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vs 아르미니우스’냐, ‘칼빈 & 아르미니우스’냐?
[서평] 랜디 알콘의 <인간의 선택인가, 하나님의 선택인가?>
랜디 알콘 | 토기장이 | 368쪽 | 14,000원
비록 인간의 자유가 늘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인류는 그 제한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함으로써 그 자유를 최대한 확장하고 또한 누리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다. 인간은 교육과 연구와 법률과 제도를 통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미지에서 응용으로, 침범에서 공존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유를 더욱 성취하고 향유한다.
그러나 신학적 담론에서 이 문제는 필연적 한계에 직면한다. 바로 절대자의 설계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연상되지 않는가?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 특히 내세 혹은 영원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서 절대적인 설계가 있다는 교리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허무를 가져다 준다. 이러한 고전적 신학 논쟁, 즉 예정론 논쟁은 오랜 것이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에서 이를 최대한 설명하고 정리한, 대표적인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바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다. 국내에서 요한 칼빈은 종교개혁자로,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이단처럼 알려져 있다. 국내에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출판물은 성지원이란 곳에서 나온 「아르미니우스 신학」 외에는 없다. 그렇지만 아르미니우스의 예정론은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설명 중 하나다.
랜디 알콘은, 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놀랍게도 쉽게 풀어냈다. 「인간의 선택인가, 하나님의 선택인가?(원제 hand in HAND)」는 지금까지 읽어 본 예정론 논쟁 책들 중 가장 담백하면서도 각 진영의 주장을 공정하게, 그리고 심플하게 다룬다(책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도표들을 그냥 넘어가지 말고, 반드시 신중하게 다 읽어보길 바란다!). 아니, 오히려 그의 프로젝트는 두 해설의 화해이다.
저자에 의하면 성경은 어떤 곳에서는 인간의 선택이 자신의 영원을 결정한다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신의 주권이 인간의 영원을 행위와 상관없이 이미 결정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도 신의 주권을 말하고, 칼빈주의도 인간의 선택을 말한다. 즉 본래 성경이나 신학은 둘 중 하나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성도 대부분도 일관성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진 않는다.
칼빈주의는 흔히 튤립(T.U.L.I.P) 교리를 고수하는 자들로 인식되지만, 사실 그 중 'L(limited atonement)', 즉 제한 속죄를 뺀 4대 교리를 믿는 칼빈주의자도 많다. 랜디 알콘은 칼빈주의 내에서도, 아르미니우스주의 내에서도 몇 가지 의견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일반적으로 양 극단에 하이퍼 칼빈주의와 열린 신론(open theism)이 있다(토기장이 출판사는 이를 개방적 유신론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에는 양립론·몰리니즘·자유의지론 이렇게 셋이 존재한다.
저자는 우선 서로에 대한, 칼빈주의는 인간의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신의 주권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오해를 없애기 위해 각 진영에서 가장 열렬한 신학자들을 끊임없이 인용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자 로저 올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칼빈주의 신학자 R. C. 스프로울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랜디 알콘 책의 장점은 우리가 의심할 만한 모든 구절을 다루며, 정직하게 학자들의 발언을 인용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미 학술적 서적이 있음도 알려 준다(그가 추천한 책 두 권은 「Four views on Divine Providence」, 「Predestination and Free will」이다).
앞서 설명했듯,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세 견해(양립론, 몰리니즘, 자유의지론)는 대칭 저울, 빗금친 막대, 집합 도표 등을 포함한 그림과 함께 잘 설명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자유의 조화를 결국 비율적으로 설명하는데, 이 중 가장 필자가 선호하는 견해가 몰리니즘이다.
이는 마치 바둑에서 고수가 '예지해서' 어딘가에 두면, 하수는 그 계획 안에서 자유롭게 두지만 결국 전체 판은 고수에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다. 몰리나는 이를 '중간 지식'이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개연성 있는 가상 사실(counter-factual)은 성경 도처에서 발견된다(렘 38:17-18; 겔 3:6-7; 마 12:7, 24:43; 고전 2:8).
양립론은 그분이 악을 허용하기도 하고 통제하기도 하시는 것이며, 자유의지론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악도 허용하신다는 것이다. 랜디 알콘은 이 중 어느 것이라도 그리스도인은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 열린 신론 혹은 개방적 유신론에 대해 랜디 알콘은 매우 단호하다. 이는 피조물의 선택에 대해 신이 알지 못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랜디 알콘에 의하면, 그것이 얼핏 보기엔 신께 비극에 대한 책임을 돌리지 않는 합리적 이론 같지만, 사실상 모든 일이 신의 뜻 안에서 일어난다는 신학이 오히려 더 비극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를 준다.
랜디 알콘은 그래도 신의 주권에 다소 무게를 두면서, 그것을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에 대한 훼손이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신께 의존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선택이 신의 주권을 좌절시키지 못함은,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이다.
물론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 <악의 역사(전 4권)>를 쓴 제프리 버튼 러셀은 "아무리 악을 선으로 바꾸는 능력이 신에게 있다 할지라도, 전쟁에서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네이팜탄이 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이며, 신에 대한 신뢰, 역사 속 인간의 책임, 비극을 겪는 모두를 위한 위로라는 이 셋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어느 것이 정답이라 잘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랜디 알콘이 버린 '열린 신관'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저자의 실천적 제안은 간단하다. 칼빈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모두 서로의 장단점을 인정하되, 오해를 없애고 진지하게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랜디 알콘의 자서전적 고백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한다. 평신도뿐 아니라 상호 입장에 대해 공격적이기만 한 모든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나는 과거 아르미니안주의자였던 시절에도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공로로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 이제 칼빈주의자가 되었지만 사람들이 로봇에 불과하다거나 하나님이 인류의 대부분에게 무관심하신 분이라고 믿은 적은 한 순간도 없다."
/진규선 목사
서평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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