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1)
/ 올네이션스교회 양종관 목사
(1)
요즘 ‘영성’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쉽게 난무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온갖 종류의 분야와 (철학, 문학, 정치, 의술, 예술, 스포츠, 문화, 레져, 사회, 등) 여러 종교와 이단, 사이비까지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볼 때 ‘영성’이라는 단어는 우리 기독교만의 점유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성’의 난무 속에서, 과연 ‘우리 기독교 영성은 무엇인가?’하는 부분이 이제는 분명히 정리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지면으로 독자들과 함께 ‘기독교 영성’에 대하여 나누고자 한다. 먼저 밝히는 것은 나는 영성 신학자도 아니요, 전공자도 아니요, 단지 목회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사이기에,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영성’에 대하여 나눌 것임을 미리 밝힌다.
한 가지 더 밝힐 것이 있다. 요즘 교회들과 선교 단체들과 나름대로의 공동체 개념을 가지고 있는 많은 곳에서 ‘기독교 영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의 대부분이 천주교 영성 가들이 말하던 바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분들이 천주교의 예수회((Jesuits)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적인 의미의 영성과 그가 말한 ‘영신 수련’에 대하여 몰두하고 있음을 쉽게 보게 된다.
그러한 현실을 보면서, ‘기독교 영성’이 너무나 천주교의 영성 쪽으로 몰리고 있으며,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영성 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개신교 목사로서 항상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천주교의 영성과 그의 영성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주도권을 분명히 믿지만, 동시에 우리들이 스스로 준비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성을 위해서 다시 행위와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듯 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과연 ‘기독교 영성은 우리 스스로 개발 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잘못 알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지면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는 따지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개신교 목사로서 기존 영성 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신학적 입장이나 천주교 적(로욜라 적)인 입장을 뒤로하고,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영성’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다.
실제 삶 속에서 편안하고 여유 있게 펼쳐지는 그러한 기독교 영성을 소망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함께 나누게 될 ‘기독교 영성’을 6가지 틀을 가지고 살펴볼 것이다. 1)예수 그리스도, 2)십자가, 3)복음, 4)생명, 5)기도, 6)성령, 5)열매 맺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성을 소유한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이민 사회 속에 바로 된 기독교 영성의 확장과 그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편안하고 쉽게 펼쳐지며 자리 잡길 소망한다.
(2)
얼마 전 한 청년이 물었다. ‘기독교 영성은 분명히 성경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아는데, 성경에 영성이라는 말이 있나요?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가요?’ 여러분 같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어떻게 보면 무지한 질문인 것 같으면서도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을 받고 정말 성경에 ‘영성’이라는 단어가 있는지 궁금해 졌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2곳에서 발견을 했지만(대상16:19, 시105:12), 여기서 사용된 ‘영성’이라는 단어는 ‘매우 적다, 매우 작다’는 뜻으로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었다.
우리는 과연 ‘영성’이라는 말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성경 구약과 신약 원어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라틴어에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말은 라틴어 ‘스피리투알리타스’(spiritualitas) 번역이다. 이 단어는 영어, 불어, 독일어, 등 현대 서구어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로 내려오면서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 어원은 ‘스피리투스'(spiritus) 이다. 그 뜻은 ‘숨, 호흡, 입김’이나 ‘대기 중에 있는 공기, 연한 바람’, 등을 뜻한다. 이 단어는 동시에 ‘신(神)의 입김’이란 뜻인 ‘영감'(inspiration) 뜻으로 사용된다. 때문에 이 단어에서 파생된 형용사인 ‘스피리투알리스’(spiritualis)는 ‘영으로 채워진’, ‘영적인’ 등의 뜻이 있고, 이 단어 명사형이 우리가 말하는 ‘스피리투알리타스’, 즉 ‘영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라틴어 성경에는 ‘스피리투알리스’(spiritualis), 즉 ‘영성’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러나 이 단어 뿌리인 ‘스피리투스’와 형용사 형인 ‘스피리투알리스’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신구약에서 이 두 단어에 해당하는 단어를 살펴보면, ‘영성’에 대한 성경적 배경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구약에서 ‘영성’에 해당하는 단어는 ‘루아흐’와 ‘네페쉬’이다. 이 단어는 ‘영’이나 혼, 또는 ‘영혼’으로 번역 되었는데, 라틴어 ‘스피리투스’로 번역돼 있는 단어이다. 단어 상으로 ‘루아흐’ 뜻은 ‘호흡, 생명, 바람, 정신, 공기, 영혼’ 등 뜻을 가지고 있고, ‘네페쉬’는 ‘욕심, 생명체, 인간’을 의미한다. 이 두 단어는 영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나타낼 때 혼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네페쉬’는 ‘육신’을 말하는 히브리 단어 ‘바사르’ 반대 개념이다. 때문에 ‘네페쉬’는 정신, 영혼, 마음, 등 뜻으로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루아흐’는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숨’이다. 곧 만물을 살리는 힘, 또는 하나님 영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원래 우리가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단어 원형인 ‘스피리투알리스’(spiritualis) 또는 ‘스피리투스’가 ‘호흡’, 또는 ‘신의 입김’을 뜻한다는 것과 의미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구약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는 ‘네페쉬’보다는 ‘루아흐’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루아흐’는 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뉘마’이다. 그런데 이 ‘프뉘마’ 역시 ‘바람, 호흡, 생명, 영혼, 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사도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고전2:14, 롬8:5, 갈5:16, 등등). 이 때 ‘영적’, ‘성령’등 단어가 나타나는데, 여기에 바로 ‘프뉘마’가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라틴어와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영성’에 해당하는 단어를 보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본다. 1)우리가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루아흐’와 ‘프뉘마’라는 것으로서, 분명히 성경적이다. 2)‘영성’이라는 의미의 ‘루아흐’와 ‘프뉘마’는 ‘공기, 숨, 생명’이라는 뜻 외에, 어떤 무엇인가를 살게 하며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실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단어는 우리 노력이나, 나 자신에 의해 길러지고 이뤄지며 터득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어떤 근원에 의해 이뤄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영성’은 그 단어 의미 상, 인간이나 어떤 생명체를 살게 하는 근원인 것이다.
📍기독교 영성 정의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기독교 영성’ 정의를 조심스럽게 내려본다(물론 개인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영성이란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삶’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교훈과 가르침과 삶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은 성령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우리 노력이나 힘이나 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음에는 구체적인 기독교 영성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3)
이미 지난 글에서 조심스럽게(나름대로) 기독교 영성이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다’고 정의를 내려 보았다.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는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가르침과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참 목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시작을 위해서는 ‘복음의 핵심’이 꼭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 영성을 말하기 전에 분명히 먼저 정리 해야 할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먼저는 복음의 핵심이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음은 임마누엘의 견고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개인에 따라 그 표현이 다르겠지만, 6가지로 말하고 싶다.
1)하나님께서 죄로 영원히 죽게 된 당신의 자녀를 살리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성육하셨다는 분명한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2)그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되 영원한 생명과 풍성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고,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추상이나 개념이나 이론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인류의 눈앞에서 일어났던 ‘실제’이다.
3)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변화된’존재가 아니라,‘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창1:27), 새롭게 창조된(고후5:17), 하나님의 자녀(롬8:16)’라는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4)우리는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가족이라는 분명하고 선명한 기준을 가져야 한다.
5)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서(요14:17),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고 계심을(마28:20) 분명히 해야 한다.
6)우리는 그 예수 안에서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살아가는 목적 있는 존재라는 수준 높은 하늘의 가치기준을 자신해야 한다.
적어도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믿고 확신할 때, 우리는 기독교 영성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부담 없이 말하며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러한 기본 없이 기독교 영성을 말한다는 것은 지식과 이론에 불과 할 것이며, 실제 삶에서 적용될 수 없는 ‘사람의 영성’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시작을 위해서는 또한 ‘임마누엘’의 견고함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을 시작하기 전 또 하나의 기본 전제는 ‘임마누엘’의 견고함이다.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기독교 영성은 얼마든지 개인의 수고와 노력과 자기성찰과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부산물로 여겨질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임마누엘’이 절대적으로 전제 되어야 한다. ‘임마누엘’이 핵심이 되는 그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 그때 진정한 영성의 싹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의 기본이 되는 ‘임마누엘’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 가? 임마누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나타나는 영원함이다.
1)과거 - ‘에벤에셀’로 임마누엘 하셨다.
블레셋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큰 위기에 처하자 사무엘은 온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여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 위기를 마무리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때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취하여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불렀다. ‘여호와께서 여기 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삼상 7:12/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2)현재 - ‘살롬’으로 임마누엘 하셨다.
미디안 족속에게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어느 날 기드온에게 나타나 ‘너는 큰 용사이니 일어나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기드온은 ‘나는 극히 약하고 힘도 없고 잘난 것도 없고 우리 집안도 별 볼일 없는데 내가 감히 어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과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셨는데 왜 현재는 임마누엘 하지 않습니까? (삿6:13)’라는 항변이었다.
현재 자기가 처한 처절한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너무나 간절히 소원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한다.’삿6:18절에서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서 내가 너를 기다리마” 라고 친밀하게 말씀하신다. 기드온은 감격하며 돌로 제단을 쌓았고, 그 제단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불렀다. 곧 ‘하나님은 평강이시다. 하나님은 평강으로 지금 여기에 나와 계신다”고 감사하며 기뻐한 것이다.
현재 삶이 치욕스런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있음을 기드온은 분명하게 경험하고 확신한 것이다.
*삿6:24/“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 이라 하였더라 ......”
3)미래 - ‘이레’로 임마누엘 하신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려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분명히 아셨고 이삭 대신 준비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게 하신다.(창22:12-13)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양을 잡아 하나님께서 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준비 하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어느 정도 ‘여호와 이레’를 확신하고 있었는가?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히11:19). 아브라함은 확고부동한 ‘여호와 이레’의 임마누엘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창22: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렇듯 하나님의 임마누엘이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계속 지속되고 있음을 믿고 확신할 때 기독교 영성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안에 복음의 핵심이 있는가? 우리 안에 임마누엘의 선명하고 분명한 기준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영성을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글에서는 ‘예수님의 영성’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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