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11, 2017

존 칼빈, 기독교 강요, 2권1장,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온 인류가 저주를 받음, 원죄론

존 칼빈, 기독교 강요, 2권1장,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온 인류가 저주를 받음, 원죄론

율법 아래서 조상들에게 나타나셨고,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구속주 하나님,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제 1장 아담의 타락과 반역으로 온 인류가 저주를 받았고

원시 상태에서 부패하였음, 원죄론

특정한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면서도 그 목표를 자기 자신의 가치와 탁월함을 아는 데에다 두었고,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면서도 그저 헛된 자신감에 부풀려지고 교만으로 우쭐해지는 것밖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첫째로, 창조 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바를 생각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비롭게 우리를 계속해서 보살피시는가를 생각하는 데 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본래 부여받은 상태대로 흠 없이 남아 있었더라면 우리의 탁월함이 얼마나 위대하겠는가를 알고, 동시에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 가운데 우리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이요, 우리는 그것을 누리는 것뿐이며,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의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생각하는 데 있다. 이것을 깨달으면, 우리의 모든 자랑이나 자신감이 사라져서 우리가 정말로 낮아지고 수치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높이 올리셔서 덕을 향하여 열심을 갖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도록, 우리를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다(창1:27).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위대한 고귀함- 이것이 우리를 짐승들과 구별지어준다-이 우리의 미련함 밑에 파묻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성과 지성을 부여받았으므로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삶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지정된 그 복된 불멸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의 본성적인 자기 도취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필 때에 추구해야 할 지식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요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능력에 대한 모든 신뢰를 제거하고, 우리로 자랑할 모든 기회를 없애며, 우리로 굴복하도록 이끄는 그런 지식인 것이다. 지혜와 올바른 처신이라는 참된 목표에 진정 도달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이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자기 가신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갖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충분히 선하고 복된 삶을 스스로 이어갈 수 있다는 정말 허망하기 그지없는 사고가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지지를 얻고 있다. 사람의 골수에 박혀 있는 교만을 부추겨 주는 간사한 이야기만큼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없다.그리하여, 거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가장 치켜세우는 발언을 하는 사람이 가장 환영을 받고 박수를 받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자기 홀로 도취되도록 만드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사실 그 가르침에 동의하는 자들을 철저히 속여 처절한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 선생들의 가르침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자기를 아는 지식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악의 무지 속에 빠져들 뿐인 것이다.

자기를 아는 지식의 두 가지 면

육신적인 판단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의 지성과 정의로움을 확신하고서, 덕의 의무들을 담대히 시행하고, 악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스스로 모든 힘을 기울여 탁월한 것과 존귀한 것들을 위해 수고를 다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살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뢰할 만한 것을 자기에게서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살필수록, 더 낙담하게 되고, 마침내 그런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고,자신의 삶을 올바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이 자기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져야 마땅한 지식을 생각할 때에, 그 지식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는 것이 합당한 것 같다. 첫째로,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목적으로 창조함을 받았으며 또한 어떠한 목적으로 고귀한 은사들을 부여받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러한 지식을 통해서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각성하여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또한 미래의 생명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둘째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능력들을- 아니 오히려 능력의 결핍을- 가늠해야 한다.이러한 결핍을 깨닫게 되면, 그는 극도의 혼란 속에 엎드러질 것이고, 말하자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첫 번째 지식을 갖게 되면, 사람이 자기 의무의 본질을 깨닫게 되고, 두 번째 지식을 갖게 되면, 그 의무를 시행할 자기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아담의 타락의 역사가 보여 주는 죄의 본질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신 것은 그의 순종을 시험하며 그가 과연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나무의 실과를 먹는 한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약속을 주셨고, 또한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즉시 죽으리라는 끔찍한 경고를 주셨는데, 이것이 아담의 믿음을 입증하고 실행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대체 무엇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스스로 자초했는지를 어렵지 않게 추리할 수가 있다. 교만이 모든 악의 시작이라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언은 지극히 올바르다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묘사하는 유혹의 본질을 근거로 좀 더 충실한 정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여자가 신실하지 못하게 뱀의 간계에 이끌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에, 불순종이 타락의 시작이었다는 것이 이미 분명히 드러난다. 바울도 역시,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바 되었다고 가르침으로써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롬5:19). 그러나 이와 동시에 유념해야 할 것은,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권위에서 반역한 것은 그가 사탄의 유혹에 사로잡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그가 진리를 멸시하여 거짓에게로 돌아섰기 때문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모든 경건한 자세가 다 흔들리는 법이다.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하나님의 위엄이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경배도 온전히 남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신앙이 타락의 뿌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야망과 교만이 감사치 않음과 더불어 일어났으니, 이는 아담이 자기에게 허락된 것만 해도 풍족하고도 남는데 부끄럽게도 그 이상의 것을 탐하여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를 제쳐버렸기 때문이다.흙으로 지어진 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도 모자라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를 탐하였으니, 이 얼마나 몹쓸 악행인가!

그런데, 아담의 반역은 그저 단순한 배반이 아니었고, 거기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비열한 모욕이 결합되어 있었다. 이 첫 사람 아담 내외는, 하나님께 거짓과 시기와 악의가 있다고 떠드는 사탄의 비방에 그대로 동의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신앙으로 인하여 야망이 생겨났는데, 이 야망이 완악한 불순종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경외를 내동댕이치고 정욕이 이끄는 대로 아무렇게나 자기 자신을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베르나르는 진정으로 말하기를,그때에 첫 사람 아담 내외가 사탄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그 말을 들어서 죽음이 임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면 우리에 구원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지 않았더라면,아담이 절대로 감히 하나님의 권위에 대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정욕들을 통제하는 최고의 장치가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곧,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함으로써 의를 실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며, 또한 행복한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마귀의 참람한 말에 휩쓸려서,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통 소멸시키기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

죄의 오염

아담이 그 지으신 분과 연합하여 있고 또한 그에게 매여 있는 것이 그의 영적 생명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곧 그의 영혼의 죽음이었다. 그가 하늘과 땅의 자연 질서 전체를 부패시켰으니, 자신의 반역으로 자기의 모든 후손을 멸망에 몰아 넣었다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피조물이 다 --- 탄식하며”(롬8:22), 썩어짐에 굴복하는 것이 자기의 뜻이 아니다(롬8:20). 이렇게 된 원인을 찾자면, 피조물들은 사람이 사용하도록 창조되었으므로, 사람이 받을 형벌의 일부를 피조물들이 마땅히 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하늘의 형상이 말소된 후에, 아담 혼자만 이 형벌- 처음 그에게 주어졌던 지혜와 덕과 거룩함과 진리와 정의가 사라지고, 그 대신 지극히 추한 더러움과 몽매함과 무능력과 불결함과 허망함과 불의가 생겨나게 된 사실-을 당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후손들 역시 동일한 비참 속에 얽혀 들어가 거기에 잠기에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물려받은 부패성인데, 교부들은 이를 “원죄”라는 용어를 써서 표현하였다. 여기서 “죄”란 그 이전에 지녔던 선하고 순결한 본성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옛 교부들이 이 주제에 대해서 명확하지를 못했기 때문에, 펠라기우스(354-420)가 일어나 아담이 죄를 지어서 자기 자신만 잃어버린 바 되었을 뿐 그 후손들에게는 전혀 해가 미치지 않았다는 불경스러운 허구를 주장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지를 못한 것이다.

선한 사람들은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사악함을 본받았기 때문에 부패한 것이 아니고 모태로부터 결함 있는 상태를 타고난다는 것을 힘써 입증하였다. 이를 부인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수치의 극치였다. 다윗의 증언이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불순한 씨에서 내려온 우리들 모두가 출생할 때부터 죄에 감염되어 있는 것이다.

죄의 오염은 모방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님

우리는 부모의 불순함이 자녀에게 전달되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날 때부터 이미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아담은 그저 인류의 시조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인류의 뿌리였고, 그리하여 그의 부패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부패한 상태 속에 있게 되었다.이 점은 사도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 것처럼(롬5;12),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의와 생명이 우리에게 회복되느니라(롬5:17).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아담의 죄가 모방에 의해서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도 우리에게 그냥 모범으로만 제시되었다는 것인가? 만일 그리스도의 의가 – 그리고 의로 말미암아 생명이- 전달에 의해서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면, 곧 그 두 가지가 – 의와 생명이 –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바 되었었는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며, 또한 아담을 통해서 끼어들었던 죄와 사망이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거된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그리스도)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는 말씀은 결코 애매한 진술이 아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신자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하고자, 아담 안에서 잃어버린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전15:22). 모든 사람이 모태에서부터 이미 저주받은 상태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바울의 진술(엡2:3)은 성립할 수가 없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본질”이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본질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더렵혀진 상태의 본질을 뜻하는 것이다. 하늘의 재판장이신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 따라서 사람이 거듭나기까지는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모두에게 닫혀 있는 것임을(요3:5) 말씀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악하고 부패한 상태로 출생한다는 사실을 친히 명확하게 선포하신 바 있다.

죄의 전달

썩은 뿌리에서 썩은 가지들이 나온 것이요,그것들이 그 썩은 상태를 거기에서 나온 다른 작은 가지들에게로 전달시킨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녀들이 부모 안에서 부패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이 그런 질병의 상태를 자기 자녀들에게 다시 옮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에게서 시작된 부패가 조상들에게서 그 후손들에게로 영속적으로 흘러내려가는 방식으로 전달되었다는 것이다.전염의 기운이 육체나 영혼의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전염의 기원은 바로, 첫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풀어주신 은사들을 지니고 있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의 후손 모두를 위한 것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자녀들이 경건한 부모들에게서 부패성을 물려받는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고전7:14). 자녀들은 부모들의 영적 중생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육적인 혈통을 물려받는다. 죄 있는 불신자든, 죄 없는 신자든 상관없이, 사람은 죄 없는 자녀가 아니라 죄 있는 자녀를 낳는 것이다(아우구스티누스).왜냐하면 부패한 본성으로부터 자녀를 낳기 때문이다.

원죄의 본질과 정의

원죄란, 영혼의 모든 부분들에 펴져 있어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만들고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 “육체의 일”(갈5:19)을 우리 속에 일으키는 바 우리 본성의 유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자주 죄라 부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거기서 나오는 것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당 짓는 것, 분열함과 이단 등(갈5:19-21)-을 가리켜 “죄의 열매”라고 부르는데, 성경은 흔히 이것들을 “죄들”이라 부르고 바울 자신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다음 두 가지를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의 본성의 각 부분이 다 타락하고 부패하여 있으므로, 이런 크나큰 부패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정죄를 받고 유죄를 선고 받은 상태에 있으니, 이는 그 하나님에게는 오직 의와 무죄와 순결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의 범죄 때문에 지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되었다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마치 우리는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아담의 죄책을 떠맡아 지게 된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고, 우리가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 속에 얽혀들어 갔기 때문에 아담이 우리를 죄책이 있게 만들었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에게서 우리에게 떨어진 것이 형벌만은 아니다. 그가 우리에게 부여한 오염이 우리 속에 거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형벌을 받아 마땅한 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주 죄를 가리켜 “다른 사람의 것”이라 부르면서도,동시에 죄가 각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께서도 친히 지극히 웅변적으로 이를 증거해 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즉, 모든 사람이 원죄 속에 둘러싸여 있고,또한 그 얼룩들로 더러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갓난아기들이라도 모태로부터 정죄를 지고 출생하며, 다른 사람의 죄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책을 지는 것이다. 그 아기들의 불의의 열매들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씨가 그들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그들의 본성 전체가 죄의 씨앗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오로지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울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당연히 죄로 여겨지는 것이다. 죄책이 없다면 정죄도 없을 것이니 말이다.

두 번째로, 이러한 부패성은 절대로 우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마치 불타는 용광로에서 불꽃과 화염이 계속 튀어나오며, 샘에서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오듯이, 계속해서 새로운 열매들-육체의 일들-을 맺는다는 사실이다. 원죄를 가리켜 “우리 속에 거하여야 할 원시의 가 결핍된 상태”로 정의한 자들은 그 위력과 힘에 대해서는 효과적으로 표현하지를 못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선이 결핍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온갖 악을 풍부하게 산출해 내기 때문이다. 원죄를 가리켜 “정욕”(concupiscence)이라고 말한 자들은 아주 적적한 용어를 사용했다 하겠다.여기에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지성에서부터 의지에 이르기까지, 영혼에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이 정욕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그것으로 더러워져 있다는 것이다. 좀 더 간단히 표현하자면, 전인(全人)이 정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죄는 전인(全人)을 부패시킴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담이 의(義)의 근원을 저버린 후에 죄가 그 영혼의 모든 부분들을 장악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그저 천박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을 뿐만 아니라, 말로 다할 수 없는 불신앙이 그의 정신의 최고 보루를 점령하였고, 교만이 그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바울은 부패가 한 부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의 어느 부분도 그 치명적인 질병에 저촉되지 않은 채 순결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음을 가르침으로써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 있다. 바울은 부패한 본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눈에 보이는 감각들의 제멋대로인 충동들을 정죄하는 것은 물론 특히 정신이 몽매함에 넘겨졌고, 마음이 부패에 넘겨졌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엡4:18).

로마서 3장 전체가 원죄를 설명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1-20절). 그런데 “새롭게 됨”에 대한 묘사에서 그것이 한층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옛 사람과 육체와 대조를 이루는 영은 영혼의 저급한 감성적인 부분을 교정시키는 은혜를 뜻하는 것뿐 아니라, 영혼의 모든 부분의 충만한 개혁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유혹의 욕심을 버리라고 말씀할 뿐 아니라, 우리더러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라”고 명하며(엡4:23), 또한 다른 구절에서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롬12:2). 이로 불 때에, 영혼의 탁월함과 고귀함이 특별히 빛을 발하는 그 부분이 손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너무나도 부패하여서, 그것이 고침을 받고 새로운 본성을 입어야 할 형편이 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전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홍수를 만난 것처럼- 완전히 죄에 압도되어서 죄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으며,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다 죄로 물들어 있다. 바울의 말처럼, 육신의 모든 생각이 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롬8:7), 육신의 생각이 곧 사망인 것이다(롬8:6).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꽤들을 낸 것이니라”(전7:2). 사람이 멸망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탓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탓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허망함 속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본성적”이라는 용어의 의미

우리는, 사람이 본성적 오염으로 말미암아 부패하였으나 그렇게 된 것이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 부패성이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하며, 그리하여 그것이 처음부터 심겨져 있던 고유한 속성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사람에게 가해진 어떤 본질임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본성적”이라 부르는 것은,아무도 그것이 악한 행실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유전의 법칙을 통해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다.”(엡2:3).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지으신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사람에게 그렇게 적의를 품으셨겠는가? 하나님은 그의 지으신 것 자체를 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지으신 것이 부패한 상태를 대적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손상된 본성 때문에 하나님께 본질적으로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과연 옳다면,사람이 본성적으로 부패하였고 타락하였다고 말하는 것도 지극히 옳은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294-310

Tuesday, August 29, 2017

예언서를 기록한 선지자들(바이블나라)

선지서 개론(7) : 예언서를 기록한 선지자들

 *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 *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에 대해서 살펴볼 때가 되었다. 그들의 선포와 예언서들은 그 당시에 한 부류를 형성하였으며, 그들은 위대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는 용기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이 기록한 예언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목록을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일정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메시지를 선포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속해 있었던 시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대에 예언을 한 사람들은 이들보다 훨씬 더 많았지만, 그들은 기록을 남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연구 대상이 될 수는 없다.
 

1. B.C 9세기의 예언자들: 오바댜와 요엘

  8세기에 활동했던 아모스는 종종 처음으로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9세기 경에 이미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이 활동했다고 믿을만한 증거가 있다. 오바댜는 처음으로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로 추정된다. 그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시대에 살았는데, 여호람은 이스라엘의 사악한 아달랴와 결혼을 했다(왕상 22:44, 대하 18:1, 21:6, 22:3,4,10). 여호람이 그의 보좌를 보존하기 위해서 그의 형제들을 죽인 것은 아마도 아달랴의 영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대하 21:4). 아달랴 자신은 나중에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서 그녀의 모든 손자들을 죽였다(대하 22:10). 오바댜의 사역은 이처럼 매우 혼란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조국이 아닌 남쪽의 에돔에 대해 예언하게 하셨다. 그는 에돔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해 교만하게 행하였기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고 예고했다(옵 11-14).

  요엘은 7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아 시대에 활동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여호람의 통치가 끝나게 되자, 그의 아들 아하샤가 1년 동안 다스렸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아달랴가 손자들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6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그러나 신실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인도 아래 아달랴는 죽임을 당하게 되고, 나이 어린 요아스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요아스가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인도했다. 요엘의 사역의 시기는 아마도 이와같이 여호야다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인도했던 때로 보인다.

2. B.C 8세기의 예언자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요나

  8세기의 예언자들 중에서 4명은 그 활동 시기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모스는 스스로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와 유다 왕 웃시야 시대에 예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암 1:1). 이러한 기록은 그가 주전 767년(웃시야가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한 해)과 주전 735년(여로보암이 죽은 해) 사이에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세아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그리고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에 사역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은 주전 767년과 주전 753년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히스기야가 유다의 전권을 행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주전 715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여로보암 2세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라를 성장시켰으며, 이로 인해 귀족들은 부를 축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들은 땅에 보물을 쌓고 자기의 쾌락과 번영에만 관심을 가졌다. 이로 인해 사회는 부정과 불의가 판을 쳤으며, 경제적으로 연약한 자들을 압제를 당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모스와 호세아를 보내셨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모세에 의해 확립되고 엘리야에 의해 제정된 선지자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이 두 선지자에 의해 세상은 격렬하게 불타오르게 된다. 당시에 가난한 자와 경건한 자들은 사회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부자와 권력자들은 사회 정치 구조에 만족하고 있었다. 신흥 대국 앗시리아는 아람을 점령했다. 여로보암 2세는 앗시리아의 정책에 순응해 가면서 영토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그는 장차 그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앗시리아와 아람, 그리고 이집트와 번갈아 가면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아모스와 호세아는 이러한 여로보암 2세의 현실 정치를 비판했다. 그들은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패역한 백성이 되었는 지를 지적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율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수없이 연단을 받은 후에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두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타락과 배교와 완악함을 꾸짖고, 그들의 멸망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번영하는 현실로 인해 미래에 대해 낙관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기 직전에 하나님은 유다에도 이사야와 미가라는 두 선지자를 일으키셨다(주전 730년). 이사야는 유다의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왕 등이 다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사야가 이스라엘 왕들의 명단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그가 아모스나 호세아와는 달리 유다만을 위해 예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웃시샤 왕이 죽던 해인 주전 740년에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죽음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사 37:38), 이 일은 주전 681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가역 기간은 약 60년 정도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른 예언자들에 비해 매우 긴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가 역시 유다를 위해서 예언했기 때문에, 그가 예언했던 시기의 유다 왕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는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 때에 활동을 했다. 그는 이사야가 사역을 시작한 얼마 후에 사역을 시작해서, 이사야가 사역을 마치기 전에 사역을 마쳤다. 요담의 통치는 주전 731년에 끝났고, 히스기야는 주전 715년에 전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그는 이 기간 중에 활동한 셈이 된다. 이사야와 미가 역시 북 이스라엘의 권력과 자만, 그리고 그들의 실용정책을 비판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멸망을 하게 되자, 그들은 남 유다에도 경고를 하기 시작했다. 남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사야와 미가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이 그들의 멸망의 전조가 된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요나는 자신이 예언했던 때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가 이스라엘이나 유다를 위해 예언하지 않고, 이방 나라인 앗수르의 니느웨 성을 향해 예언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나서가 기록된 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첫 번째 연도는 아모스가 사역을 하던 시기인 주전 760년이다. (왕하 14:25)은 요나가 여로보암 2세에게 예언을 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때는 8세기 전반기였다. 이 구절은 또한 그가 니느웨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자였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이 구절이 여로보암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영토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홍해 바다까지 회복될 것을 그가 예언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요나는 주로 8세기 전반에 사역했지만, 나머지 예언자들은 모두 주전 760년 이후에 사역했으며, 특별히 호세아와 이사야와 미가는 주전 740년 이후에 활동했다. 이들 4명의 예언자들 중에서 2명은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했고, 2명은 유다를 향해 예언했다. 이들은 또한 주전 8세기 중엽 및 후기에 활동했다.

  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유다 역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사야와 미가는 사마리아의멸망과 히스기야의 통치 아래 예루살렘의 정치가 부침하는 기간(주전 729-686년)에 사역을 했다. 두 선지자 모두 유다와 그 지도자들에게 현실정책이 주는 만족을 거부하고, 여호와의 왕국을 바라보며 의와 정의와 성실을 행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대중의 기대(백성의 목소리)는 낙관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생활태도를 장려하였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유다와 함께 행하신다는 약속을 환영하면서 이사야와 미가의 신탁을 선택하여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께 복종을 요구하는 선지자들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왕과 성전이 결코 침해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지켜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과 예루살렘의불가침성과 하나님께서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영원성, 즉 시온신학에 사로잡혀 있었다.

3. B.C 7세기의 예언자들: 나훔, 예레미야, 스바냐, 하박국

  유다의 실용주의적 생활 방식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주전 696-642년)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그의 현실정책의 실행은 유다를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만들었다. 그의 비루한 정부가 55년 동안 다스리고 지나간 후에 유다에는 시내산이나 시온 전통의 독특한 특징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처음에 스바냐와 예레미야는 느낫세의 손자 요시야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들을 기쁨으로 증언하였다. 그러나 요시야(주전 640-609년)의 개혁은(주전 622년) 외적이었고 단명하였다. 스바냐는 요시야의 다스리던 때에 사역을 했다(습 1:1). 요시야는 3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아마도 스바냐의 활동 시기는 적어도 주전 621년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이방의 제단들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주전 621년에 요시야 왕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 아마도 스바냐는 나훔과 예레미야와 더불어 요시야로 하여금 개혁을 감행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요시야 사후(주전 609년) 유다의 정세는 보다 분명히 현실정책을 추구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앗시리아의 멸망은 고대 근동의 형세를 바꾸었다. 나훔이 예언한대로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파괴되고, 앗시리아 제국은 주전 605년에 멸망하였다. 나훔은 그의 사역 시기에 대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역 시기는 대체로 (나훔 3:8)에서 나타난 것처럼 애굽의 테베가 멸망하던 해(주전 663년)와, 니느웨가 멸망한 때(주전 612년) 사이였다. 그의 예언서의 주제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의 예언은 미느웨가 멸망하기 수년 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사역을 시작한 것은 주전 630년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70년간은 바벨론이 세력 구조를 지배하였다(렘 29:10). 바벨론의 성공은 처음에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되었다(사 10:5-19).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바벨론 역시 유다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인 것을 선포하였다.

  하박국은 그의 예언 시기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합 1:5-6)에서 바벨론의 침공을 예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아직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그가 적어도 느브갓네살이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한 주전 605년 이전에 예언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마도 그가 사역한 시기는 요시야의 통치가 끝나던 주전 609년부터 여호야김이 다스리던 때까지 일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에 있어서의 예언자들의 집단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중에서 7세기 전반에 활동한 예언자는 한 명도 없으며, 모두 7세기 후반에 활동하였다. 하박국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침공을 내다보며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이 유다를 징벌하기 위해 사악한 나라를 사용할 수 있는 지를 물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이 그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며, 의인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왕국의 영광스러운 건립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함을 확신시켰다.

  예레미야 역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였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중대한 위기에 봉착했던 때에 하나님의 대언자로 일했다. 예레미야는 그의 사역을 시작한 때가 요시야 왕 13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시야는 주전 640년에 다스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요시야 왕 13년은 주전 627년이 된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포로로 잡혀간 이후까지 사역했기 때문에, 그는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기야 시대와, 에루살렘 성이 멸망한 후에 그 곳에 남아 있던 백성들이 그를 강제로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간 시기까지 예언 활동을 했다(렘 43:1-7). 그는 애굽으로 내려간 백성들에 대해서도 예언했는데(렘 43:8-44:30), 그가 죽을 때까지의 기간에 한 사역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것은 주전 580년이기 때문에, 그가 주전 627년부터 580년까지 약 47년 동안 예언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그 도시와 성전과 다윗 계열의 왕이 바벨론에 굴복당할 것을 선언했다. 그는 70년 간의 바벨론의 통치가 끝난 후(렘 29:10), 하나님이 회복과 언약과 용서와 성전과 메시야가 의로 다스리는 새 시대를 열 것을 선포하였다(30:5-33:26).

4. 포로기 중의 예언자들: 다니엘과 에스겔

  포로기는 황폐한 시대였던 동시에 회복의 시대였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성전의 황폐,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 약속의 땅으로부터 백성들의 분리, 다윗 왕조의 제거를 의미하였다. 포로기는 또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건한 남은 자들에게 일체감을 가져다 주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회복의 영에 의해 영적인 변형이 이루어지는 시대를 열었다.  그 변형은 여호와와 정경적인 계시와 그의 심판의 지혜에 새롭게 충성할 것을 다지고, 완전한 회복을 새로이 갈망하는 데서 입증되었다.

  이 과도기에 하나님은 그의 특별한 종을 세웠다. 다니엘은 예언자로 부름을 받지 않고 바벨론 궁전에서 행정가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예언적 환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는 예언자에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다. 다니엘이 활동한 기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다. 그는 그의 세 친구인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 함께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3년(단 1:1), 즉 주전 605년 여름(여호야김 통치는 주전 605년 10월에 끝났다)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그는 고레스가 주전 539년에 바벨론을 함락한 후까지, 그리고 적어도 고레스 3년까지(단 10;1) 활동했다. 따라서 그는 바벨론에서 66년동안 활동했다. 그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약 20년 전에 망명하며 바벨론이 몰락할 때까지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으로 바벨론의 고관으로 있었다. 그는 외국의 왕들에게 영감 어린 조언을 주고,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증언했으며,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의 왕국이 승리를 거부며 전진할 것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왕국 환상으로 그는 구속사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보다 넓은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현실 정책이나 백성의 소리가 주는 덫에 빠지지 않았고, 바벨론의 도덕 체계에 만족하지도 않았다. 다니엘은 그의 동시대인들보다 단연 뛰어났으며,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사랑으로 그 명성을 떨쳤다. 이 충성스러운 종은 하나님의 왕국을 열망하였던 성실한 사람이었다.

  에스겔은 주전 597년에 포로로 잡혀갔는데(겔 33:21, 40:1, 왕하 24:11-16), 이 때는 여호야김이 바벨론으로 잡혀간 때였다. 그는 적어도 포로로 잡혀간 지 27년이 되는 주전 571년까지 활동을 계속했는데(겔 29:17), 이 기간 중에는 느부갓네살이 계속해서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살았지만 다니엘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다. 다니엘이 왕궁에서 사역을 했다면,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 중에서 예언자로 활동했다.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부름받은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작은 규모의 포로인 집단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한 것을 설명하였다. 그는 또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성별되고 성령에 의해 새 민족으로 변화되고, 그의 백성 가운데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리는 회복의 시대에 대해 예고했다. 이 선지자들은 심판과 회복에 있어 여호와의 위대한 행위를 말하면서, 여호와와 그의 약속들을 모세 해석에만 국한시켰던 전통적인 신학의 경계를 넓혀나갔다. 그들은 그 약속들의 전통적인 개념을 타파하고, 그것들을 더욱 웅장하고 경이로운 것으로 제시하였다. 그들은 여호와가 언약과 약속에 신실하시며, 성령이 새 시대, 즉 영적인 변형이 이루어지는 새 언약의 시대를 열 것을 선포하였다.

5. 포로 후의 예언자들: 학개, 스가랴, 말라기

  포로후기(주전 538년)의 복된 소식은 언약을 갱신하고 약속을 성취하는 여호와의 위대한 사랑에 있었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들과 함께 거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보호하였던 것이다. 제사와 희생과 성전 예배와 제사장직과 명목상의 다윗 왕조(스룹바벨)가 포로 후기에 회복되었다. 학개와 스가랴가 사역하였던 포로 후기의 상황은 포로 전기 선지자들의 상황과 판이하게 달랐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은 후에 나온 그들은 하나님이 다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복된 소식으로 하나님과의 백성으로 격려하였다. 그들은 만약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직 그의 왕국을 열심히 구하기만 한다면, 약속들이 성취되는 훨씬 더 위대한 시대가 올 것을 약속하며 그들을 독려하였다.

 5-1. 성취의 시대

  분명히 새 언약의 시대는 이미 포로후기에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였고, 성령이 권능으로 임재했으며, 성전이 복구되었다. 다윗의 자손은 스룹바벨은 메시아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상징이었다. 비록 포로 후기 선지자들이 왕(스룹바벨)과 제사장(여호수아)의 신정 상 지위의 연속성을 확인하였으나, 그들은 역시 성령의 권능으로 주 하나님을 섬기도록 개개인을 초청하기도 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과 더불어 포로 후기 선지자들은 신정의 쇄신을 위해 견고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 신정은 확연하게 성전, 하나님의 법, 성령의 역사, 그리고 세상적 관습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정화하는 데 관련된 것들이었다. 포로 후기의 백성들은 성도는 아니었으나, 그들은 선지자들과 신정 지도자들이 주는 도전에 반응하였다. 선지자들의 저서와(학개, 스가랴, 말라기, 요엘) 역대기와 에스라-느헤미야서가 포로후기 하나님 백성의 급격한 변화를 잘 증언해 준다.

  스가랴는 모두 그들의 예언이 시작된 때가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학, 1:1, 슥 1:1)이었다. 그러나 학개는 그 해에만 계시를 받고 예언한 반면, 스기랴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들의 예언의 주제는 예루살렘 성전 재건의 필요성이었다. 백성들은 제 1차 포로 귀환이 있었던 주전 538년,537년에 성전 건축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성전은 기초만 놓여진 채로 16-17년 동안 방치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은 주변의 백성들에게 조롱을 당했다. 그러나 마침내 학개와 스가는 주전 520년에 백성들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용기를 주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사역은 곧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중단했던 성전 공사를 다시 재개했으며, 마침내 주전 515년에 성전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말라기의 연대를 추정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그의 사역의 시기가 학개와 스가랴 이후인 것은 분명하다. 그가 사역하던 때에는 바사의 총독이 예루살렘을 다스리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말 1:8). 그는 성전에서 종교적 제의들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말하는데(말 1:7-10, 3:8), 이는 당시에 성전이 이미 재건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또한 백성들이 범한 죄를 책망했는데, 그가 열거한 죄의 내용들은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열거한 내용과 비슷하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에스라와 느헤미야 당시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을 보면, 그는 에스라와 느헤미야서가 기록된 직후에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그의 활동 시기는 주전 5세기 말로 추정된다.

 5-2. 소망의 시대

  비록 포로후기 공동체가 일부 약속들의 실현을 체험했을지라도 실제 성취는 지연되었다. 백성들은 성취를 향한 진전이 더딘 것에 실망하였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웅대한 회복에 대한 그의 약속을 분명히 지키는 것을 믿도록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선지자들은 또 백성들 편에서 그 성취를 서두르도록 권면하기도 했다. 그들은 남은 자들을 자극하여 하나님과 반문화 건설에 보다 큰 사랑과 열심을 쏟도록 하였다. 그들은 또 경건한 자들이 실제적인 소망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은 예언의 말과 성취 사이의 부조화를 처음으로 취급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에 대한 약속의 성취가 점진적이며, 하나님은 자유하시고, 인간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그들은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지키나, 그의 약속을 성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자유로우신 것을 밝혔다. 포로 후기 선지자들은 내적으로 배교와 외적으로 이 세상 왕국들의 박해와 저항을 받으며, 구원이 임할 것을 지적함으로써, 구속의 진전을 보다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확인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의 성도들에게 그의 왕국의 기쁨과 메시아 시대와 새 창조로 보답할 것을 소망하며, 끝까지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경건한 자들을 격려하였다.

 5-3. 소리의 종교

  그 후에 나타난 계시 종교의 타락을 선지자들과 경건한 남은 자들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 포로후기 공동체 역시 포로 전기 공동체가 겪은 동일한 문제로 계속 고통을 당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과 인습으로 고착시켰다. 그들 역시 성취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잇따른 사건들로 좌절되자, 현실에 체념하기 시작했다. 계시에서 백성의 소리의 종교로 점차적인 전환은 우리 주님이 유대 지도자들에 의해 거부당한 이유를 설명해주며, 더 나아가 기독교 역사에 거듭거듭 되풀이하여 일어난 일들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근시안적인 환상과 인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한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영원한 것을 시간과 공간의 범주 안으로 몰아넣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성령과 보조는 맞추는 대신 현실정책과 백성의 소리의 길을 걸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과 다가올 구원을 늘 생생하게 소망하지는 못했다.

  예언서를 기록한 예언자들을 살펴볼 때에, 성경에 나열된 소선지자들의 순서는 그들이 활동한 시기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사역한 소선지자들은 모두 9세기나 8세기에 활동한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그리고 미가이다. 그 다음으로 사역한 소선지자들은 7세기에 활동한 나훔, 하박국, 그리고 스바냐가 있다. 예레미야는 재선지자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포로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학개와 스가랴와 말라기가 있다. 포로기에 활동했던 다니엘과 에스겔은 대선지자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처럼 성경에서 소선지자들이 등장하는 순서는 그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기억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다음 주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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