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October 23, 2018

요한 일서 3장 20절 해석

🎯요일 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개역한글)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개역개정)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책망하는데, 우리의 양심보다 크시며, 또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더 우리를 책망하시겠습니까?" (쉬운 성경)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우리가 양심을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공동번역)

"이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정죄할진대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니라.."(킹제임스 흠정역)

"whenever our hearts condemn us. For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s, and he knows everything. (NIV)

"For if our heart condemn us,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 and knoweth all things."(KJV)

📌요일 3장 주석: 예사랑 카페

본절에서 두 번 사용된 '호티'(* , 왜냐하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명사절을 이끄는 접속사(that)로 보고, 두번째 '호티'는 불필요한 반복으로 간주하여 생략한다. 이 해석은 20절 전체를 19절의 '페이소멘'(* , '확신케 하다') 이란 동사의 목적어로 본다(Bruce).

(2)혹자는 첫번째 '호티'를 '왜냐하면'으로 해석한다. 이 경우 19절의 동사 '페이소멘'(* , '안심시키다')의 목적어는 생략된 것으로 본다(AV).

(3)혹자는 첫번째 '호티'(* )를 '호'(* )와 '티'(* )로 분리시켜서 관계대명사 중성 명사로 보고, '에안'(* , '...이면')과 합쳐서 '...할 때마다'라는 의미로 본다.
이때 두번째 '호티'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왜냐하면'의 뜻이 된다(Stott, Smalley).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요한은 본서에서 서로 대조되는 구문을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1:9,10; 2:10,11; 3:8,9), 본절 역시 21절과 대립되는 구문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

본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묘사라고 주장한다(Alford,  Wohlenberg).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우리 자신도 우리 마음을 보시면 책망할 것이 너무 많을 것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2)혹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 
한 묘사라고 주장한다(Brooke, Luther). 이 견해에 따르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우리 마음을 책망할 때마다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문맥상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밥 어틀리 교수 (미국 동침례대학)

3:19-20 이 두절의 헬라어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혼동이 있다.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의 긍휼을 강조하는것이다. 이 문맥에서 두 번째 해석이 더 적합하다.

3:20-21 두 절 다 조건절의 제 3 유형이다.

3:20
신미국표준역(NASB)
뉴킹제임스역(NKJV)
신개정표준역(NRSV)
현대영어성경(TEV)
신예루살렘성경(NJB)

“무엇에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때마다”
“우리 양심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우리 느낌이 혹 우리를 책망하더라도”

모든 신자는 그들이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있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인해 속으로 슬픔을 경험하고 있다. 양심으로부터의 이러한 아픔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오거나(회개케 하기 위해) 또는 사탄으로부터 온다(자기 멸망이나 증거가 되지 못하는 삶을 가져 온다).

이것은 적절한 죄의식이면서 부적절한
죄의식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책을 읽음으로써(혹은 그의 사자들의 말을 들음으로써) 차이를 안다.

요한은 사랑의 기준에 의해 살고 있으면서 죄와 아직 씨름하고 있는 신자들을 위로하려고 한다(헌신과 간과).

요 12:40 의 특별제목인 마음을 보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참된 동기를 아신다(참조, 삼상 16:7; 왕상 8:39; 대상 28:9; 렘 17:10; 눅 16:15; 행 1:24; 롬 8:26, 27; 고전 4:4).

요한일서 3장 20절! 책망할 일이 있거든! 있더라도!

📌네이브 블로그

요한일서 3장입니다.

그런데 3장 20절에서 좀 중요한 번역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래 두 성경의 번역의 차이를 생각합니다.

(개역성경) 우리를 책망할 일이있거든

(개정성경) 우리를 책망할 일이있어도

<개역 성경>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요일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개정 성경>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한1서 3장 20절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 개정성경은 지난번 개역성경의 뜻과 반대로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무슨 사연이, 무슨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무슨 내용인지 요한일서 3장을 14절부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일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요일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요일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일서 3장은 지금 사랑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는 사람, 그렇지 않는 사람은 사망에 머물러 있는 사람...

사랑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죄책감을 생각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했음이 찔립니다!

내가 사랑하지 못하고 사는 것을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내 양심과 죄책감과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과 이에 대한 나의 태도를 고민합니다.

어떻게 지금 개역성경과 개정성경이 다른 것입니까?

<개역 성경>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요일3: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하지 못한 거짓과 위선의 죄를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책망하실 것이다! 책망받지 않도록 더 사랑하며 살아라! 

즉 개역성경에 따르면 우리도 솔직히 양심적으로 책망할 일이 내 자신에게 있음을 아는데, 솔직히 당신이 더 잘알지 않느냐!^^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말할 것도 없이 더 잘 알고 계실테니 책망받지 않도록 더 사랑하며 살라! 라고 이해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개정성경은 다릅니다. '도'를 집어넣었습니다.

<개정 성경>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간성의 약함-한계(사랑하지 못하는)까지도 다 알고 계시지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아시니까, (불쌍히 여기시고 용기를 주시고) 다시 사랑하게 하시고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무 죄책감에 빠지지 말아라!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망받을 일이 있긴 있어도, 그럴지라도, 그렇긴 해도- 로 이해되는 구절입니다.

즉 개정성경에 따르면

"우리 마음이 혹 우리 스스로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그 앞 19절로 돌아가 연결해보면 '그렇다할지라도' (즉, 어쩔수 없는 일이니까, 너무 죄책감에 사로 잡히지 말고, 흔들리지 말고 굳세게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자신을 믿고! 확신을 가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역성경이 강조하는 "있거든!" (있는데, 아주 많은데!)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왜 이런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온 것일까요?

헬라어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o{ti eja;n kataginwvskh/ hJmw'n hJ kardiva, o{ti meivzwn ejsti;n oJ qeo;" th'" kardiva" hJmw'n kai; ginwvskei pavnta.

헬라어 각 단어에 대한 영어 번역은 아래와 같습니다! (Darby)

20  ὅτι  that ἐὰν if καταγινώσκῃ should condemn [us] ἡμῶν our ἡ 
- καρδία heart ὅτι that μείζων greater than ἐστὶν is ὁ- Θεὸς God τῆς the καρδίας heart ἡμῶν of usκαὶ and γινώσκει he knows πάντα all things

여기에서의 해석문제는  ὅτι 호티 
that 을  어떤 맥락으로 해석!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일반적으로 ὅτι호티는  that , for , because , how that, how , since 등으로 해석됩니다.

KJV성경은 for로 번역했는데 for는 수많은 해석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NIV성경은 whenever로로 번역했고 다른 성경은 whatsoever로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Bible Hub에서는 위에 기록한대로 that if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ὅτι호티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서 내용도 정반대로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해석에 해석자의 신앙이 들어갑니다!

살아온 과거가 해석에 들어갑니다!

[KJV 성경] 개정성경과 같은 입장이라고 보입니다. 한다 할지라도~~

[1John3:19] And hereby we know that we are of the truth, and shall assure our hearts before him. [1John3:20] For if our heart condemn us,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 and knoweth all things.

[NIV 성경] 개정성경과 같은 입장~~ 언제든지 그럴 때에라도 
 [1John3:19] This then is how we know that we belong to the truth, and how we set our hearts at rest in his presence [1John3:20] whenever our hearts condemn us. For God is greater than our hearts, and he knows everything.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확실히 가책을 받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음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정 성경과 같은 입장입니다.

다른 성경은 개역성경처럼 내 양심도 나를 알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잘 알고 계시지 않겠느냐고 보는 입장입니다!

다른 성경버전들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표준새번역> 개정과 같은 입장

[요일3:19]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우리는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요일3:20] 우리가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 개정과 같은 입장

[요일3: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요일3:20] 우리가 양심을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현대어 성경> 개역과 같은 입장

[요일3:19] 우리가 진정으로 남을 사랑하고 행동으로 나타내 보인다면 우리는 하나님 편에서 있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일3:20] 우리도 죄를 저질렀을 때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스스로의 잘못을 아는데, 하물며 더없이 어지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잘못을 모르시겠습니까?

<쉬운 성경> 개정과 같은 입장

[요일3:19]  이렇게 행해야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요일3:20]  혹시 우리 마음에 가책을 받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참고가 된다면

19절에서 "굳세게 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페이소멘'  πείσομεν  즉 확신하다! will assure 라는 뜻입니다! 누가 뭐래도내 마음에 확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처럼 문장을 나누면 또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한가지,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하는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저는 이 기회에 그 본문들과 주석들을 새삼 다시 비교해보면서, 이 번역들에는 죄책감과 싸우는 내 자신에 대한 무겁고 진지한 고민들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 해석에 대한 깊은 기도와 기대와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나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도요한은 과연 어떤 의도였을까요? 

그는 사랑해야한다는 명제를 붙들고 사는 인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사도 요한의 일생에 있어서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았을까요? 시행착오를 경험할 때 어떻게 생각하고 기도했을까요? 사도요한의 생애를 생각합니다!

저는 어쩐지 사도요한이 개정의 뜻으로 말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간이란 완벽한 사람이 없으니까요!

믿음을 가진 사람도 그러니까요...

그렇다고 믿음을 포기하고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이 구절을 번역하면서 고민했을 모든 영혼들을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과연 이 부분에서 어떻게 반응하실지!

진정한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무엇일지,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고 우리도 고민하고 고민합니다!

내가 살아온 생애는 어떠하였으며,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사모해야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해야하는 것인지,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지...

얼마나,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요?

일생을 돌이켜보며 이 구절을 다시 읽습니다!

어떻게 해석하고 싶은 지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이어지는 요한복음 3:2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에 기도 응답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 아시는 주님 앞에 마음을 늘 맑게 지키고 가기를 원합니다.

[요일3: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요일3: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요일3: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라
[요일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

출처: 네이버 블로그:.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nem&logNo=220762819664&proxyReferer=&proxyReferer=http%3A%2F%2Fwww.google.com%2F

Monday, October 15, 2018

하나님께 실망했습니까?

💜하나님께 실망했습니까?
/ 어느 신앙 킬럼에서 펌...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로 유명해진 시인이 TV에 나와 인터뷰를 하면서 “사랑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그렇다”라고 했습니다. 어땠느냐고 기자가 질문하자 그녀는 “처절한 실망과 환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앞으로도 자신은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여러 번 결혼을 하고 수많은 남자와 스캔들을 일으킴으로서 60년대의 섹스 심벌이라고 알려진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짓드 바르도는 위의 시인보다 더 심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인간을 혐오합니다. 나는 인간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나가지도 않습니다. 나는 모든 것에 질려버렸습니다. 남자는 동물입니다. 동물들조차 그렇게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보다 동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극단적 동물애호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랑을 좇는 유명한 시인이나 배우만이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도 실망합니다. 제 친구는 조그만 사업을 하다가 그것이 제법 잘 되어 그 규모를 한창 벌여놓던 중 IMF 사태를 맞았습니다. 대출이 끊기고 자금 회수가 시작되고 모든 것을 빼앗긴 그는 빚더미에 앉아버렸습니다. 와중에 그의 아내마저도 그를 떠났습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 깊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실망과는 거리가 멀 사람으로 여겨지는 목회자들도 실망합니다. 미국의 통계이지만 8명 중 1명의 목사가 목사직을 그만 둔다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목회자들 가운데도 “전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열정과 소명을 갖고 시작했는데 깊은 실망이 그들을 도중하차시킨 것입니다.

실망은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한 번도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가볍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 실망의 깊이가 너무 깊고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우리는 그냥 주저앉아 버립니다. 더 이상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되고, 믿음을 떠나게 되고, 소중히 여기던 이상이나 꿈을 버리게 되고, 심지어는 삶을 포기하기까지 합니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실망 가운데 가장 치명적일 수 있는 실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실망일 것입니다. 물론 드러내놓고 자신이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특별히 보수적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의 경우에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예수님을 믿은 지 거의 27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누군가가 “나는 하나님께 정말 실망했습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경우를 거의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께 실망한 사람이 제 주변에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 이를테면 교회나 사람들이나 환경을 탓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고 실질적으로 신앙을 포기한 채 사는 사람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필립 얀시는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Disappointment with God)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2장에 보면 휘튼 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인 리처드라는 신학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욥기에 대한 글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인 얀시에게 한번 읽어봐 달라고 원고를 보내게 됩니다. 비록 공부하는 과정에 있었던 신학생이었지만 그의 글은 비범한 통찰력과 깊이가 있었고 따라서 얀시는 그에게 기쁘게 추천사를 써주기로 약속합니다. 리처드는 그러나 자신의 글이 책으로 출판되기 얼마 전 얀시에게 전화를 걸어 할 말이 있다면서 만나자고 합니다.

뜨겁고 뿌연 햇살이 아파트 건물의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어느 날 얀시의 집에서 그를 만난 리처드는 자기가 쓴 글의 내용을 이제는 더 이상 믿지 않는다면서 말을 시작합니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을 어렵게 만들었는지를 통렬히 말했습니다.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위해 말씀을 살펴보며 열심히 기도하였지만 자신이 한 모든 중요한 결정들은 결국 잘못된 결정이 되었고 취업의 기회들은 그를 비켜갔으며 자신의 영적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약혼녀에게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파혼 당했고 게다가 신체적인 어려움까지 그를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저녁, 한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그는 그 예배에서 나온 피상적인 간증과 성도들의 반응에 거의 환멸을 느끼고 돌아와 그날 자정 무렵, 마침내 하나님께 최후통첩성의 기도를 합니다. 새벽 4시가 되기까지 꼬박 4시간동안이나 마룻바닥에 엎드려서 그는 만약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계신다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어떤 징조를 주시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그의 절박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나님은 아무런 반응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성경과 다른 기독교 관련서적들을 가지고 내려가 아파트 뒷마당에 설치된 바비큐용 그릴에 그것들을 올려놓고 기름을 부은 후 불을 붙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배신감과 깊은 실망을 그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한 것입니다.

이 신학생의 행동은 “충격적”이라는 형용사가 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과격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하나님께 대한 실망감을 놀랠 만큼 강한 톤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봅니다. 잘 알다시피 예레미야는 자신의 십대 시절 거의 반강제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위기의 때에 그를 부르시면서 당신의 인도하심과 보호와 악한 자들로부터의 구원을 약속해주셨으나 그는 계속해서 조롱과 적대감과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그를 대적하는 악인들과 거짓선지자들은 오히려 번성하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다가 그는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와 관련된 그 모든 비극적 상황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불평합니다. “주님 주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께 속았습니다. 주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렘 20:7, 새번역). 같은 성경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여름날 목마른 사람들과 동물들을 속이는 마른 시내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그것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실망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분명히 충족되지 못한 기대와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의 약속들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나의 만족을 충족하기 위한 기대로 바꾸어 놓고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기대처럼 작용하지 않을 때, 또는 내가 기대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행동하시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영어로 실망을 뜻하는 단어인 disappointment는 not as appointed, 즉 “정해진 대로가 아닌”에서 유래했다는데 그 말은 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는 이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기 스승의 십자가 죽음에 깊이 실망한 나머지 부활하신 예수께서 옆에 왔는데도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조차 못합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실망이 사람들의 영적 비전을 가려놓는다”라고 말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죠. 그들은 자기들에게 다가와 대화에 끼어든 예수님께 최근에 일어났던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분이라 믿었고 그분이 일으키실 개벽을 기대했습니다. 로마의 억압에서 자유를 찾아주고 가난에서 자기들을 해방시켜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로 예수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기는커녕 손도 한번 써보지 못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의 손에 무력하게 죽어갔습니다. 그것도 가장 흉악한 죄인들이 당하는 수치스런 십자가의 형벌을 당했습니다.

‘이 무슨 패배이며 이 무슨 수치인가?’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고 자기들의 팔자를 펴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따랐는데 이 모든 기대가 산산조각이 났고 예수는 그냥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처럼 깊이 실망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기대를 점검해보십시오.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릅니까?

예수 믿으면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분을 따른다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실망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 믿고 교회에 나온다면 당신 또한 실망할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약속들이 나에게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며 믿는다면 더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무슨 거래를 하듯이 내가 이만큼 시간을 들여 섬기니 하나님도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내가 생각하는 때에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실망하며 배반감을 느낄 것입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기」라는 책에서 우리가 “번영의 신학”을 거부할 만큼 신학적으로 세련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건강과 돈과 성공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따르는데 대한 투자의 보상으로, 직접적으로 손에 잡히고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배당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기대가 적절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약속을 해주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장미로 장식된 침대를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뭔가 특별한 경험으로 점철된 인생이나 “끝내주는 삶”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기대하라고 말씀합니다(딤후 3:12). 물론 이 말은 경건한 자가 전 생애에 걸쳐 언제나 핍박을 당할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또는 모든 경건한 자가 동일한 종류나 강도의 핍박을 당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에게 핍박이나 어려움이 닥치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핍박이 경건한 자의 삶을 묘사하는 모든 것은 아닙니다. 핍박과 동시에 우리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삶의 고통과 문제와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분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그분의 형상에 합당하도록 차츰 차츰 빚어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손길을 언제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은 우리의 오해와 원망과 토라짐을 감내하시며 “거친 사랑”을 우리에게 행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의 영광스런 나라에 들어가 이 땅에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과는 가히 비교도 되지 않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기대를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십니까?

정말 무슨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시나요? 당신이 원하는 것은 참으로 무엇입니까?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미물을 사랑하사 우리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인한 사형틀이라는 로마의 십자가에 달리셨던 바로 그분께서 “너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따르는 길에서 고난과 어려움과 문제와 상처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분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감사하게도 예수님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그분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군왕이나 영웅이나 “스타”가 흉내 낼 수 없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부활하셨고 자기를 따르는 모든 자들을 위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가 쾌적한 유럽식 빌라와 웰빙 라이프스타일과 상류사회 문화로 치장된 “좋은 삶”을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부활과 영화(glorification)와 최후승리의 약속이 남아있습니다.

C. S. 루이스가 자신의 판타지소설 「나니아 나라 이야기」(Chronicles of Nania) 마지막 부분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누구도 읽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모든 챕터가 그 이전의 챕터보다 훨씬 더 나아질 위대한 이야기”의 삶을 주님의 나라에서 그분과 더불어 살게 될 것입니다.

기대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우리 것이 된 찬란한 미래는 당신의 모든 상상력을 다 동원해서 크게 기대해도 좋습니다. 그 기대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장차 올 현실은 그것을 초라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께 실망하셨습니까?

십자가를 보십시오. 거기 달려 온 몸이 찢기고 물과 피를 흘리신 나사렛 예수를 주목하여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온몸으로 외치는 사랑의 절규를 들어보십시오. 그것이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하나님께 실망하셨습니까?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의 영광과 능력과 위엄을 겸손히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온몸으로 선포하시는 승리의 함성을 들어보십시오. 그것이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Monday, October 1, 2018

회심과 회개

1. 회심과 회개의 구분

먼저 성경이 말하는 회개(悔改, Repentance)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회심(回心, Conversion)과의 차이를 구분해야 합니다.

회개와 회심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누리는 구원(救援, Salvation, redemption, deliverance)을 제공하는 뿌리입니다.

보통 구원은 크게, 칭의(稱義, Justification)의 구원,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구원, 그리고 영화(榮化, glorification)의 구원으로 구별합니다.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2. 칭의의 구원과 회심

로마서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이신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in Christ)'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으로 구원를 얻는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행위나 공로가 칭의의 구원에 개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칭의'는 법정 용어로서 한자로 부를 칭과 의로울 의를 사용하여 흔히 '의롭게 됨'이라고 이해되지만, 더 정확한 성경적인 의미는 '의롭다고 부름 혹은 불리워짐'입니다.

칭의의 구원은 불신자가 성령의 은혜로 마음을 돌이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옛 사람을 버리고 전인격적인 변화를 받아, 예수님을 믿어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칭의의 구원에는 아래와 같은 좀 복잡한 절차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죄인(불신자)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창세전에 먼저 선택하시어 불러주시고(소명), 거듭나게 하시고(중생), 죄인 임을 깊이 깨달아 마음을 돌이키게 하시고(회심),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고(믿음), 이에 따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며(연합), 이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부르시고(칭의), 자녀로 삼아서(양자), 하늘 나라 백성(성도)이 되게 하십니다.

칭의의 구원에서 마음을 전적으로 돌이키는 것 곧 '회심'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회심은 성령께서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음을 인정하여, 전인격이 죄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하도록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심은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게 될 때에, 진심으로 죄를 누우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기로 결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회심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마귀에게서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한 사람이 소속되었던 신분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회심의 주체가 누구인가?

칭의의 구원을 얻게 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은 자난 2천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산앙(학)의 논쟁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섭리)만이 칭의의 구원을 주실 수 있다는 칼빈주의, 그리고 복음을 듣는 인간이 자유 의지를 통해 결단해야만 칭의의 구원를 받을 수 있다는 알미니우스주의로 나뉘어 집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 혹은 신앙(Reformed theology or belief)은, 철저하게 칭의의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성령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불순종으로 전이된 원죄 아래에 있는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부패한 영과 몸을 가지게 되었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결코 이를 수 없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앙은, 성령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찾아 오셔서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실 때에,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로 돌이킬려는 마음 곧 회심으로 반응하게 하게 되기에,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게 하는 칭의의 구원은,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인간은,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 오셔서 회심하게 도와주시지 않으시면,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가 없기에, 개혁주의 신앙은 철저하게 칭의의 구원에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을 인정하는, 칼빈주의의 견해을 따라 갑니다.

이것이 세상의 다른 종교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새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신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한 그 어떤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찾아 오셔서 계시하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믿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4. 칭의의 구원과 회심은 단회적인 사건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칭의의 구원은 단회적(일회적) 사건이기에, 또한 앞에서 말씀드린 칭의의 구원에 이르는 여정(과정, process)도, 구원을 받는 자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한 번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회심 또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에 일어나는 오직 한 번의 단회적인 사건임을 꼭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일단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탯줄을 끊고 태어나면, 완전한 인격체를 가진 한 사람으로 인정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다시 칭의의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전심으로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면, 성령께서 내주하시고 동행하사며, 하나님을 만나는 그날까지 끝까지 함께 하시며 도우시고 인도해 주셔서, 영화의 구원에 이르도록 지켜주십니다.

5. 성화의 구원

일단 회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면, 다음 단계의 구원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만나고 깨달으며, 점점 죄를 멀리하고, 조금씩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과정를 겪게 되는데, 보통 이것을 '성화의 구원(redemption of sanct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성화는 새로 태어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인격이 닮아서, 거룩해 져가는 모든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가 처음엔 어머니의 젖을 먹으면서, 세월과 함께 천천히 몸이 자라고 생각이 성숙해져서 성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성경은 왜 성도에게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성화의 구원'을 또 이루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칭의의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를 요구합니다. 비록 죄인이 성령님의 은혜로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지만, 여전히 원죄로 인해 타락한 마음의 상태 곧 죄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칭의의 구원이 불완전한 구원이가하고 묻게 됩니다.

칭의의 구원은 죄인에서 의인으로, 혹은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신분적 변화 곧 존재론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칭의는 그 단어의 의미에 담겨있는 그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죄가 없다고 여기시고 의롭게 불러주시는 것이지, 실재로 구원받은 성도의 모든 죄를 제거되어 깨끗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님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기에 그의 십자가 보혈이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죄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지만, 죄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또다른 별명이 '용서받은 죄인(forgiven sinner)'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자녀로 태어날 때 곧 칭의의 구원을 받을 때에, 모든 죄가 완전히 한 번에 제거 되었다면, 죄를 짓지 않으며 살아야 하거나, 죄를 짓고 싶어도 지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칭의의 구원을 받은 후에도 바울의 고백처럼, 여전히 죄는 우리 마음에 있어서 왕 노릇하며 우리를 범죄하게 합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깊은 고민, 곧 성화의 구원을 이루라고 재촉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요구와, 이를 거부하고 옛 모습으로 되돌아 갈려는 죄된 본성과의 갈등으로 영적 싸움을 겪게 됩니다.

6. 성화의 구원과 회개

성화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온전히 '회개(repentance)'하는 것입니다.

죄에는 원죄(origin sin)와 자범죄(actual sin)가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전이된 원죄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범죄를 짓게하고, 그 결과로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칭의의 구원이 원죄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면, 성화의 구원은 자범죄로 부터의 벗어남을 말합니다. 회심이 칭의의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돌이킴이라면, 회개는 성화을 이루게 하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크게 보면 회심 안에 회개와 믿음이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매일 삶 속에서 짓는 죄에 대한 후회, 안타까움, 좌절, 자책, 하나님께 대한 죄송한 마음을 포함하여, 다시 짓지 않아야 겠다는 결단으로까지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매일 삶 속에서 범하는 자범죄를 벗어나기 위해서 애써는, 반복적(repetitive)이고 지속적인(continuous) 의지로서, 오직 성도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은 회심이 칭의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일생에 단 한 번 일어나는 것과 대조됩니다.

따라서 회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는 성도가, 자원하여 행하는 자범죄에 대한 고백과 돌이킴입니다. 성도는 회개를 통하여 죄를 점점 멀리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됩니다.

7. 칭의의 구원과 성화의 구원은 결국 하나

먼저 성화의 구원은 칭의의 구원에 기초하고 있으며, 성화는 일평생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점진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단번에 주어지는 칭의의 구원과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성화의 구원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이 함께 붙어있습니다. 바른 칭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으로, 죄에 민감해지며고 멀리하여, 천천히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만약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은 사람이, 아무런 죄책감없이 예전의 삶을 계속 유지한다면, 그것은 가짜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참된 칭의는 반드시 성화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은 칭의의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말씀이 진리로 와서 닿고 이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칭의의 구원 곧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태어 났기 때문입니다.

8. 성화의 구원은 완성될 수 있는가?

성도가 일평생 살면서 참된 회개를 통해서 성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한다면, 완전히 죄를 제거하고 성인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이것은 회개의 횟수와 정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첨예한 의견이 있는데, 절대 완전한 성화가 불가능하다는 주장과 회개를 통한 완전히 성화도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장로교 계열)는 전자를 지지하고, 반면에인간의 자유 의지에 초점을 맞추는 알미니우스주의(감리교 계열)는 후자를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칭의의 구원을 이룬 후에도 부패한 마음이 그대로 있기에, 완전한 성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회개를 통해 죄의 강도와 빈도를 줄이고 약하게 할 수는 있지만, 죄된 육신을 벗고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인격체가 되기까지, 이 땅에서 완전한 성화는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를 통한 성화가 부질없는 짓인가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참된 칭의의 구원은 반드시 진정한 성화의 구원으로 나아가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화를 성도가 의식적으로 이루고자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오셔서 함께 계시는 성령께서, 이미 성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성령께서 이끄시면 자신의 의지를 드려 반응하게 되고, 성화의 길을 자연스럽게 걷게 됩니다. 그랴서 일단 적은 순종으로 나아가면 더 큰 은혜가 임하게 되고, 이에 힘입어 더 나은 성화의 길을 걷게 될 때에, 다시 더 큰 은혜가 임하는 영적 선순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스스로의 의지를 드려서 꾸준히 성화되어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 행하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섬기고 교제해야 합니다.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갈때에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성화가 늦게 진행된 다고 해서 스스로 심한 자책감을 갖거나, 성화가 느리게 진행되는 약한 지체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화의 구원은 성도의 성격, 믿음의 색깔, 여건이나 환경, 받은 달란트, 성령의 은사 등에 따라서 모두 다르기에, 획일화하거나 계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의 믿음이 달랐고, 베드로와 바울의 믿음의 색깔과 순종이 같지 않았습니다. 다만 서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도록 기도해 주고 필요를 채워주고 섬길 때에, 함께 성화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고 확신합니다.

9. 그러면 성화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회개를 해야 하는가?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진솔한 회개가 필수적이라면, 어떻게 회개해야하는가하는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청교도 신앙을 계승한 18세기 스코틀랜드 존 콜쿤(John Colquhoun, 1748~1827)은, '참된 회개'라는 저서에서, 회개의 여섯 가지 실천 요소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냥 참조하시고 절대로 이대로 회개해야 한다고 부담을 갖지 마십시오. 그냥 회개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 혹은 태도라고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첫째, 참된 회개의 실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의롭다는 교만이 무너지는 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를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겸손함을 가진다.
자신이 얼마나 비열하고 가증하며 혐오스러울 정도로 죄를 사랑하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모든 면에서 의를 행하지 못하는 무능력자임을 절감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이다. 

둘째, 이어서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며 애통한다.

이 슬픔의 대상은 단지 자신이 죄로 인해 겪게 될 심판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교훈을 거스름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려 대적하며 커다란 죄를 하나님께 범했는지를 아프게 탄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못 박은 자이며, 자신의 심령 안에서 거룩한 양심을 일깨우던 성령 하나님을 근심케 한 자라는 사실 앞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울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통함으로 탄식한다. 

셋째,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해 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와 쓰라린 애통함은 모든 죄를 미워하고 혐오한다.

죄를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거스르는 극악한 것으로 여기며 이를 혐오하고 더럽고 가증한 것으로 여긴다.
죄를 범하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부패를 보고 분노하며 정죄한다. 곧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혐오하는 죄가 자신 안에 뿌리 깊게 있음을 탄식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상이, 마치 알몸이 백주에 드러나듯이, 낱낱이 드러남에 낯이 뜨듯하고 수치심을 피하지 못한다. 

다섯째, 이제 하나님 앞에서 백일하에 드러나는 자신의 죄과와 악함을 감히 감추려 시도하지 않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죄의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것은 하나님에게, 사람들에게 행한 것은 사람에게, 공적으로 지은 것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지은 것은 사적으로 행한다.
그리고 유의할 것은, 죄의 고백은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 죄의 시인이다. 

여섯째, 끝으로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회개를 잔정한 회개가 되게 하는 참된 본질이다. 왜 회개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인가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를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율법적 회개에 지나지 않는다.
정녕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알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은 자라면 그의 회개가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살펴서 그것에 감사의 심령으로 순종한다. 이 모든 일을 기쁨으로 신속하게 그리고 삶 전체 영역에 걸쳐서 행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9,10)

10. 회개와 징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죄된 본성이 살아있는 그대로 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뿐이기에, 성도는 모두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때문에 수시로 죄에 넘어지고 때로 알고도 짓습니다. 그럴 때마다 회개하면 됩니다. 또 성령이 내주하여서 죄에 대해서 매우 민감해지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죄까지도 대신 간구해주기도 합니다. 차츰 자범죄를 짓는 횟수는 줄게 되고, 정도는 약하게 됩니다. 조금씩 주님을 닮아 자라가면서, 작고 연역하지만 부분적으로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범죄를 온전히 회개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계속 짓는다면, 심판이 아닌 징계가 반드시 따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12:4,8)

만약 자범죄를 끝까지 자백 회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다”고 즉,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아직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혹시라도 자범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징계가 아닌 영원한 심판을 받는 것 아닌가 염려한다면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자범죄도 죄의 본성(하나님을 거역하는 습성)에서 기인되긴 했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본성을 죽이는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범죄를 지어도 반드시, 죄를 지을 때마다 당장이 아니라도 성령의 강권적 간섭으로 언젠가는 회개하게 됩니다.

비록 자범죄를 지었다고 해서 이미 거듭난 신자에게 심판은 절대로 임하지 않습니다. 회개해도 용서 받지 못하는 죄들이 있다고 가르치는 구교(카톨릭)의 가르침은 잘못된 진리입니다.

여기에서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이라는 좀 어려운 신학적용어가 등장합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성도의 견인 곧 바른 칭의의 구원은 반드시 성화와 영화의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한 번 성도는 영원한 성도입니다.

그래서 비록 성도가 잠시 실족하여 징계를 받더러도 이로 인해서 절망하거나, 칭의의 구원에서 끊어질까 불안해 하지 않어야 합니다. 오히려 징계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합니다.

다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순종으로 성화의 구원을 이루며, 하늘의 상급을 쌓는 것이 지혜로운 믿음입니다. 그리고 성도에게 주신 최고의 상급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복된 삶으로, 칭의의 구원을 기뻐하며, 성화의 구원에 매진하는 우리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