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February 1, 2017

✔이슬람 바로 알기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 베스트 5🔥

오프닝 :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미국이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미국은 25,000명의 지상군을 동원해서 4월에 이라크 모술 탈환작전을 실행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IS는 지난 23일, 시리아 기독교 신도 150여 명을 납치하는 등 만행이 점입가경입니다. 전세계가 IS의 폭주를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는데, 점점 판이 크게 벌어지면서 자칫 세계전쟁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계전망대'에서는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IS의 정체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지난 2주 동안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 베스트 5'라는 주제로 진행하겠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이슬람교에 대한 개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리에는 지난주에 이어서 1990년부터 20년 넘게 이집트와 영국의 이슬람 현장에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사역해 오신 FIM 선교회 대표 유해석 목사님 나와주셨습니다. 먼저 용어 정리부터 해주시고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유해석 : '이슬람'이라는 말의 뜻은 '복종'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슬람'은 종교를 의미하고 '무슬림'은 이슬람의 제4분사 용어로서 '복종의 행위를 취하는 사람'을 뜻 합니다.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데, 요한1서 4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부정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우리가 배우고 알아야 되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무슬림'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무슬림의 80%는 한번도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입니다.

사회자 : 기독교와 무슨 연관이 있길래 이슬람이 '기독교의 이단'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었는지 이해가 힘든데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유해석 : 이슬람에 대해 전세계에서 최초로 연구했던 사람은 다마스커스의 '요한나'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무함마드가 죽은 지 20년 뒤에 태어났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는  다마스커스의 우마이와 왕조에서 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던 만수르 가문의 유명한 사람인데, '요한나'라는 사람이 이슬람에 대한 회의를 품고 일생 동안 수도원에서 이슬람과 기독교를 비교연구했습니다. 연구에 대한 결론을 보면, 이슬람은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고 창시된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이단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천사 가브리엘의 영향을 받아서 꾸란을 기록했다고 하지만, 그 내용은 유대교의 경전과 책에 나오는 내용과 기독교 이단에서 나오는 내용들, 아랍 토속신앙에서 나오는 내용들을 모두 합쳐서 종합적인 산물로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슬람을 연구해 보면 그 속에는 수많은 이단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자 : 그렇다면 혼합주의로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영지주의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아주 극단적으로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생각이 이슬람 안에 들어와 있나요?

유해석 : 그렇습니다. 영지주의가 사용했던 경전 가운데 예수님의 '유년기 복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4장 12절에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 개울가에서 진흙으로 참새를 만드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똑같은 내용이 꾸란에 두 군데에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꾸란은 당시의 아라비아에 있었던 모든 종교를 집대성한 혼합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사회자 :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님 자체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인간을 신격화한 것이 기독교라는 비판인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차이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한 가지씩 짚어보면 좋겠는데, 큰 차이점이 뭔지를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유해석 : 국민일보에서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똑같은 지를 조사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지도자들 24.3%가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은 똑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알라와 하나님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첫 번째, 알라는 자연신앙적인 신입니다. 어디서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내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 가운데 인간 속에 거하시는 신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 이것을 우리는 내주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이런 개념이 이슬람의 알라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이슬람의 알라와 신도들 간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들과의 관계입니다. 꾸란 19장 93절에 보면 "천지의 모든 것이 종으로서 알라에게로 돌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하루에 다섯 번씩 무릎을 꿇고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종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과의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이슬람에서는 인격적인 관계가 절대 나타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이슬람의 알라는 호전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상당히 폭력적입니다. 꾸란 9장 5절에 보면 "어디서든지 이교도들을 발견하면 붙잡아라, 포위하라, 죽여라, 그리고 모든 매복장소에서 기다리라"는 이런 구절을 꾸란에서는 칼의 구절이라고 합니다. "길을 가다가 불신자들을 만나거든 그들의 목을 쳐라." 이런 구절이 109구절 꾸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슬람의 알라는 전투적이고 호전적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절에 한마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여기에 우리가 더 무슨 말을 붙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호전적이지 않는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만을 믿는 유대인들이 아닙니다. 구약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네 번째, 이슬람의 알라는 삼위일체를 부정합니다.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삼위일체를 말하는 그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는 말이 꾸란에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다섯 번째, 이슬람의 알라는 독생자를 부정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을 향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복음서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하는 장면이 170번 나옵니다. 또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철저하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12만 4천명의 선지자 가운데 한 명일 따름입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자 : 정리해 보면 이슬람에서는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독생자의 성육신을 부정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비인격적인 하나님으로, 그리고 내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별도로 떨어져 있는 하나님, 철저히 주종관계, 폭력적 하나님으로 꾸란에서는 표현되고 있는데, 우리 기독교에서는 신앙을 고백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에 대한 이야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신앙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항상 우리와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런 것을 볼 때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데요. 하나님에 대한 이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들어올 때 어떻게 교회 지도자조차도 24.3%가 알라와 우리의 하나님이 동일하다고 이해를 하는지 이유가 궁금합니다.

유해석 : 근본적으로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알라냐?"라고 질문할 때 그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언어적으로 봤을 때는 '알라'가 '하나님'인 것이 맡습니다. 중동에 있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쓰고 있는 성경에도 하나님이 '알라'로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의 '알라'와 우리의 '하나님'이 다른 분이라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꾸란을 번역할 때 '알라'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합니다.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같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용어적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을 한국에 전파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회자 :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시각들을 이미 조금 말씀하셨습니다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정하는 그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전부인데 말이죠.

유해석 : 이슬람에서는 예수님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일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기 때문에 평범한 선지자이지만 조금더 특별한 정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한 구원, 예수님이 중보자라는 것은 이슬람에서는 불경한 언어로 사용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을 것을 꾸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사실은 이 꾸란에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말이 11번이나 나옵니다. 그런데 이 메시아가 무슨 말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메시아는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아, 창세기 3장에 약속된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라는 설명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또 다른 별명쯤으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124,000명의 선지자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 예수님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인데 그럼 도대체 천국은 어떻게 가는 것이죠? 천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유해석 : 이슬람의 구원관과 기독교의 구원관은 상당히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모슬렘 사람들에게 "당신, 죽어서 천국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어떤 누구도 "예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하는가 하면 "인샬라" 즉, "알라의 뜻이라면"이라고 합니다. 모든 무슬림은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불확실한 구원관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슬람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 4가지가 꾸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알라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이것을 언제 아는가 하면 죽어서 심판대에 가봐야 압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당신,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아멘"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데 무슬림은 절대 그렇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천국에 갈 가능성이 많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그래서 이슬람에서 말하기를 오른쪽 어깨 위에는 착한 일을 기록하는 천사가 있고, 왼쪽 어깨 위에는 나쁜 일을 기록하는 천사가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저울에 달아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지에 따라서 그 선택권은 여전히 알라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슬람의 첫 번째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의 카바신전을 방문한 사람, 꾸란에 보면 "누구든지 거기 거하는 자는 안전할 것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1년에 300만 명씩 몰려가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때가 절기로 하지입니다. '라마단'이 끝나고 몰려 갑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로는 이슬람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지하드'입니다. '지하드'는 알라와 이슬람의 확장을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꾸란에 보면 3장 169절에 "알라에 길에서 순교한 자는 죽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들은 알라의 양식을 먹으며 알라곁에 살아있느니라." 그러니까 알라를 위해서 죽음을 당한 자는 심판을 받지 않고 천국에 간다고 하는 구원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테러가 많아지고 전쟁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사회자 : 알라와 이슬람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아깝지 않게 내놓는 것인데, 그러면 그들에게 있어서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유해석 : 그들에게 천국은 상당히 현실적입니다. 꾸란에 보면 카프리(아주 독한 술)가 흐르는 강가에서 실크 침대 위에 남자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숫처녀 72명이 대기하고 있는 곳이 이슬람이 말하는 천국입니다. 철저히 남성적 천국관입니다. 그래서 꾸란에 보면 여자가 천국에 간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회자 : 여성은 어떻게 이해되는 것입니까?

유해석 : 하디스에 보면 남자를 잘 섬김으로 인하여 그 남자가 받아들였을 때 천국에 갈 가능성이 있지만 꾸란에서는 그 부분에 있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회자 :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종말론인데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유해석 : 꾸란에 예수님이 재림한다는 이야기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에서 생각하는 예수님의 재림과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예수님의 재림은 확연하게 다릅니다. 기독교의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될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지만, 이슬람에서 생각하는 예수님의 재림은 저희가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슬람에서 생각하는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은 첫째,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 대사원이 있는데, 그 사원에 첨탑이 세 개 있습니다. 그 첨탑 가운데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40년 동안 이 세상에 살면서 모든 교회의 십자가를 때려 부수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무슬림이 되도록 전파한 다음, 무슬림 여자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살다가 40년이 되면 메디나의 무함마드 무덤 바로 옆에 예수님이 묻힐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저희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사회자 : 그런데 조금 의문이 가는 것이 144,000명 선지자 중의 한 명인 예수님과, 재림하실 예수님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유해석 : 똑같은데 조금 특별한 선지자로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죄를 중보하거나 대속의 삶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거나 하는 것을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자체가 없습니다.

사회자 : 다섯 가지를 듣고 보니까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를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 더 듣고 싶은 것은 이슬람의 문화입니다. 한국에도 모스크가 곳곳에 세워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데,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꼭 알아야 될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유해석 :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우리나라의 조선시대로 생각하시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여자들이 남자에게 복종해야 되고, 허락없이 외출하면 안 되고, 얼굴을 가려야 하고, 그런 시대의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과거로의 회기'라고 보시면 됩니다. 영국에서는 모스크가 세워지면 바로 그 앞에는 시장이 세워집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이 마음대로 외출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슬람 사원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장을 봅니다. 그래서 모스크가 하나 생기면 그 앞에는 시장이 생기고, 이슬람식 교육을 하는 학교가 생깁니다. 그 지역이 개토화됩니다. 그래서 그 지역 원주민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그 지역은 이슬람화 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도 긴장해야 됩니다. 모스크가 들어오려고 할 때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알려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사회자 : IS의 반인륜적인 여러 가지 행보들을 바라보면서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지금까지 3주에 걸쳐서 이슬람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크리스천으로서 바로 알고 무슬림을 긍휼히 여기고 끊임없이 전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FIM 대표이신 유해석 목사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강보람 PD  극동방송

Thursday, December 15, 2016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주기도문 강해 / 김세윤 박사

마태복음 6장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여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를 누가판과 마태판을 비교해 보면, 마태 판에는 "우리의 빚들을(ta; ojfeilhvmata hJmw'n)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고, 누가는 "우리의 죄들을(ta;" aJmartiva" hJmw'n-복수)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 이렇게 복수를 쓴 것은 단순히 크게 '죄의식을 제거해 주시옵소서',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옵소서'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누가는 왜 '죄들'이라고 하고 마태는 '빚들'이라고 했나? 원래 빚들이라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원래 용어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언어를 반영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판의 두 번째 부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 모두를 용서합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도 이 청원 두 번째 부분에서는 "빚"이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을 볼 때 마태의 "빚"이라는 언어가 원래 언어이고 이 청원에 첫 부분에 누가가 '빚' 이라는 언어를 의미상 '죄' 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죄를 '하나님에 대한 빚'으로 보았고 또한 '이웃에 대한 빚'으로 보았음을 말한다. 이것은 죄의 엄중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것을 유대인적 숙어에 익숙치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서를 쓴 누가는 그 뜻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금전적 재무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문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누가는 '죄'라는 말로 풀어서 우리에게 써 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태의 빚이라는 말이 원어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 누가와 마태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번째 부분에 마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해 준 것 같이" (ajfhvkamen) 이것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누가는 "우리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이렇게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동사의 시제가 다르다.  또 마태는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사해 준 것 같이"에 비해 누가는 "왜냐하면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이렇게 접속사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제일 불편한 것은 완료형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주었듯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할 때 우리의 어감으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모범으로 내세운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의 죄의 빚을 용서해 주십쇼".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는 것 같이 되어 있다. 누가 판에서도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모두를 용서해 주니까요 하나님도 용서해 주십시오". 마치 우리의 우리 이웃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용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 같은 어감을 준다. 그래서 사실은 상당히 주기도문을 해석할 때 원래의 뜻을 잘 모르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부분이다.

유대교적 배경을 금세기에 가장 많이 연구한 요한 예레미야스는 셈족 언어를 가장 잘 아는 이 분은 여기 마태복음의 ajfhvkamen을 완료형을 원형으로 보고, 이것을 아람어로 번역해 보면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이것은 동시성의 완료형(perfectum co-incidentie)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 뜻은 마태 판으로 하면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죄 용서를 청원하는 것에 대한 부수적인 서약이다. 그러면 왜 이런 서약이 붙는가?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해 준 것이"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 즉 이웃사랑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이웃사랑은 마태복음 5장 38절부터 이웃을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비는 자로서 저자가 나에게 나를 험담하고 나를 못살게 굴어서 내가 저자를 언제가 손을 봐주어야겠다는 그 마음을 품고  이웃에 대한 원한, 복수심을, 증오심을 품고 "하나님이여 나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자는 내가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죄는 내가 꽉 지고 있기에 그 죄 말고 다른 죄만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를 빌려면 동시에 자기의 죄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합니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용서가 나에게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죄의 용서의 효과가 나에게 있는데 나는 죄용서 안받겠습니다. 저 이웃에게 원수 갚겠다는 그 죄만은 용서받지 않겠습니다라는 태도와 같다.

예수께서는 주기도문을 서문과 결론의 서문에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식으로 하지 말라. 중어부언하지 말라 하신다. 왜 이유는 하나님께서 너의 처지를 다 알기 때문에 그 서문은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을 강조하는 서문이었다면 이 주기도문 끝에 마태복음 5장 14-16절 "너희가 사람들이 너희에게 지은 죄를 용서해 주면 하늘에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요. 너희들이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희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넣음으로 죄용서 청원을 하이라이트하고 그 청원에 뜻을 새기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용서 받음과 우리 이웃에 대한 죄용서함이 이렇게 구조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이웃에 대한 죄 용서 없이 하나님에 대한 죄 용서 받음이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이웃에 대한 죄 용서를 하나님에 대한 우리 공로를 내세워서 그 반대 부분으로 하나님께 죄용서 받는 그런 것 때문이 아니고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뜻이라면 그것을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자들로서 그것을 실천하지 않겠다고 우리 마음속에 가지고 있으면 용서를 비는 것이 헛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비유로 이 설교를 강력하게 하신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 다시 한번 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의 끝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말은 주기도문 끝의 구절과 같다. 이 비유가 주기도문의 청원에 대한 설교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 의하면 10000 달란트 빚진 자를 왕이 빚을 탕감, 용서해 주었다. 10000 달란트는 예수 당시 갈릴리와 베뢰아 주민 전체가 내는 1년 세금이 200 달란트 밖에 안되었다. 그것을 보면 10000 달란트는 얼마나 큰 돈인지 알 수 있다. 백 데나리온(한 데나리온-장정의 하루 품삯)은 100일 일한 것에 불과하다. 10000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그 이웃에게 조그만 빚을 탕감하지 않으면 그 죄에 대한 탕감이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 죄 아담적 실존의 죄에 대한 용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욕하고 손해 입히고 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죄에 대한 10000 달란트와 100 데나리온 정도의 중함과 경함의 관계이다. 그런데 우리는 10000 달란트에 해당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용서를 빌면서 겨우 100 데나리온 밖에 안되는 이웃의 우리에 대한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참용서가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를 받는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죄 용서가 우리를 통해서 이웃에게 나타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를 이렇게 가로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용서가 우리 이웃으로 전달되게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주기도문을 우리가 다시 번역한다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었듯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용서하겠나이다"

이 청원은 우리에게 주기도문의 각 청원이 청원일 뿐만 아니라 서약임을 잘 보여준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라는 청원은 '오늘 우리의 생명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청원만이 아니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양식에 의해 살겠습니다. 우리가 아담적 존재로 살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힘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을 우상화하고 우리의 일의 열매를 우상화 하지 않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그 앞의 "하나님 나라가 오소서"라는 청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는 서약을 동시에 담고 있다.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청원은 나도 이웃에게 죄지은 자에게 죄를 용서해 주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라는 청원은 내 스스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습니다라는 서약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서약부분을 늘 생각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소서"라고 해 보았자 허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이 누룩과 같이 온다고 할 때는 우리 성도들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의 적극적인 제자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적 경건주의의 소극주의가 아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기껏해야 음식가리고 손닦고 그릇 닦는 것으로 경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많이 빠진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이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세 가지만 안하면 된다. 1.술 안마시고 2.담배 안피우고 3.제사만 안지내면 되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경건주의적 소극주의이다. 그러면 담배 안피우고 술 안마시고 제사 안지내는 사람이 천만이 아니라 4천만 국민 전부가 그래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샬롬이 안 일어난다.

그것을 예수께서는 실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에도 담겨있지만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요구에도 담겨 있지만 예수께서는 실제로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너희들이 손닦고 그릇닦고 음식 가리는 일은 열심히 하는데 실제로 더러운 것은, 우리를 부정타게 하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즉 부정한 음식을 먹었나 안먹었나 그런 것이 아니고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배설물을 일차적으로 말하나 그것은 무엇을 비유하는가? 우리의 안에 있는 심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하나님에 대한 의존의 거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거부, 이웃에 대한 증오심과 무시함 이것이 다 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어렵게 하고 우리와 이웃을 어렵게 한다. 그것이 우리를 부정케 하는 것이지 먹는 것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제자도의 요구는 하나님에 대한 혼신을 다한 헌신과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의지하는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우리가 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을 잘 못하기 때문에 시시각각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빌어야 한다. 아담적 살려고 하는 우리의 실존을 자제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 빌어야 한다. 우리가 아담적 실존으로 빠지는 그 죄를 항상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웃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한다. 나에게 빚진 자를 용서해 줄 수 있는 힘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할 때 우리에게 샬롬이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구체적으로 부가 비교적 공정하게 재분배되고 그렇게 되면 사회정의가 일어나고 그렇게 되면 관계들이 원만해져서 평화가 증진되고 스트레스도 없어져서 몸도 건강해 지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여기에 구체적으로 실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가 변화되고 공동체가 변화되고(누룩의 비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덕을 입는다(겨자씨의 비유).

Monday, November 28, 2016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들                                                                                                                        

이인규

이스라엘에서 고대부터 중요한 농산물을 수확하는 나무가 셋이 있는데,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이다. 구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풍성한 구원을 상징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아오소서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돌보소서”(시 80:8-14)

예레미야 선지자는 귀한 포도나무가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는지를 묻는다. 표준새번역은 이를 들포도나무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품질이 나쁜 잡종으로 번역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 2:21)

이것은 이사야서 5장과 동일한 의미가 되는데, 좋은 열매가 없다면 5장5절과 같이 울타리를 걷어 짓밟힘을 당하게 될 것이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사 5:2)

포도나무는 오직 그 과실이 중요한 것일 뿐이며, 곧게 자라거나 굵게 자라지 않으므로 건축자재로서 부적당하다. 열매가 없는 포도나무는 불에 태우는 땔감이 될 뿐이며, 이러한 표현은 곧 심판을 상징한다.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겔 15:2-4)

구약에서 포도나무를 이스라엘로 비유한 것도 결국 믿음의 유기체적인 연합을 뜻하며, 수확하는 포도열매는 풍성한 구원을 상징한다. 에스겔서 본문에서 불에 태우는 포도나무 가지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땔감으로 비유된 것이다.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가 이단들에게 오용되어지고 있다. 신천지와 같은 이단은 포도나무를 사람이라고 비유풀이를 하고, 어떤 이단들은 포도나무나 무화과나무, 감람나무를 모두 이스라엘로 비유풀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구원파나 하나님의교회같은 이단들은 마태복음 24장32절의 무화과나무를 이스라엘로 해석하여 무화과나무에서 나오는 잎사귀를 1948년 이스라엘 독립으로 해석하여 한 세대 안에 예수가 재림하신다는 시한부종말론적인 해석을 주장하게 된다.

성경에서 포도원의 일은 포도를 성공적으로 수확하기 위한 많은 단계와 과정으로 표현되었으며, 도둑(렘49:9)과 멧돼지(시80:13), 여우(아2:15)등의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돌벽을 세웠으며 망루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곧 구원으로 비유된 것이다.

또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 포도나무를 그의 메시야적인 사역과 비유하였으며, 마20:1-16, 마21:28-32, 막12:1-11에서는 유대인들을 불의한 소작인으로 비유하신다.
특히 유대교 문학에서 포도나무는 메시야를 상징하는데, 신약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한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1-5)

요 15:1-5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다. 그리고 예수와 연합한 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비유하여, 포도나무에 붙어있으면 저절로 포도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기체적인 관계로 비유한다.

이 포도나무의 비유에 대해서 혹간은 요한복음 본문을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행위로 해석하는 견해 :

본문에서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하니 이것을 행위적인 결과로 해석하여 행위구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본문은 믿음 외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는 포도나무 자체가 갖고 있는 것 외의 별도의 어떤 추가적인 행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본문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는 것은 소위 상호내재라는 관계를 말하는데, 이 관계에 대해서 성경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에 거하고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2;24)

상호내재란 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연결된 유기체적인 영적인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는 예수라는 뿌리에 연결된 가지가 되므로서 열매를 맺게 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15:10)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엡3:17)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2) 신비적인 연합으로 해석하는 견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많은 사람은 모두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한몸이 되어서 서로 지체를 이룬다는 것은 유기체적인 영적연합을 뜻한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예수를 믿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종이나 자주자와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한 인격이라는 것이 아니라, 한 믿음에 의한 유기체적인 연합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 구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하셨으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전7:15-17)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몸이 되어진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두 인격이 한 인격으로 합체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본질적으로 창기와 같은 성적 탐욕을 가진 동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창기와 실제적인 연합이나 한 몸, 한 인격이 아니라, 연합적인 동질성을 말하는 것이다.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이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소위 신화사상을 주장하는데, 그들이 자주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요한복음 15장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실제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구별 가운데에서 유기체적인 영적 연합이 되는 것을 뜻한다. 루이스 벌콥은 신인합일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비적연합의 그릇된 개념들. 2. 신비적 오류:
다른 위험한 오류는 신비적 연합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 신비주의자들의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신비적 연합에는 본질의 연합이 있으며, 거기에는 한편의 인격성이 단순히 다른 편의 인격성으로 합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는 두 개의 구별된 인격들로 남아있지 않는다.“(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199쪽)

유명한 조직신학자인 웨인그루뎀도 다음과 같이 상호내재를 설명하였다.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3) 어떤 이단은 포도나무를 자신들의 교회로 비유한다.

구원파와 같은 계열의 이단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포도나무라고 주장한다. 즉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교회에서 나가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오역임과 동시에 악의적인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요한복음 본문의 포도나무는 지상에 있는 유형적인 어떤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머리가 되시는 무형적인 교회를 말한다.

무형적인 교회의 본질적 성격은 그 주인이며 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의 일차적 정의가 되어야만 한다. 머리와 몸이신 예수그리스도가 교회를 구성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2:20-22)

Sunday, November 20, 2016

죽음이 유익인 다섯 가지 이유

🔥죽음이 유익인 다섯 가지 이유

/ John Piper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서 1:21

어째서 죽는 것이 "유익"이 될까요?

1) 우리의 영이 완전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2-23).

우리 안에는 더 이상 죄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내적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께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가슴이 찢기는 실망감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 이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25).

죽자마자 몸이 부활하는 기쁨을 얻게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고통에서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위대한 반전이 있을 것을 보여 주십니다.

[부자가]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3) 영혼의 심오한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9-11)

그곳에서는 이 땅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가장 평화로운 호숫가의 포근한 여름밤 저녁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눈동자와 같은 보살핌 아래에서 평안함이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4) 우리는 진정한 본향에 온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8).

모든 인류는 그들이 비록 이를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없이는 만족하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워하듯 하나님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본향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안전감과 평화 그 이상의 만족감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21-23).

그리스도는 이 땅의 그 누구보다 놀라운 분입니다. 그는 당신이 함께 있고 싶은 그 누구보다 지혜로우시고, 강하시고, 친절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끝없이 흥미로운 분이십니다. 그는 그의 손님들을 가능한 한 가장 즐겁게 만들기 위해 매순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말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는 사랑이 넘치는 분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기 위해 그 사랑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무한한 통찰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Wednesday, November 9, 2016

가장 큰 부부 계명 / 이선이 목사

💜가장 큰 부부 계명(엡 5:33)
/ 이선이 목사

✔에베소서 5장
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

성경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성경은 저자와 내용과 형식과 부피가 다른 66권 책들의 묶음이다. 기독교인의 경전인 성경은 계시에 의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위를 가진다.

성경의 방대한 내용은 ‘가장 큰 계명’으로 함축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마22:37-39)

그러면 성경 가운데 부부에 관한 말씀 중에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일까?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는 말씀을 보고자 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핵심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 5:25) 하나님이 아담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하와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어떻게 하셨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신을 내어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엡 5:28-30)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유비하였다. 남편은 아내와 한 몸임을 강조했다.

남편에게 제일 가는 일은 자신의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남편은 일, 자녀, 명예, 친구, 취미, 스포츠 등 세상의 그 어떤 것 혹은 어느 누구보다 아내 사랑하기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아내에게 남편 사랑은 삶의 영양분이며 양식이다. 사랑받는 아내는 시댁갈등, 자녀문제, 재정 위기 등 모든 위기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

하나님은 아내가 남편을 희생적으로 존경하라고 한다.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엡 5:33) 오늘날 아내들이 자기 남편을 존경하는 것은 거의 힘들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존경 없이 성공하지 못한다. 아내에게 제일가는 일은 남편을 존경하는 일이다. 남자에게 존경받고자 하는 욕구는 분명하게 심리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존경하다”는 단어에는 “두려워하다”와 “경외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아내는 남편을 높이 여겨야 할 뿐 아니라 매우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존경”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실제 부부 생활에 적용된다. 남편이 아내로부터 존경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 경우 자신의 아내를 육체적·정신적으로 버리는 일이 종종 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람들 앞에서 깎아내리며 무시할 때, 아내와 거리를 둔다. 그리고 그는 일, 취미 생활, TV 시청, 컴퓨터 혹은 인정해줄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진정으로 사랑받는다는 느낌은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지 않고, 불평하거나 비판하거나 우는 소리를 내거나 혹은 사랑을 느끼게 해 줄 누군가를 원한다.

사랑받지 못하면 아내는 존경하지 않는다. 존경받지 않으면 남편은 사랑하지 않는다. 서로 지겨운 사이가 된다.

존경받으면 남편은 사랑한다. 사랑받으면 아내는 존경한다. 서로 행복한 관계가 된다.

이것이 모든 부부 관계의 기본 원리이자 문제 해결의 결론이다.

🔹이선이 박사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장신대학원에서 석사((M.Div), 박사(Th.D. in Missiology) 학위를, 미국 플로리다신학원(FCTS)에서 여성리더십으로 박사(D.Min) 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