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죄의 본질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본래의 상태의 영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냄을 받은 후 가인과 아벨을 낳았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아담이 130세에 셋을 얻었기 때문에, 아담의 무죄 상태는 최대한 100년 내지 110년 가량을 넘지 못할 것이다(창 4:1-3, 25; 5:3).
천사들의 타락
세상의 악은 궁극적으로는 천사들의 타락에서 기원하였다. 에덴 동산에 들어와 하와를 유혹한 뱀은 사탄이었다(계 12:7-9). 천사는 언제 타락하였는가? 성경은 천사들이 언제 타락하였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계시해 주지 않으나, 천사들의 타락이 인류 역사의 초기에 있었다는 암시가 신약에 있다. 요한일서 3:8는 증거하기를,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하였다. ‘처음부터’라는 말은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마귀는 인류의 역사 초기에 범죄하였고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하는 데 성공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들의 타락이 천지 창조의 6일이 끝나기 전의 어느 때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천사의 세계를 포함하여 천지 만물이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보며, 창조된 세계는 모두 선하였기 때문이다(창 2:1; 1:31).
천사는 어떻게 타락하였는가? 천사들의 타락은, 비록 하나님의 뜻 안에서 되어진 일이지만, 하나님께 직접적 원인이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이 악의 창조자가 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타락은 그 자신들 밖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다. 성경은 사탄의 죄를 교만이라고 암시한다. 디모데전서 3:6,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그렇다면, 천사 타락의 원인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다수의 천사들이 그를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유다서 6절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어떤 이들은 이사야 14:12-15과 에스겔 28:12-16의 말씀을 사탄의 타락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그 구절들은 바벨론 왕과 두로 왕에 대한 예언일 뿐이라고 본다.
타락한 천사들(영들)은 사탄과 그의 사자들로 분류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들의 두목이다. 그는 ‘사단’(욥 1:6, 대적자), ‘마귀’(계 12:10, 디아볼로스διάβολος, 참소자), ‘바알세불’(마 12:24, 더러움의 주), ‘벨리알’(고후 6:15, 무가치한 자, 악한 자), 아바돈 혹은 아폴뤼온(계 9:11, 파괴자), ‘귀신[들] (demons)의 왕’(마 12:24),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악한 자’(요일 5:19), ‘큰 용, 옛 뱀’(계 12:9; 20:2) 등의 명칭들로 불린다.
그 외의 타락한 천사들은 ‘그[마귀의] 사자들’(마 25:41),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 6:12), 혹은 빈번히 ‘귀신들’로 불린다. ‘귀신’(다이모니온)이나 ‘악한 천사’나 ‘악한 영’은 다 동일한 존재를 가리킨다.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는 이미 지옥에 던지워져 있는 것 같다. 베드로후서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타타로스 τάρταρος)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그러나 나머지 천사들은 지금도 사탄의 지휘 아래 하나님을 대항하여 활동하고 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요한계시록 12:7-9,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쫓기니라.”
타락한 천사들의 활동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혼란시키고 대항하는 것이다. 그들은 온 세상에 사상적 오류들, 정신적 문란 및 도덕적 불결을 일으킨다. 타락한 천사들은 본래의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성품을 잃어버렸고 더럽고 악하고 거짓된 영들이 되었다. 마태복음 10:1,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며.” 열왕기상 22:22,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디모데전서 4:1,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속이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요한일서 4:1, 3,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하나님께로부터 왔는가] 시험하라. . . . 적그리스도의 영.”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또 타락한 천사들은 육체의 질병들과 환경적 재난들도 일으킨다. 욥기 1, 2장을 보면, 욥에게 임한 재난들, 즉 재산의 큰 손실과 자녀들의 죽음과 몸에 난 악창은 사탄이 준 것들이었다. 누가복음 9:42,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영]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간질병으로부터] 낫게 하사.” 누가복음 13:11, 16,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연약의 혹은 질병의 영을 가지고]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 . . 18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고린도후서 12:7, “내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모든 타락한 천사들은 최종적으로 지옥 불못에 던지울 것이다. 마태복음 8:29, “[귀신들이 가로되]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마태복음 25:41,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이 본래의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암시하지 않는다. 그들의 어두운 미래의 상태는 고정되어 있다고 보인다. 이 점에 있어서, 천사의 타락과 사람의 타락은 성격상 크게 다르다.
인류의 타락
인류의 타락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진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불신앙적 신학자들은 아담의 첫 범죄를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하나, 그것은 매우 잘못이다. 창세기 3장은 역사적 문체(文體)로 기록된 역사적 내용을 담은 책의 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전체와 분리시켜 비(非)역사적 내용으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히 부정당하다. 또 신약의 여러 구절들은 첫 사람의 범죄 사건을 언급한다. 로마서 5:12, 18, 19,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 . . 한 범죄로 . .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고린도전서 15: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디모데전서 2: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러한 말씀들은 창세기 3장 사건이 역사적 사건임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위에 인용된 신약의 구절들은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또 성경은 인간의 죄와 마귀가 실제로 관련이 있음을 가르친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만일 창세기 3장의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면, 죄와 마귀의 관련은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대로, 죄와 마귀는 관련이 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이었다. 하와는 뱀[사탄]의 유혹에 빠져, 그리고 아담은 아내의 권함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창 2:16, 17)을 어겼다. 창세기 3:6, 11, 17,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 . .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 . . .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그러나 첫 사람의 불순종의 행위는 교만과 불신앙에도 관계가 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마귀의 말은 인간의 교만을 부추키는 말이었다. 하와는 마귀처럼 교만의 죄에 빠져들어갔다. 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뱀[마귀]의 말을 따랐고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아내의 말을 따른 것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과 불신임이었다. 교만과 불신앙은 불순종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영적 공식(公式)과 같다. 불순종은 교만과 불신앙에서 나오며, 순종은 겸손과 신앙에서 나온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의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첫째로, 아담과 하와는 창조될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지혜와 지식과, 거룩과 의를 잃어버렸다. 그들의 본성은 죄악된 경향성 곧 부패성을 갖게 되었다. 둘째로, 그들은 그들에게 본래 없었던 죄 의식과 수치감을 갖게 되었다. 창세기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3:7,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세기 3:8,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셋째로, 그들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는 크게 손상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는 자가 되었다. 창세기 3:8,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또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 보내실 수밖에 없으셨다. 창세기 3:23, 24,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 . .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넷째로, 그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은 수고와 고통을 경험하리라는 선언을 들었다. 창세기 3:16, “내가 네게[하와에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창세기 3:17, 19, “너는[아담은]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다섯째로, 땅은 그들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다. 창세기 3:17, 18,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 . .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여섯째로, 그들은 마침내 죽으리라는 선언을 받았다. 창세기 3:19,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사탄의 시험을 허용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사탄의 시험을 허용치 않으셨더라면 인류의 불행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기계적으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셨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셨다. 시험 자체는 악이 아니다. 더욱이, 사람은 이 시험에서 자발적으로 순종하였다면 더 영광된 상태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범죄를 허용하셨는가? 그는 주권으로 그 일을 막으실 수도 있지 않았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으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죄를 허용하셨다고 대답할 수 있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9:22,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그의 모든 일은 다 정당한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하나님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로마서 9:14, 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 .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말대답]하느뇨?”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
역사상,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죄를 물질적 몸의 특질, 진화되지 못한 동물성, 존재의 부정 혹은 제한, 단순한 결핍, 실재(實在)하지 않는 착각, 정신의 불건전한, 병적 상태, 선에 대한 필요한 대립 원리, 사람의 이기심, 하나님 의식에 대한 인간 자아 의식의 투쟁,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등으로 보는 것들이 그러하다. 그러나 죄에 대한 바른 개념은 오직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이었다. 요한일서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라는 히브리어(핫타트)는 ‘표적을 맞히지 못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4문답,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혹은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commission)이나 그 법을 지키지 못한 것(omission)이나 둘 다 실상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다. 특히,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을 반영하므로, 죄는 그 성격상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사악성과 심각성이 있다. 창세기 39:9,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시편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또한 죄는 항상 적극적 성격을 가진다. 소극적 죄, 불이행과 태만(ommission)의 죄도 결국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가 된다. 또한, 죄와 죄 아닌 것 간의 선이 분명하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
둘째로, 죄는 죄책(罪責)과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죄책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법적 책임을 가리키는데, 좀더 분석하면, 그것은 첫째로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죄책이다. 부패성이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된 성질(죄성, 罪性), 죄를 향한 경향성 혹은 연약성을 가리킨다. 우리가 흔히 ‘나는 죄인이다’고 느끼는 것은 이 부패성 때문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셋째로, 말과 행동 뿐만 아니라,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도 죄로 간주된다. 특히 이 점에서 잘못된 견해들이 있다. 반(半)펠라기우스주의는, 죄가 항상 인간 의지의 의식적 행동이어야 하며 부모에게서 유전되는 죄악된 성질과 습관은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간의 죄악된 욕구(concupiscence)는 죄의 기회일 뿐이며 그 자체가 형벌 받을 죄는 아니라고 본 것이다. 알미니우스주의도, 죄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인간의 자발적 행위라고 보며, 비(非)자발적 범죄는 인성의 자연적 결과로서 죄책을 돌릴 수 없으며 엄밀히 말해 죄가 아니라고 보았다. 이 견해들은 공통적으로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을 죄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도 죄라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잠언 21:4,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은] . . . 다 죄니라.”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마태복음 5:22,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5:19, 20,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로마서 7:17, “내 속에 거하는 죄.”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사람은 이 죄에서, 즉 죄책과 부패성, 그리고 죄악된 마음의 상태와 습관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
4. 죄의 구별
모든 사람들의 죄는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로 구별된다.
원죄(原罪)
원죄란,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죄책과 부패성을 가리킨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3, “그들은 모든 인류의 뿌리이었으므로, 그들로부터 일반적 출생법으로 태어나는 모든 후손들에게 이 죄의 죄책이 전가(轉嫁)되었고, 죄로 인한 그 동일한 죽음과 부패성이 전달되었다.”
죄책의 전가(轉嫁)
우선,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돌려졌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인 인류는 죄책을 가진 죄인의 신분으로 출생한다. 아담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은 로마서 5장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정죄되었고 많은 사람이 죄인되었음을 강조할 때 밝히 증거되었다. 15, 17절,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16, 18절,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뿐만 아니라, 성경과 경험이 증거하는 죄의 보편성, 정죄(定罪)의 보편성, 그리고 죽음의 보편성은 그 사실을 확증한다.
죄는 보편적 현상이다. 열왕기상 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욥기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전도서 7:20,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않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로마서 3:10, 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죄의 보편성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도 인정된다. 플라톤, “눈 멀고 머리 많은 맹수와 같은 만가지의 악이 네 속에 있다.” 이방 종교들에서 볼 수 있는 고행(苦行)이나 금욕주의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강력한 증거이다. 괴테, “나는 나 역시 범하지 않을 수 있는 허물을 보지 못한다.”
또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定罪) 아래 있다. 로마서 3:19,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에베소서 2:3, “우리도 다른 이들과 같이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정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요한복음 3:5, 6,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또한 모든 인간이 죽는다. 로마서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92) 심지어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을 수 없어 보이는 유아들까지도 죽는다.
죄의 전가의 사실은 분명하지만, 죄의 전가의 방식에 대해서는 역사상 일치된 이해가 없었다. 첫째로, 어떤 이들은93) 모든 인간이 하나의 통일체로서 아담 안에 존재하였고 그가 범죄하였을 때 그 안에서 함께 실제적으로 혹은 실체적(實體的)으로 범죄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실재론’(實在論)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의 공통적 실체’라는 개념은 성경적 근거와 합리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 같지 않다. 또한 로마서 5장에서의 원죄와 칭의의 대조가 실재론의 생각에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또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관계가 실체적(實體的) 관계라기보다 언약적 관계라고 생각된다. 또 아담의 최초의 범죄 외의 다른 죄들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인간으로서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은 실재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
둘째로, 다른 이들은 모든 인간이 출생할 때 아담의 부패성을 전달받으며 그 부패성에서 실제적 죄가 나오므로 죄책이 전가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간접 전가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패성의 전달은 죄책이 이미 전가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죄책의 전가가 없이 부패성의 전달이 허용될 수 없을 것이다. 또 로마서 5장은 모든 인간의 죄와 정죄와 죽음을 한 사람 아담의 죄에 기인한다고 말하지, 그 자손들의 실제적 죄에 기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로마서 5장의 원죄와 칭의의 대조는 이 견해에 부합하지 않아 보인다. 즉 성도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로운 성질을 전달받아서 의롭게 살므로 받는 의가 아니다.
셋째로, 대다수의 개혁신학자들94)은 아담이 모든 인간의 언약적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으므로 아담의 죄책은 모든 인간에게 즉시 전가되었고 부패성은 그 자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직접전가론’ 혹은 ‘언약론적 견해’라고 부른다.
이 견해의 근거들은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 아담의 죄와 많은 사람들의 죄와 정죄와 죽음이 직접 관련된다는 점과 아담의 죄의 전가와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가 직접 대조된다는 점에 있다. 또 성경에는 이러한 연대적(連帶的) 책임과 형벌의 예들이 있다. 출애굽기 20:5, 6,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민수기 14:33,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여호수아 22:20, “세라의 아들 아간이 바친 물건에 대하여 범죄하므로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가 임하지 아니하였었느냐?”
신명기 24:16에 아버지의 죄로 아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으나, 그것은 사회의 공적 재판 규례를 가리킨 것이며, 에스겔 18:4에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 것도 죄 없이 죽는 법이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변호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들은 성경 다른 곳에서 증거된 죄의 전가의 진리와 모순되지 않는다.
부패성의 전달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부패성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담의 첫 범죄로 인한 인간 본성의 부패성은 흔히 전적 부패성과 전적 무능력이라 불린다. 원죄로 인해, 사람은 지정의(知情意) 전체에 있어서 전적으로 부패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사람은 때때로 사람의 표준에서 선하게 보이는 일들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와 믿음이나, 구원에 이르게 할 선과 의를 행하기에 무능력해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2는 말하기를, “이 죄(원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그들의 본래의 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졌고, 그래서 죄로 인하여 죽게 되었으며, 영혼과 몸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에 있어서 전적으로 더러워졌다”고 했다.
성경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을 밝히 증거한다. 대표적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창세기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義)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아누쉬, '절망적이게 사악한'[KJV], ‘치료할 수 없는’[NIV]) 것은 마음이라.” 시편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로마서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 분별됨이니라.” 에베소서 4:18, 19,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성경은 또한 사람의 전적 무능력도 증거한다. 구약의 역사 전체가 이 사실을 증거한다. ① 창세기는 노아 시대의 세상이 결국 홍수 심판으로 멸망했음을 증거한다. ②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계속 하나님을 불신앙했고 하나님께 불평하고 불순종했음을 증거한다. ③ 사사기는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반복된 실패의 역사를 증거한다. ④ 왕국의 역사서들은 이스라엘의 왕국이 결국 멸망했음을 증거한다. 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또 다시 범죄했음을 증거한다. ⑥ 말라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구약의 맨 마지막 때까지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고 불순종했음을 증거한다.
특히, 다음의 여러 성경 구절들은 사람의 전적 무능력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斑點)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만일 할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비교] 신명기 30:11, 14,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 . .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뜻이며,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다’는 말은 ‘네가 이를 행하도록 [네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로마서 8:7, 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로 모든 선에 대하여 전혀 싫증나며 무능력하며 반대하게 하고 모든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이 본래의 부패성에서 모든 실제적 범죄들이 나온다(6:4).
사람은, 죄의 상태로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에 대한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어버렸으므로; 본성적 사람으로서는, 그 선을 완전히 싫어하며 죄로 죽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그것을 위해 자신을 준비시킬 수 없다(9:3).
본성의 이 부패성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중생한 자들 안에 남아 있고;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되고 극복된다 할지라도, 그것 자체와 그것의 모든 활동들은 참으로 그리고 정확히 죄다(6:5).
펠라기우스주의
초대 교회의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하였다. 그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① 아담은 본래 도덕적 중립 상태로 창조되었다.
② 아담의 타락 후에도, 모든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본성적 능력, 즉 자유 의지를 부여받았다. “만일 내가 해야 한다면, 나는 할 수 있다(If I ought, I can).”
③ 죄는 사람의 의지의 개별적 행동이며, ‘죄악된’ 성질이나 습관이라는 것은 없고,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책임을 진다.
④ 원죄(原罪)나 부패성의 유전(遺傳) 같은 것은 없다.
⑤ 어린아이는 죄 없이 출생하므로 유아세례는 죄씻음과는 상관이 없고 단지 유아를 하나님께 드리는 표일 뿐이다.
⑥ 죄의 보편성은 죄악된 본(本)에 의한 것이다.
⑦ 육체적 죽음은 죄의 형벌이 아니고 자연적 현상이다.
⑧ 사람은 누구나 죄 없는 생활을 할 수 있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필요하지 않다.
한마디로,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건전하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종교개혁 시대에 소시너스에 의해, 그리고 오늘날에는 자유주의 신학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명백히 비성경적이요 이단적이다.
자범죄(自犯罪)
자범죄(自犯罪)란,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이 실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가리킨다. 원죄와 자범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구별된다. 첫째로, 그 둘은 인과(因果) 관계가 있다. 원죄는 원인이요 자범죄는 그 결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6:4는 “우리로 모든 선에 대하여 전혀 싫증나며 무능력하며 반대하게 하고 모든 악으로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이 본래의 부패성에서 모든 실제적 범죄들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여러 개이다. 둘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인식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앙자들은 빈번히 그것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자범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물론 오늘날 진화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죄 의식을 많이 잃어버렸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죄를 동물성의 잔재(殘在)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악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 정도로 생각한다. 셋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죄책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의 죄이며 죄책을 포함하지만, 자범죄는 자신의 의지적 악행이기 때문에 더 큰 죄책을 가진다.
자범죄들은 다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그 종류에 따라 죄책의 경중(輕重)이 있다. 모든 죄가 다 죽음의 형벌을 받을 만하지만, 모든 죄가 다 똑같이 극악한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50문답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모든 범죄들이 똑같이 극악한 것은 아니고, 어떤 죄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 그리고 몇 가지 더 가중된 이유로 하나님 앞에서 다른 죄들보다 더 극악하다”고 하였다. 성경은 죄와 심판에 정도의 차이가 있음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하셨고(눅 12:47, 48) 또 자신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표현하셨다(요 19:11).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사도 바울의 증거도 죄와 심판의 차등(差等)을 전제한다(롬 2:6).
자범죄들은 죄책의 정도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알지 못하거나 연약하여서 짓는 죄이다. 레위기 4:2,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레위기 4:22, “만일 족장이 그 하나님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부지(不知) 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다가.” 레위기에서 여러 번 ‘그릇’ 혹은 ‘부지 중에’ 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비쉐가가 )는 ‘실수로, 부주의하여, 무심코, 부지 중에’ 등의 뜻이다. 누가복음 12:47, 48, “주인의 뜻을 . . .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둘째는 고의적으로 짓는 죄이다. 민수기 15:29, 30, “이스라엘 자손 중 본토 소생이든지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든지 무릇 그릇 범죄한 자에게 대한 법이 동일하거니와, 본토 소생이든지 타국인이든지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짐짓’이라는 히브리어(베야드 라마)는 문자적으로 ‘높은 손을 들고’라는 말로서 ‘뻔뻔스럽게, 도전적이게, 반항적이게’라는 뜻이다. 시편 19:13, “주의 종으로 고범죄(故犯罪)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여기에 ‘고범죄’라는 말도 ‘뻔뻔스런 죄,’ ‘고의적인 죄’를 가리킨다.
신약은 또한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 말한다. 이것들은 고의적 범죄의 극단적 형태라고 생각된다. 모든 고의적 죄가 다 결코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아래의 네 구절들에 언급된 죄는 특별한 죄로 보인다. 마태복음 12:31, 32,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히브리서 6:4-6,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10:26, 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헤쿠시오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요한일서 5:16, 17, “. . .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위의 네 구절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① 어떤 이들은 성령 훼방의 죄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동안에만 사람들이 범할 수 있었던 죄로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기적 행하심을 사탄의 일로 돌린 죄만을 가리킨다고 보았다(제롬과 크리소스톰). 그러나 성경 다른 곳에 나오는 죄, 예를 들어 요한일서 5:16의 죄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② 어떤 이들은 위의 죄들을 ‘끝까지 회개치 않는 죄’라고 보았다(어거스틴과 찰머). 그러나 위의 네 구절에 나타난 죄들은 일반적 성격의 죄가 아니고 특수한 성격의 죄를 가리킨 것 같다.
③ 다른 이들은 이것을 거듭난 사람들이 범하는 죄라고 보았다(후기의 루터파 신학자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도 죄를 범하지만 그들의 범죄를 성령에 대항하는 죄 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④ 우리는, 칼빈이나 투레틴과 더불어, 위의 네 구절의 죄가 다 동일한 죄로서 성령의 사역을 고의적으로 멸시하고 훼방하는 죄, 혹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며 대항하고 참된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배교(背敎)의 죄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단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러한 죄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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