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다
/ 정용섭 목사
(히 5:1-10)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택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3 그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신을 위하여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도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제가 어릴 때 종종 제사에 참석한 기억이 있습니다. 큰집이 아니라서 처음에는 제사가 없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초등학교 1학년 이후로 제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제삿날만이 아니라 추석과 설날에도 제사를 드리니까 일 년에 세 번 제사가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제사에 직간접적으로 관계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겁니다. 믿지 않는 시댁의 제사 때문에 믿는 며느리가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제사 풍습을 종교적으로 너무 예민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상에 대한 추모이자 후손들의 친목 정도로 여기면 됩니다.
속죄 제사
구약성경에도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우리의 제사는 조상을 기리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순전히 이런 일을 위한 용도로 건축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전문적으로 제사 업무를 감당하던 이들이 제사장들입니다. 제사도 여러 종류입니다. 하루에 두 번씩 드리는 제사도 있고,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제사도 있고, 수시로 드리는 제사, 또는 일 년에 한번 드리는 제사도 있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하던 제사장들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왕의 권력보다 더 컸습니다. 이스라엘이 제국에 의해서 지배당하거나, 왕정이 해체되었을 때도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는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이 지배하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가장 강력한 법적 지위를 가진 기구는 90여명 정도로 구성된 산헤드린이었습니다. 여기에 제사장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의 최고위직을 대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대략 로마가톨릭교회의 추기경이 제사장이고, 교황이 대제사장이라고 보면 됩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는 자신들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유지되어야만 자신들이 세상에서 편안하고 복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바르게 유지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죄는 생명을 약화, 또는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은 이 죄 문제를 집요하고 신랄하게 문제 삼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도 같은 의미입니다. 시기심으로 동생 아벨을 돌로 죽인 가인은 하나님에 의해 공동체에서 추방당합니다. 노아 홍수 사건도 역시 죄에 깊이 연루된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죄를 행하지 말아야 하는데, 실제의 삶에서 죄는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속죄, 즉 죄의 용서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는 속죄를 핵심으로 합니다. 제사장은 이런 종교 의식을 주도하는 사람들입니다.
번제나 속죄제 등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고대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오늘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현대인들은 이런 속죄 종교 의식과는 거리가 먼 세상을 사는 게 분명해보입니다. 죄, 또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면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자기가 잘못한 상대에게 말로 용서를 구할 수도 있고, 때로는 국가에 벌금을 물 수도 있고, 감옥에 갈 수도 있습니다. 실정법을 기준으로만 죄 문제를 처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법이 인간 삶에서 벌어지는 잘잘못을 다 해결해준다면 다행이겠지만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법이 오히려 불법과 죄를 합법화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돈만 많으면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서 처벌을 면하기도 하고, 능력이 없으면 재판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현대인들의 의식에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 앞에서의 속죄 개념이 들어갈 틈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기독교인들은 매사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서 모든 불행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십일조 헌금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다거나, 새벽기도회에 한번 빠졌기 때문에 교통사고도 나고, 아이들이 병들기도 한다고 여깁니다.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죄를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와서 기도를 드릴 때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받았다는 안도감을 얻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방식으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세리와 부자의 비유에서(눅 18:9-14)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한 세리의 믿음을 그런 식으로 해석했습니다. 이런 해석은 옳지 않습니다. 그 비유는 자책하는 세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의로운 척하면서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전문 종교인들을 향한 충고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제사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다고 생각한 데에는 죄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도둑질을 했을 경우에 율법에 따라서 몇 배로 변상한다고 해서 이 문제가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남의 것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변상 받은 사람도 단순히 재물만이 아니라 정신으로 얼마나 큰 후유증을 겪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죄와 죄의 결과에는 인간이 다 추적할 수 없는 까마득한 깊이와 넓이가 놓여있는 게 분명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생각에 따르면 이런 죄의 존재론적 깊이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진지한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로 그들은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일 년에 한번 대(大)속죄일에는 이스라엘 모든 민족들이 알지 못하고 지은 죄까지 용서를 바라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대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의 전통
초기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제사제도가 종교적으로 아무리 심층적인 의미가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에 의해서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단 한 번에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반복해서 잡아 바치는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 제물은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은 예수님이 이스라엘 제사장들처럼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게 아니라 멜기세덱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합니다(히 5:10).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7장에도 나옵니다. 7장이 설명한 사건의 배경은 창 14:17절 이하입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살렘 왕이자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에게서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전쟁 노획물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아브라함보다 멜기세덱이 종교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시 110:4절을 근거로 예수님이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 레위 혈통을 따르는 이스라엘의 제사장들보다 더 우월하고 참된 대제사장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이런 주장이 정당할까요? 그의 설명을 일단 더 들어봅시다. 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이 ‘온전하게’ 되셨다는 사실이 그가 영원하고 참된 대제사장이라는 진술의 근거입니다. 공동번역은 완전하게 되셨다고 번역했으며, 루터는 완성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또는 신(神)이니까 완전한 게 당연하다고 말입니다. 문장 구조를 잘 보십시오. 처음부터 완전하다는 게 아니라 완전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아직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배가 고프고, 울고, 웃고, 실망하고, 주변 사람들로 인해서 힘들어 했습니다. 공생애 초기에 마귀에게서 세 번이나 시험을 당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여전히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이 처음에는 불완전했다가 나중에 완전해졌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예수님은 선재적으로(요 1:1)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불완전이라는 말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하게 되셨다는 말은 영광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공생애 중에는 영광이 비밀한 방식으로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이제 부활 승천 이후로는 실질적으로 영광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부활 승천으로 예수님은 세상에 살면서 겪어야만 했을 인간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시어 하나님과 동일한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신 겁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 사실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예수님이 부활 승천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완전하게 되었다는 진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을 알고 설명할 수 있으면 기독교 교리의 모든 것을 아는 거와 같습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의 고위 당국자들과 로마 총독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뒤에 자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떤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궁극적인 생명의 현실성(reality)로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종말에 완성될 절대적인 생명을 비밀스럽게 미리 경험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미리 경험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그 현상을 부활이라고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입니다. 부활의 빛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벌어진 일들과 예수님의 말씀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한걸음 더 나가서 종말에 완성될 생명의 완성도 이해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종말에 예수님이 재림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운명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식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에,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하게 되셨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원
지금까지의 설명을 다시 정리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완전하게 되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9절에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했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로 바꿔 불러도 좋습니다.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입니다.
이런 기독교 교리를 이미 아는 분들도 있고, 지금 새롭게 알게 된 분들도 있고,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 좀 더 정확하게 알게 된 분들도 있을 겁니다. 들어서 아는 것에 머물면 곤란합니다.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영혼에 공명되고, 그래서 우리가 그 사실에 몰입할 수 있어야만 실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학 개론서나 소설이나 시를 읽고 이해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사랑의 능력에 휩싸이는 건 아닙니다. 사랑은 실제 느낌이고 경험이지 단순한 정보와 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예수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경험이 우리에게 실제로 어떻게 주어질까요? 그런 경험이 우리에게는 실제로 있을까요? 이게 무얼 가리키는지 잘 알지도 못한 채 습관적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순박한 신앙이 나쁜 거는 아닙니다만 왜 아멘이라고 대답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관한 저의 설명을 조금 더 듣고 싶으신가요?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예수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졌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의’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옳다.’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를 순전한 자유와 기쁨으로 살게 합니다. 우리의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는 죄의식까지 다 극복되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이는 마치 수능 시험의 결과에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8: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죄로부터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자기를 실현하려는 욕망 자체입니다. 이 욕망으로 인해서 사람은 평생 자기를 자기가 성취해야 한다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걸 삶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자기실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은 우리는 이제 죄와 죽음의 논리에서 벗어난 존재, 즉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이해하고 믿는 사람은 예수가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외에 여러분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다른 근원이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졌다는 사실을 단순히 도덕성이나 출세나 평판처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어떤 것쯤으로 보면 안 됩니다. 의는 하나님에게만 가능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듯이 하나님만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만이 의가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떤 인간적인 성취로도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노벨상을 타거나, 목사와 선교사로 사는 것도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 필요할 뿐이지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맥락을 바탕에 놓고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와 동일한 믿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게 하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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