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승리이다
고전 15:50-58
고린도전서 15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가?' 이것은 인류의 최대의 관심사(關心事)이었고, 인간 이성(理性)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원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자기 나름대로 부활 신앙을 가졌지만, 기독교의 부활 신앙처럼 역사적(歷史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사실 위에 세워진 종교는 없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세월과 함께 점점 더 널리 펴져 나가고 있으니, 이 하나만 보아도 부활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지적했듯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7-19)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설득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믿음은 지식으로 설명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스스로의 결단입니다.
남이 무어라 해도, 내게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받아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substance)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라고 하였습니다.
실상(實相)이란 무슨 뜻입니까? 실상은 허상(虛想)의 반대 개념입니다. 부활은 결코 사람들 마음속에 <허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위에 나타난 실상이요 실제적 사실에 대한 증거(證據)란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 증거가 무엇입니까?
1. 부활은 죽음(死亡)에 대한 정면 도전이요 승리(勝利)입니다.
아담 이후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종이었습니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폭군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은 죽음 앞에 모두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2:15절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죽음의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 승리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었습니다.
사망이라는 폭군의 도전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죽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아무런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고 했는데, 이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값을 지불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망의 지배하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은 거짓(虛僞)과 불의(不義)와 죄(罪)에 대한 승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고, 그 사망 권세는 오늘까지도 죽음의 위력을 앞세워 거짓과 불의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거짓됨으로 오염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없도록 모두 거짓으로 물들여 졌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세력 앞에,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그는 언제나 악의 세력에 굴복하며 너무나 무능하게 산다고 고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였습니다.(롬7:24)
어찌 이것이 바울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뜻 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뜻 대로 살기로 했네' 라고 찬송을 힘차게 불러도 정말로 주님뜻 대로 살았는가? 항상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죄책감에서 해방 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어디에 가서 그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게 하고, 죄를 음페하기 위하여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자들의 행위였습니다.
인류 역사는 이러한 거짓과 불의의 죄의 세력들이 도리어 참(眞)을 윽박지르고 의(義)를 매장시키려는 세력으로 등장하여 역사를 지배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선언을 얻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 죄의 지배하에 있던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부터의 해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부활에서 찾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죄의 세력을 부수고 살아나신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은 미움과 증오(憎惡)의 갈등을 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무리들, 저들은 승리자 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저들은 자신들이 승리한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백성을 미혹케하던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자부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증오와 미움의 갈등을 승리하였습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시었던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부활은 총검의 증오를 사랑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부활은 승리입니다. 미움과 증오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원수가 없는, 원수를 모르는 사랑! 이 사랑 앞에, 모든 증오와 미움과 갈등은 살아졌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면서까지 원수를 위하여 용서를 빌었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당해 낼 자가 없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가르침, 그 사랑 앞에 로마제국의 총검도 녹아 버렸습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젊은 집사 스데반이 돌로 몰매를 맞으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고, 그 포악한 무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 보좌 위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놀라운 사랑의 근원이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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