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25, 2018

천주교의 구원론 (권영문)

/ 권영문 (전 경성대 교직원, 현 기독교 칼럼니스트·<성경적 기독교와 엉터리 기독교> 저자)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관 또는 구원론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구원론이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남으로서 교회는 타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타락이 극에 달했던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도 신약성경적인 구원론의 회복을 위함이었다.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이고 탈성경적인 구원론에 대한 도전이었다(<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침례신학대학교, 107쪽). 


신약성경에서 교회란 말은 영적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교회 건물이나 구원받지 못한 가짜 교인들의 집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관이므로 여기서는 천주교의 구원관과 국내 주요 개신교파의 구원관 그리고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먼저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신약성경적인 용어로 ‘구원받는 것’은 죄와 죽음과 지옥에서 의와 영생과 천국으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 영원한 멸망인 지옥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얻는 구원받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예수님을 믿어야만 된다는 생각을 거절하기 일쑤다. 때문에 그들은 이 단순한 구원의 길 대신 다른 많은 대용품을 만들어냈으며 이 대용물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파멸로 이끌어갔다. 

구원에 관한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1) 자기가 선택하는 어떤 종교를 진실히 믿고 실천한다 해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2)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3) 선행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는 없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4) 세례나 침례가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침례)를 주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고전 1:17)”.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세례(침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것에 의해서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세례(침례)를 받지 않았지만 구원받았다(눅 23:42,43). 

(5)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지 않았으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상의 사항들 외에도 세상에는 구원에 관한 잘못된 개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상기의 사항들처럼 구원을 얻는 것을 돕는다는 생각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행위에 불과한 것들이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헨리 M. 모리스, 전도출판사, 95~97쪽).

상술한 것처럼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제 천주교의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천주교인들에게 있어 구원이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영세(세례)로부터 시작해서 계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교회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길고 긴 과정인 것이다. 

그들의 구원은 성례들, 고해성사, 선행, 연옥에 들어가서 자신의 죄들과 다른 사람들의 죄들로 인하여 받은 고난들, 연옥에서의 고통을 감해 주는 면죄부 그리고 거의 끝도 없는 미사들,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드려야 하는 묵주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짐승 위에 탄 여자>, Dave Hunt, 도서출판 누가, 19쪽). 

지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구원을 주는 복음이 아니라 가짜 복음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상실된 사람들이란 것을 깨달은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통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를 갖지 못하고 교회에 속박되어 버리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규정을 잘 따르면, 결국 교회가 천국으로 이끌어 줄 것만 기대했다.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되는 기정 사실이 아니라 교회에 복종하여 선행을 계속하고 의식을 계속 지킴으로 얻어지는 한 과정이다. 당시 성경적 복음을 믿게 된 개혁자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기뻐하였으며, 그들은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파문과 핍박을 당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앞의 책, 269쪽). 

한편, 가톨릭에서는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 등을 인용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반쪽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얼핏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함이다.

다시 말해 신자가 진실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입증할 선행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디도서 3장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7)” 그리고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딛 3:8)”에 해당하는 것이다(<이렇게 구분된다>, 윌리암 맥도날드, 전도출판사, 17~18쪽). 

신약성경에는 약 150문단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구원’은 서두에 언급한 대로 신약성경적인 용어로, 사람의 영혼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생을 얻는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가 항상 ‘영혼 구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구원이 ‘구출, 안전, 온전함’ 등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인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장 37절에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쓰여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는 바울과 그 일행들이 지중해의 바닷물에 빠져 죽는데서 건짐 받는 것을 표현하는데,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 구절은 앞뒤 문맥을 보지 않더라도 ‘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서 건짐 받는 구출’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전후 문맥이나 상황을 살피지 않을 경우, 구원이란 단어가 영혼의 구원인지 아닌지 쉽게 분간하기가 어려운 구절도 있다. 예컨대 빌립보서 1장 19절에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바울은 ‘구원’이란 단어를 자신이 갇혀있는 로마 감옥에서의 석방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은 바울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말한 것이 아니고 감옥으로부터의 ‘석방’을 말한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 12절에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구원은 빌립보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영혼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빌립보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의 의미는, 주로 문맥이 그 의미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신약성경에 ‘구원’이란 단어가 나올 때는 그 구절과 관련된 이웃하는 문맥과 나아가 더 넓은 문맥을 신중히 비교해서 올바른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성경과 하나님이 모순되는 것처럼 착각할 수도 하고, 또 자의적인 해석과 억지 해석을 주장함으로써 큰 오류에 빠져 기독교 이단이나 사이비로 변질되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106쪽). 

상술한 바와 같이 천주교의 구원관은 오직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또 신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외에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세례를 비롯한 각종 성사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천주교는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아닌 행위에 의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회이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복음인 거짓 교리를 전하는 거짓 교사들을 이단이라고 말했다(벧후 2:1).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인 천주교 사제들에게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천주교와 개신교와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에게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가톨릭교회교리서 846조)”고 겁을 주며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가톨릭은 자기네 교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비성경적인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구원은 가톨릭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천주교 평신도들은 더 이상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구원 교리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술한 것처럼 국내의 여러 개신교파와 교단들도 각기 저마다의 구원론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신학적으로 또는 지식적으로 자기네 교단의 구원론만이 올바른 교리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교파들이 율법이나 계명이나 자기네 교단 교리를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고, 또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바치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의 비성경적인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이제 국내의 개신교인들도 더 이상 이런 거짓 목자들의 말에 속지 말고, 성경적인 올바른 구원관을 갖고 이런 거짓 목자들을 척결하고 대적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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