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ugust 27, 2018

성경적인 영성이란?

성경적인 영성이란?

/ 이상준 목사

앞으로 성령님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한다. 목차는 정해놓지 않았다. 그냥 생각나는 주제들을 정리해서 글을 올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영성을 바르게 정의를 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느 학자가 말했듯이 21세기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할 세 단어(영역)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1) 영성, (2) 치유, (3) 가정이다.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은 원래부터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적인 목마름과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성에 대한 시도는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교회는 그 가운데서 성경적인 영성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하고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영성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 내려야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영역 중에 하나가 영성 분야일 것이다. 최근에 어느 글을 보니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적인 단어는 ‘경건'(예를 들어 딤후 4:8)이라는 것이다. 영성이란 단어는 일반 종교에서는 사용하는 단어로서 동양의 신비종교나 자기초월, 뉴에이지(New-Age)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서 영성운동을 하는 여러 리더들이 모두 그런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라는고 비난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보면 전혀 틀린 주장만은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영성이라는 단어를 바르게 정의하면 구지 영성과 경건을 구분해서 영성운동을 하는 지도자들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영성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인 정의(사전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신령스러운 풍성이나 성질’이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풀어서 정의하면 ‘어떤 종교의 가르침이나 정신대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이것을 브래들리 한센은 “영성이란 인간의 삶의 본질과 목적에 관한 확신에 따라서 사는 한 개인이나 한 공동체의 삶의 스타일이다”라고 말하였다(안영권, ‘빛과 소금’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1993. 10). 즉 영성이란 ‘삶의 스타일’이며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 모든 종교가 나름의 교리와 주장하는 것들이 있다. 그 가르침과 교리(정신)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바로 영성인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모든 종교에 영성이 존재한다. 불교의 영성이 있고, 이슬람의 영성이 있고, 기독교의 영성이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불교의 영성이고, 코란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이슬람의 영성인 것이다.

기독교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면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영성이라는 것이다. 영성이란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종교에 영성이 존재한다. 어쩌면 불교, 이슬람, 기독교 중에 가장 영성훈련을 잘 받고, 영성이 가장 깊은 종교는 이슬람일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코란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전 세계가 혼란스럽게 되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그렇다면,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영성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일반 종교와 기독교 영성의 차이점을 알지 못하면 큰 혼란에 빠지고, 여러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단어를 정의하는 차원에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거기엔 본질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일반 종교의 영성에는 ‘관계'(relationship)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에는 ‘관계’가 존재한다. 아니 기독교 영성에서 ‘관계’를 빼 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 영성이 아니다. 그것은 일반 종교의 영성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영성(하나님과의 관계없이 스스로의 의지로 행할려고 노력하는)을 ‘율법주의’라고 부른다. 율법주의란 다른 것이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열심히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성경적인 영성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교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다루었던 영성의 정의를 다시 ‘관계’라는 측면에서 정리해 보자. 불교의 영성은 석가모니(불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그럼 거기에 석가모니와 교제 한다는 개념이 있을까? 단연코 없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에 죽었고 무덤이 존재한다. 그의 많은 가르침은 기록되어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교제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또한 이슬람은 어떠한가? 그들은 유일신을 믿는다. 그들이 믿는 ‘알라’는 전능한 신이면서 유일신이다. 하지만 코란을 통해서 알라와 교제한다거나 알라와 대화한다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제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 종교의 영성에는 반드시 자기 초월적 개념이 등장해야 한다. 인간의 영역 안에는 신이 존재하지도 않고 만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하는 영역으로 나아가기 위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런 자기 초월적 경험을 위해서 많은 종교들이 소위 ‘영성훈련’을 실시한다. 그들의 영성 훈련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고, 신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불교적 영성 혹은 가톨릭적 영성이라고 부른다. 불교적 영성은 자기 학대와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서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고, 가톨릭적 영성은 영적 체험이나 경험을 통해서 신처럼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 성경적인 영성은 그런 개념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기독교 영성은 인간의 자기 초월을 통해서 신의 영역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이다(성육신, 요 1:14).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두 번째 이름을  ‘임마누엘'(마 1:23,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고 부르신다. 또한 신구약 성경 곳곳에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고 강림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성막이고 성전인 것이다. 하나님은 저 높은 하늘에 계신 분이시면서 동시에 인간 가운데 임재하시는 분이시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구원의 목적이 성령님의 내주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할 때 실제적으로 우리 내면에 임재하시는 분은 바로 성령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몸을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하신다(고전 3:16, 6:19).

이것을 우리는 십자가 영성, 복음 중심적인 영성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며, 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존재를 만들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오직 십자가에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느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할 필요가 없다. 더 많은 도를 닦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불교적 영성이 존재하고, 가톨릭적 영성이 마치 성경적인 영성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필요가 없다. 아니 만들수도 없다. 그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 타락의 원인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왜 타락하게 되었는가? 창세기 3장 5절을 보면, 뱀이 하나님이 만드시 여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새번역)

뱀이 여자를 유혹할 때, 그 유혹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는 그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곧 인간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시도한 것이 바로 타락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시도를 빈번하게 시도한다. 타종교의 영성도 그러하다. 모양은 다르지만 모든 종교의 영성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영성은 핵심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영성의 본질이고 핵심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온전한 순종은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다. 성경적인 영성은 무엇을 보거나 무엇을 체험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되려는 것에 있지 않다.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분과 교제함으로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빼놓고 영성을 논할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 영성이 아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해서 나누기 전에 영성을 먼저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잘못된 영성의 이해 때문에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나 은사가 많이 오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영성에 대한 바른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것을 먼저 바르게 정리하지 않으면 아무리 성령님에 대해서 가르친다해도 잘못된 토양 위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꼴이 되는 것이다. 나무가 아무리 좋은 품종이라도 해도 토양이 좋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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