 샘물 이름은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의미는 ‘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이의 우물’이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과 가운데 한 자만 다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본처 소생이 이삭만이 아니라 후처 소생인 이스마엘까지 살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위해서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읽기가 민망하다고 했는데, 사실 그 이야기 자체를 민망할 거는 없다. 그게 인간의 본 모습이다. 누구나 다 도덕군자처럼 살지는 못한다. 질투도 하고, 속이기도 하고, 배신을 때리기도 한다. 성서의 사람들도 많이 그랬다. 그게 좋다는 게 아니라 그게 현실이라는 말이다. 사라가 아기를 낳지 못한 자신의 신세로 인해서 얼마나 크게 좌절했겠는가.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내 주는 그녀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임신한 하갈이 잘난 척할 때 그녀가 느낀 수모는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갈도 마음이 아주 복잡했을 것이다. 잘난 척하고 싶은 적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만 본다면 인간 역사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오히려 선하게 이용하신다. 마치 철없는 아이들이 말썽을 부려도 오히려 그걸 기회로 더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해주는 부모와 비슷하게 말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의 무지로 인해서 벌어진 비극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걸 오히려 인간 구원의 기회로 만드셨다. 악이 아무리 영악하다고 능력이 크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뜻을 성취할 수 없다. 궁극적인 승리자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기도>
주님, 비록 지금 우리가 고난과 십자가의 시절을 살고 있지만 그 어둠에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내다보도록 인도해주십시오. 예수 이름으로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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