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1, 2016

일반적인 기도순서

*일반적인 기도순서

기도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찬양,
하나님께 받은바 은혜에 대한 감사,
죄를 자백,
타인이나 공동체를 위한 중보와
자신의 간구로 이루어진다.

1. 찬양(Adoration)과 감사(Thanksgiving)
 
▶기도의 시작은 항상 찬양과 감사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서 지나친 미사여구나 수식어는 필요하지 않다. 진실한 고백으로서의 찬양과 감사가 필요하다.

▶감사의 고백 : 내 삶 속에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드린다.

2. 자백 (Confession) - 죄의 용서

자백이란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고백(Profession)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죄를 인정(Admission)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백이라 함은 고백과 인정이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다. 

1) 자백은 "내가 범죄하였다는 것"을 시인함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2)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품고 기도하면 듣지 아니하신다.
 
3. 중보기도 (Intercession)

중보기도는 타인이나 공동체를 위하여 대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를 위한 기도,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전도 대상자들을 위한 기도,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 세계 복음화를 위한 기도 등
  
4. 간구 (Supplication)

간구는 우리 자신이 어떤 특별한 간청과 관심을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⑴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구하라. (마7:7-12)
⑵ 욕심이나 정욕을 품고 간구하면 듣지 아니하 신다.
(3)담대히 구하라

5.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 아멘!

기도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만물의 통치자이시고 주관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구할 때 응답받는 역사가 일어난다. 

▶아멘  ⑴ "소망"의 표현 (엡3:21, 계22:20)
               ⑵ "동의와 확신"의 표현 (신27:26,
               고후1:20)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 받는 자녀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란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와 대화하는데 어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기도를 어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아버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히4:14-16).

그러면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좀더 정확히 알기 위해 우리들이 기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공부해 봅시다.

1) 기도는 자기 혼자서 하는 참선이나 명상이 아닙니다. 또한 멀리 떨어진 분께 외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기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 나와 함께 계신 그 분께 드리는 것입니다.(골1:24-29)

그분은 우리 속에 함께 계십니다.(갈2:20) 구약에는 멀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지금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저 높은 보좌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만나러 오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악의 짐을 다 지시기 위해서 이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 속에 거하십니다.(고후13:5). 사실상 이것이 신약과 구약의 주된 차이점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엡3:14-21) 우리는 기도할 때 항상 이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2)기도는 나의 소원을 일방적으로 아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는데 있습니다(요15:7). 자녀들이 부모님께 무엇인가를 항상 요구하기 위해서만 대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그런 것들을 요구합니다. 자녀가 요구하기 때문에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들어주십니다. 요구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께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행해지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요구 때문에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때문에 요청합니다.

3)기도는 일이 아니라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그리스도인이 해야 될 일로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생활로서 주셨습니다. 특별한 모임이나 예배 때만 드리는 것은 일입니다. 하루 중 정해진 어떤 시간에만 기도하는 것은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활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기를 원하셨지(데살로니가5:17), 특별한 때만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과 나누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5:17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은 원래 원어의 의미로 “줄 기침 한다”는 뜻입니다. 기침은 내가 원할 때만, 그리고 정하진 시간에만 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시간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때나 어디서나 항상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자녀와 항상 대화해도 특별한때, 특별한 시간에 집중적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때때로 우리들은 집중적으로,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때에(예를 들어 수련회나 금식기도 등)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4)기도는 종교적인 말의 의미 없이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신 분입니다. 이미 그 분은 기도하기 전에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마6:7-8). 이 말은 기도를 한 번만 하고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반복하여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확실한 믿음은 우리의 기도를 계속적으로 반복하거나, 중언부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기도의 결과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들어주시든 안들어 주시든 모든 결정은 그분이 합니다. 다만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말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단지 믿음을 원하십니다. 믿음이 클수록 말은 줄어듭니다. 그러나 말이 줄어든다는 것이 기도의 횟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신앙 블로그에서...)

귀신 쫓고 표적이 나타나는데도 이단인가? / 최삼경 목사

귀신 쫓고 표적이 나타나는데도 이단인가?
/ 최삼경 목사 (교회와 신앙애서...)

Q: 성경에 보면 수많은 기적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우리 주변에도 기적을 행한다는 유명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귀신을 쫓아내고 표적이 나타나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단이 될 수 있습니까?

A: 이 문제는 넓게 보면 신비주의 문제입니다. 신비와 신앙은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신비를 부정하면 이성주의에 빠지게 되고, 신비만 좋아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신비주의는 이단의 온상이 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명확한 답을 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으로부터 그 답을 찾으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좋아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표적과 기사를 구하고, 그 표적과 기사만 나타나면 무조건 진리로 인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라고 했고, 표적을 행하시는 것 때문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요 12:18).

예수께서도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고 말씀하신 일도 있고, 바울도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고전 1:22) 말하였습니다.

성경은 표적과 기사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먼저 결론부터 내리자면,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다는 것과 이단이 되는 것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반대로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오히려 의심해 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먼저, 표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주님께서는 표적 중심의 신앙인을 책망하시고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번째로 기적을 행하신 가나의 혼인 집 사건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난 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는데 그 이유는 저들을 아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요 2:23-24). 그리고 예수님은 표적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비판하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마 12:39, 마 16:4)고 하였습니다.

왜 늘 기적을 쫓고 구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저들은 이 말씀 앞에서 깨달음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 기적만 좋아하고 기적을 구하는 사람들을 만나시면 같은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다음으로, 기적을 체험했다고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그리고 기적을 자신이 직접 체험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믿음이 아니며 또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실례를 각각 구약에서 하나 신약에서 하나를 들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구속사적 측면에서 계속 언급되는 사건이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넌 기적일 것입니다. 430년의 한많은 종살이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원수까지 자동적으로 갚는 순간입니다. 장정만 60만 명, 추산하여 200만 명의 아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고 그래서 바다를 육지처럼 건넜습니다. 그런데도 믿지 못할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이 있었다면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이렇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출 14:31). 분명히 믿었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진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5장의 사건에서도 알 수 있지만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까 생략하고 16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렇게 큰 기적을 체험하고 출애굽한 지 고작 2개월 15일만에 이들은 인간적으로도 할 수 없는 불신앙적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2-3).

무엇을 말해 줍니까? 기적이 바로 참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조금의 의리라도 있다면 2개월 15일만에 이렇게 불신앙적인 원망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서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공생에 중에 행하신 기적 중에 그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정만 5천 명, 모두 2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이 기적에 대하여 4복음서 모두 기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그 기적의 떡을 먹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예수님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다음날 가버나움에 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기적의 빵을 먹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시며(요 6:27-34),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적의 빵을 먹고 찾아온 그들인데 기적의 빵이신 주님 자신을 먹으라고 하니까 아무도 먹지 않겠다고 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는 쓸쓸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기적을 체험한 것과 믿음은 이렇게 다른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기적 때문에 자신을 쫓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많은 기적을 행하여 택한 자까지 미혹한다는 주님의 예언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질문을 해 보면 좀 쉬워질 것입니다. "성경에 '말세에 누가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알려면, 그가 기적과 표적을 행하는지 행하지 못하는지 살펴보고, 기적을 행하지 못하면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며 기적을 행하면 내 제자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런 곳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 적그리스도가 이적을 행하지 못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이적과 기사를 행할 것이고 그래서 택한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했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했습니다. 여기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는 말씀을 볼 때,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할 때 그 미혹성이 크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타종교에도 얼마든지 기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사이비 이단에게도 얼마든지 기적과 표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적과 기사를 본질적으로 부정하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성주의자가 되어 이단에 빠질 위험성이 더 커집니다.

결론적으로 믿음과 기적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7장에서 말세의 심판대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주님에게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한 말과 주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여기에서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들이 정말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들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까지 쫓아내고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귀신을 쫓아내고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대표적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오늘날 신비주의 계열의 이단들은 항상 자신들만이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것처럼 선전하고 그것으로 이단이 아닌 것처럼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을 수단적으로 이용은 하고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부정하지도 않고, 기적과 표적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는 믿음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른 믿음입니다.

가상칠언!

*가상칠언(架上七言)
Seven Words from the Cross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때 십자가에 메달려서 하신 일곱가지 말씀

제 1언의 말씀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Father, forgive them, for they do not know what they are doing

예수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입니다. 구약에는 아버지란 말이 없으나 예수님은 아버지라 부르시면서 우리에게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주기도문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은 사랑의 인격적 참여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게 될 때 내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제 2언의 말씀 :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I tell you the truth,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우리는 양쪽에 달린 두 강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리고서도 그 죄를 깨닫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림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39절)고 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진심이면 얼마나 다행이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에 보면 비방하였다고 했습니다. 객관적이요, 비판적이요, 야욕적인 말이었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현재도 십자가를 신앙적으로, 주관적으로, 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강도처럼 비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지금도 강도처럼 죽어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방하는 자가 많습니다.
고난과 십자가에서는 선한 말이 나오기 힘든 모양입니다만 중앙에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 알고 구세주임을 알았다면 구원을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강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3언의 말씀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Dear Woman, here is your son
    
세 번째 주님의 눈동자가 집중된 것은 여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신 곳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클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4언의 말씀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Eloi, Eloi, lama sabachthani?
My God, my God, why have you forsaken me?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심각한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세상에 대하여는 더 할 말씀이 없고 성경에 응하기 위한
말씀을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언의 말씀 :
내가 목마르다!(요19:28)
I am thirsty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 : 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6언의 말씀 :
다 이루었다!(요19:30)
It is finished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 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다섯 갈래의 가지가 있고 그 가지마다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또한,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그가 하실 일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7언의 말씀 :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으니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들은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해도 아버지 손에 맡기고 부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사순절 묵상 / 정용섭 목사

사순절 묵상 / 정용섭 목사

마 27:66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오늘이 내일 부활절을 하루 앞둔 사순절 마지막 날이다. 예수는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빌라도는 예수를 태형에 처하고 풀어줄 생각도 있었지만 대제사장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만약 빌라도가 자신의 처음 생각을 그대로 밀어붙였으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예수 스스로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지 않고 갈릴리 지역에 머물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면 어땠을까? 역사에서 모든 가정은 무의미하다. 예수는 결국 로마 형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아침 아홉 시에 십자가에 달려서 여섯 시간 동안 고통 받다가 오후 세 시에 숨을 거두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사형수의 시체는 상당한 기간 동안 십자가에 매달아 놓는다. 일벌백계의 의미다. 그런데 예수의 경우는 달랐다. 네 복음서가 예수 시체의 처리 과정을 똑같이 전한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이 장면에 등장한다. 마태복음 기자는 그가 부자였으며, 더 나가서 예수의 제자라고 했다. 그는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다. 상당한 위험을 감수한 행동이다.

요셉은 시체를 세마포로 싸서 자신의 가족 묘지에 안장한다. 금요일 오후 세 시에 숨을 거두었다면 시체를 처리할 시간이 촉박하다. 곧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체를 씻고 향유를 바르는 최소한의 절차도 생략한 채 세마포로 싸기만 했을 것이다. 마 27:61절에 따르면 그 장면을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가에서 보고 있었다.

제자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마태복음의 설명대로 요셉도 예수의 제자라고 한다면, 비록 열두 제자 명단에 들어오지는 못했지만, 다른 제자들과도 어느 정도 친분은 있었지 않겠는가. 유다는 자기의 행위를 뉘우치고 대제사장들과의 계약을 취소하려다가 거절당하자 자살했다고 한다(마 27:1-10). 베드로도 역시 예수와의 관계를 세 번에 걸쳐서 부인한 일로 인해서 자책에 빠졌을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제자들은 가까이 오지 못했다. 십자가 처형은 공개적으로 집행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가까이 올 수 있었는데 말이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 그 현장에 있었다고 전한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마 27:56).

이들 여자들 중의 두 사람은 예수의 시체가 안장되는 현장에까지 따라왔다. 제자들보다 낫다.

이렇게 하룻밤이 지났다. 토요일이다. 본격적인 안식일이다. 예수 제거에 성공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뭔가 불안했던 것 같다.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제안한다. 어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라는 자가 살아 있을 때 말하기를 자기가 죽은 다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큰 소리를, 헛소리지만, 쳤다. 혹시라도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빼돌리고 다시 살아났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복잡해질 터이니, 이를 사전 방지하기 위해서 무덤 경비를 좀더 철저하게 조치해 달라.

빌라도는 그렇지 않아도 예수 처형의 책임을 이스라엘에게 돌리면서도 마음 한편이 찜찜했었다.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당신들도 경비병들이 있으니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말을 돌렸다. 반쯤 허락을 받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부리고 있는 경비병들을 그곳에 배치하고 무덤의 돌문을 아예 봉인해버렸다. 자신들의 불안을 그런 식으로 처리하려고 했다. 완전범죄의 시도다. 참으로 꼼꼼한 수작이다. 이런 건 오히려 악의 허약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고난주간의 토요일은 예수가 무덤에 묻혀 있는 날이다. 실제로는 금요일부터 무덤에 묻혔으나 온전한 하루를 묻힌 날은 토요일이다. 악이 완전히 승리한 날이다. 하나님이 침묵한 날이다. 그러나 이런 날은 하루로 족하다. 날짜 숫자로만은 사흘로 충분하다. 아무리 경비병을 세우고 돌을 인봉한다고 해도 예수를 계속 무덤에 가둬둘 수는 없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막을 수는 없다. 하루 이틀 꽃샘추위가 찾아온다고 해서 봄을 막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예수가 무덤에 묻혀 있던, 즉 하나님이 침묵하는 듯이 보였던 토요일의 순간인지 모르겠다. 기독교인은 그런 순간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믿는다. 그리고 희망한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침묵의 순간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삼일만에 다시 살아 나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믿었던 여인들만이 그 십자가 처형의 현장을 지켰던 것처럼, 예수의 다시오심 곧 재림을 진실하게 믿고 기다리는 기독교인만이 현재의 모든 고난과 삶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다.

성령이 도우시기를!

부활의 의미 / 김신정 목사

*부활의 의미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에 있는 사건입니다.

첫째 부활사건의 의미를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표면적인 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 이것을 아주 분명하고 자세하게 이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활사건에서 가장 핵심이 되고 근본이 되는 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의심하고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부분을 아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죽음 사람이 삼일 후에 살아났다 즉 부활했다는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아주 신비로운 일이고 이것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신자와 불신자가 나눠질 정도로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이 부활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는 것에서부터 믿음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부활사건은 우연히 일어나거나 제자들에 의해서 조작된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었던 것이고 예수님께서도 누차 자신의 부활을 미리 예언하셨습니다.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부활절과 성탄절의 설명는 짧을수록 좋다. 사실에 대한 것이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죽은 자도 살리시고 산 자도 죽이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신앙의 첫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부활의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부활해서 지금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살아 계신 분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믿는 사람들이 죽은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르고 찬양하지만 그리고 기도하지만 그 예수님이 살아있는 예수님이 아니고 죽어 있는 예수님입니다.

살아 계셔서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간섭하시고 우리가 힘들 때 힘이 되시고, 우리의 일들 도와서 잘 할 수 있도록 살아서 역사 하시는 분임을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활의 의미는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단순히 우리 죄를 대신 해서 죽는 일만하신다면 부활의 사건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어린양을 통해서 속죄제사를 드릴때 그 어린양이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는 속해 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한다는 것을 보이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히 역전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가장 실패한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왔으나 그 세상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끌려가시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의 삶이 또한 예수님을 따라갈 것입니다. 우리의 이 세상의 삶이 거칠고 힘들고 많은 실패와 상처가 있고 그래서 피곤하고 고달프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하고 새로운 하늘과 새 땅 가운데서 살아갈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부활의 기쁨을 누리시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김신정 목사

창조와 부활 / Henry Morris

창조와 부활 (Creation and Resurrection)

죽음의 보편적 권세는 오직 인간의 죄로 인하여,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저주와 지배의 관점에서만이 설명이 가능하다 (창세기 3:17-19). 이 죽음의 보편적인 법을 인간에게 씌우신 이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그 분만이 그 법을 빼앗을 수도, 바꿀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한하였던 유일했던 육신의 부활은 그가 인간이었음과 동시에 하나님이셨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대하신 창조주께서 인간의 아들로 오셨음은, 그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죽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었기에 죽음이 그를 묶을 수 없었다!

창조주의 최초의 사역인 창조는 세계의 기초를 세움으로써 끝을 맺었다 (창세기 2:1-3; 히브리서 11:3). 창조의 사역은 애초부터 완벽하고 온전했다. 완성된 창조는 완벽했기 때문에, 덤으로 그 사역을 끝내기 위한 그 어떤 진화라는 허황된 과정 따위로부터의 도움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다.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그의 두 번째 사역인 속죄의 사역도 또한 완벽하고 온전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의 죄 값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시고 죽으시면서, 지옥 그 자체인 영혼의 죽음을 감당하신 후에 그는 승리를 외치셨던 것이다.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

그 분은 당신의 영을 놓아주어 그의 죽음이 육신의 죽음이었다는 확증을 세우신 가운데, 시신과 함께 무덤 속에 묻히도록 허락하셨다. 삼일 후 그가 육신으로 다시 돌아와 육신에 영광과 영원한 부활의 삶을 나타냈을 때, 그는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들 앞에, 당신 자신이 진정으로 창조주이심과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그리고 죽음은 영원히 그 근거를 잃어버렸음을 극명하게 알리셨던 것이다.

속죄의 값은 치러졌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로마서 8:21).

그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요한계시록 21:5) 그날까지,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한테, 용서와 구원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다짐하신 그 분의 약속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로마서 5:10).

/ Henry M. Mor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