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11, 2016

기독교 변증 / 박아론 교수

기독교 변증

이 글은 박아론 교수님의 기독교 변증 개론이다. 기독교 변증은 변증과 험증으로 나뉜다. 변증은 철학적이고 전제적이고, 험증은 경험적이고 실용적이다.

기독교 유신 논증은 개관적인 규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심리주의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스프럴 교수는 ‘하나님과 무신론’이라는 책에서 프로이트, 마르크스, 샤르트르 등의 심리주의 철학을 이용하여 기독교 무신론의 특징을 서술한 바있다.

즉, 과학자이든 철학자는 하나님의 존재의 객관성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없다고 한다. 내지는 하나님의 존재는 알 수 없으므로 불가지론으로 본다. 따라서 그들의 하나님의 무존재에 대한 증명의 토대가 되는 객관성을 스스로 차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객관적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파스칼은 과학의 도구인 이성이 유효한 유일한 이유는 이성의 한계를 아는 데 있다고 했다. 이성의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자연과학의 한계가 분명하며, 따라서 보편적인 개관성은 유한영역에서 멈춘다. 그 바탕위에서 과학이 성립하기에 부족한 이성을 위해 신념이 채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은 일종의 종교인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과학주의에 맞서 과학의 성과와 경험주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유신론과 유신론적 우주의 구조의 신존재 증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에드워즈 목사님을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로 재평가하며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의 변증은 거대 담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며, 현시대의 과학주의에 있어 더욱더 유용하게 담론을 펼칠 수 있어 유용한 구령의 도구가 될 수 있다.

박아론 교수의 이 글은 그런 면에서 발판이 되는 개념을 제공한다. 유신론적 논증과 현대의 무신론의 토대가 무엇이며 어떤 패턴의 공격루트가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주의의 유신론적 사고방식과 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을 비교할 수 있어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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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변증
/ 박아론 교수

시작하는 글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여 기독교를 변증하는 학문이다. 기독교 변증학은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을 반기독교적 공격으로부터 수호하는 일이다. 우리가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권유할 때 변증학에서 터득한 변증의 방법을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변증학을 선교학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기독교 험증학’(Christian Evidence)은 기독교 변증학에서 이미 그 존재가 변증된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하시는 구속의 사역에 대해 그 진리성과 타당성을 변증하는 학문이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확인되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속적 사역의 증거들을 거론하는 일을 하는 학문이다. “변증학은 기독교 신론의 지위를 확보하기를 목적으로 하고 험증학은 주로 기독교의 경험에 관한 정해(正解)를 유지하기에 노력한다. 따라서 전자는 사실보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후자는 철학보다 사실을 더 많이 취급하게 된다.”(박형룡)

Ⅰ. 20세기의 큰 변증학자들

1. 헤르만 도이빌드
헤르만 도이빌드(Herman Dooyeweerd)는 1894년 화란에서 출생하였다. 도이빌드는 1935년에서 1936년에 걸쳐 「우주법 개념철학」에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재검토하고 카이퍼의 영역 자주권 사상을 그의 입장으로 하여 ‘학리사상’의 초월적 비판과 ‘우주법 개념론’, ‘개체구조론’ 등을 전개했다.

⑴ 학리사상을 비판
도이빌드는 모든 사상을 종교적 동기를 갖고 있으나 종교적 중립을 유지할 수 없으며, 엄밀한 의미에서의 객관적 입장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도이빌드의 학리사상 비판은 모든 철학사상 비판으로 발전하였고, 서구 철학사상의 흐름 속에서 4대 종교적 사상 동인을 발견했다. 도이빌드에 의하면 고대 희랍 철학의 종교적 사상 동인은 형상과 질료 개념이다. 이 개념은 고대 희랍의 두 종교사상의 연합을 의미한다. 고대 희랍 사상은 무종교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원론과 플라톤의 이원론은 고대 희랍의 두 종교인 수구종교와 신흥종교가 가졌던 질료와 형상이라는 종교적 사상 동인에 의해서 지배를 받은 이론이었다.
서구 사상의 제2의 종교적 사상 동인이 되는 기독교의 주제는 창조, 타락, 구속이다. 제3의 종교적 사상 동인은 중세 스콜라 사상이 가졌던 ‘자연과 은혜’라는 개념이다. 이 사상은 본래 성경적 주제개념과 고대 희랍 사상의 주제개념을 종합 수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본다.
‘자연과 은혜’ 개념은 존재를 이분해서 자연계과 초자연계로 식별하고 자연계에 존재하는 진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고, 초자연계, 즉 은혜계에 있어서만은 인간은 신의 계시에 의존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서구사상에 있어서 제4의 종교적 사상 동인은 근대 휴머니즘이 갖고 있는 ‘자연과 자유’의 주제 개념이다.
자유 개념은 본래 르네상스 사상에서 온 것으로 인간을 우주의 통치자로 군림시키는 태도를 유발한다. 신의 형상인 인간은 그의 창조적 욕구를 자연에서 만족시키기 위해 자연에서 활동의 무한대한 가능성을 찾게 된다.
도이빌드에 의하면 서구사상사 속에 나타나고 있는 4대 주제개념들은 모두 종교적 성격의 것이며, 서구사상의 발전에 기여한 종교적 사상 동인이었다. 학리사상이 논리적으로 비논리적인 존재를 파악하려 할 때 저항을 맞게 되고, 이 저항을 논리적인 것과 비논리적인 것의 통합을 시도한다. 그러나 논리와 비논리의 통합에 있어서 논리성으로 통합을 시도하려 하기 때문에 부조리가 생긴다. 학리사상은 학리적 이성으로 존재(또는 경험)를 논리화한 결과 진정한 학리적 종합을 성취하지 못하고 존재의 한 국면을 절대화하는 이즘(ism)으로 빠지게 된다.

⑵ 우주법 개념철학
도이빌드가 말한 우주법 체제(cosmonomic order)란 신에 의하여, 창조된 만물은 신의 법칙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신의 우주법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15법계 또는 의미국면들은 각자가 각자의 영역에서 주권적이며 자주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신의 통치 하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도이빌드는 영역주권(sphere sovereignty) 사상을 제창한다. 그러나 이 영역 주권 사상은 원래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한 것으로서 그 기원과 칼빈과 성경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각 영역은 그것의 존재와 성격을 신으로부터 규정받았기 때문에 신에게 절대적으로 예속되어 있고, 한 영역이 다른 영역을 간섭한다든가 침해하는 것은 그 영역에 대한 신의 주권을 훼손하는 행위로서 지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⑶ 인간존재의 집약점으로서의 마음
도이빌드에 의하면 기독교 철학이란 전우주에 관한 고찰을 의미하는데, 그와 같은 고찰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정점이 고찰하는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 고정점을 그는 ‘알키미디안 포인트’라고 부르면서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도이빌드가 말한 마음은 인간의 자아 또는 자아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 내에 존재하는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분설적 구조를 부인하는 그는 이 마음 또는 자아 또는 자아성을 인간의 영혼을 대치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⑷ 좌경하는 기독교 철학의 기수
도이빌드는 진정한 기독교 철학을 모색, 정립하는 개척자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의 공적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 도이빌드의 기독교 철학은 학리사상의 자율성에 도전해서 그 도그마를 파괴하는 일에 기여했다. 도이빌드는 모든 철학(학리사상)이 어떤 전 학리적 전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에 있게 그의 기독교 철학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해 주었고, 많은 철학적 연구와 토론이 그런 이유 때문에 무의미함을 알게 했다.
둘째로, 도이빌드의 기독교 철학은 우주법 개념의 신본주의적 발상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와 공적을 인정받아야 한다. 그의 신학리사상 비판은 칸트에 대한 새로운 비판의 계기를 이루었다. 칸트는 신의 우주법 체제에 도전하고 영역 주권 사상을 무시하면서 이성과 윤리를 거점으로 해서 인생과 우주의 제영역을 고찰하는 과오를 범했으므로 칸트의 이성비판이 진정으로 초월적 비판일 수 없다고 보았다.
도이빌드의 사상이 갖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이빌드가 이분설적 인간론을 거부하고 영혼의 실재에 대해 회의를 표명하면서 인간을 ‘마음’ 또는 ‘자아’라는 한계 개념으로 표현한 것은 비성경적인 일이라 볼 수 있다. 영혼의 실재와 본체 개념에 대한 그의 회의는 곧 그것을 긍정하는 니케아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한 그의 회의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도이빌드는 기독교 철학을 기독교 신학으로부터 독립시킬 것을 선언했다. 마치 기독교 철학이 기독교 신학의 원리와 기능을 결정짓는 것처럼 이야기함으로써 기독교 신학의 권위를 크게 떨어뜨렸다. 기독교 철학이 기독교 신학의 원리와 그 기능 및 위치를 결정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진리와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계시 진리의 체계화라고도 볼 수 있는 기독교 신학이 기독교 철학의 원리와 위치를 결정해 주어야 한다.
셋째, 도이빌드는 그의 종교론에서 인생의 전영역에서 종교는 교리 연구나 예배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이 신을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종교에 대한 굉장히 보편주의적 고찰을 했다.
이처럼, 그는 교회 대신에 사회를, 신학 대신에 철학을, 신앙 대신에 이론을, 예배 대신에 교육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비성경적이며 역사적 기독교의 계시주의 입장에 도전하는 이성주의적 사고가 빚어낸 이론을 나타냈다.
도이빌드는 그의 교회론에서 조직교회와 그리스도의 가시적인 몸으로서의 교회를 구별하면서 전자를 경시하는 한편 후자의 중요성을 극대화했다. 도이빌드는 기독교 학교와 노조 및 기독교 정당 등을 그리스도의 가시적 몸으로서의 교회로 보고 강조하면서,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교회를 경시하며 과소평가했다.
도이빌드의 기독교 철학은 종교와 교회 및 선교의 개념을 전우주적으로 확대시켜서 창세기 1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문화명령을 오늘날 조직 교회가 제1차적인 사업으로 삼고 있는 구령 및 선교사업보다 더 중요시 하는 사상 풍토를 개혁파 교회 내에서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계에서 조성했다.
도이빌드는 추종하는 학자들의 성경관에서, 그들은 3중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한다. 창조 속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말씀 등 하나님의 말씀에 세 가지 존재 형식을 말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개탄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인간을 감동하고 사로잡는 힘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화 될 수 없으며 인간에게 어떤 지식이나 명령 또는 약속을 제공함 없이 오직 인간을 변혁하는 힘이 될 뿐이라고 본다. 그는 하나님의 자연계시를 그의 특별계시인 성경보다 더 중히 여기고 소위 하나님의 우주법 질서라는 것을 율법과 선지자들과 똑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오인하는 과오를 범했다.
이와 같이, 도이빌드의 기독교 철학이 괄목할 만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좌경적 사상성이 짙은 기독교 철학, 좌경하는 기독교 철학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2. 코넬리우스 반틸
반틸은 신학적으로는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과 프린스톤 신학교의 3대 핫지 교수들과 워필드의 사상을 종합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화란의 카이퍼의 신학적 전통을 표본으로 삼고 그의 신학을 수립했다고 보는 것이 낫다.

⑴ 탕자 같은 인간
반틸은 현대 인간이 탕자와 같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현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 신의 계시적 말씀인 성경을 부인하고 그가 신의 피조물인 것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며 자기 자신을 문화와 진보의 창조자로 생각하고 있다.
현대인은 신으로부터 자유를 현실화하기 위해 창조, 섭리, 이적과 같은 역사적 기독교의 제교리를 그의 자율적 이성의 빛에 비추어서 재해석한다. 사르트르의 말을 빌린다면,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인간이 소원하는 자유는 신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반틸은 특히 현대 인간이 신을 버림으로써 죄인이 되었지만 그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치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그는 죄의 쥐엄열매를 먹고 있지만 그가 하는 고생은 그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유한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현대인은 죄를 ‘신에 대한 배신’으로 보는 윤리적 죄관을 버리고 죄는 ‘존재론적으로 불가피하다’는 형이상학적인 죄관을 주장한다.

⑵ 기독교 철학과 비기독교적 철학의 대결
기독교 철학이 비기독교 철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전자는 신을 궁극적 존재로 생각하고 후자는 인간을 궁극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전자는 창조주 신을 경배하고 섬기며, 후자는 피조물 인간을 경배하고 섬긴다.
* 존재론 : 기독교 철학에서는 ‘2층으로 된 존재론’을 말하는데, 차원으로 생각해서 신의 존재는 궁극적이며 인간은 파생적이다. 비기독교 철학에서는 만일 신이 있다면 인간도 한 존재 안에 포함시킨다. 기독교 철학에서는 ‘영원한 하나와 여럿’으로 보지만, 비기독교 철학에서는 삼위일체의 신을 궁극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와 여럿’과 ‘창조된 하나와 여럿’을 구분하지 않는다.
* 인식론 : 기독교 철학은 이층으로 된 인식론을 말한다. 절대적 지식인 신의 지식과 상대적이며 파생적 지식인 인간의 지식을 말한다. 비기독교 철학에서는 신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본다.
* 윤리론 : 비기독교 철학은 인간의 최고선은 자아실현이며 그것은 합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우주의 법칙에 순응해서 그의 내적 가능성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철학은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세상 안에 모든 죄악을 완전히 소멸해야 한다는 것과 악한 자의 사역이 계속하는 한 절대적 최고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과 기독교의 윤리는 ‘소망의 윤리’라는 것을 말한다.

⑶ 神知識의 호소
반틸은 우리가 비기독교 철학의 소유자인 현대 인간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신지식에 호소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의 ‘전제에 의한 이론’(the reasoning by presupposition)은 기독교를 변증할 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다같이 인정하는 어떤 ‘사실’이나 ‘법칙’에 호소하지 않고 어떤 ‘사실’이나 ‘법칙’을 진정으로 ‘사실’과 ‘법칙’이 되게 하는 궁극적 표준이 무엇인가를 따져 변론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인은 영원 자존자이신 삼위일체의 신의 존재와 우주적 섭리와 작정을 전제하고 이론을 벌이는 것이며 비기독교인은 우연의 존재와 인간의 이성이 규정지을 수 있는 한도 내의 ‘존재의 합리성’을 전제하고 이론을 벌인다.
반틸은 기독교를 변증함에 있어, 비기독교인과의 접촉점을 인간의 이성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이유로 모든 가톨릭 신학자들과 알미니안 신학자들을 규탄할 뿐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에서 구 프린스톤의 신학자 워필드와 화란의 신학자 카이퍼와 바빙크 등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반틸은 카이퍼의 신학을 원칙적으로 자신의 입장으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카이퍼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에 기독교의 신의 전제없이 신학적 혹은 논리적인 문제들을 같이 검토하고 연구할 수 있는 공동지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의 근본적 입장을 약화시켰다고 말한다.

⑷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기수
반틸은 그리스도의 진리가 현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진리를 훼손하고 기독교 자체의 존재를 위태롭게 만드는 비기독교적 철학과 정면으로 싸워서 그것을 물리칠 수 있는 기독교 철학을 수립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와 같은 일을 하는데 그의 생애를 바쳐 왔다.
“반틸에게서 우리는 기독교의 대전제들에 기초하며 인간의 경험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충분히 고려하는 진정한 기독교 철학을 발견한다.” 반틸은 그의 기독교 철학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현대 철학자들과 현대 자유주의자들을 인본주의자로 호칭하고 우상숭배라는 죄명 하에 정죄하여 기독교 철학이 부정적인 철학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에 대해서, 반틸은 자신이 일반 철학자가 아니라 기독교 변증가이므로 기독교의 진리를 철저히 가르치기 위해서 현대 철학과 현대 철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신학사상을 총괄해서 비진리라고 비평했기 때문에, 기독교를 긍정하기 위한 부정인 것이라고 말했다.
반틸은 탕자와 같은 현대인의 개종을 마음에 두고 기독교 진리를 실존주의 철학이 아니라 역사적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기독교 철학을 전개했기 때문에 진정한 기독교 철학의 기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박형룡

⑴ 박형룡의 신학의 내용과 범위
박형룡 박사는 1976년 신학지남에 기고한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글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을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청교도적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은 첫째로 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신념이고 둘재로 하나님의주권과 유호소명(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확신이다. 셋째로 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함이요, 넷째로 복음전도의 중요성을 모든 신도들에게 강조하는 직접전도주의이다.

⑵ 박형룡 신학의 특색
성경 무오 사상에 입각하는 비타협적 보수주의 신학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무오함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그의 신학의 기초요 본질적 요소이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의식구조 속에는 성경 무오사상을 지키면서 일보도 양보하지 않는 것이 ‘보수주의’라고 하는 인식이 깊이 부리를 박고 있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의 말씀으로서 그 기록에 있어서 영감되었기 때문에 정확무오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모든 신학적 입장들을 우선 보수주의 신학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묶어 놓으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성경 무오사상에 입각한 비타협적 보수주의 신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⑶ 박형룡 신학의 역할
첫째로, 그 내용과 범위에 있어서 그의 신학의 범위는 “기독교 변증학으로 시작하여 교의신학으로 끝나는 신학”이라는 표현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 내용은 구주대륙의 칼빈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구현된 청교도적 개혁주의 정통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그의 신학사상의 특색은 “성경 무오사상에 입각하는 비타협적 보수주의 신학”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묘사될 수 있다. 성경의 완전 축자영감을 믿는 모든 신학적 입장들을 우선 보수주의 신학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묶어 놓으려고 한 것이 그의 신학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셋째로, 박형룡 신학의 한국 교회사적 역할을 거론하면서 그것을 다양 중에 통일성 있는 지로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형룡 신학의 목적은 창작에 있지 않고, 사도적 정신앙으로 교회를 지도하는 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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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하나님의 변증(기독교 변증학)

1.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⑴ 철학자의 말 : “존재하지 않는다”
고대 희랍 철학자들로부터 사르트르와 같은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철학자들이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 태도와 어조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원칙적으로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피노자와 같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하면서도 범신론적인 신개념을 그리고 있는 철학자들도 있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철학자들 중에는 이성주의적 입장에서 자연종교를 부르짖는 볼테르형이 있고, 인간은 빵으로 사는 존재라는 인식 하에 인간의 역사를 빵을 먹기 위한, 그리고 빵을 더 배불리 많이 먹기 위한 투쟁의 역사로 보는 마르크스형이 있으며,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하니까 존재한다는 역설적인 이론을 주장하여 인간의 절대적 개인적 자유를 외치는 사르트르 형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철학자들이 기독교가 믿는 영원부터 자존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일치를 보고 있다.
도이빌드는 하나님의 계시 진리의 책인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기독교 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종래의 모든 철학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철학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며 반기독교적 철학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하나님의 계시진리의 책인 기독교 성경에 그 근거를 두지 않는 모든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부터 비롯해서 하이데거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율적인 이성 또는 인간의 자율성을 믿는다는 한 가지 단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 때문에 우리 기독교가 믿는 “영원부터 자존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며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론밖에 되지 않는다.

⑵ 과학자의 말 :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자들 중에서 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있게 한다. 칸트 이후 과학 시대에 살고 있는 과학자들 중에는 칸트의 겸손을 미덕으로 알고 대부분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반틸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과학자들과, “하나님은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과학자들 사이에 기본적인 사상적 차이성은 없으며 그들 사이에 어떤 차이성이 구태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표현상의 것일 뿐이라고 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주의를 신봉한다. 과학주의는 과학적 방법이라는 틀을 갖고 우주와 인생에 대해 자연주의적인 해석을 취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과학자들 간의 투쟁은 기독교와 과학의 투쟁이라기보다는 기독교라는 진정한 종교와 과학주의라는 유사 종교와의 투쟁임을 알아야 한다.”(데이비드 프리만)

⑶ 기독교인의 말 : “존재한다”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에 따라 그 대답이 각각 다르다.

① 로마 가톨릭
로마 가톨릭은 ‘존재학적 유추’라는 이론을 갖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이런 신학 입장을 ‘이성주의’ 또는 ‘이성만능사상’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로마 가톨릭 신학의 입장은 인간의 이성은 죄로 말미암아 상처를 입기는 했으나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에 결코 미흡하지 않다고 하는 이성건재설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토마스 아퀴나스).
로마 가톨릭의 존재학적 유추의 개념에 기초하는 이성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진리의 책인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적 지식과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신학자의 사변적 지식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과 우주와 인생을 거론하는 이론적 신학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이며 비기독교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알미니안
알미니안은 로마 가톨릭과 같이 인간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 않고서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만큼은 그의 이성의 구사를 통해서 능히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미니안은 로마 가톨릭과 같이 아담이 에덴동산 시절에 가졌던 ‘본래적인 의’라는 것이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사라고 주장하지는 않으나, 인간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로 인간의 이성적 능력과 의지의 자유를 뜻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과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알미니안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보다 인간의 이성적 지식을 진리 탐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시 하고 궁극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③ 칼빈주의자
칼비니스트는 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과 견해를 달리하면서, 인간은 죄의 영향으로 밀미암아 부패하고 무기력해진 그의 이성을 갖고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참 지식’을 가질 수 없고 다만 그의 심중에 내재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신지식’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으로 ‘깨어날 때’에만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하다고 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자아계시인 성경을 읽음으로써 알 수 있다고 한다.
칼비니스트는 바울과 칼빈의 말을 따라 인간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 즉 신지식이 있어 인간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및 하나님은 그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칼비니스트는 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과는 달리 인간이 그의 부패하고 무기력해진 이성으로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도저히 헤아려 알 수 없으며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 놓으신 신지식을 통해서 그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알고 있다고 말한다.
칼비니스트는 바울이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야 했던 것 같이 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그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바울의 눈을 덮었던 비늘 같은 것, 즉 죄로 더러워진 생각과 마음이 벗겨져서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신지식이 눈을 떠야만 할 것이라고 한다. 반틸은 인간의 눈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의 눈은 죄로 풀칠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했다.
로마 가톨릭과 알미니안은 그의 이성의 지혜로운 구사를 통해서 또는 자유의지의 행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칼비니스트는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은 그의 부패하고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이성이나 자유의지를 갖고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도저히 깨달을 수 없으며 오직 그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신지식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죄악의 생각들이 성령의 사역으로 파쇄될 때, 즉 중생 또는 영적 출생이 그 안에서 이루어질 때 인간의 그의 마음 속 깊이 그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그의 입을 열어서, 행동과 생활을 통해서 시인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2.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할 수 있는가?
기독교 변증학은 하나님의 존재를 변호, 증명함으로써 왜 우리가 기독교를 믿는가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 안에서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알미주의의 입장과 칼빈주의자의 입장이다. 전자는 이성의 지혜로운 구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멸할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다. 후자는 비록 하나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억눌림을 당하고 있는 신지식을 성경의 조명과 성령의 계몽으로 촉진하고 재활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할 수 있다는 자들이다.

⑴ 하나님의 존재는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엄밀한 과학적 의미에서 증명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다(요 4:24). 칼비니스트 또는 개혁주의자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존재는 과학적인 증명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다만 그의 존재는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 우주와 인생의 유의성(有意性)을 결코 시인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되기 보다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칼비니스트는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전제하고서 이론을 벌이는 것을 타당한 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전제주의자’(a presuppositionalist)라고 한다.
이런 전제주의적 입장에 대해서 합리주의자들은 칼비니스트의 전제주의적 ‘믿습니다 주의’(fideism)라고 비꼬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면 결국 증명하지 못하는 것이 되는 것이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것은 눈감고 거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닐 것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전제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순환적 논법의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논리에 비추어 봐서 기독교의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고 기독교가 진리인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이나 이성의 지혜로운 구사를 통해서 우리가 자연의 구조와 진행 및 하나님의 존재 등을 알 수가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는 알미니안의 주장과 인간에 의해서 건조된 이성적 우주 및 도덕적 우주가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의 메시지에 대해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하며 기독교가 진리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 카넬의 주장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 또는 도덕적 의지를 기준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의 진리성 등을 평가 판단하고자 하는 의도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서로 대동소이한 인본주의적 이성주의의 입장의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다.

⑵ 합리주의자의 비난에 대한 전제주의자의 답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신지식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성경과 신지식을 어떻게 우리가 믿을 수 있는가?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지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는 전제주의적 이론은 하나님의 존재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존재로 돌아오는 순환적 논법이기 때문에 이것은 ‘논법’이 아니라 ‘이론’이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영원부터 자존하시고 이 우주와 인류를 창조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반면에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그 마음속에 분명히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서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서’(롬 1:21) 기독교 신앙의 도전자로서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을 뿐이다.
찰스 핫지, 워필드, 카이퍼, 바빙크 등도 변증 신학적 영역에서 전제주의적 사고에 투철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종종 합리주의적 사고의 경향성을 보인 것은 그들의 신학의 기본 정신과 입장으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이었는데, 반틸은 이를 ‘옥의 티’,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았다. 물론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칼빈과 같이 모든 인간들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신지식에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의 진리성을 변증하려는 데 있었다.
그들이 이성과 양심 그리고 자연원리 및 자아의식 등을 마치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에 의존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의 진리성 등을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리주의적 사고의 순간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받는 것이다.

⑶ 4대 유신논증

① 우주론적 논증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
고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또는 우주의 원인을 소급해 올라가면 맨처음의 원인이 되는 원인, 즉 제1원인을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데, 그와 같은 제1원리의 존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이 세계 또는 우주의 제1원인으로서 존재하는 존재로서 증명하고자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증”
중세 교회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우주론적 논증을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삼단논법식으로 전개했다. 이 우주 안에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변화하는 모든 존재는 그 변화에 대한 충족한 원인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우주 자체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으므로 그 변화에 대한 원인이 되는 어떤 존재, 즉 자체는 변하지 않으나 타(他)를 변화시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체는 부동(不動)자이지만 타를 동(動)하게 하는 영원한 원인, 곧 부동(不動)의 동자(動者)가 있어야 한다고 보고, 신을 증명해 나갔다.
골든 클라크에 의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충실히 따르면서 무한수의 원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부동의 동자’의 개념과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부동의 동자의 개념을 살리기 위해서 무한수의 원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논리에 맞지 않다. 만일 부동의 동자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부동의 동자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길은 없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이 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물려받은 ‘존재적 유추’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이며 비기독교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 또는 성도들이 이 우주와 자연현상계에 관한 지식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아간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소위 존재적 유추의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가령 구약성경에 실린 자연시들은 자연시들인 동시에 신앙시들이었으며 천지와 삼라만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주로서 찬양을 받았다. 그러므로 벌카우워는 이 우주 및 자연현상계와 하나님 사이에 우주론적 논증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어떠한 형태의 지식적 관련성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클라크, 벌카우워 등 현대 개혁주의 신학자들과는 달리 구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우주론적 논증에 대해서 찬동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우주론적 논증은 전적으로 무용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비기독교인에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또는 우주라고 해서 원인이 없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바로 이 세계 또는 우주적 원인이 되는 존재가 기독교의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겠느냐고 말함으로써 기독교의 하나님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좋다.
그 다음 단계로 우리는 그에게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강론하면서 우리 기독교가 믿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의 존재를 선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 우주론적 논증과 비슷한 이론을 사용한다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하나님의 백성 또는 자녀들의 “신앙고백을 전제로 하는 이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② 존재론적 논증
존재론적 논증은 안셈, 데카르트, 쿠잔 등이 주장하는 것으로, 귀납적이며 경험론적인 우주론적 논증과 달리 형이상학적이며 관념론적이다. 인간은 그의 마음 속에 완전과 무한의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유한함을 느낀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하는 그 완전과 무한의 관념 배후에는 그와 같은 관념을 산출하는 완전무한자로서의 하나님이 존재해야 한다고 논증하는 이론이다.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관념학적 분석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선험적이며 존재론적 사고의 지배를 받는 이론이기 때문에 관념주의와 존재론적 사고를 싫어하는 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왔다.
헤르만 바빙크는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존재를 이성적 사고의 결론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라고 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머리 속에서 진행 중인 관념분석학적 과정이 결과를 기다려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든가 안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제작물로 삼을 수 있다.
한편, 이 우주와 만물과 인생을 끝없는 인과관계의 연속으로 생각하는 아퀴나스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우주론적 논증을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순수 관념의 세계와 실존의 세계를 같은 것으로 사유하는 헤겔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존재론적인 논증이 도움이 될 수도 있다.

③ 목적론적 논증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논증들 중에서 우주론적 논증과 존재론적 논증 다음으로는 목적론적 논증이 있다. 이 목적론적 논증은 이 우주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과 삼라만상에 질서와 조화와 어떤 목적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와 같은 질서와 조화와 목적을 낳게 하는 이지적이며 의식적인 마음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 논증이다.
목적론적 논증의 제1형인 정서론은 물리학적 예증과 천문학적 예증을 통해서 망원경 렌즈로 볼 수 있는 우주적 의장을 말하고 있고, 제2형인 의장론은 인체생리학적 예증과 유기생물학적 예증을 통해서 현미경 랜즈로 볼 수 있는 소우주적 의장을 말하고 있다. 전자를 ‘거시 목적론적 논증’이라고 부를 수 있고, 후자를 ‘미시 목적론적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론적 논증은 지금까지 고찰한 유신논증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목적론적 논증은 인간이 그의 이성적 사고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가진 칼비니스트 신학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의 사변이나 이론으로 증명한다는 것에 대해서 심각히 회의하고 있는 반틸과 같은 전제주의적 사고에 투철한 칼비니스트 신학자들도 목적론적 논증만큼은 수용 정도가 높다.
바르트에 따르면 우리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이 그의 이성적 관찰이나 연구를 통해서 그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그런 분이 결코 아니며, 그는 오직 그 자신의 자아공개, 즉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알려질 수 있는 절대적 존재임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벌카우워는 하나님의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말씀에 의거해서 해석될 때만 우리를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자연계시의 현장인 이 우주와 대자연은 인류의 타라과 죄의 결과로서 인류와 더불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고 있기 때문에”(롬 8:22), 그리고 하나님의 자연계시인 이 우주와 대자연을 보는 인류의 눈이 흐려지고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 않고 이 우주와 대자연만을 보고서는 인류가 하나님을 찾을 수는 결코 없을 것이며, 그가 존재함을 깨달아 알 수도 없을 것이다(요 14:6; 롬 8:5-8; 요 16:13). 우리는 다윗과 이사야, 바울의 신앙 정신을 본받아 목적론적 논증의 이론을 물리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기독교 유신론적 신앙의 증언이나 간증으로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④ 도덕적 논증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논증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것이 도덕적 논증이다. 이 논증은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양심 또는 도덕의식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로서 제시하는 논증인데, 우주론적 논증과 존재론적 논증 그리고 목적론적 논증 및 기타 논증에 비해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던 칸트도 찬성과 지지의 입장을 취했다.
도덕적 논증은 양심논증과 도덕질서논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는 양심 또는 도덕의식의 증거를 들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론 형식이고, 후자는 상선벌악의 윤리적 질서를 가진 도덕적 세계의 존재를 증거로 삼고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이론 형식이다. 전자가 후자보다는 그 논법과 내용전개에 있어서 단순 명료하다.
이 논증에 대해서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양심 또는 도덕의식이라는 것은 동물적 본능의 사회적 향상을 의미하거나, 인간교육의 결과를 의미함으로, 그것을 근거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도덕적 질서논증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도덕적 질서가 있고 도덕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계라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무고한 수난이나 상선벌악 법칙의 비현실성을 근거로 든다. 과연 도덕률이 지배하는 세계인가 하는 의심인 것이다.
도덕적 논증에 대한 평가를 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적 논증이 성경의 논법과 정신에 일치하는 면이 많다. 구약에는 도덕적 질서 논증에 대한 구절이 많고 신약에는 양심논증의 이론을 시사하는 구절이 많다. 신약에서 인간의 심중에 존재하는 내면적 도덕적 질서의 강조로 발전하여 이 우주와 인류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도덕법 질서에 대한 원만하고 심오한 이해가 가능해졌다. 둘째, 도덕적 논증은 그것이 양심논증이거나 도덕적 질서논증이든간에 이론 아닌, 모든 사람들의 실제적인 인생경험에 호소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설득력과 감동력을 갖고 있다. 셋째, 도덕적 논증이 실제적인 인생경험에 호소하기 때문에 설득력은 있으나 이 논증의 이론으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처럼, 하나님의 존재는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의미에서 증명될 수 없으며, 다만 반틸의 말과 같이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전제하고 증명을 나중에 하는 전제주의적 방법론이 성경적 방법론이며 하나님의 존재문제에 대해서 진정한 칼비니스트가 가져야 할 접근법이다. 따라서 도덕적 논증의 평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간증으로서 의의와 중요성이 있다고 하는 전제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론 : 왜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가?

왜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가? “기독교의 하나님의 존재만이 이 우주와 인생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다.” 이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인생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으며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와 같은 심각하고 우리 인생들이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물음에 대해 기독교의 하나님의 존재만이 진정한 대답을 줄 수가 있다. 우리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이 우주와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로 인해 죽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 내세와 영생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의 존재를 수락하고 전제할 때 비로소 이 우주의 신비가 해소되고 인류와 역사와 자연이 참 의미성을 가지게 되며, 죄로 말미암아 죽음과 멸망의 비탈길에 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용서와 구원 및 육신의 부활과 영생 등 희망찬 삶의 진리를 터득하며 구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독교를 거부하는 비기독교인들이 수락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조명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아무리 천사의 말과 헬라인의 지혜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말하며, 기독교가 참 구원의 도인 것과 기독교의 진리성과 타당성을 설명하고 기독교를 믿을 것을 권유한다 하더라도, 불신자 또는 비기독교인의 눈으로부터 죄의 비늘이 떨어지기 전에는 우리의 기독교를 위한 설득과 변증이 무력할 것이다.

Ⅲ. 기독교의 변증(기독교 험증학)

1. 현대 과학자들과 그 무신론적 신조

⑴ 중립적 태도
많은 현대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과학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을 긍지로 말한다. 반틸은 오늘날 과학자들은 중립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중립을 실천하지 않는 데 있다. 중립적 태도, 그것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그들의 무신론적 신조를 위장하기 위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 과학자들의 중립적 태도라는 것을 보고서 ‘편견적 태도’라고 고쳐 불러도 될 것이다.

⑵ 과학주의의 유사종교성
오늘날 과학자들에게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중립을 지키지 않는 중립적 태도, 편견적 태도 배후에는 과학주의(Scientism)라고 하는 현대 과학자들의 ‘유사종교적 인생관’ 및 ‘가치관’이 존재한다. 과학주의는 문화, 예술, 윤리, 종교 등 자연과학 이외의 영역에 대해서 자연과학적 연장으로 적용시켜 판단하고 평가한다. 마치 예술이나 윤리, 종교 그리고 인생 자체를 핵분자나 에너지를 다루듯이 다루며 처리하려고 하는 물질 일원론적 사고가 과학주의자들의 문제이다.
그들은 물질이라는 단일 차원의 존재만을 주장하여 우주와 우주 안의 삶에 대해서 분석하려 한다. 과학주의적 사고에 철저한 과학자들은 초자연에 대해서 시종 편견적인 부정만을 일삼고 있는데 그것은 과학자들이 초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대한 과학적 증거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초자연의 존재는 생각할 수가 없다는 막연하고 독단적인 이유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초자연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지 정말 생각을 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따라서 과학주의의 ‘자연 일차원적 사고방식’은 과학자 자신들의 풍부하고 ‘믿을 만한’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초자연과 신에 대한 편견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인 것이다.
과학적인 방법이 갖는 한계에 대해서 살펴보자. 첫째, 과학적 방법으로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것들을 바로 인식할 수 없으며 따라서 초시공적이며 초현상학적인 것에 대한 바른 지식이 불가능한데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의 진리를 초시공적이며 초현상학적인 차원에 속한다. 둘째, 과학적 방법으로는 진정한 인격과 영혼의 상태에 대해 바로 알 수 없다. 인간의 기원과 죄, 영혼의 구원과 내세 등의 문제에 대해서 참 지식이 불가능한데 우리 기독교가 믿은 하나님은 영원한 인격이며 기독교의 진리는 영적 구원과 내세와 깊이 관련된 진리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과학주의가 하나의 유사종교가 되었다는데 대해서 프리만 박사는 원칙적으로 과학주의와 과학은 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과학은 과학자들의 자연현상에 대한 연구적 활동이다. 그런데 과학자가 자기 자신과 우주를 내재적으로 또는 유물론적으로 설명하려고 할 때 이미 종교적인 물음에 대해서 답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 연구는 자연과 우주의 외관적 양태에 관한 지식을 가능케 할 뿐, 결코 자연은 궁극적이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연과 우주의 궁극성을 주장하는 것은 과학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종교적 행위이다.

2. 창조론과 진화론
창조 과학자 헨리 모리스 박사가 말한 바대로 뮬러 박사가 177명의 미국 생물학자들이 생물진화의 증명으로 제시한 증거들을 상세하게 살펴 볼 대 그것들이 생물 진화의 증명으로 사용될 수 있기에는 무리가 많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생물학적 진화론에 대해서 절대적인 충성을 보이는 것은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유래에 관한 만족스러운 설명이 따로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진화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편견 때문이다.
진화론에 대해 성경은 창조를 강조한다. 우리가 진화론을 반대하는 성경 외의 근거를 과학의 기본 법칙에서 찾을 수도 있다. 첫째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열역학 제1법칙)에 맞지 않으며, 둘째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열역학 제2법칙)에 맞지 않는다.
기독교 안에도 우주는 부분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변형설’(돌연변이)로써 진화론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돌연변이는 좋지 못한 방향으로 변이된 것이니, ‘진화’와는 맞지 않다. 벌코프 박사가 말하기를, 이러한 유신론적 진화설 또는 기독교 진화론을 보고 일부에서는 틈을 메꾸는 이론이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우주의 진화과정에서 설명이 잘 안되는 부분에서만 나타나게 만드는 이론, 즉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이론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주의 창조에 대해 지질학자들과 생물학자들에게 묻기 보다도 우주와 인류를 창조하신 창조의 당사자 하나님께서 그의 계시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에 의존해야 한다.

3. 섭리론과 자연법칙론 또는 우연론
우주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신의 섭리가 작용되고 있는가?

⑴ 과학자들 : 우주는 자연법칙이 지배한다
“이 물리적 우주가 신적 섭리에 의해서 유지되며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은 대자연의 질서에 어떤 결함이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으므로 결코 수납할 수 없다. 오히려 그보다는 우리가 아는 대로 전자라든지 마음과 같은 불가축소적 실재들은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이 부여한 일들을 하기에 조금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아더 톰슨)
반틸은 톰슨과 같은 과학자가 신적 섭리의 개념을 배제하는 까닭은 그가 갖고 있는 내재적 해석원리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이 세계사의 과정 속에 파국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다는 해석이 되므로 우리가 이 우주 내에 존재하는 모든 사실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신의와 신적 경륜을 발견해야 한다는 결론이 되는데 그와 같은 결론을 내재적 해석원리를 좋아하는 톰슨과 같은 현대 과학자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⑵ 기독교인 : 우주는 하나님의 섭리가 지배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는” 분으로(시 103:19) 묘사되어 있고 인간의 출생과 운명을 결정하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고 하며, 참새 한 마리라도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가지도 세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다(마 10:29-31).
기독교인은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진리의 말씀인 성경의 증거에 입각해서 이 우주와 인생을 자연법칙에 내맡겨 두지 않으시고 친히 그의 주권적 영광을 위해서 섭리하시며 경륜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적 섭리의 교리는 초자연적 신의 존재와 사역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우주를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우주 및 인생의 관계는 매우 밀접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행 17:27,28; 엡 4:6; 시 139:7-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우주적 섭리를 펴실 때 제2차적인 원인들, 즉 자연법칙이라든가 인간의 지식과 인격과 신앙 등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진리를 우리는 또한 성경을 보고서 알게 된다.
칼빈은 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바울의 입장을 그대로 이어받아 이 우주와 만물을 움직이고 있는 원인이 두 가지 있다고 했다. 원인(遠因)으로서의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과 근인(近因)으로서의 인간의 행위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특별섭리의 역사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반섭리의 세계 속에서 매일 나타나고 있다.

4. 이적적 신앙과 이적 불신사상

⑴ 과학자의 말 : 이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은 이 우주 또는 자연은 어떤 영원불멸한 법칙에 따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자연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 과학자가 만들어낸 가설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런데 첫째 원리는 과학자의 이론적 입장의 천명이며 둘째 원리는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갖게 되는 실제적 입장의 천명이다. 따라서 이적은 자연 법칙의 위반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은 현대 과학이 믿고 있는 두 가지 원리 중에서 두 번째 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자연법칙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이적의 존재를 파괴하는 무기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연법칙이 무엇인가에 대해 정확하고 전체적인 파악이 불가능한 형편에서 과학자가 자연법칙의 이름으로 이적을 공격하고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반틸의 말에 의하면, 오늘날 과학자들이 과학을 하며 과학연구에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은 기독교 사상의 덕분이다. 그들은 기독교로부터 빌어간 밑천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하는 연구도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⑵ 기독교인의 말 : 이적은 존재한다
“이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과학자와 맞서서 기독교인은 이적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이적의 존재에 대한 소신을 하나님의 계시진리의 말씀으로 그가 믿는 성경에서 찾는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적의 책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적 기사들에 대한 기록을 우리는 발견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적적 신앙’을 요구하고 있다. “이적은 하나님의 특별한 권능을 나타내며 경이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특별 임재의 표적이다.”
우리가 이렇게 성경에 나타난 이적의 개념과 어원을 고찰해 보면, 성경의 이적은 하나님의 존재와 연결되고 있다. 성경의 이적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방법, 즉 구원론적 목적의 확증으로서 ‘성경적 신앙’의 본질적 요소가 된다.
우리는 이적을 과학자가 생각하는 대로 자연법칙의 위반이나 침해로 보기 보다는 초자연적 하나님께서 자연법칙을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의 공의와 구원을 위해서 직접적으로 수행하시는 비상사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이적은 언제나 자연의 영역에서 발생하며 인간의 오관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는 사건이다. 성경의 이적은 초자연적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에 재연할 수 없다. 따라서 실험을 통한 재현을 요구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성경의 이적을 분석해도 별 소용이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성경의 이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 신학사상의 이적 불신론을 가장 능변적으로 말한 사람은 불트만이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며 여객기로 세계를 누비는 시대에 성경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불트만이 제안한 신약성경의 비신화화라는 것은 신약성경의 비이적화를 의미하며 그것은 곧 이적이 없는 신약성경을 믿는 것을 뜻한다.
성경의 비신화화를 추진하는 이유는 기록된 이적들이 비과학적인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이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정말 일어났었던 일’들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이야말로 비과학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적들은 비록 오늘날 과학자들이 말하는 자연법칙으로 이해가 되지 않고 설명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런 이적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적들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들이 아니라 과학적 원리에 비추어 보더라도 공신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도 포함된다. 무엇보다 자연법칙이라는 말로써, 천지를 창조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켜서는 성경을 읽어도 이적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⑶ “오늘날 이적은 기도의 응답으로 존재한다.”
이적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 개혁교회의 일반적인 신앙 태도이다. 이적 시대가 지나갔다는 말은 칼빈이 가르친 이적관이기도 하다. 성경 계시기에는 하나님의 의지와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며 사람들에게 신앙을 일으키는 것이 이적을 행할 만한 충분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신약 시대 이후로는 새로운 계시는 불필요하여 이미 완성된 계시, 즉 기독교 복음을 세계에 전파하여 인류로 하여금 이 복음의 구원하는 지식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시대가 이적 후 시대라고 해서 이적이 지금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이적을 “하나님께서 공의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시는 비상한 사역”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존재하고 인류구원의 사역이 계속되는 한, 이적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며 또 존재해야만 한다.
헨리 모리스는 “이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무신론이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최고의 이적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병을 고치고 이적을 행하는 것도 사도 시대에 사도들이 가졌던 이적적 은사를 우리들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믿음있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적적 은사라는 것은 이적을 행하는 권능을 지니고 다님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유두고라는 청년을 살릴 때 기도하지도 않았고 복잡한 의식을 행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당시에 벌써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여러 은사가 서서히 쇠퇴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초대 교회가 사도들의 리더쉽으로부터 성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말씀의 리더쉽으로 옮겨가게 되자 이적을 행하는 은사는 끝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도 이적은 존재한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구원 사역을 계속하시는 한 그렇다. 다만 기도의 응답으로서 이적 또는 치유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에도 눈먼 자를 보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도의 응답은 분명히 있다.

5. 부활신앙과 그리스도 부활부인설
워필드는 “영원한 하나님의 성육신은 도그마이다.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믿는 교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이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부활 교리는 기독교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인 동시에 우리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은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인 소위 자연법칙 또는 과학법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도 다른 성경적 이적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와 같은 일이 정말로 있었는가에 대한증거를 조사하려고 하지는 않고 과학원리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권위를 가지고 모든 역사와 사실들을 판단, 평가하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몰트만과 같은 변증신학자들은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변증법에 입각하는 초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있다. ‘역사 아닌 사실’로 인식하며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그는 역사의 전체성 속에 신을 포함시킨 뒤, 역사 밖으로부터 역사 안으로의 신의 초월적 개입을 원칙적으로 불허함으로써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이라는 것이 초자연적 의미가 전혀 없는, 인류사에 대한 어떤 해석학적인 구심점의 설정을 의미할 뿐이라고 본다. 몰트만은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성을 강조한다고 하지만 “인류의 미래사에 공헌하며 영향을 끼친다”는 뜻으로서의 역사성이지 결코 “역사적 사실로서의 역사성”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에 대하여 예언하며 증거한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결과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기독교인’일진대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기독교가 설 수도 있고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야말로 부활과 영생의 종교인 기독교의 존재에 대한 원만한 설명이며 참으로 믿을 만한 증명이 되기 때문이다.
“부활은 과학적 증명을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성질상으로 보아 이것은 하나의 큰 이적이니 자연법칙이나 어떤 세력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활 논증을 하나님의 의지와 권능에 직결시켰다.”(박형룡)

6. 영생론과 사멸론
기독교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영생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며 즉시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말 한마디로 토론을 끝내려고 할 정도로 영생에 대한 강한 불신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들은 물질주의적이며 특히 과학주의적인 세계관 및 인생관에 입각하여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인생은 죽음으로 끝날 뿐이며 내세라든가 영생과 같은 것들은 인류가 갖고 있는 한낱 ‘비과학적인 희망’ 또는 미신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신약 성경을 불트만은 특히 신약성경에 있는 천당과 지옥의 개념은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비신화화 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적 실존의 성취를 천상적이며 내세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경향을 자기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영생교리에 대한 반대설에는 첫째로, 영생이란 존재한다 하더라도 굉장히 무미건조할 것이며 권태감을 느끼게 할 것이라는 반대설이 있다. 그러나 영생과 천당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온전한 축복의 삶을 뜻하며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진정한 복인 것을 알아서 주실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
둘째로, 부활과 영생과 같은 교리는 기독교에 대해 필수적인 교리는 아니고 다만 기독교를 매력있는 종교로 돋보이게 할 뿐이라는 반대설이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이론은 구원과 영생의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본질을 잘 깨달아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고 하셨다.
셋째로, 영원한 지옥의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부합하지 않음으로 부당하다고 말하는 반대론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적 경륜으로 존재하는 천당과 지옥 및 내세가 인간들의 여론에 결코 좌우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배척하고 그의 속죄의 보혈을 비방하는 자들을 형벌에 처한다는 것은 그의 공의를 나타내는 일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도 전혀 모순됨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영혼불멸을 말하는 것은 플라톤 철학이지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일부 기독교인들 중에서는 ‘자유주의계 신학자’들 중에서 영생교리가 마치 구약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와 같은 견해는 크게 잘못되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영생교리가 비록 점진적이기는 하나 계시된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구약성경에는 믿음의 인물들의 별세에 대해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은 내세적 신앙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 5:24)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이 그의 육체가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직접 영생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구약의 이사야와 다니엘 선지자가 고백한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사 26:19)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영생의 교리가 신약 성경에 와서는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무엇보다 성경에 근거하여 부활을 믿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기억해야 한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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