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이 계실까요? 계시다면 어떤 모습을 갖고 계시며, 어떻게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계실까요? 이와 같은 질문에 우리가 어떻게 답변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철학이 결정됩니다. 누구든 이것을 하찮은 질문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실까?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면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시편 14:1)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구태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1)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널리 알려져 있어 그에 대한 증명이 필요 없었다.
(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였다.
성경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회의주의 시대에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과 무신론자들에게 초월적인 존재가 있음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심을 믿는 다음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십시오.
✔최초의 원인
어떤 일이나 결과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새나 동물이 그것을 건드렸거나 바람이 불었기 때문입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있다는 사실은 어떤 에너지가 그 차에 반드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우리가 어떤 결과의 원인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든 결과 뒤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음을 우리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우주는 수많은 “결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들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이성적으로 볼 때 이는 다음 두 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처음부터 어떤 것이 항상 존재했거나
(2) 전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후자의 논리를 따른다면 최초의 원인이 무(無)에서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지금 존재하는 이 세계가 아무런 원인도 없이 저절로 생겼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오시기 수 백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초월적 존재에 대한 논증을 처음으로 주창했습니다. 그는 일상적인 현상에는 “인과법칙”이라는 끝없는 순환의 고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고리를 계속 추적하면 더 이상의 원인이 없는 최초의 원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어딘가에는 최초의 시작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 최초의 원인은 영원해야만 합니다. 최초의 원인이 어떻게 항상 존재하는지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설명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영원한 최초의 원인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과학에서는 이것을 "열역학 제2법칙" 혹은 "엔트로피(entropy, 무질서와 혼돈)" 이론으로 증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우주는 시계처럼 한번 태엽을 감아놓자 계속 작동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려면 최초의 원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엔트로피(무질서와 혼돈)" 이론은 우주의 시작과 끝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도덕 논증
인간은 도덕적 의식, 곧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구분 의식”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됩니다. 사람과 달리 동물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 도덕심은 사람이 배운 도덕적 원리나 문화적 소양과는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 도덕성은 타고나는 것이지 후천적으로 취득하는 것이 아니며, 미개인이라 할지라도 갖고 있습니다.
이 내적 의식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반드시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는 양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은 교육될 수 있고, 어떻게 교육받았느냐에 따라 양심의 요청이 다를 수 있지만 양심 그 자체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에 따라 행동하게 하고 그것을 무시할 때 우리를 책망합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도덕성은 도덕을 가진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스스로 도덕적인 창조자만이 우리에게 이런 특징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인 본질과 작용으로는 이런 특징을 가질 수도 형성시킬 수도 없다." (Braden, The Problem of Problems, p. 281 Cincinnati, Chase & Hall, 1877) 스스로 선한 하나님만이 그의 피조물에게 이런 특징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초월적 지성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히브리서 3:4) 집을 보면 그 집을 건축한 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그것을 그린 이가 있음을 알고, 신문을 보면 발행인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설계에는 반드시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내릴 수 있는 결론입니다. 수많은 부품들이 정교하게 작동하는 시계가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것을 만든 이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가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이것을 목적론적 증명이라고 합니다. 우주의 운행은 지적 존재 혹은 지적인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천체가 이토록 정교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은 수 백 년 앞서 어떤 특정한 시기에 별자리가 어떻게 놓일지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로써 이 모든 천체를 조화롭게 운행하는 초월적인 지적 존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지럽히지만 않으면 자연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대대로 그 현상을 계속 유지하는데, 이것을 우연히 생긴 결과라고 설명한다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손, 눈, 귀, 심장, 피 같은 인체의 신비를 살펴보아도 초월적인 지적 설계자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마다 모두 이 초월적 지적 존재의 지혜를 증거합니다. 인간의 두뇌를 생각해 보십시오. 두뇌를 인공적으로 만든다면 수십억 개의 진공관과 어마어마한 양의 배선과 거대한 창고와 이 모든 것을 작동시킬 엄청난 전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아담한 머리에 맞춰져 있고 25와트의 작은 전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란 단어가 흔들리는 잎마다 쓰여 있고,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 새겨져 있고, 모든 화강암에 조각되어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세상에 계시다는 귀납적인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사람이 이 세상의 원인에 대해 연역적 논증을 시도한다면, 그 궁극적 귀결 역시 하나님이 될 것이다. 우주는 하나님을 광고하는 거대한 포스터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창조주의 존재를 부인하는 생물 진화론은 유신론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은 모든 생명의 형태가 초월적 존재의 개입 없이 하나 혹은 몇 개의 원시적인 생명체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이는 하나의 아메바가 화학적 반응에 의해 생겨났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생명체가 이렇게 시작되어 세상의 온갖 식물과 동물이 우연히 진화되었다고 합니다. 진화론자들은 화석에 남아있는 동식물의 흔적을 여러 종들의 유사점과 비교연구하면서 그들의 이론을 실증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면의 한계상 진화론은 여기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지만 진화론이 갖고 있는 이론의 허점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진화론은 과학적으로 아직까지 증명된 바 없으며, 만약 이를 증명하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그럼, 진화론의 문제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자연발생설 – 과학은 생명이 반드시 또 다른 생명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과학자들이 화학성분을 이용해 옥수수 세포 핵의 성분과 모양이 동일한 물질을 만들어 낼 수는 있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는 배아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진화론자들 가운데는 진화란 생명의 기원 보다는 생명의 변화되는 과정을 다루는 과학이기 때문에 진화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한 설명이 아닙니다. 건물이 그 기초보다 튼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원인인 하나님을 부정하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마치 모래 위에 짓는 집과 같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이 최초의 생명체의 창조주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피해가려고합니다. 하나님이 그 최초의 생명체를 창조한 이후로는 진화론의 일반적 이론에 따라 생명체가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유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론이 생명의 기원 문제를 해결하기는 하지만, 이 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창조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을 창조 신화라고 부르면서 여전히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일반적인 진화론과 유신론적 진화론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신론적 진화론은 다른 진화론과 마찬가지로 반 성경적인 이론입니다.
📌연결고리의 부족 - 연결고리란 진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적 근거입니다. 19세기에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설과 용불용설을 연결고리 이론으로 설명했습니다. 후에 라마르크는 획득형질이 진화에 의해 미래 세대로 전이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후천형질이라고도 부르는 이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후에 과학자들에 의해 밝혀져 현재는 진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으로는 배제되고 있습니다. 돌변변이가 식물과 동물에서 종종 일어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돌연변이는 때로 식물이나 동물의 품질을 향상시키기도 하지만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돌연변이가 대진화의 원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돌연변이나 기타 어떤 진화론의 이론도 진화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만족스럽게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대진화의 부재 - 서로 유사한 새와 동물같은 생물에서는 생물학적 유사성과 차이점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생물의 종과 종 사이의 변화 곧 그들이 말하는 대진화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을 선언합니다. (창세기 1:21,24,25)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은 엄연히 서로 다른 종입니다. 생물의 진화를 증명하려면 이와 같은 종 사이의 대진화가 발생해야 하지만 이에 대한 생물학적 증거가 없습니다. 고양이과로 분류되는 같은 종 사이의 연관성과 새와 고양이처럼 서로 다른 종 사이의 연관성은 동일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단절고리 - 진화론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인류와 영장류 사이의 단절고리를 묘사한 그림을 익히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을 공부하면서 간과하기 쉬운 것은 이 그림에 수많은 상상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몇 개의 뼈를 예로 들어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바원인은 자바 강 유역에 흩어진 채로 발견된 두개골과 넓적다리뼈와 몇 개의 치아 뼈들을 모은 것이고, 베이징원인은 한 개의 치아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 외에도 단절고리가 많이 있지만 소수 뼈들을 토대로 그린 자바원인과 베이징원인의 그림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대 인류가 현대 인류와는 다른 외모를 가졌다는 화석 증거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인류도 사람마다 그 신체적 구조나 외모가 다릅니다. 또, 발견된 화석들을 살펴보면 호모사피엔스(인류)와 유인원(원숭이)은 분명히 서로 다른 종임이 확실히 나타납니다. 그 중간 단계의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어떤 확실한 증거도 없습니다.
식물과 동물 같은 생명체의 생물학적 구조의 유사성을 들어 진화론자들은 그들의 이론을 뒷받침하려 하지만 그들의 이 가설은 오히려 서로 다른 두 생명체에 공통의 설계자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거합니다. 예를 들어 서로 비슷한 두 그림은 한 화가의 작품임을 보여주듯이 서로 유사한 생명체는 곧 그 생명체들을 만든 한 창조주가 있음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창조론이나 진화론이나 모두 믿음을 요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고, 보이는 것(우리가 눈으로 보는 만물)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나타난 것(보이는 것 곧 그들이 주장하는 진화의 최초 원인인 생명체)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3)
그리스도인들은 다름 아닌 하나의 원인을 믿습니다. 그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한편, 진화론자들은 우리가 이미 다루었던 대로 증명되지 않는 여러 가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떠나 비과학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항상 계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사실인데도 말입니다.
(어느 신앙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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