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July 8, 2017

죄란 무엇인가?/ 박일민 교수

🌻죄란 무엇인가?
/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계,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3월호)

Friday, June 2, 2017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란 무엇인가? 

1. 이끄는 말

2. 은혜의 정의

3. 은혜의 내용

4. 은혜의 특성

5. 맺는 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엡2:8-9-

1. 이끄는 말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나 교회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 중에서 은혜라는 용어가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진리와 은혜와의 관계가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은혜의 종교'라고 하기도 하고, 기독교 진리를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기독교 진리를 논하기가 어렵게 된다. 따라서 신앙적인 대화나 복음전도에 있어서 '은혜'라는 용어가 흔히 사용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학문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기독교 진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설명된 단어 하나하나에 올바른 이해가 앞서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자세하고 분명하게 정리된 진리체계라 할지라도 먼저, 설명된 단어에 올바른 이해가 없이는 진리체계 전체에 대한 오해를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진리대로 전달이 되어지려면 전달의 도구로 사용된 용어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앞서야 하는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특별계시로 주신 하나의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기독교 진리가 너무도 복잡하고 혼란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그 중 하나는 용어에 대한 잘못된 이래가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다양한 형태의 신비주의 신앙운동들이 건전한 기독교 신앙계에 암초 역할을 하고 있는 원인 중의 하나가 '은혜'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왔다는 사실이다. 성경진리의 기초 위에 견고하게 세워지고 자라가야 할 교회가 몇몇 광신적인 신비주의 운동가들의 불장난에 의하여 커다란 상처를 받은 것이 현대 교회의 현실이다. 광신자들 중 더러는 마술적인 신통력에 의하여 사람을 넘어지게 하여 소위 입신을 시키키도 하고, 양손을 서로 붙이기도 하고 떼게 하여 호기심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신적 능력으로 과장하여 군중들을 흥분시켜 놓고,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충만한 은혜의 역사라고 선전한다. 그리고 혹자들은 방언도 하고 환상도 보게 되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요즘 흔하게는 '주여!' 삼창을 부르고 등골에서 땀이 나도록 큰소리로 기도할 때, 몸에 뜨거운 불이 임하고 진동도 일어나게 되며 하나님의 응답도 받는 것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 자들이 허다하다. 그리고 더 흔하게는 소위 부흥회라 해서 많은 사람을 집회 장소에 모아놓고 북과 나팔소리에 맞추어 빠른 속도로 복음송을 부르게 함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켜 참석자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작태들을 은혜의 역사라고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는 금식기도를 한다든가, 산기도를 한다든가, 또는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등은 물론 안수를 받거나 은사 집회에 참여하는 것 등으로 알고 있는 경우는 일반화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깊게 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모두가 성경적인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이나 오해에서 나타나는 잘못된 신앙적 부산물이다.

건전한 신앙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상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이 건전한 신앙은 기대될 수 없다.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게시하실 목적으로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업쇼이는 역시 건전한 신앙이 기대될 수 없는 것이다.

현세교회는 계속 개혁이 진행되어야 한다. 신학은 물론 신앙과 교회 행정 전반에 걸쳐서 꾸준한 개혁이 진행되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에 대한 오해들을 바로 잡아가야 하는 것이 선결 과제이다. 그 중의 하나가 은혜에 대한 성경적인 올바른 이해라고 생각이 되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적인 은혜란 무엇인가? 

2. 은혜의 정의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가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은혜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아보려고 한다. 신약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하는데 고대어에 있어서의 이 단어의 외적인 의미는 '매력' 또는 '매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친절한' 또는 '예의 바른'이라는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은총'이나 '혜택' 또는 '은혜'라는 의미로 나타나게 되었다. 결국 은혜(Grace)라는 말은 친절함이나 은택을 베푸는 자에 대하여 이것들을 받는 자가 감사를 느끼는 태도를 나타내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헨'이라고 하는데 '은총(favor)' 또는 '은혜(Grace)'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다.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은혜'라는 단어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구약성경에 있어서 노아 시대에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시는 여호와께 노아가 은혜를 입은 일이나 소돔성이 멸망을 당할 대 롯의 가족이 여호와께 은혜를 입어 멸망을 피한 사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김으로 여호와의 진노를 받아 백성들 삼천 명이 죽게 된 후, 모세가 회개하고 여호와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을 구하면서 은총을 입은 증거를 보여 주시라고 한 사건 등이 있다. 이러한 사건 등은 구약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은총'이나 '은혜'에 대한 단어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나 진노에서 구출되거나 용서되는 사건들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배경으로 해서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섭리와 관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사역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 있어서의 구원섭리는 하나님의 언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구약에 있어서 '은혜'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구원이나 언약섭리와 관련을 지어 그 의미가 이해되어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은 이스라엘 열조와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고, 그 언약은 아무런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성이나 자비성에 근거한 그 뜻에 따라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은혜'라는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신약성경에 있어서도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가 잉태될 것을 알리면서 은혜를 받은 자라고 했고, 예수께서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고 말씀하신 것을 은혜로운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 특히 서신서에는 은혜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는 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마리아의 경우 많은 처녀 가운데 예수의 모친으로 선택된 사건이나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으로 약속하신 것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사실이나 아브라함 후사가 믿음으로 되는 것 등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성에 의하여 무조건적으로 되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은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잇다. 그러므로 '은혜'라는 용어는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적 섭리에 따라 자비하신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셔서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구원해 주시는 역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은혜에 대한 개념은 일반적인 은혜와 특별한 은혜로 구분한다. 일반적인 은혜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나 택하지 아니한 자에게 일반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말한다. 예를 들면 물. 공기. 태양 등 자연의 혜택 도는 정치. 문화. 예술. 교육. 학문. 경제 등과 같은 일반적인 혜택을 말한다. 그리고 특별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만 베푸시는 종교적인 은혜인데, 예를 든다면 진리를 깨닫게 해서 믿게 해 주시고 구원에 이르도록 섭리하시는 혜택을 말한다. '은혜'라는 용어도 일반적으로 사용할 때에는 부모의 은혜 또는 스승의 은혜, 상사의 은혜 등 다양하게 사용이 되지만, 이 용어가 종교적으로, 즉 성경적으로 사용이 될 때에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사용이 되는 것이다. 본 논고에서는 전자와 같은 '은혜'에 대한 일반적인 용도의 의미는 제외하고 후자와 같은 종교적인, 즉 성경적인 용어에 있어서의 해답을 구하려 한다. 

3. 은혜의 내용 

은혜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얻으려면 은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 내용을 성경에서 일일이 구하자면 너무도 방대한 분량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같은 방대한 내용을 간단히 간추려서 총정리 하듯이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설명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성경 내용을 중심으로 은혜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아들 되게 하심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듯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3-6)"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찬송할 것을 언급하고, 그 이유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으니까 은혜의 영광을 찬송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구체적인 내용은 신령한 복으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구체적인 방법이 놀랍다. 그 첫째 방법으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을 아들들로 택하신 것이고, 둘째 방법으로는 택한 바 된 아들들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시려고 하나님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이 방법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도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거저 주신 은혜임을 알게 된다. 첫째 방법인 하나님의 선택이나 둘째 방법인 하나님의 예정이 모두가 하나님의 기쁘신 듯에 의한 조건 없는 은혜이다. 목적을 위한 방법이 은혜라면 그 방법의 목적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도 조건 없는 은혜일 수 밖에 없다. 

다음은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이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듯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잇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7-12)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해야 할 두 번째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그 이유로는 성도들이 피로 구속을 받아 기업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구속사건 역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비밀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넘치데 해서 다 알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을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이 다 예정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아 기업이 되게 된 것도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섭리에 의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은혜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 다음은 성령으로 인치심이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 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3-14)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찬송해야 할 이유를 밝혀 준다. 그 이유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성도들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도한 믿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아들들로 인치심을 받은 것이 어떠한 공로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이 없는 은혜로 된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들었다는 것도 은혜라는 것이며,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누구나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게 해서 깨닫고 믿게 해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은 자만의 것이다.

지금까지 에베소서 1장 3절에서 14절까지의 내용을 중심으로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다시 한 번 요약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셔서 아들들이 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여 기업이 되게 하시고, 약 속의 성령으로 인을 쳐서 기업의 보증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성경적인 은혜의 내용인 것이다. 

4. 은혜의 특성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다. 그 내용 자체도 특수하지만 그 성질 자체도 특별하다. 성경적인 은혜란 무엇인가? 라는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는 주권성이다 

은혜의 내용 부분을 설명하는 가운데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절대 주권적이시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성도들 편에서 은혜 받기를 원한다고 해서 은혜를 받게 되거나 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해서 받아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리켜 신학에서는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라는 교리 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성도에게 베풀어지는 은혜가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거부될 수 없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장로교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도 보면 10장 1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예정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 용납하시기로 작정하실 때에 말씀과 성령으로 저희를 확실히 부르사 저희가 본 성품으로 사는 죄와 죽음에서 나오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은혜와 구원을 얻는 지위에 이르게 하시되......"라고 했고 2절에서는 "이 유효한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고 특별한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결코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미리 하나님이 보시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소생하고 새롭게 된 연후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할 수가 있게 되며, 또한 이 부르심 가운데서 제공되며 전달된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모든 내용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주권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소위 장로교회 지도자나 성도들이라고 하는 자들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적인 열심이나 노력에 의하여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성경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4-16) 

다음은 자비성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특성 중에 하나는 자비성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의 기초가 되고 잇기 때문에 은혜의 특성 중에 하나로 자비성이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경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 '아하바'라는 말과 '헨'이라는 말이 있고, 신약에서는 헬라어로 '아가페'라는 말과 '필레오'라는 말이 있다. 이들 용어들은 모두가 사랑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구약에 있어서의 히브리어 '아하바'나 '헨'은 아주 다양하고 폭넓게 사용되고 있고, 신약에 있어서도 헬라어 '아가페'나 '필레오'도 그 의미상 커다란 구별 없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아가페'라는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라는 말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 용도는 '아가페'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아가페'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는 사용이 되고 있지 아니하는 헬라어 '에로스'라는 말과는 구별이 되는 용어이다. '에로스는 성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용어로서 '아가페'와는 구별이 된다. '하나님은 사랑(아가페)이시다'라는 말에서 '아가페'는 신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용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신적인 사랑이란 역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역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며 일방적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조건이나 의사에 관계없이 하나님께로부터 택한 성도들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9)" 

그 다음은 영원성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의 특성 중의 또 하나는 영원성이다.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영원성을 특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영원(Eternity)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시간의 연속이나 시간의 제한이 없는 미래를 일컫는 말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영원이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형상을 초월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으로써 종교적이고 절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나중이 되는 상태를 말하는 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표현 방법이다. 그래서 '영언'이라는 말이 하나님과 결부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성경에서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원'은 그 용어 안에 무한성과 불변성 도는 완전성 등이 포함된 넓은 의미의 말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역시 영원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한하고 불변하며 완전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변함도 없고 완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혹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고 작은 것이 있는 줄로 알기도 하고 도 은혜를 하나님께서 베푸셨다가 생각에 변동이 생겨 다시 되돌려 가시는 줄로 알고 있는 자들도 있다. 이러한 결과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성경적인 은혜의 특성을 오해하고 있는 데서 얻어진 것들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라는 용어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셔서 언약하시고 언약대로 구원해 주시는 역사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정의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영원성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도 영원한 언약이며, 그 언약대로 구원해 주신 것도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은혜는 영원성을 그 특성의 하나로 가지고 있는 무한하고 불변하며 완전한 은혜인 것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4:17-18) 

5. 맺는 말 

처음 이끄는 말에서 은혜에 대한 오해의 부분들을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은혜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정의와 그 내용 및 특성들을 차례로 살펴보았다.

은혜에 대한 오해의 결과는 기독교 신앙계에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비성경적인 신비주의 운동 또는 염세적인 기도원 운동, 그리고 말씀 중심에서 탈피한 은사 중심의 부흥운동 등과 같은 사이비적 신앙운동 등이 곡신밭에 무성한 가라지처럼 자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성경보다는 인기나 명성은 물론 큰 목소리가 비중이 큰 것도 사실이다.

이제야말로 건전한 말씀운동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이다. 방향감각마저 잊어버리고 탐욕과 허영에 취해 인기나 통계 중심의 탈선된 신앙운동에 열을 올리던 자들은 어리석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조용히 말씀 안에 신앙의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해된 은혜중심의 부흥회는 당연히 경계해야하며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욱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들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성경공부(사경회)가 심도 깊게 자리잡혀 가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미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이미 받은 바 은혜를 깨달아 가는 것이다. 즉 엄밀하게 말하면 은혜를 성도가 받은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는 듯이다. 성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은혜를 깨달은 농도만큼 은혜의 감격이 솟아나게 되기 때문에 감사와 찬송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나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이라 (고후4:14-15) 

http://theology.ac.kr/institute/dtdata/목회상담/신앙상식상담/은혜.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