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고 하용조 목사(전 온누리교회 담임)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은혜’는 하나님께 속한 단어지만 ‘믿음’은 인간에게 속한 단어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믿는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서 믿음이 시작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성, 지식, 경험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 이상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셨습니까? 하나님을 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않았고, 성경을 다 아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믿음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선택된 축복입니다.
믿음의 결론 ‘예수 그리스도’
믿음을 갖고 싶습니까? 자연적인 믿음이 아니라 영적인 믿음, 이성적인 믿음이 아니라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하늘의 믿음을 갖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해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겸허하게 구하십시오. 깨달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이 부어지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눈, 귀, 마음이 열립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클라이맥스, 믿음의 완성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동기와 이유는 어떻든지 간에 믿음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믿음, 이성적인 믿음, 세속적인 믿음과의 차이입니다. 크리스천의 참된 믿음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믿음입니다. 믿음의 뿌리도 예수 그리스도요, 믿음의 줄기도 예수 그리스도요, 믿음의 열매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믿음의 목표와 방향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믿음의 초점도 예수 그리스도요, 믿음의 완성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국 온전한 믿음의 결론은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에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모습이 있지만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십니다. 고난이라고 다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 받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할 때 그냥 고난 받는 자가 다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받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막연하게 정의를 위해, 선을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막연히 믿는 것, 신념, 적극적 사고, 의지, 결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크리스천의 완성된 믿음입니다.
고난을 겪은 믿음의 영웅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에 대한 전반적인 그림을 그려줍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2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11장 6절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영웅들에 대해 제시합니다.
4~7절에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참된 예배를 드렸던 아벨, 둘째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 셋째 대홍수에서도 살아남은 노아입니다. 성경은 이들을 믿음의 영웅들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을 소개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갔던 요셉, 홍해를 건넌 모세, 가나안 땅을 점령한 여호수아, 사사들 그리고 다윗과 사무엘과 많은 선지자들을 믿음의 영웅들로 제시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고난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멀리서 그것을 봤습니다. 약속을 받았고 고난을 기쁘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영웅들의 특징입니다. 그들은 불속으로 들어갔고 감옥에 갇혀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굶주리고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믿음의 결론입니다.
믿음의 결론은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을 운동경기, 경주에 비유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은 어떤 개념을 설명하는 명사적 의미보다 어떤 행위를 표현하는 동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이란 경주와 같습니다. 단거리가 아니라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입니다. 우리는 70~80년이라는 인생을 경주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면 관중들이 환호성과 박수로 선수를 격려합니다. 믿음의 영웅들이 때로는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말고 뛰어라’고 응원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12장 1절에 나오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입니다. 내가 바통을 이어 받아 믿음의 경주를 할 때 피를 흘려가며 순교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나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경주자를 위한 세 가지 권면
히브리서 저자는 이 믿음의 경주자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첫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경기를 할 때 가장 가볍고 몸에 맞는 옷만 입습니다. 장신구는 필요 없습니다.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더더기를 벗어던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군더더기가 있습니다. 꼭 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 없어도 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주를 하는 여러분, 당신을 짓누르고 있는 죄의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하십시오.
둘째,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는 나쁜 습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습관으로 인해 늘 덫에 걸리고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경기 중에는 공부도 사업도 사랑도 다 잊고 오로지 경주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셋째, 인내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승리의 관건은 얼마나 오래 참느냐에 있습니다. 옳은 줄은 알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고질적인 병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고비가 있습니다. 등산할 때 마지막으로 넘어야 하는 이른바 ‘깔딱고개’가 있듯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도 포기하고 되돌아가고 싶고 타협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도중에 포기하거나 목표를 수정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편법을 씁니다. 법을 위반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실격입니다.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만이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
12장 2절을 보면 믿음의 목표에 대해 설명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경주를 하는 사람은 한 가지만 생각해야하는데 그것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입니다. ‘그분을 바라본다’는 말은 힐끗 한번 보는 것이 아니라 초점을 고정해서 보는 것입니다. 응시하는 것입니다. 주의 깊게 뚫어져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생각, 관심, 시선, 귀, 마음을 고정하고 예수님 앞에 내 마음과 몸과 생각과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경주의 목표입니다.
12장 2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주요’라는 말은 믿음의 창시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둘째, ‘온전케 한다’는 말은 ‘완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앞에 가면 내 믿음이 완전해 집니다. 내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완전하시기에 예수님 안에 있으면 내가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수학에 절대값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이너스도 플러스고 플러스도 플러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절대값이 생깁니다. 내가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완전해 집니다. 크리스천에게 ‘완전한 사람’은 ‘흠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내가 성숙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십자가를 기쁘게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영광과 기쁨을 보셨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즐거움을 위하여’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즐거움이라는 말은 기쁨, 미래에 올 영광, 승리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다’라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고난을 참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는 좋아하지만 고난은 싫어합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체면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
우리의 영원한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많이 만나셨습니다. 교회에 병든 사람이 많이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건강할 때 믿지 못하고 병들어서 믿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어떤 분은 병든 상태로, 사업에서 실패한 상태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 코가 석 자나 빠져야 비로소 믿습니다. 교만한 인간은 다 잘 될때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계에 부딪혔을 때에야 머리를 숙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일곱귀신이 들린 사람, 거품물고 물 속에 들어가는 사람, 불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외롭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남편이 다섯 있었던 여인, 돈은 있었지만 외롭게 사는 세리 삭개오 같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은 목자 없이 방황하는 청중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까지 만나 주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을 만나실 때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은 병든 것입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 아내를 볼 때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면 절대 싸우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긍휼히 보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보듯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한 마음이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사람은 죽는다’는 마음입니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 사람은 희망이 없다’는 것입이다.
둘째, 예수님은 누구를 만나든지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네 죄가 사함을 입었느니라. 네 병이 나음을 입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외롭든 병들었든 귀신들렸든 가난했든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께서 우십니다. 여러분이 불쌍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위해 죽지 않으면 안되지”하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낫게 하시고, 죄를 사해주십니다. 그런데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하십니다. 그러니 내게 믿음이 없으면 큰일납니다. 내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죽을 것 같습니까? 그러면 죽습니다. 살 것 같습니까? 그러면 삽니다. 내 믿음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화답하십시오
여러분이 무슨 생각을 하느냐는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하나님 믿든 믿지 않든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는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여러분의 병이 나을 것인지 말 것인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될찌어다”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기가 막힌 말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이 긍정적인 믿음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귀가 주는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절망적인 생각을 거두십시오. 자살할 생각은 아예 포기하십시오.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환상과 비전을 가지십시오. 부부관계가 절망적입니까? 돌이켜 희망적이라 말하십시오. 그러면 나부터 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신앙생활 또는 믿음생활이라고 합니다. 믿음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히브리서 4장 2절 말씀입니다.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은 말씀과 믿음이 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능력이 되려면 믿음을 넣어야합니다. 말씀과 믿음이 화합해야 능력이 됩니다.
우리는 믿음을 정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보는 믿음과 보지 않고 믿는 믿음, 큰 믿음과 작은 믿음, 약속에 근거한 믿음과 단순한 희망에 근거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믿음선포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믿음의 증거와 실상에 대해, 그리고 지난 주에는 믿음의 영웅들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는 믿음의 완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훌륭해지는 것이 믿음의 완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믿음의 완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믿음에 대해서 혼돈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기적과 하늘의 영광과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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