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y 18, 2016

예정설과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 김진규 교수

예정설과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조화할 것인가?
- 구원을 말하는 두 가지 관점에 대한 성경의 답

어느 날 한 학생이 다가와 질문을 했다. "교수님, 예정설에 대해서 설명 좀 해 주세요?" "예정설이 정말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 있다면 어디에 있습니까?" "제 친구는 '예정설이 맞는다면 전도는 왜 하느냐'라고 질문을 했어요."

아마 오늘날 장로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이 대화를 하면서 가장 충돌을 많이 하는 부분이 '예정설 교리'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 학생도 감리교인과 대화를 한 후에 고민에 빠져 질문을 해 온 것이다.

성경은 예정설에 대해서 뭐라고 가르치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예정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에베소서 1:4-5의 말씀을 찾아 보여 주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셨다고 가르친다. 여기뿐만 아니라 로마서 8:29-30에도 예정의 교리가 나온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들을 미리 아셨고 미리 정하셨고 또 그들을 부르셨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로마서 9장에는 하나님께서 야곱은 선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셨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분명한 예정의 교리를 입증하는 실례이다. 이들의 선택과 버림은 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이미 결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어거스틴이나 칼뱅 등은 예정의 교리를 확고하게 믿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예정의 교리를 사용할 때는 조심할 점이 있다. 만약 예정의 교리를 숙명론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믿을 사람, 믿지 않을 사람을 정하셨으니 전도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실제로 미국의 장로교 역사에 있었던 일이다.

19세기 미국에서 선교사들을 파송하면서 장로교단에서 아시아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바로 이 예정의 교리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은 믿을 테니 선교사를 파송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주장이 성경적인 생각인가? 아니다. 성경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고 명하고 있다(마28:18-20).

침례교단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선교사를 열심히 파송했다. 그래서 사실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에는 침례교회가 많다고 한다. 단 아시아 국가 중에 한국만이 예외적이다. 이런 식으로 예정론을 사용하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예정론을 사용하면 전도할 필요도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예정한 사람 믿을 테니 내가 전도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시각은 성경을 한쪽 면만 강조한 잘못된 생각이다.

중요한 점이 바로 이 점이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지만 우리 인간은 누가 선택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거절했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예정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그가 나중에 예수님을 믿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그가 마치 하나님의 예정을 받은 사람처럼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경은 복음을 전하라고 수없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 4: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인간의 구원을 미리 예정하신 동일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하도록 명하시고, 동시에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기를 원하신다는 사실도 말씀하셨다. 우리가 전도할 때는 이런 말씀을 기억하고 최선을 다해서 전도해야 한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면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을 것처럼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이를 강조한 나머지 구원은 인간의 결정에 달렸다고 주장하면 알미니안주의에 빠지게 된다. 사실 이런 말씀만 모아서 보면 인간의 구원이 자신의 결정에 달린 것처럼 보인다. 예정설을 믿는 장로교인이 알미니안 교리를 믿는 감리교인과 대화를 하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에게 질문한 학생은 자신과 대화를 나눈 그 감리교인이 "만약 모든 것을 예정한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까지 했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모순처럼 보이는 교리를 접근해야 하는가?

해결책은 성경대로 믿는 수밖에 없다.

성경은 사실 2가지를 동시에 가르친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미리 결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구원은 믿으면 받는다고 동시에 가르치고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고 가르친다.

이런 교리적인 차이점은 어디에 있는가? 어느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본다. 예정설은 하나님의 주권의 관점에서 교리를 설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시고 버릴 자를 정하셨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후자는 인간의 관점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구원은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달린 것처럼 보인다. 사실 복음을 전할 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우리는 전도한다. 어느 누구도 전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예정하셨다면 예수를 믿게 될 겁니다"라고 전도하지 않는다. 우리는 마치 복음을 듣는 자가 결정하면 구원을 얻는 것처럼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는 장로교인으로서 분명히 밝혀 두는 바는, 그렇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외치지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마음 문이 열리는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믿는다. 이게 사실 성경의 가르침이다(고전12:3).

유명한 개혁주의 변증학자인 코넬리우스 반틸(Conelius Van Til, 1895-1987)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제한 개념'(limiting concept)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책임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인간의 책임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주권을 침입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은 성경이 동시에 가르치는 교리이다. 이 두 개념이 서로에게 제한을 가한다고 해서 '제한 개념'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하나님의 예정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은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믿으면 모두 구원을 받기 때문에 구원은 인간에게 모두 달렸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침입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구원받을 자를 예정하셨다. 동시에 성경은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요3:16). 이렇게 상호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성경의 모든 가르침들이다.

기도는 어떤가?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셨다. 그러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걸까? 그런데 성경은 "너는 부르짖으라"고 명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지만 우리는 부르짖어야 한다. 성경의 모든 교리는 '외관상 모순'(apparent contradiction)처럼 보인다고 코넬리우스 반틸 교수는 말한다(여기 영어 apparent라는 말은 '외관상'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인간의 좁은 머리 안으로 제한하려는 극단을 조심하시라!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김진규 profj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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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pril 30, 2016

변질되어 가는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 /김명도 교수

💥변질되어 가는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
/ 튤립 신학 연구원, 고 김명도 교수 

* 본 글은 “위기에 처한 기독교”라는 제목의 김명도 교수님의 글에서 부분 발췌한 것임.

위에 열거한 정통적인 기독교의 신앙고백서의 교리와는 달리 근자에는 기독교의 진리가 많이 왜곡되어 간다. 며칠 전 IVP 출판사에서 편집을 맡고 있는 Hsu 라는 분 (아마 중국계인 듯) 이 Christianity Today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어떻게 믿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여 “한 때 보수였던 IVP 출판사도 요즘 많이 변했구나“ 하고 한탄해 본 적이 있다. 옛날 나의 친구 James Sire 가 편집장으로 있을 때 같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정말 아무렇게 믿어도 구원은 보장되는가? 

마태복음 7:22 이하에서 주님에게 책망을 받는 사람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제 나름대로 목사, 부흥사, 신학교 교수로 주님의 일을 했던 사람들인데 “너희를 내가 도모지 안 적이 없으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고 주님으로부터 엄한 책망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구원도 얻지 못했다. 아무렇게 믿어도 구원이 보장되는가? 아니다. 기독교에는 믿는 도리가 따로 있다. 아무렇게 믿어도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늘의 기독교 교계에는 이런 사상이 풍미하고 있다. 그리고 한 때 개혁주의를 신봉하던 목사, 학자들이 근자에 대거 성경을 이탈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재림의 징조라고 믿고 있으면 필자의 생각도 그러하다.

✔첫째, 지옥이 없다고 가르치는 신학자가 늘어나고  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이며 많은 보수주의 책을 쓴 John R. Stott(존 스토트)는 요즘 새로운 주장을 펴고 있어서 기독교계의 정통신학자들에게 빈축을 사고 있다. 그는  David Edwards와 공저한 책, Evangelical Essentials (IVP, 1998) 이란 책에서 하나님은 사랑인데  어찌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London의 목사였던 그도 변했다. 지옥이 있다해도 무의식중에 시간을 보내는 곳이라고 한다.

지옥은 불신으로 인하여 영영 형벌을 받는 곳인데 무의식 중에 어찌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의식이 없다면 형벌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이런 학설은 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것인데 근자에 와서 이렇게 가르치면서 성도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속임수 이다.

✔둘째, 하나님은 미래를 모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미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어찌 하나님인들 미래를 알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이들의 주장인데 새로운 신학이다.  물론 18세기 독일의 합리주의자들이 이렇게 주장한 것은 별로 놀랄 것이 없지만 오늘 소위 복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놀랍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Michigan 주 Bethel 신학교의 교수로 있는 Gregory Boyd 이다. 그는 그의 저서 God of the Possible: A Biblical Introduction to the Open View of God (Baker, 2000)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그의 수많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면서 왕성하게 그런 책들을 펴내고 있다.

또한  Clark Pinnock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은 불과 20년 전 까지만 해도 정통적인 신학자들이었다. 필자가 신학교 시절에 Pinnock 이 쓴 The Infallibility of
Scripture 라는 책을 가지고 공부했었다.  <하나님은 미래를 알 수 없다> 는 사상은 요즘 미국에 있는 대학 교수들 간에 큰 인기를 얻고 있는데  이와 같은 신학을 이라고 하며  "미래불가지론” 이라고 한다. 

이들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는 사도신경을 외우지만 믿지는 않는다. Florida 에 있는 RTS 교수인 John Frame 은  Boyd 에 반박하여 No Other God (P&R, 2006) 이란 책을 펴내서 반박한 바 있다. 요즘 이런 사기꾼 신학자들을 조심해야한다. 속임수이다.

✔셋째로, 어느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신학사조가 풍미한다.

“모든 종교는 대등하기 때문에 사람이 선행만 하면 어느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신학자나 목사들이 늘어간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1948년에 조직된 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와 그 산하 NCC에 속한 기독교 지도자들이지만 우리의 눈길을 끄는 사람은 유명한 전도자 Billy Graham (빌리 그래함) (86세) 목사다.
그는 1997년 5월 Garden Grove 소재 수정교회 담임인 Robert Schuller 목사가 진행하는 TV 프로그램 Hour of Power (권능의 시간) 에 출연하여 하는 말이 "선행을 하면, 어느 종교도 구원이 있다“ 고 말하여 파문을 던진바 있다.
이런 사상은 요즘 소위 ”종교다원주의" 라는 이름으로  목사들 중에 상당히 많이 파급되어 있고 이런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서울의 모 대형교회 C 목사(주: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심지어 불교계  동국대학교에서 특강하면서 “기독교와 불교는 아무 차이가 없으니 어느 것을 믿어도 된다” 라는 망언을 했다.
이런 사람도 기독교의 목사인가?  큰 교회를 목회했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데교회(계3장) 은 “죽은 교회"라고 주님이 책망하지 않았던가?  대형교회 목사 일수록 실수가 많은 오늘의 교계이다.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비단 빌리 그래함 (86세) 만 아니다.  한국에서 제일 숫자가 많이 모인다는 교회의 조용기 목사도 2004년 5월 12일 불교계 동국대학교에서 특강을 하며  불교와 기독교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하며 가족 중에 불교 믿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불교적 구원을 믿고 자기는 목사이니 기독교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그의 말은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를 믿던 불교를 믿던 종교는 모두 같기 때문에 각각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의 신학이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가르침인가? 잘못된 교리, 비성경적인 교리는 비판해야하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 일변도로 흘러가는 한국의 교계에서는 아무도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다. 한국의 교회들도 진리를 떠난다는 신호이다. 불의한 것을 보고 의분을 느끼지 못하면 벌써 성경을 떠난 증거이다. 무서운 속임수가 성도들을 속이고 있다.

✔넷째, 개신교 목사들이 천주교를 따라가는 경향.

Canada, Vancouver 의 유명한 개신교 신학자인 James Packer (제임스 패커)는 본의이건 타의이건 간에 1995년에 조직된 이른바 ECT 즉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라는 단체에 가입하여 서명했다.
1996년 가을에 필자가 서한으로 Packer 교수에게 자초지종을 문의했더니 Packer (제임스 패커) 교수는 자기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만 그 주동은 Charles Colson(찰스 콜슨) 이었다고 발뺌했지만 그 문헌에 개신교 측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Packer 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John Ankerberg 와 John Weldon 두 분이 공저한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Eugene, Ore.: Harvest House, 1998) 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천주교의 구원의 교리와 개혁주의 구원의 교리와는 타협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운동은 요즘  개신교 목사들 중에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ECT 가 처음 창립될 때 멋모르고 서명했던 개신교의 White 박사는 후에 회개하고 나왔다. CCC 운동의 Bill Bright(빌 브라이트) 도, Billy Graham (빌리 그래함)도 John Paul II 이 살아 있을 때 Poland에서 천주교의 선교사업에 동조한 적도 있다고 Christianity Today 지는 보도한 적이 있다. 

어떻게 천주교와 개신교가 같이 일을 할 수 있는가?  두 교파는 전혀 다른 구원관을 갖고 있다.

2003년 2월 19일자 중앙일보 E.-22 면에는 <장로교 합동 보수파> 소속 목사들과 여자 전도사 몇 명이 충북 옥천(沃川)에서 보은 (報恩)으로 가는 길가에 “나실 수도원” 을 만들어 세상을 등지고 천주교식 예복을 입고 천주교식 수도에 몰두하는 기사가 실렸다. 필자는 믿을 수 없어서 확인하기 위하여 그 기사를 작성한 중앙일보 담당 기자에게 전자우편으로 경위를 문의했는데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그 기자는. "이것이 정통 장로 교단에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기사화한 것이지 만일 이단 집단의 사람들이라면 기사화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나는 할말을 잊었다.

이런 일은 미국에 있는 교회에서는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너무도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면, New York의 이라는 성공회 교회에서는 천주교 신부, 기독교의 목사, 이슬람교의 Imam (이슬람교 지도자), 힌두교의 구루 (Guru 힌두교의 지도자), 불교의 중, 일본 신토교 (神道敎, Shintoism)의 사제(司祭) 등이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또한 부활절에는 각종 동물들을 본당에 들여 넣고 축복해준다.
Samantha Smith. The Trojan Horse (Fafaytte ,La.: Huntington House, 2001) 란 책을 참고하라.
이유는 모든 종교는 하나이고 지구는 “어머니 신(神)” 이기 때문에 지구가 낳은 모든 짐승은 형제자매이므로  공경해야 한다는 논리 아닌 억지 논리이다.  이런 뉴에이지 운동가들은 1971년 “Earth Day, 지구의 날” 을 제정하여 지구를 “Gaia" 로 섬긴다. 

인간의식 (人間意識) 의 진화를 외치다가 타계한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 Pierre Teilhard de Chardin (“삐에르 타이할 드 샤르뎅“ 이라고 발음함)의 가르침을 교회에 도입하여 실천하는 현장이다. 이 교회의 목사였던 James Morton 은 이 교회에 화재가 발생한 후에 교회를 사임하고 지금은 New York에서 보다 차원이 높은 Interfaith Movement (종교간 통일 운동)을 맡고 있는데  Scotland 의 Inverness 라는 마을 옆에 있는 Findhorn 이라는 New Age 운동본부의 소장이었던 David Spangler 박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Morton 목사는 그의 종교간 통일 운동에 몰두한다.
종교간 통일 운동은 요즘  Alpha Course(알파코스) 나 Contemplative Formation(관상기도) 운동을 벌리고 있는 얼빠진 목회자들이 벌이고  있는 세계 단일 종교 운동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말살하려고 한다.  큰 속임수이다.

✔다섯째, 남의 종교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절대적인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는 주장으로 나의 주장만이 절대적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주장도 내가 주장하는 주장과 같은 비중의 진리가 있기 때문에 나의 주장을 다른 사람에게 수용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며 남의 주장을 수용할 필요도 없으며 모든 사람의 주장은 대등하기 때문에 남의 종교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전도” 라는 방편을 통해서 “기독교만 진리의 종교이다” 라고 전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 미국의 문화를 타락시키는 근간인 Michel Foucault 나 Richard Rotty, Jacques Derrida 의 Postmodernism (후기 근대주의) 의 기본적인 철학이다.
Foucault 가 AIDS 에 걸려 죽기 직전에 쓴 320 면 짜리 방대한 Madness and Civilization: A History of Insanity in the Age of Reason (N.Y.: Vintage Press, 1988) 을 읽어보라. 이런 범신론적 사상이 어떻게 기독교 교회에 여과 없이 스며들도록 교회 지도자들이 방치해 두었을까? 
오늘 기독교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독소 (毒素, venom)중의 한 가지이다.
과연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들은 하나님의 종인가? 아니면 흑암의 종인가?  양같은 평신도는 분별없는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수백만, 수천만명씩 매일 속아 넘어가고 있다. 독약에 영적으로 살해당하고 있다. 그래도 아무도 말하는 목회자가 없다.  속지 말자.

✔여섯째, 사랑과 화해를 중요시해야 한다는 주장.

교리의 진위(眞僞) 논쟁보다도, 진리탐구보다도, 사람이 “서로 사이좋게 지나는 것” 이 더욱 생산적이라는 견해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오늘 어디를 가도 기독교 전반에 크게 물들어있다.  사람들을 상담하다 보면, 놀라울 정도로 이런 사고방식에 성도들이 깊이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연실색할 때가 있다. 이런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어떤 종교이건 종교의 차이는 없고, 누가 무엇을 믿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인정하고 화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며 남을 고쳐 주려고 해서도 안 되며 남을 어떤 이유로든 대적해서도 안 되고 모든 종교와 모든 다른 의견들을 최대한으로 수렴하며 서로 서로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새로운 신학용어(神學用語)를 만들어 냈는데 프랑스어로 "Rapprochement"  “라프로쉬망”  이라는 단어이다. 
다른 종교를 비판하면  내 종교도 비판을 받게 되고 그러면 결국은 화해보다 싸움이 일어나므로 사랑이 희생된다는 논리이다.  이런 생각이야 말로 지금 제일 교회를 타락시키는 가장 비성경적인 사고방식이다.  우리들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에 젖어 있는가? 

이 단어에 담긴 사상은 1967년에 채택된 미합중국 연합장로교단 (UPCUSA)의 새 신앙고백서 (The Confession of 1967) 의 골자인데 새 신앙고백서 에는 "지옥과 천당," "삼위일체," "속죄" 등의 말은 들어 있지 않고,  오로지 인간과의 "화해"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신앙고백서를 일명 “화해의 신앙고백서” 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화해의 신학은 요즘 이상하게도 널리 보편화되어 있다.
지상의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Church Militant) 라고 하는데 교회는 점점 이단과 싸우는 힘은 약해지고, 교회가 점점 여성화(feminization) 되어가고 있다.
  이들의 말을 들으면, 남을 이단으로 정죄하지도 말고, 설혹 이단으로 판명되어도 비평하거나 고쳐 주려고 하면서 얼굴을 붉히지 말고 서로 감싸주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눈감아 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십자가의 군사로 마귀와 싸우면서  “악을 대적하라”(엡6:10이하) 는 성경말씀에 부합하는 신앙태도일까? 속임수 이다. 사람들은 목사들에게 속고 있다.

✔일곱째,  성경위주보다 경험위주로 믿는 신앙풍토가 표준화되어간다.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개인의 경험이나 이성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한다. 고로 교회 예배도 하나님 중심의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하는” 것 보다 소위 “Seekers' Service, 열린 예배" 라고 하여 예배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살려주는 이른바 감정위주의 예배를 드린다. 그러므로 자연히 예배가 말씀 중심이 아니고 오락중심이 되어 간다. Rick Warren(릭 워렌) 목사가 그 대표자 이다. ”졸리고 진부한 찬송가보다는 신나게 박자가 빠는 세상 방송국에서 홀러나오는 pop music 으로 예배음악을 교체하자는 주장이다 (Purpose-Driven Church, p.255).
이들이야말로 레위기 10장을 주의 깊게 읽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배워야하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하시고 전제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인간이 제멋대로 고안해서 드리는 예배를 가증한 것으로 여기며 받지 않으신다.

교회마다 유명한 영화배우의 간증집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도 말씀중심의 집회는 인기가 없다.  요컨대 진리의 말씀에서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말인데 디모데 후서 4:1-8 말씀이 오늘 교회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요즘은 <경험주의>와 <신비주의> 가 혼합하는 경향이 많다. Richard Foster(리처드 포스터)는 그 대표자이다. 그의 책 Celebration of Discipline 을 읽어보라. 불교식의 명상과 다를 바가 없다. 성도가 엎드려 기도할 때 손바닥을 위로해야한다는 가르침은 어디서 왔는가? (ibid. pp.30-31).
Contemplative Prayer (Soaking Prayer) (관상기도) 등이 유행한다. 이것은 나중에 설명할 Brian McLaren (브라이언 맥클라렌)이나 Tony Jones의 Emergent Church Movement(이머징교회 운동)의 사상이다.  무서운 속임수가 횡횡한다.

✔여덟째, 직통 계시를 중요시 하는 풍토.

안식교의  Ellen G. White 라는 여자 분은 평생에 200 번의 환상과 계시를 보고 안식교 교리를 만들었고, 모르몬교의 Joseph Smith도, 통일교의 문선명도 그러하다.  오늘의 빗나가는 신앙은 예외 없이 모두 하나같이  계시나 환상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이나 계시를 보았다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신명기 13장과 18장에 두 번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신명기 (Deuteronomy)라는 말은 헬라어로 “두번 째 율법” 이라는 의미인데 신명기에서 하나님은 환상을 보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죽이라고 까지 말한다 (신 13:5).

또한 성경은 계시록 22:18, 히 1:1,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1에 계시의 종결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에는 계시의 운동이 너무도  많은 성도들을 미혹한다.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왔다고 하는 분, 내가 육신을 떠나서 수술대에 누어있는 내 몸을 보았다는 말(이런 것을 요즘 뉴에이지 운동에서는 OBE 라고 하는데 Out-of-Body Experience)의 약칭이다.
연구할  분은 Shirley MacLaine 의 Out on a Limb 이라는 그의 자서전과 그의  Dancing in the Light 이라는 밀교적 서적 (密敎的書籍, occult books)을 참고 하기 바란다.
이를 명쾌하게 반박한 이는 Malibu에 있는 Pepperdine 대학교의 F.LaGard Smith 박사인데 그는 형법학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이런 밀교에 젖은 학생들을 카운슬링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근자에는 은퇴하고 영국에 건너가서 저작에만 몰두하고 있는 분이다. 그가 남긴 명저 Out on a Broken Limb 은 바로 MacLaine 이 쓴 뉴에이지의 환상과 계시를 공격한 명저중의 명저로 이름이 나 있다 (Harvest House 1989 간행). 속임수에 속지 말라,

✔아홉 번 째, 번영 신학에 젖어 드는 이들이 늘어만 간다.

예수를 믿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Schuller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조용기 목사의 제4차원의 영적세계 같은 책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Kenneth Copeland(케너쓰 코플랜드), Charles Cabbs(찰스 크랩), Napoleon Hill, Robert Schuller(로버트 슐러), Norman Vincent Peale(노만 빈센트 필), Joel Osteen (조엘 오스틴) 등도 같은 생각이다.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기도한 바울의 경우를 보라 (고린도후서 12장).

근자에는 번영신학이 TV 설교가의 80 퍼센트를 넘는다고 한다.  예수를 믿어도 암으로 고생할 수 있고, 교통사고를 당할 수 있고,  남이 당하는 고통을 당할 수 있다. Shamanism 적으로 믿는 성도들이 너무도 늘어만 간다는 사실 앞에 아연실색(啞然失色) 하지 않을 수 없다.
  John Calvin 은 55세에 몸에 27까지 병을 가지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Robert Murray McCheyne 목사는 26에 목사가 되고 29살에 세상을 떠났다.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오른 팔 격인 드로비모는 밀레도에 병들어 누어 었었던 일을  기억하는가? 하나님은 전제주권으로 인간을 다스린다. 몸에 병이 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병이 나는 것도 하나님이 아시는 가운데 일어난다. 낫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신자에게 죽음은 손해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생사가 달려 있다. 반드시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은 아니다. 하루를 살아도 주님을 바로 믿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칼빈 선생의 믿음이 우리 보다 못해서 그리도 가난하게 살다가 그리도 일찍 세상을 떠났는가?  변영신학은 가장 비성경적이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다. 교인들의 귓맛을 좋게 해주는 목회자는 번영신학을 성경의 가르침인양 거짓으로 가르친다. 속지 말자.

✔열번째, 뉴에이지 운동의 교회 침투가 활발하다.

TV 인기 프로를 담당하고 있는 Oprah Winfrey 가 2008년 3월부터 교회를 시작했다.
그가 가르치는 내용을 보면,
1. 천당은 장소가 아니고 나의 의식구조이다.
2. 나의 심성은 하나님의 일부이다.
3. 나는 나의 거룩함으로 구원을 얻는다.
4. 구원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다 
5.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6. 십자가에 매달리며 울부짖지 말라,
7. 십자가의 멧세지는 우리가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8.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만이 아니고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이것이 자칭 침례교 신자인 Oprah 가 가르치는 교리이다.  그는 철저한 뉴에이지 운동의 전도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거짓가르침을 검증도 않고 묵묵히 따르는데, 이는 이 세상의 신이 저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기 때문이다(고후4:4).  속임수이다.

오늘 도처에서 이유 없이 부활하는 옛 영지주의를 통해서 뉴에이지는  힌두교 불고 같은 동양종교를 통해서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활발하게 주님의 교회에 침투하고 있다. 예배 형식, 설교내용, 교회 행정, 특히 교회 음악 등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John Armstrong 박사가 쓴 The Coming Evangelical Crisis (P&R, 1997)) 라는 책이나, Hank Hanegraaf 의 Christianity in Crisis (Eugene, Ore.: Harvest House, 1999), 혹은 Michael Horton 가 편집한 The Agony of Deceit (Eugene, Ore.: Harvest House, 1998) 라는 책,  또는 Herbert Pollitt 박사가 쓴 Interfaith Movement; Invasion of New Age into the Church (Edinburgh, UK.: Banner of Truth Trust, 2000) 라는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Saturday, April 16, 2016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하나님의 존재 곧 하나님은 계시는가에 이어서 구럼 하나님은 누구이신가(속성)에 관한 글을 올려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다면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조직신학에서도 신론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매우 중요하게 다르고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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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속성 곧 성품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3~23).

✔1. 성경만이 밝혀 주시는 하나님의 존재

누가복음 3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우리 인간의 족보가 예수님의 족보와 똑같을 수는 없어도 노아 시대 이후로는 혈통으로 나와 있습니다. 38절 말씀을 보면,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뿌리는 하나님에게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조상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으로 볼 때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누구이건 간에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하나님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한 계시에서, 만물 중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계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가에 대하여 자연계시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계시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이 특별계시를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시고 자기를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은 오직 성경에서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39

요한복음 43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You diligently study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that by them you possess eternal life. These are the Scriptures that testify about me,"

✔2. 하나님은 영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께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영이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4).

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누구나 만족할 만큼 흡족한 답을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요, 영에 속한 일은 육안으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영은 첫째로 사람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의 영적 실체를 알 수 없지만, 우리 인간과 같은 육체적인 모습을 가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이 말씀은 육신을 가진 자 중에는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뵐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But," he said, "you cannot see my face, for no one may see me and live."

이처럼 인간 중에서 그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뵈고 살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보이도록 만들어 섬기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이며, 하나님을 어떤 형상과 비교하려는 인간의 마음은 죄악에서 나온 악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They exchanged the truth of God for a lie, and worshiped and served created things rather than the Creator -- who is forever praised. Amen."

✔3. 하나님은 어디서 나온 분입니까?

하나님의 기원에 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 영원하신 분이라고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영원”이란 끝이 없다는 뜻으로 하나님은 이처럼 그 발생의 시발점 또한 없는 분이십니다. 말씀의 기원에 대하여 요한복음 1:1에서 태초라고 나와 있지만, 이 태초란 말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을 가리킨 것입니다.

시편 90: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Before the mountains were born or you brought forth the earth and the world, 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you are God."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밝히셨는데, 이 말의 뜻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출애굽기 3:13~15 참조).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나, 안 보이는 것이나, 오직 창조함을 받지 아니한 존재는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였고, 지금도 하나님은 이 만물을 섭리하고, 붙드시고, 주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

✔4. 하나님의 두 가지 속성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속성을 갖고 계십니다. 속성(an attribute)이란 말을 알기 쉽게 말하면, 성품(nature)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유적 성품과 비 공유적 성품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소유하고 계시고, 다른 피조물에게는 없는 성품이 비 공유적 속성이며, 인간과 닮은 속성을 일컬어 공유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비 공유적 속성

하나님은 영이시다 ……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 인간은 흙으로 만든 육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다 …… 하나님은 무한하지만, 우리 인간은 유한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 하나님은 영원하지만, 우리 인간은 잠시 잠깐후면 사라져 버리는 일시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다 …… 하나님은 불변하지만, 우리 인간은 가변적입니다.

💥(2)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 :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유사한 점도 있습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닮은 점이 있었는데, 이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공유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존  재 : 실제로 살아 있다는 점에 있어서
지  혜 : 무엇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일에 있어서
능  력 :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거  룩 :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깨끗한 상태
선하심 :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선을 주는데 지금도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약간은 남아 있다.
진  실 : 거짓이 없는 참

대개 열거하면 이런 것들인데,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이 같은 속성이 하나님과 똑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지만 우리는 다만 그 형상을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형상조차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함으로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없어졌다는 말은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인간의 타락이라고 부르며 타락한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예레미아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만은…” 이처럼 말했습니다(예레미아 17:9 참조).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던 존재가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순수한 지혜는 마귀의 간교한 지혜로 변해버렸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릴 능력은 마귀의 도구가 되었으며, 거룩은 죄악으로 뒤바뀌고, 선은 악으로, 진실은 거짓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성경은 이 같은 인간의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에베소서 2:1, 요한복음 5:25 참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으며, 만물보다 더욱 가증한 자들이 되어, 마귀와 짝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으며, 하나님 없는 바벨탑을 쌓고 있으며, 인간의 더럽고 추한 죄악이 쌓이고 또 쌓여 하늘에 사무쳤다고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8:4).

이제 아무 소망이 없는 인간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는 비참한 존재로 멸망 받았을 것입니다.

✔결론 : 여기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를 알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가 되십니다.

나를 모태에서 잉태케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시편 71:6, 이사야 44:2 참조). 그러므로 그 분의 징계를 달게 받으며,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히브리서 12:9 참조).

📌(2) 이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피조물들을 수호하고, 지배하고 계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6:26 말씀에서, 주님은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9 말씀에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만 의뢰하고, 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합니다.

📌(3) 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잠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하여 사단의 시험을 허락하시는 일은 있지만 이것은 우리의 유익과 축복을 위해서만 허용하십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산성과 방패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셨습니다(요한일서 4:8 참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 증거를 충분히 나타내셨습니다(로마서 5:7~8).

우리는 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진정이란 거짓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에 거짓이 있다면 이는 헛된 경배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령이란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경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마땅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어느 신앙 블로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