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1, 2016

영생에 대해서

*영생(Eernal Life)에 대해서
(바이블 나라에서 펌...)

1. 문자적인 의미

영생이란 단어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은 요한복음입니다. 헬라어로 "영생"은 "조에(life) 아이오니오스(eternal)"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만 이 말이 17회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조에"(생명)라는 말과 "아이오니오스"(영원한)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이것은 첫째로 시간적으로 "끝없이 지속되는 생명"을 의미하고, 2) 둘째로 질적으로 "인간의 삶과는 다른 신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말에는 시간적으로 영원한 삶이란 의미와, 하나님 안에서 누리게 되는 신적인 삶이란 의미를 둘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2. 성경적인 의미

1) 구약에서

  원래 구약에서 "생명"이란 말은 "영원한 삶"이나 "죽은 후의 삶"보다는 지상에서의 완전한 복지를 의미했습니다. 구약에서 생명을 누리는 것은 장수(시 시 91:16), 가족의 축복(전9:9), 번영(신 28:1-), 안전(신 8:1),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시 16:11, 신 8:3, 렘 2:13 등)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축복과 선물을 누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약에서 이러한 생명을 누리는 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릴 수 있었습니다(신 30:15-20).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불멸하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축복은 죽음도 초월할 수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려 주실 것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사 26:19).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 26:19)"

2) 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에서

공관복음에서 "영생"의 의미는 주로 "내세에서 누릴 신적 생명이나 영적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님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헌신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영생"을 얻지 못할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0:30) 또한 주님은 장차 악인들은 "영벌"에 들어가고, 의인은 "영생"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25:46).

이와 같이 공관복음에서 "영생"은 이 세상이 아니라, 내세에서 누릴 생명과 축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3) 요한복음에서

가. 내세에서 누리는 영생
  요한복음에서도 "영생"의 의미는 공관복음처럼 "내세에서 누릴 영원한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나, 이 세상에서 자기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5).

나. 현실에서 누리는 영생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내세보다" "현재"에 누리는 축복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주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며, 그 축복을 주님 안에서 현실 속에서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자신에 세상에 오신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들이 현실 속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0:10). 주님은 세상에서 굶주리고 갈증을 느끼는 자들을 만족시켜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요 6:35).

이러한 생명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요 12:49-50).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산 떡"이며(요 6:51-), "생수"로 묘사되고 있습니다(요 4:10,14). 모든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그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으며, 이로 인해 주님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요 5:26, 11:25).

이러한 점에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으며,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요 11:25-26, 14:6).

여기에서 주님은 주님을 믿는 자는 죽은 후에라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살아도 주님을 믿는 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점에서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은 내세와 현실을 하나로 있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다. 영생의 본질: 하나님을 아는 지식
  또한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영생"을 가리켜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요 17:3).

여기에 "영생"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중보자이신 "아들"을 아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안다"는 말은 지식적인 앎을 넘어서 친밀한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 전인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서 누리는 축복에 있습니다. 이러한 영생의 축복은 이미 주님을 믿은 성도들에게 현실 속에서 시작되었으며, 죽음을 넘어서서 내세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고 하용조 목사(전 온누리교회 담임)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고 하용조 목사(전 온누리교회 담임)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은혜’는 하나님께 속한 단어지만 ‘믿음’은 인간에게 속한 단어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믿는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서 믿음이 시작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 지식, 경험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셨습니까? 하나님을 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않았고, 성경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선택된 축복입니다.

믿음의 결론 ‘예수 그리스도’

믿음을 갖고 싶습니까? 자연적인 믿음이 아니라 영적인 믿음, 이성적인 믿음이 아니라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하늘의 믿음을 갖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겸허하게 구하십시오. 깨달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 부어지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눈, 귀, 마음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클라이맥스, 믿음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동기와 이유는 어떻든지 간에 믿음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믿음, 이성적인 믿음, 세속적인 믿음과의 차이입니다. 크리스천의 참된 믿음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믿음입니다. 믿음의 뿌리도 예수 그리스도요, 믿음의 줄기도 예수 그리스도요, 믿음의 열매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믿음의 목표와 방향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의 초점도 예수 그리스도요, 믿음의 완성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국 온전한 믿음의 결론은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모습이 있지만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십니다. 고난이라고 다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 그냥 고난 받는 자가 다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막연하게 정의를 위해, 선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막연히 믿는 것, 신념, 적극적 사고, 의지, 결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크리스천의 완성된 믿음입니다.

고난을 겪은 믿음의 영웅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을 그려줍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2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 제시합니다.

4~7절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참된 예배를 드렸던 아벨, 둘째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 셋째 대홍수에서도 살아남은 노아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믿음의 영웅들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갔던 요셉, 홍해를 건넌 모세, 가나안 땅을 점령한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다윗과 사무엘과 많은 선지자들을 믿음의 영웅들로 제시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고난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그것을 봤습니다. 약속을 받았고 고난을 기쁘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영웅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불속으로 들어갔고 감옥에 갇혀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굶주리고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믿음의 결론입니다.

믿음의 결론은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운동경기, 경주에 비유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명사적 의미보다 어떤 행위를 표현하는 동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경주와 같습니다.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우리는 70~80년이라는 인생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면 관중들이 환호성과 박수로 선수를 격려합니다. 믿음의 영웅들이 때로는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말고 뛰어라’고 응원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12장 1절에 나오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입니다. 내가 바통을 이어 받아 믿음의 경주를 할 때 피를 흘려가며 순교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나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경주자를 위한 세 가지 권면

히브리서 저자는 이 믿음의 경주자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첫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경기를 할 때 가장 가볍고 몸에 맞는 옷만 입습니다. 장신구는 필요 없습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더더기를 벗어던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군더더기가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주를 하는 여러분, 당신을 짓누르고 있는 죄의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하십시오.

둘째,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나쁜 습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습관으로 인해 늘 덫에 걸리고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경기 중에는 공부도 사업도 사랑도 다 잊고 오로지 경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셋째, 인내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승리의 관건은 얼마나 오래 참느냐에 있습니다. 옳은 줄은 알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고질적인 병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고비가 있습니다. 등산할 때 마지막으로 넘어야 하는 이른바 ‘깔딱고개’가 있듯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도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싶고 타협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도중에 포기하거나 목표를 수정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편법을 씁니다. 법을 위반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실격입니다.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만이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

12장 2절을 보면 믿음의 목표에 대해 설명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한 가지만 생각해야하는데 그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입니다. ‘그분을 바라본다’는 말은 힐끗 한번 보는 것이 아니라 초점을 고정해서 보는 것입니다. 응시하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뚫어져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생각, 관심, 시선, 귀, 마음을 고정하고 예수님 앞에 내 마음과 몸과 생각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경주의 목표입니다.

12장 2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주요’라는 말은 믿음의 창시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둘째, ‘온전케 한다’는 말은 ‘완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앞에 가면 내 믿음이 완전해 집니다. 내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완전하시기에 예수님 안에 있으면 내가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수학에 절대값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이너스도 플러스고 플러스도 플러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절대값이 생깁니다. 내가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완전해 집니다. 크리스천에게 ‘완전한 사람’은 ‘흠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내가 성숙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쁘게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영광과 기쁨을 보셨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즐거움을 위하여’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즐거움이라는 말은 기쁨, 미래에 올 영광, 승리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다’라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고난을 참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는 좋아하지만 고난은 싫어합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체면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

우리의 영원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많이 만나셨습니다. 교회에 병든 사람이 많이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건강할 때 믿지 못하고 병들어서 믿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분은 병든 상태로, 사업에서 실패한 상태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 코가 석 자나 빠져야 비로소 믿습니다. 교만한 인간은 다 잘 될때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계에 부딪혔을 때에야 머리를 숙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일곱귀신이 들린 사람, 거품물고 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 불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외롭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남편이 다섯 있었던 여인, 돈은 있었지만 외롭게 사는 세리 삭개오 같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목자 없이 방황하는 청중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까지 만나 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을 만나실 때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은 병든 것입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 아내를 볼 때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면 절대 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긍휼히 보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보듯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한 마음이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사람은 죽는다’는 마음입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 사람은 희망이 없다’는 것입이다.

둘째, 예수님은 누구를 만나든지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네 죄가 사함을 입었느니라. 네 병이 나음을 입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외롭든 병들었든 귀신들렸든 가난했든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여러분이 불쌍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위해 죽지 않으면 안되지”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낫게 하시고, 죄를 사해주십니다. 그런데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하십니다. 그러니 내게 믿음이 없으면 큰일납니다. 내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죽을 것 같습니까? 그러면 죽습니다. 살 것 같습니까? 그러면 삽니다. 내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화답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나님 믿든 믿지 않든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의 병이 나을 것인지 말 것인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기가 막힌 말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긍정적인 믿음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절망적인 생각을 거두십시오. 자살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십시오.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환상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부부관계가 절망적입니까? 돌이켜 희망적이라 말하십시오. 그러면 나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신앙생활 또는 믿음생활이라고 합니다. 믿음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4장 2절 말씀입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말씀과 믿음이 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려면 믿음을 넣어야합니다. 말씀과 믿음이 화합해야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보는 믿음과 보지 않고 믿는 믿음, 큰 믿음과 작은 믿음, 약속에 근거한 믿음과 단순한 희망에 근거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믿음선포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증거와 실상에 대해, 그리고 지난 주에는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는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해지는 것이 믿음의 완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믿음의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믿음에 대해서 혼돈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기적과 하늘의 영광과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이 주는 교훈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이 주는 교훈

본문은 우리들에게 두 가지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과 공포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보여주고 있고 다른 하나는 성경이 얼마나 정직하게 기록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초대교회를 이끌고 지도하신 초대교회의 핵심인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베드로를 미화하고 베드로의 수치와 허물을 덮기 위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의 실수와 허물까지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후에 닭이 울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신 예수님 말씀이 생각나서 죄책감으로 심히 통곡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도 몇 시간 전까지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땅이 꺼지도록 장담했던 사람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와 교훈의 말씀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실패했으면 나도 실패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세 번 부인에서 찾을 수 있는 영적 교훈 몇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먼저, 인간의 헛된 자만과 지나친 자신감은 실패와 수치를 당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을 과대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드신 후에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마태복음 26:31-35).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구체적인 시간까지 제시하시며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어도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땅이 꺼지도록 장담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과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의 신앙에 자신감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장담과 큰 소리는 5-6시간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겁쟁이의 변절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용기를 자랑하거나 인간의 용기를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베드로보다 용기가 있을까요? 아니면 베드로만한 용기도 없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는 위선이나 꾸밈이 없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수제자로 언제나 모든 일에 앞장서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 유일하게 예수님을 따라 바다 위를 걸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의 귀를 칼로 쳐서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재판 받는 자리에도 다른 제자들은 도망가고 없지만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재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만 하면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용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던 베드로의 장담은 어디로 갔습니까? 환난과 두려움이 없는 평안한 환경에서는 누구나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 때는 정직하고 용감하게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생명에 위협을 느꼈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정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 여태껏 정직과 용기의 가면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기를 맞이하고 두려움을 느끼자 정직과 용기의 가면이 한 순간에 벗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인하시지 않고 베드로를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복음(福音)이 있습니다. 비겁한 자와 죄인에 대한 용서와 사랑!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眞髓)인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지 않고, 인간의 용기에 기대지 않고 오직 성령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때론 실족할 때에도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어 항상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약속 / 존 파이프 목사

하나님의 최고의 약속
/ 존 파이프 목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로마서 8:32)

하나님의 미래의 은혜에 대한 약속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을 가져올 약속은 로마서 8:32의 약속입니다. 제게 있어 이 구절은 성경에서 가장 소중한 절입니다. 제 삶과 사역의 모든 국면마다 이 약속이 저를 돕기 위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제 삶에 있어서 이 약속과 관련없는 상황은 결코 없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약속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굳이 이 구절 외에도 다른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84:11 말씀과 같이 아주 포괄적인 약속도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혹은 고린도전서 3:21-23의 약속도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이러한 약속들은 엄청나게 포괄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 8:32 말씀은 독특하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절 안에는 약속을 확고하게 보장하는 논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무한히 사랑할 만한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약속의 확고함을 보증하는 기초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32은 강하고 견고하고 확실한 토대와 보증입니다. 약속이 깨어질 가능성은 절대적으로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힘이 됩니다. 다른 무엇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무엇이 실망시키더라도, 다른 무엇이 실패하더라도, 모든 것을 아우르는 미래의 은혜의 약속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이것이 참되다면, 하늘 나라의 논리라 할 수 있는 논리를 따라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내주신 이들에게 반드시 모든 것을 주실 것입니다.

(견고한 기쁨에서...)

베드로의 회개와 가룟 유다 죽음 / 김경진 교수 <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베드로의 회개와 가룟 유다 죽음
/ 김경진 교수 <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베드로의 부인(否認)을 배교(背敎)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배교란 문자 그대로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신앙을 회복한 베드로의 경우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만일 베드로의 부인이 배교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자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개인적 혹은 인격적 친분을 부정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2, 74).

이런 견지에서 볼 때 가룟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 사이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유다나 베드로나 모두 배신 후 회개한 것은 동일하지만, 그 정도 역시 다르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였으나(마 26:75), 유다는 단지 “뉘우쳤을” 뿐이다(마 27:3). 여기서 ‘뉘우치다’(metamelomai)란 단어는 마태가 즐겨 사용하는 ‘회개하다’(metanoeo)라는 단어 보다 약한 뜻을 지니고 있다.

유다의 죽음 이야기(마 27:3-10)에서 우리는 유대 당국자들의 자기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유다가 자신의 행동을 뉘우친 후 자신이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버리자, 그것이 무죄한 사람의 피 값임을 알고는 성전 금고에 넣기를 그들이 꺼려했다는 것은(마 27:6)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판결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처사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고(참고, 마 23:24), 그런 이들의 모함과 시기로 인해 구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다.

유다의 죽음을 기록하면서도 마태는 그 모든 것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한다(마 27:9-10; 렘 18:2-3; 19:11; 32:8-9; 슥 11:12-13).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행적이 우발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 아래 진행되었음을 밝히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성취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유다의 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이뤄졌으며, 또한 그 모든 것이 이미 태초부터 전부 예정되었던 것이니, 그를 더 이상 부정적 안목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악으로 사람을 이끌지 않으신다.

유다의 배신은 재물 및 세상에 대한 그의 욕망의 결과로 빚어진 것이지(요 12:4-5), 순진무구한 사람을 억지로 배신하도록 하나님이 인도한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뿐만아니라 유다는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처럼 구약에서 분명히 예언되었던 참 메시야에 대한 인식이나 믿음을 전혀 갖지 못했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 26:24)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교회에 출석하면 모두 구원을 얻는가? / 김명도 교수       

교회에 출석하면 모두 구원을 얻는가?       

툴힙선교회/ 김명도 교수

세상에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일년에 중요한 절기 때만 교회에 출석하는 분도 있고 매 주일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한결 같이 어떤 “의무감” 에 속박되어 교회에 출석하는 분도 있는데 후자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교회에 나가야 구원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출석만 잘하면 구원은 보장된 것“ 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교회의 모든 집회에 참석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는 1643년부터 1648년까지 오랜 세월을 두고 영국에서 만들어진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이고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경을 가장 바르게 요약한 신조로 받아 드리는데 이 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만든 “대 요리문답” (196문) 과 “소 요리문답”(107문)이 있습니다.

그 대 요리문답 제61문에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면 모두 구원을 얻는가?” 라는 질문이 있고 그 대답은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가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무형교회’에 속한 사람만 구원을 얻는다” 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자연히 “무형 교회“ 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진정으로 중생하여 구원 얻은 모든 무리의 총체를 말합니다. 유형교회 안에는 구원을 얻은 사람도 있고 구원 얻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가령, 가롯 유다는 예수님과 3년을 같이 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따라나녔지만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했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분들은 사람이 한번 구원을 얻은 후에도 가롯 유다처럼 타락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가롯 유다가 처음에 구원을 얻었던 사람이라는 성경말씀과 증거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서 마태복음 26:24에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결국 가룟 유다는 처음부터 구원을 받지 못했던 자였음을 이 말씀을 통해서 알게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예수를 믿다가 중도에서 불신앙으로 돌아서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도취되어 ”믿는 척“했던 사람들이며 진정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2:19에는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간 것은 원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했기 때문이며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에게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아주 명쾌하게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주변에서 열심히 믿다가 중도에서 교회를 떠나 교회를 비방하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무리들은 모두 애당초 택함 받지도 않았고, 따라서 구원을 얻은 사람도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무형교회 (Church Invisible)에는 구원 얻은 사람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형교회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구원을 얻은 백성전체를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중생한(거듭난,  Born Again)사람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중생이란 이단 박옥수의 구원파에서 말하는 것처럼 중생한 장소와 날자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선 간 훌륭한 신앙의 선진들 중에는 중생한 때와 날짜를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 합니다.  현재 예수가 나의 생명의 구주이고 주님에게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그는 구원을 얻은 성도입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 혹은 “위로부터 난 자” 란 뜻이니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새사람으로 지음을 받은 분들을 말합니다.  중생은 인간의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세전에 택하여 (엡 1:4) 우리를 불러주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해 주시는 (롬8:3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딛 3:5-7).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엡 2:8). 그래서 종교개혁가 루터는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에게만 영광”(SOLI DEO GLORIA)만을 외쳤던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믿음을 선물로 받아 그 선물을 수단으로 하여, 주님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 으로 인하여 이룩한 주님의 “의” 가 우리에게 전가되고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이중 전가” (double imputation) 로 인한 구속을 근거로 우리를 의롭다고 "법적으로 선언"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형교회 즉 중생한 사람만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듣지도 못한 자를 어찌 믿을 수 있으며 전한는 자가 없으니 어찌 들을 수 있습니까? 라고 성경은 롬 10:13 이하에 말합니다. Brian Edwards 는 그의 책 “Shall We Dance?" 라는 책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것은 나팔과 북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김을 불어넣어 쓰신 성경말씀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러 나가는 유형 교회는 사람을 사귀고 이야기 하는 사교장이 아닙니다.  음악이나 무용을 감상하기 위해서 나가는 극장도 아닙니다. 

교회에는 진정과 신령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에게 영적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우리 모두 구원의 도리 곧 믿음의 도리를 바로 배우고 참된 신앙생활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