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6, 2017

아사셀 염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 이상환 목사

🌻아사셀 염소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

/ 이상환 목사 (pen o f truth에서 펌...)

🔹문제 제기: 막 1:12~13 말씀을 보자.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검증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이 구절은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로써, 사탄의 참소로부터 죄인을 자유케하는 예수님의 사역이 담겨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 말씀은 이러한 감격적인 소식 대신 수 많은 물음표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왜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 것일까?”  “왜 예수님은 40일동안 광야에 계신 것일까?”  “왜 예수님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것일까?”  “왜 예수님은 들짐승과 함께 계신 것일까?”  “왜 천사들은 예수님을 수종든 것일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사탄의 우리를 향한 참소의 박멸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 16:7~10 말씀을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레위기의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16:7~10: 레위기 말씀을 보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하나님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하나님을 위하여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하나님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우리가 읽은 레 16:7~10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는 대속죄일에 일어나는 마지막 예식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대속죄일이 되면, 제사장은 크기와 모양새가 똑같은 두 마리의 흠없고 깨끗한 염소를 구한다.  그리고 제비를 뽑는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제비에 뽑힌 염소는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하여 그 목에다가 빨간 천을 두루고, “아사셀의 것”이라는 제비에 뽑힌 염소는 광야에 사는 아사셀을 위하여 구별하여 그 뿔에다가 빨간 천을 두른다.

🔹하나님의 것과 아사셀의 것

그런후 두 염소에다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전가한 후 죽인다.  헌데 두 염소를 죽이는 방법과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

1. 두 마리의 염소: 첫째 염소부터 보자.  제사장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한 첫째 염소의 각을 뜬후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고 그 피는 지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언약궤에 뿌린다. 그러면 지성소안에 하나님 쉐키나의 영광이 가득 차게되고, 이는 이스라엘의 죄가 속해져 하나님의 진노가 사라졌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이 첫 번째 염소의 죽음과 그 의미이다.  둘째 염소는 이와 사뭇 다르다.  제사장은 아사셀을 위하여 준비한 둘째 염소를 광야로 몰아내어 (1) 굶어 죽이거나, (2) 들짐승에게 찢겨 죽게한다.  그때 염소의 뿔에 달린 빨간 리본이 하얗게 변하게 되고, 이는 이스라엘을 향한 사탄의 참소가 더이상 합법적이지 못함을 상징한다.  바로 이것이 막 1:12~13의 그림자인 레 16:7~10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아사셀은 누구이고, 그에게 염소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를 위한 염소는 무엇을 나타내나?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을 풀 수 있는 열쇠이다.

2. 아사셀:  아사셀부터 알아보자.  아사셀(עֲזָאזֵל)이란 ‘쫓겨난 귀신,’ ‘추방당한 악령’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잘젤의 유음화어로써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모세 이전의 사람들이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일컫기 위해 사용했고, 유대인들도 사탄을 일컫기 위해 그들의 문헌에 사용했다.  아사셀이란 신학적 광야에 거주하는 사탄을 나타내는 것이다.

3. 염소를 보내는 이유:  그렇다면, 염소를 사탄에게 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사탄에게 염소를 바치기 위함이 절대 아니다.  사탄을 예배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참소자 사탄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전가받은 염소를 굶어 죽이거나 들짐슴을 통해 찢어 죽임으로써 그의 참소를 합법적으로 잠재우기 위함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이 증거하는 사탄의 일은 인간의 죄를 합법적으로 참소하는 것이다.  계 12:10을 보면 하나님께 우리를 밤낮 참소하는 사탄을 볼 수 있다.  스가랴 3:1을 보라.  더러운 죄의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사탄이 계속 참소한다.  바로 이것이 사탄의 일이다.  사탄은 밤낮 쉬지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참소했고, 백성들은 그로인한 영적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고통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죄는 물론 죄책감으로부터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사탄의 참소로부터 오는 죄책감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사셀 앞에서 굶겨 죽이거나 찢어 죽일 흠없고 깨끗한 염소를 제정하사, 그에게 이스라엘의 죄를 전가시키고 광야로 보내사 죽이심으로써 사탄의 참소를 온전히 막으셨던 것이다.

“사탄아 보라!  네가 밤낮으로 참소하던 이스라엘의 죄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쉬지않고 고발하던 이스라엘의 죄가 어디에 있느냐?  이 염소에게 있다.  이 염소가 어떻게 되었느냐?  이스라엘 백성의 죗값으로 이처럼 비참하게 죽었다.  너는 더이상 이스라엘을 참소할 수 없다.  내가 그 참소의 이유를 합법적으로 잠재웠기 때문이다.”

사탄은 더이상 이스라엘을 합법적으로 참소할 수 없다.  시도할 수도 없다.  그는 이스라엘이 지었던 과거의 죄를 입밖에 꺼낼 수도 없다.  왜?  죗값이 사탄의 눈앞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아사셀의 염소를 준비시킨 것이고, 해방의 증거로 염소의 뿔에 달린 빨간 천을 하얗게 바꾸신 것이다.

4. 아사셀의 염소, 예수: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가 남았다.  아사셀의 염소는 누구를 상징하나? 

그렇다.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광야에 나가사 사탄의 앞에서 찢겨 돌아가심으로써 인간을 향한 사탄의 참소를 합법적으로 온전히 잠재우실 아사셀의 염소라는 것이다! 

여기에 지혜가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어 속죄제로 죽은 첫째 염소는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사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우실 예수님을 상징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구별되어 광야에서 굶거나 찢겨 죽는 둘째 염소는 십자가에서 찢기사 사탄의 참소를 잠재우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인간의 죄를 전가받은 두 마리의 염소는 전부 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 누구도 인간의 죄를 대신 질 수 없다.  천사도, 사탄도, 인간들도 말이다!  몇몇의 사람들은 아사셀의 염소를 사탄으로 규정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사탄은 죄의 원인이 아니다.  촉매제일 뿐이다.  고로 인간의 죄를 사탄에게 전가시킬 수 없다.  사탄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럼으로 대속죄일날 인간의 죄를 전가받은 속죄 염소 두 마리는 이중적 대속의 의미를 갖고 돌아가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다.

얼마전 유대인들의 문헌을 읽다가 바리새 보수 학파인 샴마이와 바리새 개혁 학파인 힐렐의 뒤를 병합하여 이은 요하난 벤 자타이가 쓴 역사적 글을 접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유대인의 성전 역사를 반영하는 글로써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무엇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로부터 하나님께서 아사셀의 염소를 더이상 받지 않으셨다는 내용이다.  그 부분을 인용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기 40년 전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해]부터 [두 마리의 염소를 뽑을 때 사용된 ‘하나님의 것’이라는] 패가 대제사장의 오른손에 들려지지 않았고, [아사셀에게 보낸 염소의 뿔에 묶어놓은 빨간]띠가 흰색으로 바뀌지 않았다. [메노라의] 서쪽 등잔이 [온종일] 타지 않았으며, 지성소의 문은 자기 맘대로 열렸다…"

왜?  아사셀의 염소가 예표했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수치심을 다 안고 골고다 광야위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찢겨 돌아가셨기에, 이제는 그 염소가 필요 없게된지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제비가 대제사장의 오른손에 들리지 않게 된 것이다!  더이상 염소를 광야로 보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이상 또 다른 염소를 잡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히 7:27의 증언처럼 완벽한 희생제물이신 “[예수님께서]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기 때문에!  그래서 또 다른 희생 제물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  그 분 안에만 참된 속죄가 있고, 그 분 안에서만 사탄의 참소는 영원히 그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녹아있는 배경이다.

🔹모형론적 풀이: 이제 본문 12절을 보자.

1. 예수님을 몰아내신 성령님:  12절은 “성령이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헌데, 여기에 이상한 부분이 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몰아내셨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헬라어로 보면 성령님께서 능동자로 되어있고,예수님께서 수동자로 되어있다.  성령님께서 주체가 되어 예수님을 몰아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을 오해하지말라.  예수님께서 성령님께 억지로 떠밀렸다는 뜻이 아니다.  제사장이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보낸 것 처럼, 성령님께서 아사셀의 염소되신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셨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2. 광야에서 광야로…: 또 하나의 이상한 부분을 먼저 보자.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어디로 몰아내셨나?  “광야”로 몰아내셨다.  이상하지 않은가?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미 광야에 계셨다.  막 1:4을 보라.  침례 요한이 어디에 이르러?  “광야”에 이르러…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했고, 예수님께서는 그 광야로 나오사 침례를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시기전 이미 광야에 계셨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다른 광야로 가셨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거기에는 광야가 하나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  4절에 나오는 “광야”는 지리적 광야를 뜻하고, 12절에 나오는 “광야”는 신학적인 광야를 뜻한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지리적 광야에서 신학적인 광야로 몰아내신 것이다. 왜?  신학적 광야는 타락한 마귀 아사셀이 사는 지역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가가 표현하고자 한 대비이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타락한 천사 사탄을 만난다.

3. 사탄에게 시험을…: 또 하나의 궁금증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광야에 나가셨다는 것은 알겠는데, 시험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지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본문에 나오는 시험을 마태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3가지의 시험과 동일시 하기 때문에 답을 얻지 못한다. 이 시험은 다른 시험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마태와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3가지 시험은 예수님께서 40일을 굶으신 후에 받으신 시험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나에게 절하라!”  40일의 금식이 끝난 후에 찾아온 시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험은 예수님께서 40일을 굶으신 후에 받으신 시험이 아니라, 40일 동안 굶으시면서 받은 시험이다.  도대체 무슨 시험인가?  본문에 “시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페이라조(πειράζω)로써,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진지하게 분별하여 자질을 검증하다는 뜻이다.  즉 전지하지 못한 사탄은 정말 예수님께서 레 16이 예표하는 아사셀의 염소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몰랐기에 40일 동안이나 면밀히 조사하여 검증했다는 것이다.  왜?  그의 참소가 합법적으로 박멸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죄가 전혀 없으신 아사셀의 염소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탄도 합법적으로 그의 참소가 박멸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속죄제를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를 찾기 위해 40일 동안이나 샅샅히 뒤진 것이다.  헬라어 성경은 사탄이 4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예수님을 검증했다고 암시한다. 그만큼 집요하게 조사한 것이다.

4. 40일 동안: 그렇다면, 왜 40일인가? 유대인들에게 40이라는 숫자는 4라는 땅의 숫자와 10이라는 하늘의 숫자가 곱해진 것으로써 충분히 충만하다는 의미를 띄고 있다.  사탄은 예수님을 4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충분히 검토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40일이란 날짜는 인간이 밥을 먹지않고 견딜 수 있는 최대의 날수를 상징했다.  모세도 40일을 굶었다.  엘리야도 40일을 굶었다.  예수님도 40일을 굶으셨다.  마귀는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굶어 돌아가시기 일보직전까지 샅샅히 조사한 것이고, 결국 그분의 죄 없으심을 시인한 것이다.  이때부터 마귀의 태도는 돌변한다.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 마귀는 그분을 죄짓게하여 아사셀의 염소가 될 수 없도로 하기위해 시험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라!”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나에게 절하라!”  그러나 그의 수작은 수포로 돌아간다.

5. 들짐승과 함께: 마가는 여기에서 더 깊이 들어가 다른 복음서에는 찾을 수 없는 사건 하나를기록한다.  예수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들짐승이라는 단어는 표범, 쟈칼, 늑대, 여우, 곰따위를 나타내는 단어로써 광야에 나간 아사셀의 염소를 찢어 죽인 야생동물들을 나타낸다.  이는 예수님과 아사셀의 염소를 연결하기위한 마가의 의도이다! 그렇다!  (1)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 왜?  제사장이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몰아냈기 때문이다. (2) 예수님께서광야에 있는 사탄에게 보내지셨다.  왜?  둘째 염소가 아사셀에게 보내졌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금식하셨다.  왜?  아사셀의 염소가 광야에서 굶어 죽었다는 것을 상기키시기 위함이다.  (4) 예수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 아사셀의 염소가 들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처럼 십자가 위에서 찢겨 돌아가실 것을 택하사 사탄의 참소를 영원토록 박멸하신다.  바로 이러한 선전포고를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나가셨던 것이다.

6. 천사들의 수종: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다.  13절 끝자락을 보라.  무엇이보이는가?  천사들이 예수님을 수종든다.  “수종”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아코네오(διακονέω)는 음식을 가져다 주며 섬기다는 뜻으로써 미완료 제 2 용법인 기동의 미완료형으로 쓰였다.  이는 40일을 굶으시면서 검증받으시고, 또한 3가지의 시험을 승리로 끝내신 예수님께 천사들이 음식을 가져다 주면서 섬기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여기에도 신학적 지혜가 있다.  팔레스타인의 전쟁 문화를 보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 원수의 영토에서 음식을 먹으며 승리를 축하한다.  적진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자라난 시편기자도 23편에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차려 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즉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아사셀의 영토였던 광야에서 천사들의 수종을 받아 음식을 드심으로써 당신의 온전한 승리를 예표함과 동시에 선전포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마 12:43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라고 되어있는 것이다.  귀신이 물 없는 곳을 다니며 쉬기를 구하는데 쉴 곳을 얻지를 못한단다.  “물 없는 곳”이 어디인가?  이는 영적 광야를 뜻한다.  귀신들이 영적 광야를 돌아다니며 쉴 곳을 찾았지만 얻지 못했다.  왜?  광야는 귀신의 대장인 아사셀의 거주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왜?  예수님께서 광야를 정복하셨기 때문이다.  광야는 더이상 사탄의 거주 장소가 아니다.  광야는 예수님께서 정복하신 예수님의 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도 전에 모든 광야를 다 정복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신학적 복음이 들어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도 전에 패배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완전히 패배했다!  그는 첫 번째 아담을 넘어뜨렸던 것 처럼,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했지만,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보라!

(1) 아담은 죄 없이 사탄을 만났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사탄을 만났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2) 아담은 사탄이 찾아와서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사탄을 찾아가셔서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3) 아담은 낙원에서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4) 아담은 동산의 모든 과일을 실컷 먹으며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40일을 굶으시고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5) 아담은 돕는 배필과 함께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홀로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6) 아담은 모든 동물과 평화로울때 시험받았고, 예수님은 거친 야생 동물 속에서 시험받으셨다.  아담은 넘어졌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7) 시험에 넘어진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났지만, 시험에 이기신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을 떠나보내셨다.
(8) 아담은 사탄에게 참소받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참소를 박멸하셨다!
우리의 영원한 원수 참소자 사탄의 입을 영원히 막으시겠다는 예수님의 선전포고가 광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다.

🔹끝으로: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는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일을 완전히 확실하게 멸하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죄뿐만이 아니라 죄책감까지도 거두어 주셨다는것이다.  예수님께서 굳이 광야로 나가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곳에서 사탄에게 수모를 겪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40일 동안 굶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들짐승과 함께 계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골고다 광야에 세워진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고 찢겨 죽으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수치심과 죄책감까지도 거두시기 위함이다.  때문에 성경은 롬 8:1~2과 계 12:10~11에 증언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노라”

그렇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앖다!  참소함도 없다!  사탄은 더이상 우리를 정죄할 수도, 참소할 수도 없다!  예수님께서 광야를 정복하시고 그 광야에서 찢겨 돌아가심으로써 사탄의 입을 합법적으로 막아버리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물론 죄책감과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는 사탄의 참소까지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값을 다 지불해 주셨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서 자유하라!  그분의 보혈 안에서 자유하라!  그분의 십자가 아래서 자유하라!  이 광야에서 자유하라!

사탄의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히 박멸되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부여잡고 그 안에서 자유하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사 사탄을 완전히 심판하시는 그 날까지 이러한 진정한 자유가 우리안에 충만해 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Sunday, February 5, 2017

영생이란? (바이블 나라)

1. 문자적인 의미
  영생이란 단어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요한복음입니다. 헬라어로 "영생"은 "조에(life) 아이오니오스(eternal)"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만 이 말이 17회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조에"(생명)라는 말과 "아이오니오스"(영원한)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영생"이라는말은 문자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이것은 첫째로 시간적으로 "끝없이 지속되는 생명"을 의미하고, 2) 둘째로 질적으로 "인간의 삶과는 다른 신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말에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이란 의미와,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신적인 삶이란 의미를 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성경적인 의미

1) 구약에서
  원래 구약에서 "생명"이란 말은 "영원한 삶"이나 "죽은 후의 삶"보다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복지를 의미했습니다. 구약에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장수(시 시 91:16), 가족의 축복(전9:9), 번영(신 28:1-), 안전(신 8:1),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시 16:11, 신 8:3, 렘 2:13 등)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선물을 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에서 이러한 생명을 누리는 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릴 수 있었습니다(신 30:15-20).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불멸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축복은 죽음도 초월할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 26:19)"

  특히 (단 12:2)에서는 직접 "영생"이라는 단어가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영생"의 의미는 "죽은 자들이 부활 후에 경험하게 될 생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2) 공관복음에서
공관복음에서 "영생"의 의미는 주로 "내세에서 누릴 신적 생명이나 영적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헌신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영생"을 얻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0:30) 또한 주님은 장차 악인들은 "영벌"에 들어가고, 의인은 "영생"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25:46). 이와 같이 공관복음에서 "영생"은 이 세상이 아니라, 내세에서 누릴 생명과 축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3) 요한복음에서

가. 내세에서 누리는 영생
  요한복음에서도 "영생"의 의미는 공관복음처럼 "내세에서 누릴 영원한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나,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5).

나. 현실에서 누리는 영생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내세보다" "현재"에 누리는 축복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며, 그 축복을 주님 안에서 현실 속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자신에 세상에 오신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이 현실 속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주님은 세상에서 굶주리고 갈증을 느끼는 자들을 만족시켜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요 6:35). 이러한 생명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요 12:49-50).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산 떡"이며(요 6:51-), "생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요 4:10,14).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그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으며, 이로 인해 주님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요 5:26, 11:25). 이러한 점에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으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요 11:25-26, 14:6). 여기에서 주님은 주님을 믿는 자는 죽은 후에라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살아도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은 내세와 현실을 하나로 있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 영생의 본질: 하나님을 아는 지식
  또한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영생"을 가리켜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요 17:3). 여기에 "영생"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중보자이신 "아들"을 아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안다"는 말은 지식적인 앎을 넘어서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전인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서 누리는 축복에 있습니다. 이러한 영생의 축복은 이미 주님을 믿은 성도들에게 현실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죽음을 넘어서서 내세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신앙과 인격의 조화를 위하여 / 서정호 목사

🌻신앙과 인격의 조화를 위하여
/ 서정호 목사(서울 영암교회)

교회에서는 은혜로 버팁니다. 그러나 삶을 살다보면, 삶 속에서는 인격으로 버팁니다. 또한, 예배 때에는 영이 드러나지만,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육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교회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한결 같은 성도가 진짜 성도입니다.

은혜가 인격을 대신할 수 없을 때가 많고 인격이 은혜를 대신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는 영을 드러내고 생활 속에서는 육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인격과 은혜의 조화, 영과 육의 균형은 참으로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할 숙제입니다.

교회에서는 성령충만하던 사람도, 일상적인 삶을 살다보면 은혜가 바닥나고 육과 미숙한 인격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자신도 힘들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감정의 조절능력이 상실된 사람입니다.

은혜는 충전은 빨리 되지만 지속 시간이 지극히 짧습니다. 한 시간도 못 버티고 육이 드러나는 경우입니다.  한결같은 착함과 신실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복 주신다고 했습니다. 변화무쌍한 날씨가 아니라, 한결같은 봄날이 좋습니다.

일을 해보면 참으로 더 많이 함께 하고픈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일을 해보면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가 중요하지만 일을 해보면, 은혜를 담고 있는 그릇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은혜 없는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아무리 선하고 착해도 은혜 없는 착함은, 자기 의와 합리화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 없는 육도 문제이지만, 미숙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의 은혜는 더 큰 문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숙한 인격의 소유자라 함은, 이기적이며 신실치 못함을 말합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는 온 열성을 바쳐 주의 일에 힘쓰다가도, 기분이 나빠지면 교회조차 오기 싫어합니다. 반대로 일은 잘하는데, 은혜로 하지 않음으로 인정받으려 함도 위험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집사들을 세울 때 성령충만하고 착한 사람들을 세우라 했습니다. ‘성령충만으로’만은 안 됩니다. 착해야 합니다. 이 말은 인격과 은혜의 하모니를 말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을 때는 착함으로 버티고, 인격이 미숙할 때는 은혜로 버티면 됩니다. 은혜는 변합니다. 감정도 변합니다. 열정도 변합니다. 상황도 변합니다. 그러나 인격은 잘 안 변합니다. 그러므로 본성이 착한 사람들이 은혜 받으면 금상첨화입니다.

은혜 받을 때 충성하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은혜 없을 때도 충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았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바닥났을 때에도 감사하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 기도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하나도 없을 때 기도하러 교회 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게 이익이 될 때 열심을 내는 것,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손해가 날 때도 열심을 내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므로 성장이란, 모든 면에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의지의 어른, 감정 조절의 어른, 인내의 어른, 희생의 어른, 믿음의 어른...

누구나 신앙이 초보일 때와 인격이 미성숙할 때는 감정에 뿌리를 두고 삽니다. 기도도 봉사도 헌신도 감사도 아멘도..

그러나 신앙이 성숙하고 인격이 완숙해지면 말씀과 의지에 뿌리를 두고 삽니다. 뿐만 아니라 나보다 공동체를 생각합니다. 마음이 항상 한결같습니다.

주의 일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지와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과 함께 성숙한 인격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반죽될 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기차의 레일 같아서 하나라도 빠지면 기차가 전복하듯 우리의 삶도 신앙도 전복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거나 교회가 서로 성처를 주고 받으며 분열되는 이유는, 은혜의 부족이 아닙니다. 인격이 충실한 교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교인들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교인들 때문입니다. 애 같은 어른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은 주관적인 은혜를 성숙한 인격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말끝마다 은혜를 달고 사는데 성숙하지 못한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적이라는데 약속을 못 지키는 교인들로 인해 세상의 전도의 문은 점점 닫히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착하고 순한 교인들을 찾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사악하고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들을 물리치십니다. 그 마음이 언제나 그 마음인 사람을 찾으시고 계십니다.

순수함과 순박함이 무기입니다. 착함(심지가 견고함)이 성령충만을 담을 그릇입니다. 은혜가 좀 모자라도, 그리 성령충만하지 않아도 성숙한 인격으로 교회와 이웃과 교우들을 변함없이 섬겼으면 좋겠습니다.

한결같은 성품, 변함없는 마음, 흔들림 없는 믿음,
그것은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무장해야 할 첨단무기입니다. 착함과 믿음은 군인에게 있어서 포기할 수 없는 창과 칼입니다. 더 많이 착해 집시다.

목까지 차오르는 은혜를 더 많이 받읍시다. 은혜를 받지 말고 은혜에 잠겨 삽시다. 은혜로 옷을 입읍시다. 그리고 순둥이가 됩시다.

은혜는 많은데 인격은 미달이고, 인격은 훌륭한데 은혜가 바닥이면, 그것은 향기 없는 꽃이며, 열매 없는 나무 입니다. 거룩한 순둥이, 사도행전적 은혜파! 이 두 가지는 우리가 평생을 두고 꿈꾸어야할 신앙의 결정체입니다.

당신은 은혜로 삽니까? 아니면 인격으로 버팁니까?

아니면 둘 다 부족하여 죽을 지경입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른 장성한 용량의 어른이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아이 같은 어른으로 사는 것, 그것은 마귀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애들의 특징은 항상 징~징 거리는 것입니다. 잘 삐지는(상처)것이며,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잘 삐지고, 잘 참지를 못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어른 아이"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상처 받지 않았던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다면 당신은 진정 어른 신앙을 소유한 믿음의 부자일 것입니다.

🌻신앙은 인격이다 / 이종전 교수

신앙은 인격이다

-/ 이종전 교수 '신학 칼럼' (13)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목표는 단지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있지 않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요행을 위한 종교적 행위로 충족하는 것이 더더욱 아니다.만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목적을 위한 종교적 행위로 만족한다면 그의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필요나 욕구를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에 있어서 각 피조물에 부여하신 존재목적을 깨닫고 그것을 자신 안에 이루어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실은 다른 종교에서 보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데 고민이 있다. 기독교 신앙은 만물의 존재 목적을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 자체에서 찾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영원한 뜻 안에서 찾는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여전히 신앙의 목적을 자신과 현실에서 찾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한 확인이 없다면 기독교도 결코 주술신앙과 기복신앙의 한계를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는 신앙과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서 찾고, 그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 섭리, 능력을 구하여 이루어가는 삶이어야 한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한다면 ‘순종’과 ‘제사’의 관계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개인의 목적에 집착한 종교적 행위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배제한 형식적인 종교적 행위로서 ‘제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순종’을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종교적, 의식적 행위로서 제사는 아무리 화려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받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기뻐하시겠다는 ‘순종’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제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순종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그분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창조하신 분임을 믿으며, 특별히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순종은 전적으로 창조자로서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목적을 기뻐함으로 그 목적을 자기 안에 이루어 가는 모습이다.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순종이며, 그 순종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단지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에 국한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일에 있어서 목적을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서 찾으며 그것과 일치시키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의 목적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일치시키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인간의 삶의 목적을 일치시키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이상적인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통해서 자기 안에 형성시켜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담 이후에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 안에 회복시키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 회복을 위한 과정이 인생의 여정이고 신앙생활의 과정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자기 안에 채워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분명히 해야 하고,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왜 ‘제사’를 기뻐하지 않고 ‘순종’을 기뻐하시겠다고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야 할 일이다. 정작 찾아야 할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현재적 필요를 채우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신앙의 본질을 왜곡시킨다면 그것은 참된 기독교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현실은 아쉽게도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요행을 찾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창족목적에 대한 고백(깨달음)과 함께 그 목적이 자신 안에서 확인될 수 있도록 일치시키는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고, 그분의 뜻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것을 신앙인격이라는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신앙에 의해서 자신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형성하도록 하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이 수고가 곧 신앙으로 사는 여정을 통해서 자기 안에 만들어가야 하는 신앙과 인생의 수업이다. 이 수업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 깨닫는 과정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화(自己化)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 안에 담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앙은 곧 인격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허락받은 유일한 피조물인 인간이 아담 이후에 상실하고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 안에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아를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신앙이 좋다는 말과 그 사람의 인격이 일치될 것이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종전 교수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