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25, 2018

다윗 -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제목: [다윗: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책 요약

작성자 :임실사랑의 교회 

유진 피터슨 지음/이종태 옮김 
IVP/1999년 6월/283쪽/7,500원

▣ 저 자  유진 피터슨
개신교 영성 신학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깊은 영성과 성경 신학적 바탕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한 탁월한 문체 등이 어우러진 20여 권의 저서로 유명하다. 미국 메릴랜드 주에 있는 Christ Our King Presbyterian Church에서 30년간 목회자로 섬겼으며, 캐나다 벤쿠버에 있는 Regent College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친 바 있다. 현재는 Regent College의 명예 교수로 있으면서 미국 몬타나에서 저술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약을 새롭게 번역한 『The Message』와 『한 길 가는 순례자』『묵시: 현실을 새롭게 하는 영성』 등이 있다.

▣ 역 자  이종태 
한국 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였으며 장로회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역서로는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저자는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성소에서 거짓말을 하는 다윗,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 법궤 앞에서 정신 없이 춤을 추는 다윗,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는 다윗, 아들에게 쫓겨 도망치는 다윗의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게 해준다. 그리고 이 다윗 이야기야말로 현세를 사는 영성(earthy spiritually)을 회복시키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본서는, 이야기라는 형식이 주는 재미와 성경에 기초한 깊이 있는 묵상을 통해 당신을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의 세계로 안내해준다. 

▣ 차 례 
1. 이야기 - 다윗과 예수님
2. 이름 - 다윗과 사무엘
3. 일 - 다윗과 사울
4. 상상력 - 다윗과 골리앗
5. 우정 - 다윗과 요나단
6. 성소 - 다윗과 도엑
7. 광야 - 엔게디와 다윗
8. 아름다움 - 다윗과 아비가일
9. 공동체 - 시글락의 다윗
10. 관대함 - 브솔 시내의 다윗
11. 슬픔 - 비가를 부르는 다윗
12. 어리석음 - 다윗과 스루야의 아들들
13. 성장 - 다윗과 스루야의 아들들
14. 종교 - 다윗과 웃사
15. 주권적 은혜 - 다윗과 나단
16. 사랑 - 다윗과 므비보셋
17. 죄 - 다윗과 밧세바
18. 고통 - 다윗과 압살롬
19. 신학 - 다윗과 하나님
20. 죽음 - 다윗과 아비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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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기 - 다윗과 예수님

우리 어머니는 이야기꾼이셨다. 내게 다윗 이야기를 처음 들려주신 분도 어머니였다. 성장하여 스스로 성경을 읽었을 때, 나는 어머니가 신앙적 상상력을 통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이야기 전체를 꿰뚫는 중심과 기준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파악하고 계셨음을 깨닫는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바로 그런 식으로 다윗 이야기를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안다. 

다윗 이야기 :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가장 주된 통로다. 이야기는 성령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문학 장르다. 초지일관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다윗 이야기는 성경에서 너무도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이야기인지라, 우리는 이 훌륭하고 영감을 주며 위엄 있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별 무리 없이 젖어든다.  

다윗과 하나님 : 다윗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온전하고 충만한 삶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이라는 것을 배운다. 다윗이 중요한 것은, 그의 도덕성이나 탁월한 전투 능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던 그의 체험과 증언 때문이다. 그의 전 생애는 하나님과의 대면이었다. 

예수님 이야기 : 성경이 들려주는 제일 가는 이야기는 다윗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것이 인간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 이야기는 다윗 이야기를 전제한다.  

현세를 사는 영성 : 이전에 수많은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다윗 이야기야말로 거룩으로 넘쳐흐르는 ‘현세를 사는 영성(earthy spiritually)’을 회복시키는 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다윗의 이야기는 진정 정열로 들끓는 이야기다. 바로 현세를 사는 영성이 그의 삶의 특징이며 그러한 정열의 이유다. 

2. 이름 - 다윗과 사무엘

다윗이 선택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안목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선택되고,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하나님에 의해 사무엘을 통해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 이야기를 읽고 듣는 사람은 자신에게 무언가 다윗과 같은 면 - “비록 보잘것없고 양이나 지키는 무명의 신세지만 나는 선택된 사람이다.” - 이 있음을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성경 이야기꾼의 의도요 기술이다.

평범한 사람 : 다윗 이야기의 주인공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되기는 하지만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는 ‘단순한’ 평신도, ‘하카톤(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서, 그렇기에 그가 부적절하다는 암시는 찾아볼 수 없다. 다윗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단순한’이라는 형용사로 평신도를 과소평가하는 관례에 대해 성경으로부터 준엄한 질책을 받는다.  

어느 날 몇몇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에 우리를 초대한 친구가 말했다. “자,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달라지게 만든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 게 어때?”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친구들에게 체트 엘링슨(Chet Ellingson)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사춘기 시절에 내게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체트 엘링슨은 나보다 열 살 정도 위였고 그리스도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혼한 경력이 있었고 그러므로 영향력 있는 지도자 위치에 있지는 못했다. 그는 종종 같이 사냥하러 가자고 나를 초대했다. 체트는 아직 어린 나에게 어른 대접을 해주었다. 우리들의 대화에는 ‘기독교적인’ 색깔이 깔려 있었다. 비록 교회에서 쓰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추위 속에서 예수님, 성령, 성경 등에 관해 지극히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다. 그는 내가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옮겨가는 길에 그리고 “…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엡 4:13)” 걸어가는 길에 다리가 되어 주었다. 사춘기의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시기에 그와의 교제를 통해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성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하기를 다 마쳤을 때, 나는 그 이야기들 중 목사나 교수, 선교사 혹은 복음 전도자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마 체트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우리와 함께 할 ‘시간’이 없었으리라. 우리 이야기에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해주었고 길을 인도해주었으며 교훈을 주었다. 지금껏 내가 받아왔고 또 지금 받고 있는 도움과 격려와 지혜의 대부분은, 사실 그런 일에서 비전문가로 여겨지는 사람들로부터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들을 다윗 이야기라는 배경 속에 놓고 바라볼 때 그것들이 전에 없던 의미와 영적인 힘을 갖게 됨을 발견한다.

3. 일 - 다윗과 사울

시작은 모든 것이 다 좋았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선택된 영예와 책임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자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울은 점점 일 자체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표현했어야 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일과 예배, 예배와 일이 완전히 일치를 이룬 삶이다. 

일하시는 하나님 : 사울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와중에 그만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신분에서 몰락하고 말았다. 일은 성(性)보다 훨씬 많이 사람들을 유혹에 빠뜨린다. 성과 관련된 다윗의 죄보다는 일에 관련된 사울의 죄가 더 파괴적이었다.

아버지는 정육점 주인이셨다. 나는 일과 예배가 사실상 구별되지 않았던 환경에서 자란 것을 늘 행운으로 여긴다. 내게 일의 세계는 곧 거룩한 장소였다. 우리가 다녔던 교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교회였다. 몇 년 동안 우리 교회에 계셨던 한 목사님은 성막, 성전, 유대인의 제사 제도에 도통하신 분이었다. 나는 그런 종류의 예배 세계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짐승이 도살되고 바쳐지는 광경과 소리, 갓 흘린 피 냄새, 파리들이 날아다니는 소리 등을 경험하며 자랐다. 실로의 제단에 황소가 바쳐지는 모습은 중심가에 위치한 우리 가게 도마 위에 뿔 짧은 암소가 올려지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가게에서 매일같이 드려졌던 예배는 유대인들의 예배처럼 신체의 오감이 총동원되고 자극되는 예배였다. 예배는 결코 말쑥하고 점잔빼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 후 25년이 지나고 이제 목사가 된 나는, 예배 장소에 들어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대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일할 때 쓰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임을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목사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며 성령을 받는 영성 생활의 일차적 환경은 바로 일의 세계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늘 절감한다. 

왕업 :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은 일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제 다윗이 하는 일은 왕업(kingwork)이었다. 모든 참된 일, 모든 진정한 일은 왕업에 포함된다. 거룩한 소명으로서의 일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주된 임무다.

왕을 섬기는 왕 : 다윗이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종으로서 섬기는 일은 그 자체가 이미 왕으로 통치하는 일이었다. 사울의 궁정에서 다윗은 왕을 섬기는 왕이었던 셈이다. 소명을 따라 사는 삶의 열쇠, 즉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사는 삶의 열쇠는, 어떤 직업이냐가 아니라 어떤 환경에 있든지 우리가 그 일을 왕업으로 행하느냐이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 : 다윗이 베들레헴 언덕과 풀밭에서 아버지의 양을 돌보면서, 기도하고 노래하며, 묵상하고 찬미하는 가운데 형성된 그의 상상력 속에는 양, 곰, 사자를 모두 압도하는 더 크고 거대하며 강한 무언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을 갖고 있었기에 에베스담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냇가에서 무릎 꿇기 : 다윗이 던질 돌을 고르며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골리앗은 무릎을 꿇은 다윗을 경멸한다. 계곡 왼쪽의 사울 왕은 무릎을 꿇고 있는 다윗이 걱정스럽다. 시냇가에서 무릎을 꿇은 다윗의 모습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무언가를 보여 준다. 

사울의 갑옷 : 사울이 좋은 의도로 다윗에게 자신의 갑옷을 입혀준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투구를 벗고 칼을 풀고 갑옷을 벗어버렸다. 다윗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방법으로(사울의 무기를 이용해서) 일을 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목동 시절에 자신이 익숙하게 다루었던 무기(물매와 돌멩이들)만을 사용할 만큼 참으로 신중했고 참으로 대범했다. 마침내 그는 거인을 쓰러뜨렸다.

위기의 순간 : 그 순간은 다윗뿐만 아니라 믿음 없는 형들과 사울, 이스라엘 전체 그리고 지금 우리 모두까지 포함된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 젊은이가 시냇가에서 돌을 고르고 있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행동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무릎꿇은 다윗은 우리를 회복의 길로 인도해준다.

달려가는 다윗 : 이제 다윗은 더 이상 무릎을 꿇고 있지 않다. 다윗은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거인을 향해 돌진해 가는 것이었다. 다윗의 물매가 두세 번 빙빙 돌더니, 다섯 개의 매끄러운 돌 중 한 개가 세차게 날아가 블레셋인의 이마에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거인은 정신을 잃고 쿵 하고 땅바닥에 쓰러졌고 곧 목숨을 잃었다. 그 날 엘라 골짜기에서 있었던 거룩한 역사는 다윗이 하나님의 실재 안에 온통 잠겨 있었던 것과, 다윗의 인간됨이 강력하게 발휘된 것이었다. 

4. 우정 - 다윗과 요나단

다윗은 적대감을 경험했다. 다윗의 영성 -그의 기도방식, 그가 살아간 방식 -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다윗이 그 적대감을 경험하고 대처한 방식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설명이 된다. 

적, “다윗을 벽에 박아 버리겠다” : 다윗의 적대감 경험의 주된 원천은 사울 왕이었다. 사울은 다윗을 증오했고 여러 번 그를 죽이려고 했다. 사울은 다윗이 선했기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좋은 일을 했는데도 비난을 받을 때, 최선을 다했는데도 느닷없이 심한 반대를 겪을 때 우리는 당혹하게 된다. 

친구, 다윗에게 마음이 끌린 요나단 : 광기와 발광, 비열함과 증오를 겪는 와중에서도, 다윗은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의 우정을 통해 흔치않은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둘은 함께 대화하고 기도하며 사울을 이해하려고 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우정은,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거듭된 시도를 막았다. 

선의 마력 : 사울이 라마에 있는 다윗에게로 두 번, 세 번 부하들을 보내어도 일이 여의치 않자 사울 스스로 라마를 찾아갔다. 살기 등등해서 그 곳에 도착했으나, 결국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그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선의 마력에 사로잡혀 엎드러졌다. 요나단의 우정은 다윗에게 그가 선택받았다는 것과 그의 소명과 상상력을 굳게 다져주었다.

5. 성소 - 다윗과 도엑

아히멜렉 : 다윗은 허기지고 무방비인 상태로 놉의 성소에 들어왔었다. 아히멜렉은 제단에 올리는 오직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과, 골리앗의 칼을 제공한다. 이러한 성소의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근본적인 영성이다. 우리에게는 달려들어갈 수 있는 성소가 필요하다.

도엑 : 그 날 놉의 성소를 방문한 사람은 다윗말고 한 명 더 있었다. 그의 이름은 도엑이었다. 그는 다윗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하게 관찰했다. 철두철미하게 정치적 기회주의자였던 도엑은 사울 왕에게 놉에서 보았던 일을 보고했고, 놉에 있던 무방비상태의 제사장들 85명과, 여자들, 아이들, 가축들까지 학살했다. 거룩한 곳에 들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때마다, 우리는 더 나아져서 나오거나 더 나빠져서 나올 수도 있다.

6. 광야 - 엔게디의 다윗

엔게디는 사해 옆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로서, 이스라엘의 남동쪽 외딴 곳에 있는 소금물 호수다. 다윗은 광야에서 인생을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광야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세월을 보냈다. 다윗은 거기에서 광야가 진리의 장소, 아름다움의 장소, 사랑의 장소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다윗이 광야에서 보낸 세월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에 속한다. 

없어서는 안될 광야 : 광야는 무언가 거대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광야에 있을 때, 우리는 흔히 삶이 단순해지고 깊어지는 것을 체험한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며칠(혹은 몇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자신이 좀더 자신다워지고, 정리되고, 자연스러워진 것을 느낀다. 광야는 우리가 위험과 죽음에 직면하는 곳이지만, 맞이하는 태도에 따라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신비와 삶의 특별한 소중함에 직면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광야 이야기 : 다윗의 엔게디 광야 이야기는 모세의 시내 광야 이야기와, 예수님의 유대광야 이야기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다윗의 광야 이야기에서 우리는, 미움받고 한 사람의 인간이기를 거부당하고 한 마리 사냥감 신세로 전락한 젊은이가 신성 모독의 삶과 기도의 삶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 결국 기도를 택하는 모습을 본다. 그는 기도를 선택하면서 거룩을 연습하는 삶을 시작한다. 그것은 매우 현세적인(earthy) 거룩이었으나 분명 거룩이었다.

동굴 속의 사울 왕 : 다윗의 광야 생활 초기 중 엔게디 근처의 광야 동굴에서 다윗과 사울이 만난 이야기가 있다. 사울이 동굴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다윗은 거기서 비록 결함을 가지긴 했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장엄한 왕을 보았고 경의를 표했다. 얼마 후 십에 있는 하길라산에서도 그는 손쉽게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윗은 사울에게서, 다른 누구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주께로 피합니다” : 다윗은 거룩을 발견함과 동시에 피난처를 발견했다. 보통 우리는 엉망이 되어 버린 집안, 말 안 듣는 차, 까다로운 배우자, 고집센 아이 등(혹은 찬란한 해돋이, 희열에 찬 미소, 꿰뚫는 통찰 같은 기막힌 순간들)의 엔게디 광야에서 살고자 바동거리며 출발한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어느덧 하나님의 광야에서 희열을 맛보는 것이다.

7. 아름다움 - 다윗과 아비가일

광야에서 다윗 앞에 무릎을 꿇고있는 아비가일. 모욕을 당한 다윗은 복수를 하기 위해, 격분한 400여 명의 동지를 이끌고 복수의 길을 가는 중이다. 그런데 갑자기 아비가일이 나타나 다윗에게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그의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준다. 

다윗과 그의 선한 사마리아인단 : 다윗은 광야에서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을 모아 선한 사마리아인단을 결성했다. 이들의 보호를 받았던 부유한 목축업자 나발이 잔치음식을 나눠주기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다윗과 그 동료들을 모욕했을 때 다윗은 이성을 잃었다. 이제 그의 눈에 나발은 악취를 뿜어대는 더러운 쓰레기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다윗은 또 다른 사울이 되어 버릴 위기에 있었다.

“생명 보자기에 싸여” : 아비가일은 나발이 다윗을 모욕했다는 것을 감지하고 다윗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재빨리 잔치음식을 가득 싸서 나귀에 싣고 길을 떠나 중간에서 다윗을 보자 황급히 무릎을 꿇고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증언한다(“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놀랍게도 다윗은 멈춰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귀를 기울인다. 아비가일의 아름다움으로 다윗은 다시 하나님을 보고 듣게 된다. 

증거로서의 아름다움 : 다윗은 아비가일과의 만남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기 자신 안에서 거룩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게 된다.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자존심을 지키고 피를 보려고 달려갔던 다윗, 바로 자신에게서 말이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셨던 정체성을 회복시켜 준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 : 이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우리를 몹시 화나게 만든다. 그러나 그들을 바로잡아 주겠노라고 나서면서 우리 자신도 그들과 같은 어리석은 악독함에 빠지는 때가 많다. 다윗은 후에 기도를 통해 나발(‘어리석은 자’란 뜻)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난다. 

8. 공동체 - 시글락의 다윗

다윗은 광야 생활에 관한 한 노련한 대가였다. 다윗의 광야 생활 중에 일어났던, 전혀 기대하지 못했고 너무도 뜻밖인 ‘최고’는 거기서 지금의 교회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둘람과 그 다음의 시글락이 바로 그것이다.

아둘람 굴 : 사울 왕을 피해 홀로 도망치던 다윗이 블레셋 족속 가드의 통치자 아기스왕을 피해 아둘람 굴로 몸을 피하자 40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이것이 다윗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되는 첫 번째 모습이다. 그들이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진 백성임을 볼 수 있다. 광야 영성은 우리가 보통 때라면 결코 사귀려고 하지 않았을 사람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는 일을 포함한다.

가드의 아기스 :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600명까지 불어난 다윗 공동체가 가드의 아기스 왕과 고용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이다(삼상 27:2). 전에 홀로 망명했던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바로 그 왕, 더더구나 블레셋 왕과 말이다. 사실 이러한 일들 하나하나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다윗은 그저 그렇게 했다. 하나님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시글락 : 다윗은 아기스를 위해 일하면서, 자신과 군대가 머무를 수 있는 도시 하나를 달라고 요청했다. 아기스는 그에게 시글락을 주었다. 시글락은 다윗의 기지가 되었고, 가족과 병사들을 위한 그의 ‘교회’가 되었다. 바로 시글락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지하게 살려는 이들은 자신의 기대에 전혀 맞지 않는 장소와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교회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시글락에 살고 있는 것이다.

9. 관대함 - 브솔 시내의 다윗

브솔 시내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다. 그 곳은 다윗에게 뿌리를 둔 생명 나무인 예수님의 족보에 속하는 모든 사람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브솔 시내의 다윗 이야기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접촉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 재연되고 있다. 

파괴당한 시글락 : 다윗과 600명의 부하가 가족과 아이들을 무방비 상태의 시글락에 놓아두고, 떠나 있던 중에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끌고 갔고 물건들을 모두 가져갔다. 마을은 초토화되었다. 다윗의 부하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 600명은 비탄에 휩싸였고, 분노는 그들의 지도자인 다윗을 죽여버리자는 데까지 고조되었다. 그러나 다윗의 계획은 분노가 아닌 기도와 상담에서 나왔다. 그는 빼앗긴 여자와 아이들을 되찾아오기 위해 길을 떠났다.

병든 이집트인 : 다윗의 600명 부대는 아말렉 약탈자들을 추적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상태였다. 그들이 브솔 시내 지점에 이르자 200명의 부하는 더 이상은 갈 수 없을 만큼 완전히 탈진했다. 그래서 그들은 브솔 시내에 그대로 남겨졌다. 다윗과 나머지 400명은 아무리 찾아도 아말렉인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반쯤 죽은 채 버려진 병든 이집트인을 발견했다. 다윗의 군대는 그를 보자 물과 음식, 무화과와 건포도를 주어 극진히 돌보아주었다. 다윗에게서 보살핌을 받고 살아난 그 이집트인은 그들에게 아말렉인들의 거처를 알려주었으며, 그들은 빼앗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되찾을 수 있었다.
  
브솔시내 : 이 이야기의 절정은 브솔 시내에서 일어난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시글락으로 돌아가던 400명은 브솔 시내에 남겨진 200명의 동료들을 만나자 아말렉에게서 빼앗아온 물건을 단 한 개도 나누어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바로 그 날 브솔 시냇가에서 다윗은 “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야 한다.(삼상 30:23-25)”고 판결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관대한 은혜로 대하셨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서로를 놀랍도록 관대한 은혜로 대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념이었다.    

“돌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이다“ : 다윗은 열정(passion)의 사람인 동시에, 자비(compassion)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열정은 공동체적 열정, 즉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com) 따뜻한 정(passion)이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의 정열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사람이었다. “돌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일이다.”라고 폰 휴겔은 말했다. 

10. 슬픔 - 비가를 부르는 다윗

내 고향 마을, 옆집 프리다 아주머니는 내 어린 시절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슬픔이란 정당한 것이며 어디에나 퍼져 있는 것임을 알게 해 주었다. 다윗 역시 나의 성인 시절 상상력을 자극하여 바르게 슬퍼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커다란 비탄은, 끔찍한 상실과 그에 따른 모든 감정을 정직하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루는 건강한 영혼의 심연 속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다윗은… 슬퍼하여” : 다윗은 비탄에 젖었다. 그의 넘치는 열정과 비탄은 동일한 인생관, 동일한 가치관의 양면이었다. 즉 삶은 소중하다는 생각 말이다. 다윗은 인간의 삶을 넘치는 열정으로 존중했다. 그의 비탄의 깊이는 그의 그러한 숭배의 높이를 보여 준다. 

“… 조가를 지어서 부르고” :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했다(삼하 1:19-27). 다윗의 비탄의 노래에는 관대함이 넘쳐흐른다. 한편, 다윗의 비탄은 동정심을 유발시키지 않으면서, 시로서 정화되었다.

“그것을…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였다” : 다윗은 자신의 슬픔을 비가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 노래를 배우라고 명령했다. 그것을 암기하고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 삼도록. 우리는 죽음을 비롯한 여러 상실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맥락 속에서 다룰 줄 아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주권은 최종적으로 부활로서 드러날 것이다.  

11. 어리석음 - 다윗과 스루야의 아들들

우리는 동지라고 믿었던 이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 삶이 비참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 우리 삶을 힘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바로 스루야의 아들들이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에 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스루야의 아들들이 없는 장소나 모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상황 : 10여 년 동안 광야에서 쫓기며 산 후 이제 다윗은 나이 서른의 통치자가 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할 것인가?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피하여 도망갈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하나님을 불필요하게 여길 것인가? 스루야의 아들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알아서 행동할 것이다. 우리의 방식대로. 더 이상 하나님께 매달려서야 쓰겠는가?”

아브넬과 요압 : 저급하고 좀스러우며 거만한 전략가들은 역사적 상황을(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자신의 명성과 야망을 위한 무대로 이용하는 데 몰두한다. 아브넬은 잔꾀를 통해서, 요압은 폭력을 통해서. 아브넬은 이스보셋의 유약함을 이용해 자신을 위해 교활하게 다윗 편에 붙으려 했고, 요압은 다윗 군대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개인적 원한을 갚았다. 

어리석은 자들 : 왜 요압이나 아브넬 같은 얼간이들이 그렇게도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가? 대답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상황과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 이용(아브넬)이나 폭력(요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스루야의 아들들 : 다윗의 여동생인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 아비새, 아사헬은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향한 다윗의 노력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거룩을 추구하는 삶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지만, 이들 중에는 ‘스루야의 아들들’도 있어 다윗의 삶을 무척이나 어렵게 만든다. 그들의 시끄러운 자리 다툼으로 인해 모든 일이 늘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12. 성장 - 다윗과 예루살렘

얼마 전 다윗은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새로운 정부를 위한 새로운 중심지가 필요했다. 대담하게도 다윗은 여부스족 요새 예루살렘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그 도시는 ‘시온’으로 불렸고, 지금까지 다윗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랍비 게르소니데스 : 프랑스계 유대인 랍비 게르소니데스의 본문 읽기에 따르면, 통치권을 확립할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던 다윗은 예루살렘을 선택해 그 곳의 우상들을 청소했는데, 그 우상들이란 절뚝거리는 야곱과 눈먼 이삭의 모양을 한 오래된 조상(彫像)들로서, 여부스인들이 이스라엘의 ‘조상들(fathers)’을 흉측한 악의 표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더 큰 걸음과 더 넓은 포용 : 다윗은 사울의 오랜 적대감에도 비참해지지 않았으며, 블레셋에 대한 과도한 악감정 속에 갇히지 않았고, 이득에만 집착하는 인간으로 전락하지도 않았으며, 과거 업적의 명성을 우려먹고 사는 나태에 빠지지도 않았고, 애정 때문에 탈선하지도 않았다. 즉 하나님 안에, 기도 안에, 순종 안에 자리잡은 그의 걸음걸이는 더 커졌다. 그의 포용력은 더 넓어졌다. 

유기적 영성 : 사무엘하 5:10의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에서 다윗 이야기는 대전환기를 맞는다. 지금까지는 다윗의 신분이 점점 상승해 온 이야기였다. 이제부터는 다윗이 통치하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다윗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우리의 복잡 다단한 삶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얻는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유기적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주님은 나의 목자 : 다윗의 즉위식에 사용된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라.” 왕 대신 목자와 영도자(prince)라는 단어가 선택되어 쓰인 것이다. 사람들은 다윗이 젊은 시절 목자였을 때의 직관과 기술을 발휘하며 자신들을 통치해 주기를 바랐다. 사람들은 다윗이 광야 생활을 통해 연마한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통치해 주기를 바랐다. 다윗은 그들의 요청대로 살았다.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다윗은 계속 다윗이었다.

13. 종교 - 다윗과 웃사

30년 전 이스라엘은 블레셋인들에게 법궤를 빼앗긴 적이 있다(삼상 4-7장). 다윗이 왕이 되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통치권 확립 작업이 끝나자, 새로운 수도로 법궤를 가져오게 한다. 그런데 법궤를 되찾아오는 길에 웃사는 죽었고 다윗은 춤췄다. 법궤는 죽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고 춤추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법궤 수도원 : 몇 년 전, 나는 아내와 몇몇 친구들과 함께 다윗이 살았던 고장에서 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우리가 서 있던 곳은, 30년 동안 법궤가 유배되었던 아비나답 제사장 집이었다. 우리가 서 있던 곳은 다윗이 통치와 예배의 새로운 중심지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셔가기 위해 왔던 곳이다. 우리는 성경을 꺼내어 함께 사무엘하 6장을 읽었다. 그리고 예배에 대해서, 또 예배하기 위해 우리 각자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의 발 아래에 엎드려 경배하자! : 그리고 나서 우리는 본문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련된 다윗의 시편, 시편 132편을 가지고 함께 기도했다. (시 132편 본문 생략)

법궤 :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법궤는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들을, 다윗의 통치뿐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리심 밑에 모으는 구심체가 될 것이다. 아비나답의 두 아들 웃사와 아히오가 짐수레에 법궤를 실어 나르던 중에 수레가 한쪽으로 기울었고 법궤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웃사는 법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사적으로 손을 갖다 대었다. 그 순간 그는 쓰러져 죽었다. 

웃사의 죽음 : 웃사는 왜 죽었을까? 왜 하나님은, 그를 치셨을까? 수세기에 걸쳐 반복해서 등장한 한 가지 통찰이 있다. 주제넘게 하나님 관리책임자 행세를 하려 들면 죽게 된다는 것이다. 웃사는 하나님을 책임 관리하는 담당자였으며 계속해서 담당자 자리에 있고자 했다. 그는 그가 원하는 곳에 하나님을 집어넣고 계속 가두어 놓고자 한다. 이러한 삶의 최종 결과는 죽음이다.

다윗의 춤 : 왜 다윗은 춤을 추었을까? 다윗은 하나님에 관해 웃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무언가를 알았던 것이다. 다윗은 결코 하나님 관리 책임자 행세를 하지 않았다. 다윗은 하나님께 화를 내었지만 죽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던 것이다. 그는 그저 경배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반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갈의 조롱 :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이 법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업신여겼다. 왜 좀더 왕다운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미갈에게 하나님은 단지 사회적 편의 장치, 정치적 지지물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윗은 신경 쓰지 않았다. 

14. 주권적 은혜 - 다윗과 나단

다윗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하나님이 통치자인 것이다. 다윗은 보통 의미로서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심을 증거하는 자로서의 왕이다. 다윗은 자신의 보좌를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는 강단으로 사용한다. 다윗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이미지와 확신이 흠뻑 배어 있다. 

하나님께 ‘집’을 지어 드리기로 결심한 다윗 : 다윗은 자신에게 복을 주셨고 약속을 이루셨으며 정의롭게 심판하셨던 하나님께 벅차오르는 감사를 느꼈다. 그는 그토록 많은 것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성소를 지어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단에게, ‘하나님을 위한 다윗의 건축계획’이 ‘다윗을 위한 하나님의 건축계획’에 방해가 됨을 보여 주셨다. 

앉은 다윗 : “다윗 왕이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 앞에 꿇어앉아….(삼하 7:18)” 다윗은 하나님 앞에 앉아서 왕으로서의 주도권을 포기하고 권세를 내려놓고 권좌에서 내려와 그의 왕이신 하나님 앞에 잠잠히 그리고 겸손히 나아갔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품었던 다윗. 그런 다윗을 멈춰 세운다는 것은 마치 한 무리의 도망치는 말을 따라잡아 멈춰 세우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단은 그를 멈춰 세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윗은 자신을 멈춰 세우시는 하나님께 순종했다. 

전략적으로 ‘아무 일도 안 하기’ :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앉았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차리는 것, 자신의 계획 대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 자신의 권위와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왕이기를 포기하고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에 참으로 순종하는 왕이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15. 사랑 - 다윗과 므비보셋

므비보셋은 다윗과 가장 절친했던 친구 요나단의 아들이다. 다윗 이야기에서 므비보셋의 이름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삶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법을 전해 준다. 

므비보셋(1) : 사울 왕과 요나단 왕자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인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므비보셋의 유모는 당시 다섯 살이던 아기를 업고 허겁지겁 달려가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그 후로 므비보셋은 다시는 걷지 못하는 절름발이로 자라났다. 므비보셋은 그 때부터 세상을 향한 원한 속에 갇혀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자신이 처한 삶의 한계 문제를 회피하는 데 익숙했다. 그에게 있어서 그토록 험악하고 비열하고 무정한 세상은 곧 다윗의 얼굴이기도 했다. 

므비보셋(2) : 이제 므비보셋은 성인이고, 여전히 지독한 불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다윗 앞에 출두하라는 명령에 그는 공포밖에 느낄 수 없었다. 다윗의 궁전으로 인도된 므비보셋에게 다윗은 이름을 불러주며 그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일전에 요나단과 맺었던 맹세대로, 므비보셋에게 조부 사울의 모든 소유지를 넘겨주고 사울의 종이었던 시바로 하여금 돌보게끔 한다. 그는 므비보셋을 가족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였고, 매일 세 끼 식사로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 이것이 관대하게 아낌없이 넘치도록 내어주는 사랑이다. 

므비보셋(3) : 세 번째 므비보셋 이야기는 여러 해 후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던 기간(삼하 16-19장)에 나온다.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은 몇몇 충성스러운 신하들만을 거느린 채, 예루살렘에서 탈출한다. 므비보셋의 하인인 시바는 그 탈출의 밤에 자신의 상전 므비보셋이 왕이 될 기회를 포착하고자 배신했다고 이야기한다(삼하 16:1-4). 그 후 승리의 재입성을 하는 다윗에게 므비보셋은 시바가 자신을 배신하는 바람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자기로서는 꼼짝 못하고 있었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삼하 19:24-30). 그런데 이 두 이야기에 대해 다윗은 뜻밖의 반응을 보인다. 다윗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따지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저 두 사람 모두를 자신의 도시와 집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그는 므비보셋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한다. 

16. 죄 - 다윗과 밧세바

다윗과 관련해서 결코 잊지 못하는 두 이름이 있다. 하나는 거인 골리앗이고 또 하나는 여인 밧세바다. 그 둘은 모두 다윗을 일종의 시험장, 곧 그의 속마음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 만남의 자리로 데려간다. 골리앗과의 만남은 다윗이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드러내주며, 다윗은 밧세바와의 만남을 통해서, 기도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된다.  

죄짓는 다윗 : 봄이다. 다윗의 군대는 출전 중이다. 그러나 다윗은 뒤에 남았다. 집에 남았다는 것은 그의 영혼의 빈혈 증세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어느 날 오후 다윗은 궁전 옥상에서 우연히 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답다. 그는 그녀를 데려오게 해서 잠자리를 같이 하고, 그 다음에는 내팽개치듯 그녀를 돌려보낸다. 그녀의 이름은 밧세바다. 그녀의 남편 우리아는 그 때 싸움터에 나가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밧세바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다윗에게 전갈을 보낸다(삼하 11:5). 이제 문제를 다루는 데 능수능란해진 다윗은 이 일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그에게 한 달의 휴가를 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계략이 먹혀들지 않자 우리아를 죽을 것이 확실한 전방에 배치시켜서 전사하게 한다. 애도의 기간이 끝나고, 다윗은 밧세바를 데려와 그녀와 결혼한다. 죄가 대부분 그렇듯이, 다윗의 죄 역시 은밀하고 점진적인 과정을 거친다. 죄를 짓고 또 짓고 있다는 사실에서 다윗과 우리가 서로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이 다윗과 동일한 부류의 죄인임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복음 이야기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설교하는 나단 : 이 이야기의 복된 전환점은, 다윗의 목사 나단이 등장하여 그에게 설교를 들려줄 때다. 나단의 설교를 한 마디 한 마디 들을수록, 다윗은 점점 더 종교적이 되어간다. 애지중지하는 양을 잃은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끼고 그 양을 빼앗은 부자에 대해서 분개한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복음이 정확히 초점을 맞춘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당신이. 이것이 바로 설교자들이 해야할 일이다. 나단은 이 예술의 명수였다. 

‘펠릭스 쿨파‘ : 복음을 아는 사람들은 “내가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선언이 실은 소망이 가득 담긴 선언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가득찬 선언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한 말로 여겨지는 라틴어 어구 ‘펠릭스 쿨파(felix culpa)’는 “오, 경사스런 죄여!(O happy sin!)”로 나의 죄를 인지하고 고백할 때에야 비로소 나를 나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하고 응답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해야할 가장 주된 임무는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범한 죄를 인지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다윗 :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다윗을 찾아온 나단은 그 날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회복시켜 주었고 동시에 비유 설교를 통해 죄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다윗의 마음은 녹아내렸다. 다윗은 나단의 힘있는 설교를 통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표면적인 죄 이전에 자신이 하나님을 모독한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윗의 시편 51편은 하나님을 다시 찾은 것에 대한 감동적인 고백의 시다. 다윗의 죄가 아무리 극악무도하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것을 훨씬 넘어선다.    
예수님 : 나단 앞에 서 있는 다윗과 빌라도 앞에 서 있는 예수님. 내가 누구인지를 알 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때, 하나님이 우리 앞에 개인으로 서신다. 진실하고 솔직하게 열린 개인으로. 이 개인적인 하나님이 나의 개인적인 죄를 직면하고 처리하신다. 나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끌어 주시면서.

17. 고통 - 다윗과 압살롬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에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삼하 18:33)” 이것은 역사상 가장 애처롭고 가슴을 찢는 통곡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아들이 에브라임 숲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이 창자를 쥐어짜며 외친 통곡이었다. 그것은 마셔야 할 쓴잔이었다. 아마 이것이 다윗이 겪은 가장 완전한 인간적/신적 경험이었을 것이다. 

고통의 문제 : 믿음의 삶, 다윗 같은 삶, 예수님을 따르는 삶, 예배를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고통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성경과 복음적 전통은 늘 현실과의 일치성을 역설해왔다. 현실과의 일치성은 압살롬과 관련된 다윗의 고통의 문제에 주목하게 한다. 

고통의 역사 : 고통에는 역사가 있으며 그것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죄는 죄를 키운다. 다윗은 압살롬의 죄 때문에 아들 암논을 잃었고, 자신의 죄 때문에 아들 압살롬을 잃었다. 압살롬은 용납받기를 원했고, 인격적인 용서를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압살롬은 이번에는 형세를 뒤집어 자신을 왕이라고 선포했고 예루살렘과 궁전을 점령했다. 그러자 다윗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광야로 도망쳤다(삼하 15:13-23).

회복되는 다윗 : 광야는 다윗의 인격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그 곳으로 다시 돌아온 다윗에게서, 우리는 그의 다윗다움이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시련은 다윗 속에서 최선을 끄집어내었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통해 겸손을 회복했다(삼하 16:5-14). 그 저주의 선포는 다윗을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고통 속에서 다윗은 기도를 회복했다. 아히도벨의 배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다윗은 기도를 회복했다. 고통 속에서 다윗은 자애를 회복했다. 그는 다윗은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슬피 울었다. 그간 겪었던 고통은 수년 동안 아들을 거부하며 굳어졌던 그의 마음을 이처럼 애끓는 비탄의 마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18. 신학 - 다윗과 하나님

지금까지는 제삼자가 다윗에 대해 말했지만, 이제는 다윗이 직접 앞으로 나와서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시편 18편은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기도문이다. 이 시편만큼 다윗의 생명력이 약동하는 기도문도 없다. 

“하나님은 나의 반석” : (시편 18편 2-7절 생략) 다윗의 삶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 한 가지를 고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생각했으며 하나님을 상상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윗은 은유로 기도했고 경험을 기도로 삼았으며 계시를 기도로 삼았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의 내면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되었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그 목소리를 높이셨다” : (8-20절 생략) 다윗은 이 시에서, 갈라져서 두 동강이 난 바다, 천둥으로 흔들리는 산의 모습을 상상해 낸다. 그는 이 이야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 다윗은 평상시 그답게 말들을 놀랍도록 멋지게 노래하며 기도하는 데 사용한다. 다윗이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다윗이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우리가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많은 의미를 준다. 

“주께서 나에게 상을 내려 주시고” : ( 21-28절 생략) 그런데 이 시편의 분위기와 운율이 숙고하고 반추하고 명상하는 것으로 느닷없이 변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우리의 여러 가지 행동들이 있다. 성품을 함양하고 결정을 내리고 습관을 기르고, 한 곳에 열중하고 계명에 순종하고 죄를 고백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커다란 부분은 아니지만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는 방식은 중요하다.  

“주께서 나에게 싸우러 나갈 용기를 북돋우어 주시고” : (29-46절 생략) 이제 다윗은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구비시켰는지에 대해 증거하는 기도를 한다. 그러나 인간다운 삶의 정수로 제시되는 다윗의 삶의 여건이 전적으로 비인간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다윗이 사람을 죽이는 그러한 전쟁에 정열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다윗이 살았던 문화적 여건은 상당부분 블레셋 문화와 가나안식 도덕관 - 폭력과 난잡한 성문화 - 이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다윗이 어떤 여건에서 살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들은 바로 인간적 여건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여건이다.

“나의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여라!” : (47-51절 생략) 다윗이 탐험하고 부딪쳐 보지 않은 삶의 영역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항상, 적어도, 결국에는 그의 삶의 가장 큰 부분은 하나님이었다. 다윗의 삶은 하나님을 긍정하는 삶, 하나님께 긍정을 받는 삶, 드넓고 광대한 삶이었다. 다윗에게는 더 다듬어져야할 부분도 많았지만 성경은 그것들을 그의 오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상황으로 제시한다. 이는 먼저 선해져야 그 보상으로 하나님을 얻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반박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일단 그저 은혜로 하나님을 얻는다. 그러고 나서 평생동안 꾸준히 하나님의 방식으로 훈련받는다. 

19. 죽음 - 다윗과 아비삭

이제 다윗은 죽는다. 죽음은 우리의 인간됨을 종결시킨다기보다는 입증해 준다. 따라서 참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숙고해야 한다. 죽음을 부인하는 것은 삶을 회피하는 것이다. 

다윗의 죽음 : 40년 전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숭고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죽음을 자신의 존경과 사랑을 나타내 보이는 계기로 삼았다. 다윗처럼 참 삶의 길을 아는 사람들은 죽음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이 죽었을 때는, 숭고한 반응은 고사하고 애도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가 죽을 당시 집안은 온통 싸움판이었다. 그의 유언은 야비하고 무자비했다. 그것은 전에는 자비를 베풀어주었던, 오랜 숙적 시므이를 처형시키라는 명령이었다.

수넴 여인 아비삭 : 그러나 아비삭은 예외다. 아비삭은 다윗의 임종을 둘러싼 암흑과 혼란 속에서 빛나는 단 하나의 불빛이다. 나는 아비삭의 등장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활용되는 성적인 기능 정도로 축소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그녀는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죽음의 신성함에 대한 증거이며, 죽어가는 다윗의 옆을 지키는 신성한 임재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죽어가면서 신하들, 아들 아도니야, 아내 밧세바에 의해 차례로 버림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다윗을 저버리는 와중에서도 아비삭만은 조용히 그리고 아름답게 다윗의 옆을 지키고 있다. 

신하들, “젊은 처녀를 한 사람 구하자” : 신하들은 다윗의 죽음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취급한다. 그들은 우선 이불을 더 많이 덮어주는 방법을 취한다. 그 방법이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들은 이스라엘 골짜기의 수넴 마을에서 아비삭을 데려온다. 그러나 이 치료법 또한 성공하지 못한다. 다윗은 점점 하나의 문젯거리가 되었고 그만큼 인격체로 대접받지 못한다. 이는 통탄스러운 비인간적 대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비삭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다윗 곁에 계속 남아 있다.

아도니야, “내가 왕이 되리라” : 아도니야는 다윗의 아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이로서 서열상 왕위 계승자다. 그러나 다윗이 오랜 기간 병석에 누워있으면서 쉽사리 죽지 않자, 마침내 아도니야는 완전히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탁월하고 이름난 두 인사 아비아달 제사장과 요압 장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자신을 왕으로 선포한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죽음을 존엄하게 대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자신의 죽음을 앞당겼다. 마침내 다윗의 명령에 따라 솔로몬이 기름부음을 받아 왕으로 즉위했고, 아도니야는 야비한 기회주의자로 간파되어, 솔로몬은 아도니야를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삶의 제한을 존중하고 죽음을 존엄하게 대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깊이 있게 해주는 것이다. 

밧세바, “누가 보위에 오를 것인가?” : 죽어가는 다윗에 대한 밧세바의 반응은 우리를 실망시킨다. 물론 밧세바의 책임감 있는 행동은 다윗으로 하여금 책임을 다하게 만든다. 밧세바의 관심과 관여 때문에 다윗의 왕국은 솔로몬의 왕국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은 결말을 기대했다. 애도하는 밧세바의 모습, 죽음의 신성한 신비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며 다윗에게 그의 시편들 중 하나를 읽어주는 밧세바의 모습을 말이다.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것은, 참으로 그리고 철저히 인간적인 삶의 실재를 상세히 익히고 느끼는 일이다. 

예수님의 죽음 :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 다윗의 말로 마지막 기도를 하셨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하고 부르짖으셨다.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하는 뜻이다. 시편 22편이 바로 그 기도다. 이것은 죽음에 관해, 죽어감에 관해 회피하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은폐하는 일 없이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예기했던 바, 예수님이 죽음을 경험했던 방식이다. 이것은 놀랍도록 생명력 넘치는 삶에 대한 증언이다. 그토록 격심한 죽음의 고통을 토로했던 사람의 입에서 이런 기도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실제로 그랬다. 다윗이 그랬다. 예수님이 그러셨다. 예수님은 다윗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셨다. 그분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임박한 죽음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상쇄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것에 예리함과 힘을 더했다. 그리고 부활은 그것의 최종 확증이었다. 

부활의 씨앗 : 어떻게 다윗은 절망의 울음에서 기대에 찬 외침으로 옮겨갔는가? 어떻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부활로 옮겨 가셨는가? 시편 22편 본문에는 이를 설명해주는 구절이 없다. 그러나 다윗처럼 기도하는 사람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들은 늘 그것을 경험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에 관한 설명은 거의 얻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 우리의 기도의 삶 속에 말없이 숨어있는 이러한 선회축(旋回軸)들이야말로 바로 부활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죽어가는 동안 내내 아비삭은 끝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분을 따르고 섬겼던 여인들 또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죽어가는 그분 옆에서 말없이 기도하면서. 그리고 그 여인들 중 한 사람이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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