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ugust 27, 2018

성경적인 영성이란?

성경적인 영성이란?

/ 이상준 목사

앞으로 성령님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한다. 목차는 정해놓지 않았다. 그냥 생각나는 주제들을 정리해서 글을 올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영성을 바르게 정의를 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21세기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할 세 단어(영역)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1) 영성, (2) 치유, (3) 가정이다.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은 원래부터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적인 목마름과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성에 대한 시도는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교회는 그 가운데서 성경적인 영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하고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영성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 내려야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영역 중에 하나가 영성 분야일 것이다. 최근에 어느 글을 보니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적인 단어는 ‘경건'(예를 들어 딤후 4:8)이라는 것이다. 영성이란 단어는 일반 종교에서는 사용하는 단어로서 동양의 신비종교나 자기초월, 뉴에이지(New-Age)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 영성운동을 하는 여러 리더들이 모두 그런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라는고 비난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보면 전혀 틀린 주장만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단어를 바르게 정의하면 구지 영성과 경건을 구분해서 영성운동을 하는 지도자들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영성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정의(사전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신령스러운 풍성이나 성질’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풀어서 정의하면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나 정신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이것을 브래들리 한센은 “영성이란 인간의 삶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확신에 따라서 사는 한 개인이나 한 공동체의 삶의 스타일이다”라고 말하였다(안영권, ‘빛과 소금’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1993. 10). 즉 영성이란 ‘삶의 스타일’이며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모든 종교가 나름의 교리와 주장하는 것들이 있다. 그 가르침과 교리(정신)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영성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모든 종교에 영성이 존재한다. 불교의 영성이 있고, 이슬람의 영성이 있고, 기독교의 영성이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불교의 영성이고, 코란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이슬람의 영성인 것이다.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이라는 것이다. 영성이란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 영성이 존재한다. 어쩌면 불교, 이슬람, 기독교 중에 가장 영성훈련을 잘 받고, 영성이 가장 깊은 종교는 이슬람일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코란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전 세계가 혼란스럽게 되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그렇다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영성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일반 종교와 기독교 영성의 차이점을 알지 못하면 큰 혼란에 빠지고, 여러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단어를 정의하는 차원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거기엔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일반 종교의 영성에는 ‘관계'(relationship)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에는 ‘관계’가 존재한다. 아니 기독교 영성에서 ‘관계’를 빼 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영성이 아니다. 그것은 일반 종교의 영성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영성(하나님과의 관계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행할려고 노력하는)을 ‘율법주의’라고 부른다. 율법주의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열심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성경적인 영성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교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다루었던 영성의 정의를 다시 ‘관계’라는 측면에서 정리해 보자. 불교의 영성은 석가모니(불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그럼 거기에 석가모니와 교제 한다는 개념이 있을까? 단연코 없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무덤이 존재한다. 그의 많은 가르침은 기록되어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교제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또한 이슬람은 어떠한가? 그들은 유일신을 믿는다. 그들이 믿는 ‘알라’는 전능한 신이면서 유일신이다. 하지만 코란을 통해서 알라와 교제한다거나 알라와 대화한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제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 종교의 영성에는 반드시 자기 초월적 개념이 등장해야 한다. 인간의 영역 안에는 신이 존재하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는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자기 초월적 경험을 위해서 많은 종교들이 소위 ‘영성훈련’을 실시한다. 그들의 영성 훈련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고, 신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불교적 영성 혹은 가톨릭적 영성이라고 부른다. 불교적 영성은 자기 학대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고, 가톨릭적 영성은 영적 체험이나 경험을 통해서 신처럼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 성경적인 영성은 그런 개념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자기 초월을 통해서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성육신, 요 1:14).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을  ‘임마누엘'(마 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고 부르신다. 또한 신구약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고 강림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성막이고 성전인 것이다.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는 분이시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의 목적이 성령님의 내주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할 때 실제적으로 우리 내면에 임재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몸을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하신다(고전 3:16, 6:19).

이것을 우리는 십자가 영성, 복음 중심적인 영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며, 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존재를 만들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십자가에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느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할 필요가 없다. 더 많은 도를 닦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불교적 영성이 존재하고, 가톨릭적 영성이 마치 성경적인 영성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필요가 없다. 아니 만들수도 없다. 그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 타락의 원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왜 타락하게 되었는가? 창세기 3장 5절을 보면, 뱀이 하나님이 만드시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새번역)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그 유혹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는 그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곧 인간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시도한 것이 바로 타락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를 빈번하게 시도한다. 타종교의 영성도 그러하다. 모양은 다르지만 모든 종교의 영성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영성은 핵심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영성의 본질이고 핵심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온전한 순종은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성경적인 영성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체험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것에 있지 않다.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분과 교제함으로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빼놓고 영성을 논할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 영성이 아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서 나누기 전에 영성을 먼저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잘못된 영성의 이해 때문에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나 은사가 많이 오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영성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을 먼저 바르게 정리하지 않으면 아무리 성령님에 대해서 가르친다해도 잘못된 토양 위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꼴이 되는 것이다. 나무가 아무리 좋은 품종이라도 해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질문: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답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는 구속의 날을 위해 우리를 인치시는 성령을 받게 됩니다(엡 1:13, 4:30).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요 16:13)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진리의 일부는 하나님의 일들을 취하여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삶에 적용이 되면 신자는 성령께서 자신을 다스리도록 허락하는 선택을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거듭난 신자가 자신의 삶을 성령의 인도와 다스림에 맡기는 정도에 근거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자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이 구절의 시제는 진행형이기 때문에 “계속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의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단지 성령님께 통치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술에 취하면 그는 혀가 꼬부라진 말을 하거나, 불안정하게 걷거나, 의사 결정의 장애라는 어떤 특징들을 드러냅니다.

술 취한 사람의 특징 때문에 그가 술에 취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거듭난 신자는 성령의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그 특성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묘사된 소위 “성령의 열매”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신자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에 의해 맺혀지는 진정한 기독교 영성입니다.

이러한 성품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거듭난 신자는 건전한 말과 일관된 영적인 행보를 보이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의사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삶에서 성령의 사역에 복종함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상적인 관계에서 ‘알며 성장하기’ 위해 내리는 선택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신자로서 우리가 자백을 통해(요일 1:9) 성령님과의 분명한 소통을 유지하기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성령을 근심하게 할 때(엡 4:30; 요일 1:5-8)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을 쌓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에 복종할 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가로막히지 않습니다(살전 5:19).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육체와 죄에 의해 가로막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영과의 교제에 대한 의식입니다. 거듭난 신가가 성령의 사역에 지속적으로 계속 순종하기를 기도하며 선택할 때,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성장합니다.

출처: Gotquestions.org

Saturday, August 25, 2018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 정용섭 목사

(히 5:1-10)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제가 어릴 때 종종 제사에 참석한 기억이 있습니다. 큰집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제사가 없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초등학교 1학년 이후로 제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제삿날만이 아니라 추석과 설날에도 제사를 드리니까 일 년에 세 번 제사가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제사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겁니다. 믿지 않는 시댁의 제사 때문에 믿는 며느리가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사 풍습을 종교적으로 너무 예민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상에 대한 추모이자 후손들의 친목 정도로 여기면 됩니다.

속죄 제사

구약성경에도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우리의 제사는 조상을 기리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순전히 이런 일을 위한 용도로 건축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전문적으로 제사 업무를 감당하던 이들이 제사장들입니다. 제사도 여러 종류입니다. 하루에 두 번씩 드리는 제사도 있고,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제사도 있고, 수시로 드리는 제사, 또는 일 년에 한번 드리는 제사도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하던 제사장들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왕의 권력보다 더 컸습니다. 이스라엘이 제국에 의해서 지배당하거나, 왕정이 해체되었을 때도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는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이 지배하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가장 강력한 법적 지위를 가진 기구는 90여명 정도로 구성된 산헤드린이었습니다. 여기에 제사장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의 최고위직을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대략 로마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 제사장이고, 교황이 대제사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자신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어야만 자신들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복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바르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죄는 생명을 약화, 또는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은 이 죄 문제를 집요하고 신랄하게 문제 삼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도 같은 의미입니다. 시기심으로 동생 아벨을 돌로 죽인 가인은 하나님에 의해 공동체에서 추방당합니다. 노아 홍수 사건도 역시 죄에 깊이 연루된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죄를 행하지 말아야 하는데, 실제의 삶에서 죄는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속죄, 즉 죄의 용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는 속죄를 핵심으로 합니다. 제사장은 이런 종교 의식을 주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번제나 속죄제 등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고대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오늘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속죄 종교 의식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사는 게 분명해보입니다. 죄, 또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면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자기가 잘못한 상대에게 말로 용서를 구할 수도 있고, 때로는 국가에 벌금을 물 수도 있고,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실정법을 기준으로만 죄 문제를 처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법이 인간 삶에서 벌어지는 잘잘못을 다 해결해준다면 다행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이 오히려 불법과 죄를 합법화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돈만 많으면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서 처벌을 면하기도 하고, 능력이 없으면 재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의 의식에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속죄 개념이 들어갈 틈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기독교인들은 매사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모든 불행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십일조 헌금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다거나, 새벽기도회에 한번 빠졌기 때문에 교통사고도 나고, 아이들이 병들기도 한다고 여깁니다.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죄를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기도를 드릴 때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았다는 안도감을 얻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방식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세리와 부자의 비유에서(눅 18:9-14)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한 세리의 믿음을 그런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런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그 비유는 자책하는 세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로운 척하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전문 종교인들을 향한 충고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제사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다고 생각한 데에는 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을 했을 경우에 율법에 따라서 몇 배로 변상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의 것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변상 받은 사람도 단순히 재물만이 아니라 정신으로 얼마나 큰 후유증을 겪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죄와 죄의 결과에는 인간이 다 추적할 수 없는 까마득한 깊이와 넓이가 놓여있는 게 분명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죄의 존재론적 깊이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진지한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로 그들은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일 년에 한번 대(大)속죄일에는 이스라엘 모든 민족들이 알지 못하고 지은 죄까지 용서를 바라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대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의 전통

초기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제사제도가 종교적으로 아무리 심층적인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의해서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단 한 번에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반복해서 잡아 바치는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 제물은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제사장들처럼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게 아니라 멜기세덱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합니다(히 5:10).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7장에도 나옵니다. 7장이 설명한 사건의 배경은 창 14:17절 이하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살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에게서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전쟁 노획물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아브라함보다 멜기세덱이 종교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시 110:4절을 근거로 예수님이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 레위 혈통을 따르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보다 더 우월하고 참된 대제사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런 주장이 정당할까요? 그의 설명을 일단 더 들어봅시다. 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이 ‘온전하게’ 되셨다는 사실이 그가 영원하고 참된 대제사장이라는 진술의 근거입니다. 공동번역은 완전하게 되셨다고 번역했으며, 루터는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또는 신(神)이니까 완전한 게 당연하다고 말입니다. 문장 구조를 잘 보십시오. 처음부터 완전하다는 게 아니라 완전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아직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배가 고프고, 울고, 웃고, 실망하고, 주변 사람들로 인해서 힘들어 했습니다. 공생애 초기에 마귀에게서 세 번이나 시험을 당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여전히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이 처음에는 불완전했다가 나중에 완전해졌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선재적으로(요 1:1)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불완전이라는 말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하게 되셨다는 말은 영광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공생애 중에는 영광이 비밀한 방식으로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이제 부활 승천 이후로는 실질적으로 영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부활 승천으로 예수님은 세상에 살면서 겪어야만 했을 인간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시어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신 겁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 사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예수님이 부활 승천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완전하게 되었다는 진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을 알고 설명할 수 있으면 기독교 교리의 모든 것을 아는 거와 같습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의 고위 당국자들과 로마 총독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뒤에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떤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궁극적인 생명의 현실성(reality)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종말에 완성될 절대적인 생명을 비밀스럽게 미리 경험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미리 경험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그 현상을 부활이라고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벌어진 일들과 예수님의 말씀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한걸음 더 나가서 종말에 완성될 생명의 완성도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운명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식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에,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되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원

지금까지의 설명을 다시 정리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완전하게 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9절에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했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로 바꿔 불러도 좋습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입니다.

이런 기독교 교리를 이미 아는 분들도 있고, 지금 새롭게 알게 된 분들도 있고,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들어서 아는 것에 머물면 곤란합니다.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영혼에 공명되고, 그래서 우리가 그 사실에 몰입할 수 있어야만 실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학 개론서나 소설이나 시를 읽고 이해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는 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 느낌이고 경험이지 단순한 정보와 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예수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경험이 우리에게 실제로 어떻게 주어질까요?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는 실제로 있을까요? 이게 무얼 가리키는지 잘 알지도 못한 채 습관적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순박한 신앙이 나쁜 거는 아닙니다만 왜 아멘이라고 대답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관한 저의 설명을 조금 더 듣고 싶으신가요?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예수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졌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의’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옳다.’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순전한 자유와 기쁨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식까지 다 극복되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이는 마치 수능 시험의 결과에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8: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망 자체입니다. 이 욕망으로 인해서 사람은 평생 자기를 자기가 성취해야 한다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걸 삶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자기실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은 우리는 이제 죄와 죽음의 논리에서 벗어난 존재, 즉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예수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여러분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다른 근원이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졌다는 사실을 단순히 도덕성이나 출세나 평판처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어떤 것쯤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의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듯이 하나님만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의가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적인 성취로도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노벨상을 타거나, 목사와 선교사로 사는 것도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 필요할 뿐이지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맥락을 바탕에 놓고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와 동일한 믿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아멘.

대제사장과 대속죄일

대제사장이 1년에 하루, 대속죄일 7월(종교력) 10일에 드리는 제사는 이스라엘 전체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지성소에 들어가 드리는 제사로, 모든 제사의 최고 절정이다.

이날 대제사장은 자신과 권속을 위한 속죄제(레 16:11-14), 백성을 위한 속죄제(레 16:15-19), 그리고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속죄하였다(레 16:23-24).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은 에봇이나 판결 흉패, 에봇 받침 겉옷을 입지 않고 오직 성결을 상징하는 세마포 옷을 입었다(레 16:4).

 
대제사장은 대속죄일 하루 동안 총 네 번에 걸쳐 지성소를 출입하며 제사를 드리는데, 그 절차와 의미는 다음과 같다.

01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채우고, 두 손에는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서 지성소에 들어간다(레 16:12).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움으로 대제사장 자신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레 16:13). 분향하는 연기로 속죄소를 가리운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하여 볼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02

분향을 하고 지성소에서 나온 대제사장이,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들어가 먼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다음으로 속죄소 앞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일곱 번 뿌렸다(레 16:14).

이는 대제사장 자신과 권속의 속죄를 위해 피를 뿌리는 것이다(레 16:6, 11). 이것은 하나님께서 피를 보시고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간구하는 의미이며, 일곱 번 피를 뿌린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예표한다(히 7:27, 9:12, 10:10).

 03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두 번째 행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피를 뿌렸다(레 16:15).

이는 백성들의 속죄를 위해 피를 뿌리는 것이다. 이 염소는 속죄제를 위해 취하였던 수염소 두 마리 중에서, 광야에 보내질 한 마리 염소(아사셀 염소; 레 16:21-22) 외에 다른 한 마리의 염소를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염소의 피를 뿌리고 지성소에서 나온 다음, 여호와 앞 단으로 나와서 단을 위하여 속죄하는데, 이를 위하여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취하여 단 귀퉁이 네 뿔에 바르고 그 위에 피를 일곱 번 뿌려 단을 성결케 한다(레 16:18-19).

지성소와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 대제사장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광야로 내보낸다(레 16:20-21).

그리고 회막으로 들어가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평상시 직무를 행할 때 입는 화려한 복장, 레 8:7-9)을 입고 나온다.

그리고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르게 된다(레 16:24-25).

지성소에서 이루어지는 속죄는 죄인 된 인간의 근본적인 죄를 속하는 것을, 번제의 속죄는 근본적인 죄를 속한 후에 생기는 더러움을 씻어 주는 속죄를 나타낸다.

 04

대제사장은 마지막으로 다시 지성소에 들어가 향로와 불을 제거하고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제사장이 세 번 지성소에 들어갔다 나오는 모든 과정을 거쳐 속죄를 위한 번제까지 마친 후에, 다시 새로운 흰 세마포 옷(새 세마포)으로 갈아입고 손과 발을 씻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로와 불을 제거하였다(Yoma 5:1, 8:4, The Book of Our Heritage).

 *  *  *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대속죄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기 때문이다(히 9:12, 10:10-14).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기심으로(마 27:51, 히 10:20)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해결되었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헐리고, 이제는 참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누구나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롬 5:1-11, 엡 2:14-18, 딤전 2:5-6, 히 10:19-20).

출처 박윤식 목사, "맹세 언약의 영원한 대제사장" (휘선, 2011

대제사장

대제사장

1.제사장의 자격(레 21:10-24)

1.제사장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지파만이 할 수 있었다(신 21:5). 제사장을 일정 수준 유지하기 위해서 나이의 제한을 조정하였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30세였다. 요셉이 총리가 되었을 때도 30세였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도 30세였다.
그래도 수가 모자랄 경우 나실제사장으로 보충하였다. 나실제사장은 지파에 관계없이 나실 인으로 서원을 한 사람들이었다(민수기 6장).


2.제사장은 육체에 흠이 없어야 한다(레 21:18-21).


3.제사장은 정결해야 한다(레 21:1-3). 대제사장의 경우에는 부모의 시체까지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다(레 21:11).


2. 대제사장의 임무

1.번제단에서 속죄(레 16:18-19)
2.물두명에서 수족을 닦는 일(출 30:19-21)
3.떡상에 떡을 진설하는 일(출 25:30)
4.등대의 불을 간검하는 일(출 27:20-21)
5.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일(출 30:7-8)
6.지성소에서 속죄하는 일(히 9:7)


지성소에 들어가는 규칙


1)짐승의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레 16:11)
2)향연으로 속죄소가 보이지 않도록 가려야 한다(레 16:13)
3)속죄소에 피를 뿌린다(레 16:14-15).


7.판결하는 일(신 21:5)
8.축복하는 일(신 6:22-27)


제사장의 세가지 축복


1)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한다.
2)여호와는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
3)여호와는 네게 평강 주시기를 원한다.


9.성막일에 총지휘하는 일
성막에 봉사한 레위인은 30세에서 50세까지의 남자로 모두 8.580명이었다(민 4:46-47).


게르손 자손:성막, 장막, 덮개, 회막, 문장, 뜰 휘장(민 3:21-26)


고핫 자손:증거궤, 떡상, 등대, 번제단(민 3:27-32)


므라리 자손:널판, 띠, 기둥받침, 말둑, 줄(민 3:33-37)

10.율법을 가르치는 일

3.대제사장의 예복(출 28:1-43)

1.속옷(출 28:39)

대제사장이 가장 먼저 입는 옷으로 가는 베실로 짠 세마포 옷이다. 가는 베실은 성결을 의미한다.

2.에봇 받침 겉옷(출 28:31-34)

성결한 속옷 위에 입는 믿음과 구원의 옷입니다.

에봇받침:청색(생명을 의미)-제사장의 최대 목표는 생명구원이다.


금방울:믿음을 의미-제사장은 움직일 때마다 금방울 소리가 나야 한다.
가는 곳마다 믿음(금)으로 구원받음(청색)을 증거하여야 한다.


석류(금방울과 금방울 사이에 석류를 수놓음):
석류는 씨를 붉은 즙(피)로 감싸고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의 모 습과 같다. 성도들(석류)은 믿음(금방울)과 믿음(금방울) 사이에 있어야 한다.


3.에봇(출 28:6)

대제사장이 세번째 입는 옷으로, 금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만들었다.

4.두 견대(출 28:7-14)

대제사장의 어깨에는 두 견대가 있는데, 호마노 보석 위에 이스라엘 12 아들들의 이름을 여섯씩 새겼다.

우편 견대:르우벤, 레위, 단, 시므온, 유다, 납달리


좌편 견대:아셀, 스불론, 베냐민, 갓, 잇사갈, 요셉


5.흉패(출 28:15-30)

에봇짜는 법과 동일하게 만들었다(15절).
크기는 가로 세로 각 한뼘식 정사각형으로 두겹으로 만들었다(16절).

보석에는 모두 금테를 두르고,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겼다. 성막을 둘러싸고 있는 진의 배치와 같이 동, 남, 서, 북의 순서로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겼다.

첫째줄(동):홍보석(유다), 황옥(잇사갈), 녹주옥(스불론)


둘째줄(남):석류석(르우벤), 남보석(시므온), 홍마노(갓)


셋째줄(서):호박(에브라임), 백마노(므낫세), 자수정(베냐민)


넷째줄(북):녹보석(단), 호마노(아셀), 벽옥(납달리)


우림과 둠밈을 흉패 안에 넣어 가슴 위에 있게 하였다. 우림은 빛이라는 뜻으로 흰 돌이 다. 둠밈은 완전이라는 뜻으로 검은 돌이다.

제사장의 판결 원칙

1)생명을 주는 방향으로 판결해야 한다(청색실).
2)왕권으로 선포해야 한다(자색실).
3)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심정으로 판결해야 한다(홍색실).
4)믿음으로 판단해야 한다(금실).
5)백성들을 보석과도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한다(보석에 새긴 이름).
6)공의로 판단해야 한다(정사각형의 판결흉패)
7)하나님 앞에서 판단해야 한다.
8)사랑으로 판결해야 한다(판결흉패를 가슴에 담)

6.띠(출 28:4-5)

봉사(눅 17:8)


힘(사 22:21)


준비자세(눅 12:35; 출 12:11)


7.관(출 28:36-38)

관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써 놓았다. 대제사장의 가장 우선은 성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