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은 구원관 또는 구원론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함이니라(눅 19:10)”고 말씀했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구원론이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남으로서 교회는 타락의 길을 가게 되었다. 타락이 극에 달했던 16세기 초에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도 신약성경적인 구원론의 회복을 위함이었다. 당시 종교개혁의 기치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이고 탈성경적인 구원론에 대한 도전이었다(<한국 침례교의 신학적 특성>, 침례신학대학교, 107쪽).
신약성경에서 교회란 말은 영적으로 거듭난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지, 교회 건물이나 구원받지 못한 가짜 교인들의 집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관이므로 여기서는 천주교의 구원관과 국내 주요 개신교파의 구원관 그리고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먼저 신약성경에 나오는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신약성경적인 용어로 ‘구원받는 것’은 죄와 죽음과 지옥에서 의와 영생과 천국으로 구원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 영원한 멸망인 지옥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인 영생을 얻는 구원받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예수님을 믿어야만 된다는 생각을 거절하기 일쑤다. 때문에 그들은 이 단순한 구원의 길 대신 다른 많은 대용품을 만들어냈으며 이 대용물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영원한 파멸로 이끌어갔다.
구원에 관한 이와 같은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1) 자기가 선택하는 어떤 종교를 진실히 믿고 실천한다 해서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2)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3) 선행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을 수는 없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4) 세례나 침례가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침례)를 주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니(고전 1:17)”.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세례(침례)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믿는 것에 의해서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세례(침례)를 받지 않았지만 구원받았다(눅 23:42,43).
(5)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지 않았으면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상의 사항들 외에도 세상에는 구원에 관한 잘못된 개념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것들 모두가 상기의 사항들처럼 구원을 얻는 것을 돕는다는 생각에,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행위에 불과한 것들이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헨리 M. 모리스, 전도출판사, 95~97쪽).
상술한 것처럼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제 천주교의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천주교인들에게 있어 구원이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영세(세례)로부터 시작해서 계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교회와의 관계에 의존하는 길고 긴 과정인 것이다.
그들의 구원은 성례들, 고해성사, 선행, 연옥에 들어가서 자신의 죄들과 다른 사람들의 죄들로 인하여 받은 고난들, 연옥에서의 고통을 감해 주는 면죄부 그리고 거의 끝도 없는 미사들,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드려야 하는 묵주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짐승 위에 탄 여자>, Dave Hunt, 도서출판 누가, 19쪽).
지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구원을 주는 복음이 아니라 가짜 복음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상실된 사람들이란 것을 깨달은 가톨릭 사제들이었다. 통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를 갖지 못하고 교회에 속박되어 버리는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규정을 잘 따르면, 결국 교회가 천국으로 이끌어 줄 것만 기대했다.
가톨릭 교리에 의하면,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되는 기정 사실이 아니라 교회에 복종하여 선행을 계속하고 의식을 계속 지킴으로 얻어지는 한 과정이다. 당시 성경적 복음을 믿게 된 개혁자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기뻐하였으며, 그들은 구원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행 20:24)을 전파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파문과 핍박을 당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앞의 책, 269쪽).
한편, 가톨릭에서는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나오는 말씀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4)” 등을 인용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반쪽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얼핏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행함은 구원의 조건이나 방법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함이다.
다시 말해 신자가 진실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입증할 선행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디도서 3장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7)” 그리고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딛 3:8)”에 해당하는 것이다(<이렇게 구분된다>, 윌리암 맥도날드, 전도출판사, 17~18쪽).
신약성경에는 약 150문단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구원’은 서두에 언급한 대로 신약성경적인 용어로, 사람의 영혼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영생을 얻는 구원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많이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가 항상 ‘영혼 구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구원이 ‘구출, 안전, 온전함’ 등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인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장 37절에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고 쓰여 있다. 이 구절에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는 바울과 그 일행들이 지중해의 바닷물에 빠져 죽는데서 건짐 받는 것을 표현하는데, ‘구원’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 구절은 앞뒤 문맥을 보지 않더라도 ‘영혼의 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서 건짐 받는 구출’임을 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전후 문맥이나 상황을 살피지 않을 경우, 구원이란 단어가 영혼의 구원인지 아닌지 쉽게 분간하기가 어려운 구절도 있다. 예컨대 빌립보서 1장 19절에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바울은 ‘구원’이란 단어를 자신이 갇혀있는 로마 감옥에서의 석방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은 바울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말한 것이 아니고 감옥으로부터의 ‘석방’을 말한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 12절에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 나오는 구원은 빌립보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에 관한 문제의 해결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구원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영혼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빌립보 교회에서 발생한 분쟁에 대한 ‘문제의 해결’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구원’이란 단어의 의미는, 주로 문맥이 그 의미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신약성경에 ‘구원’이란 단어가 나올 때는 그 구절과 관련된 이웃하는 문맥과 나아가 더 넓은 문맥을 신중히 비교해서 올바른 해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성경과 하나님이 모순되는 것처럼 착각할 수도 하고, 또 자의적인 해석과 억지 해석을 주장함으로써 큰 오류에 빠져 기독교 이단이나 사이비로 변질되는 경우도 발생하는 것이다(성경은 해답을 가지고 있다, 106쪽).
상술한 바와 같이 천주교의 구원관은 오직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또 신자들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 외에도 구원받기 위해서는 세례를 비롯한 각종 성사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천주교는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아닌 행위에 의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회이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복음인 거짓 교리를 전하는 거짓 교사들을 이단이라고 말했다(벧후 2:1). 그러므로 천주교회의 평신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인 천주교 사제들에게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 국내 주요 개신교파인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의 구원론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거기에 앞서 구원과 관련하여 국내 개신교계의 현황에 대해 살펴 보자. 예나 지금이나 국내 주요 개신교파나 교단 내에서는 구원받지 않은 가짜 신자들이 부지기수다. 생명의 말씀사 대표이며 장로교단의 목사인 김창영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언급하기를 “국내 교회에는 짝퉁 구원이 판을 치고 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짝퉁으로 믿는 교인들이 많으며 한국교회에는 구원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구원 받음>, 김창영, 생명의 말씀사, 20~21쪽). 이처럼 국내 개신교에는 구원받지 않은 신자들로 이루어진 비성경적인 가짜 교회들이 부지기수다.
더욱이 국내 주요 개신 교파와 교단 내에서는 구원도 받지 않고 목회를 하는 목사들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주요 교파의 16명 목사와 신학대 교수들이 집필한 저서에서도 언급하기를 “국내에 자신의 개인의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는 목사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은 신학교를 졸업한 뒤 마치 운전 면허증을 취득하듯이 강도사 고시, 목사 고시를 보고, 그 다음 절차에 의해 목사 안수를 받는데 안타깝게도 자신은 구원의 확신도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자들이 목회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먼저 구원의 확신부터 점검해야 한다”고 말했다(<교회 개척>, 목회와 신학 편집부, 두란노 아카데미, 105쪽). 이처럼 이런 가짜 목사들이 존재하는 교회도 바로 가짜 교회인 것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서구의 개신교회도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목사들이 목회를 하고 있다. 교회 개척 분야의 탁월한 이론가이며 강연가인 대린 패트릭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를 “오늘날 안타깝게도 개인적으로 구원도 못받은 자들이 목회를 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목사와 교회 개척자가 무조건 다 그리스도인일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구원받지 않고도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기적을 행할 수도 있다(마7:21~23). 거듭나지 못한 목사의 말로도 슬퍼지만 그를 따르는 교인들의 말로는 훨씬 심각하다”고 했다(<교회 개척자>, 대린 패드릭, 복있는 사람, 35~39쪽).
그리고 19세기의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로 널리 알려진 찰스 스펄전은 그의 유명한 저서인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라는 책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목사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목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구원의 확신을 가진 ‘거듭난 자’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자 가운데 가짜 목사들이 많은데 그들은 교인들에게 지옥을 피하라고 소리쳐 놓고 자신은 지금 지옥에 있다”고 했다(<목회자 후보생들에게>, 찰스 스펄전, 생명의 말씀사, 21쪽). 이처럼 스펄전은 설교하는 목사들 가운데 거듭난 체험이 없는 가짜 목사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국내 주요 개신교파의 구원관에 대해 알아 보자. 개신교는 천주교와는 달리 교파마다 교리와 신조 등에 차이가 많다. 구원론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예컨대 감리교는 구원론에 있어 칼빈주의를 따르지 않고 알미니안주의를 따른다. 여기서 칼빈주의란 하나님이 믿을 자들을 택한다는 주의이며, 알미니안주의란 사람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택한다는 주의이다. 이에 따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여러 교파들은 구원론에 당면하여 장로교회와 개혁교회 등은 칼빈주의를 따르고 감리교회와 성결교회, 순복음교회 등은 알미니안주의를 따르고 침례교회는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절충한 구원론을 가지고 있다.
그럼 먼저 국내 개신교인의 약 70%를 차지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교파인 장로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국내의 장로교는 구원론에 있어 칼빈의 예정론을 따른다. 칼빈의 예정론이란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에 구원받을 자들 미리 택해 놓았다”는 교리이다. 그래서 장로교회에 다니는 모태교인이나 일반 교인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받을 자로 미리 택했다고 믿고, 또한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장로교회에 다닌다고 믿고 있다.
물론 ‘예정론’도 성경적이며 틀린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있어야 하고, 또한 영적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각 개인 스스로의 의지적 결단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도 요구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서 믿은 뒤 거듭나게 되면, 나중에서야 비로소 이 두 가지, 곧 은혜와 믿음이 함께 역사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구원받음, 86쪽).
이러한 ‘은혜와 믿음’의 두 가지 역사에 대한 가장 부합되는 성경말씀은 에베소서 2장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여기에서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이자 소관이며, 믿음은 인간의 주권이며 소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을 모두 언급하고 있으므로, 한쪽만 옳다고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장로교는 불신자를 위한 복음집회를 따로 갖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에는 불신자를 위한 복음집회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행13:42~49, 살전1:8). 장로교 외에 다른 교파인 침례교나 감리교 그리고 초교파적인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들은 복음집회를 통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왔다. 예컨대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나 침례교 계통의 찰스 스펄전과 빌리 그레이엄 그리고 초교파적인 디엘 무디 등의 복음전도자들은 교회 내에서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나 큰 광장이나 체육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집회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장로교는 초창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팎으로 ‘복음전도집회’라는 것이 없었다. 장로교에 있어서 ‘전도’라는 의미는, 일반적으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당에 데리고 오라는 뜻으로 통하고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총동원전도주일’이라는 것도 교인들로 하여금 사람들을 강권하여서라도 자기네 교회당으로 데리고 오라는 의미인 것이다.
리하여 총동원전도주일에 불신자들이 교인들을 따라 교회에 나갔을 때, 목사들은 설교를 통해 ‘영혼 구원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으면 복을 받고 병 고침을 받고 사업이 잘된다는 기복 신앙을 대개 전한다. 그리고 총동원전도주일이 아닌 평상시에도 장로교 목사들은 예배, 즉 설교시간에 전하는 말씀내용이 주로 자기네 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교훈적인 말씀을 전한다.
이러한 경우, 자기네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 내용이 자신들을 위한 가르침인 것을 알지만, 처음 교회에 참석한 거듭난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설교 내용을 알게 모르게 자신들에게 적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다 보면 중생이나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교회의 교인이 되어 기독교 신자인양 착각하면서 교회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다.
한편, 장로교 헌법에는 교인의 정의를 “교인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라고 쓰여 있다(<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 173쪽, 한국장로교 출판사). 거듭난 신자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장로교 교인의 정의를 살펴 볼 때 여기에 나타난 심각한 오류를 보면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상술한 것처럼 장로교는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을 교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들도 삼위일체를 확실히 믿고 있고, 기독교 이단 종파들 중에서도 일부는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 그렇다면 장로교인이나 가톨릭교인나 그런 기독교 이단 종파나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
장로교 헌법을 만든 사람들은 현직목사 외에도 장로교 목사자격증을 가진 교수나 신학박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람들이 ‘교인의 정의’를 단지 삼위일체를 믿는 자들이라고 정의를 내렸으니 정말 기가 찰 일이며, 이들이 과연 신학교수나 신학박사가 맞는지 그 자격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명색이 장로교의 최고 연구진들이 이 모양이니 한국 장로교도 문제가 삼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 역시 중생이 의심되는 지도자들이며, 교인들 또한 그런 자들에게 배우고 있느니 ‘중생’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대부분의 장로교인들의 ‘중생 체험의 실종’과 함께, 왜 장로교에 ‘복음집회’가 존재하지 않고 또한 교인들 가운데 ‘중생의 체험’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 입을 열지 않거나, 또는 엉뚱한 답변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장로교인들은 교회 집회에 빠지지 않고 잘 다니고 봉사도 하며 십일조도 잘 내고 직분도 잘 감당하면서 교회생활을 잘 하면 죽어서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거듭난 체험이 있는지 없는지, 즉 “영적 출생의 여부”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국내의 장로교인들은 장로교 헌법에 나타나 있는대로 삼위일체를 믿기만 하면 장로교인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로교 헌법에 따라 비성경적인 교리를 전하는 영적으로 소경된 인도자인 목사의 말을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직접 해답을 찾거나, 아니면 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전하는 성경적인 교회를 찾아야만 올바른 복음을 깨닫고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장로교 헌법에 나타나 있는 장로교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성경에 나타나 있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감리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감리교는 18세기 초에 영국의 존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영국 국교회의 개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거듭나는 체험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진 뒤 수많은 사람들에게 ‘중생의 복음’을 전했다. 감리교 초창기에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은 ‘개인 영혼구원’을 우선시하고 그 다음으로 ‘삶의 실천’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는 그 순서가 점점 뒤바뀌어 오늘날에는 영혼구원보다 타 종파와의 에큐메니칼 운동이나 사회구원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의 감리교회도 상기와 같이 개인의 영혼 구원보다는 사회 구원쪽으로 흐르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 기독교 대한 감리회의 ‘교리와 장정’ 책에는 구원과 그리고 선행에 대하여 서술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구원은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역사와 사회를 성화시키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적혀 있다(<교리와 장정>, 기독교대한감리회, 33쪽). 이 문구에서 구원을 사회 성화와 연관시킨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증명하는 선행은 성화의 과정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위해 작용한다”고 쓰여 있다(앞의 책, 33쪽). 여기서도 선행과 구원을 연관시킨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구의 내용은 불신자나 초신자뿐만 아니라 교인들이 읽더라도, 도대체 구원의 진리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야 말로 비성경적인 문구이며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존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뒤 영국을 비롯하여 독일 아일랜드 등 수많은 나라를 직접 순회하면서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오늘날 감리교는 변질되어 존 웨슬리가 깨달은 복음의 진리를 감리교 교인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거듭나지 못한 가짜 목사들에게 속아 종교생활을 하고 있다. 이러한 거짓 지도자들은 그들의 헌법과 교리에 따라 교인들에게 내세에 대한 막연한 기대보다는 현세에서의 적극적인 삶과 사회구원을 강조하며 엉터리 복음을 전하고 있다. 국내 감리교의 평신도들은 더 이상 가짜 복음에 속지 말고 존 웨슬리가 믿고 전한 올바른 구원의 복음으로 되돌아 가야 할 것이다.
다음, 성결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성결교는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완전주의적 입장과 성결운동을 강조하며 생겨난 교파이다. 국내의 성결교는 구원론에 있어 감리교와 순복음교회처럼 알미니안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신학에 있어서는 초창기부터 늘 보수적, 수구적,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전통적으로 국내 성결교의 신학적 정체성에 나타난 사상으로는 ‘사중복음’을 들 수 있다. 그것은 곧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네 가지이다. 이 사중복음은 원래 19세기 말에 미국의 심슨이나 다른 부흥사들이 사회복음 운동에 반대하여 일어난 미국교회의 일종의 쇄신운동이며 미국 성결운동에서 강조했던 내용이었다. 이것이 한국 성결교에서도 창립 당시부터 줄곧 강조되어 오면서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되어 왔다(<한국개신교 주요교파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29쪽).
성결교에서는 다른 교파와 달리 사중복음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네 가지를 중요시 하며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중복음은 비성경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오직 한 가지,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라고 적혀 있다. 이와 같이 누구나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믿어 천국가는 것이며, 복음은 몇 가지 종류가 아닌, 이 ‘구원의 복음’ 한 가지 밖에 없다. 그 외에는 모두 가짜요 거짓 복음인 것이다. 따라서 성결교회에서 강조하는 ‘사중복음’은 비성경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갈1:7)”고 씌어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신자들에게 다른 복음, 즉 가짜복음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구원의 복음은 “구원받고 천국가느냐, 구원 못받고 지옥가느냐”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성결교의 사중복음 가운데 ‘성결· 신유· 재림’은 천국 지옥과는 무관하며, 그것은 일종의 기독교 교리 가운데 일부에 해당하는 것이지 구원의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따라서 사중복음은 비성경적인 용어일 뿐만 아니라 가짜복음인 것이다.
다음, 침례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침례교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유럽의 재침례파와 17세기 영국의 회중교회의 분파인 청교도주의로부터 침례교가 시작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에는 1889년 캐나다 선교사 말콤 펜윅에 의해 침례교가 전래되었다. 현재 한국에는 기독교한국침례회, 대한기독교침례회, 한국성서침례회,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 등 4개의 교단이 있다. 이 가운데 기독교한국침례회의 교단이 가장 규모가 크다.
침례교는 구원론에 있어서, 초창기에는 알미니안주의를 지지하는 일반침례교와 극단적 칼빈주의를 따르는 특수침례교로 양분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에 온건한 칼빈주의를 토대로 한, 복음주의 침례교 교리가 나타나 일반침례교와 특수침례교가 통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침례교는 일반적으로 다른 교파보다는 확실한 구원관을 갖고 있으며, 중생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침례교는 지역교회마다 ‘회원권 제도’라는 것이 있다. 회원권이란 교회의 회원이 되는 자격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그 첫째 조건이 중생인데, 즉 “오직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 증거를 주는 자만이” 회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침례교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구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침례교는 각 나라나 지역이나 심지어 개교회의 목사마다 구원관이 다른 경우도 많다. 마찬가지로 국내의 침례교도 개교회의 목사의 구원관이나 복음에 대한 교리가 비성경적일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영적 분별력이 약한 교인들은 그릇된 목사를 따라 사망의 길로 갈 수도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이런 목사를 믿지 말고 성경을 믿어야 할 것이다.
다음, 순복음교의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자. 한국의 순복음교회는 오순절교회의 한 교파로 1928년 미국 선교사 럼지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녀는 1933년에 한국에 최초의 오순절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1953년 서울에서 교단이 창립되면서 순복음 신학교가 처음 설립되고, 1960년대에는 여러 오순절 계통의 교단들이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국내 오순절 계통의 최대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는 1981년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이단 시비문제’로 인해 총회측과 순복음측으로 분열되었다.
당시 조용기는 “조상숭배 문제, 성령세례 문제, 환상과 방언, 축복과 구원 등”과 관련하여 예장통합으로부터 ‘이단 시비문제’가 발생했다. 그 때 순복음측은 사태가 여의치 않자 조용기를 중심으로 하여 ‘예수교대한하나님의 성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렇게 두 교단으로 분리되었다가 1991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라는 명칭으로 다시 통합되었다(한국 개신교 주요교파 연구, 247쪽).
구원론에 있어서 오순절교는 감리교와 성결교처럼 알미니안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오순절교의 구원의 교리는 ‘회심과 성령세례’를 별도로 구분시켜 회심 후에 성령세례를 따로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회심과 성령세례를 동일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순절교와 큰 차이가 있다. 또한 오순절교는 침례교나 장로교와는 달리, 구원을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이라 하여 질병의 치유까지 포함시켜 놓아, 복음적인 기독교 교리와는 동떨어진 비성경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다(앞의 책, 233쪽) .
그리고 오순절계통의 교인들은 사도시대의 ‘방언 등 표적의 은사’가 모든 시대에도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 교회시대 이후, 속사도들이나 그리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나 20세기 이전의 세계적인 전도자들은, “방언이나 기타 표적은 초기 기독교의 표적이며 일시적인 현상이었으며, 표적의 은사는 성경의 정경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활동이 멈추었다”고 말하고 있다(분파주의, 엔드류 스텐하우스, 전도출판사, 106쪽). 그러므로 순복음교인들은 교회사와 성경적인 구원론을 제대로 파악하여 방언이나 병고침이나 성령세례 등을 구원받은 증거인 것처럼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천주교와 개신교와 성경적인 구원관에 대해 살펴 보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신자들에게 “가톨릭교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가톨릭교회교리서 846조)”고 겁을 주며 위협하고 있다. 이처럼 가톨릭은 자기네 교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비성경적인 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구원은 가톨릭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천주교 평신도들은 더 이상 가톨릭의 비성경적인 구원 교리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술한 것처럼 국내의 여러 개신교파와 교단들도 각기 저마다의 구원론을 갖고 있다. 그리하여 신학적으로 또는 지식적으로 자기네 교단의 구원론만이 올바른 교리인 것처럼 주장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교파들이 율법이나 계명이나 자기네 교단 교리를 지킬 것을 강조하면서,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면 천국에 갈 수 있고, 또한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바치면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다는 기복신앙의 비성경적인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이제 국내의 개신교인들도 더 이상 이런 거짓 목자들의 말에 속지 말고, 성경적인 올바른 구원관을 갖고 이런 거짓 목자들을 척결하고 대적해 나가야 할 것이다.
권영문 / 전 경성대 교직원, 현 기독교 칼럼니스트·<성경적 기독교와 엉터리 기독교> 저자
권영문 kymn@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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