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1, 2016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

*오병이어의 기적의 의미
/낮은마음 침례교회 칼럼에서....

첫째 의미는 주님의 자상하신 사랑이다. 우리도 이 사랑을 믿고 누리자. 주님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함께 육적 삶에도 관심을 갖고 계신다. 

둘째 의미는 주님은 먼저 우리에게 있는 아주 작은 것을 요구하시고 그것을 받으셔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오병이어가 주님의 손에 들리우자 2만명(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 어른 만 5천명이었음) 이 배불리 먹고 남았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심고 거두는 법칙을 깨달아야 한다. 
기쁨으로 선을 심으면 30배, 60배, 100배 거둔다. 오늘 이 장면에서는 1만배 넘게 거두는 장면이다. 

셋째 의미는 주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영육간의 생명의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벼 한 알을 심어 1000배를 거두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오, 출애굽 당시 만나를 내리신 분도 주님이시오,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자 

네 번째 의미는 주님의 세계는 넘치는 축복, 풍성한 축복의 세계라는 의미이다.
이만명이 먹고도 남아서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차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오병이어는 주님께서 당신의 살을 찢고 피를 쏟아 수십억 인류에게 영생의 양식과 음료로 나누어 주실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기적을 베푸신 후에 주님은 십자가 수난과 성찬식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교만에 대한 치료 / 존 파이퍼 목사

교만에 대한 치료
/ 존 파이퍼 목사 (견고한 기쁨에서...)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야고보서 4:13-16)

사람이 지혜나 힘이나 재물 등에 있어서 자기를 의존하면, 이제 교만의 궁극적인 형태인 무신론으로 향하는 강한 유인이 생기게 됩니다. 인간은 그의 마음 속에서 자기가 최고의 자리를 계속 차지하고 있기 위해서, 자기 위에 있는 것은 무엇이라도 부인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남을 낮추어 보는 데 열중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다른 것들 혹은 다른 사람들을 낮추어 본다. 그리고, 그렇게 낮추어 보고 있을 때는 자기 위에 있는 것을 볼 수 없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하지만, 위에는 쳐다볼 것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선포하는 것이 교만을 유지하는 더 간단한 방법입니다. 따라서,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편 10:4). 궁극적으로,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자신을 설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은 삶의 모든 세부적인 부분에 압도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삶의 일상적인 것들을 꾸려 나가는 데 있어서조차 하나님의 긴밀한 개입을 견디지 못합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주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주권적인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은 없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며, "크리스마스에 디즈니 팍까지 차를 몰고 갈 거야"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미래를 너무 확신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대신에 "주의 뜻이면, 그 때까지 살 수 있을 것이고, 크리스마스를 보내러 디즈니 팍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하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핵심은, 우리가 디즈니까지 도착할 건지, 그리고 우리가 이 묵상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살아 있을 건지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교만의 자기 충족성 사상을 가진 자에게는 매우 거슬리는 생각입니다. 뇌졸증을 일으키지 않고 묵상의 시간을 끝낼 수 있을지조차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다는 생각은 교만한 자에게 있어 매우 불쾌합니다.

야고보서는 말씀하길, 미래의 세부적인 것들을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않는 것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 교만과 싸우는 방법은 삶의 모든 세부적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고, 그의 약속 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고(역대하 16:9), 우리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며(시편 23:6),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행하시며(이사야 64:4), 그의 영광을 위해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으로 온전하게 하신다는(히브리서 13:21)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만에 대한 치료책은 하나님의 미래의 은혜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휘브리스(교만)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에서...)

휘브리스(교만)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에서...)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누가복음 1:51-53)

마리아 찬송은 눅1:51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라고 했다. 기독교 교부들은 교만을 죄의 본질로 여겼다. 대표적으로 어거스틴이다. 그에 따르면 죄는 헬라어 '휘브리스'가 가리키는 교만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들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뱀의 유혹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자기를 높이려는 열망이 강했다는 의미다.

교만은 보통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이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난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을 때 교만해진다. 로마 황제는 대표적이었다. 로마만이 아니라 제국의 왕들은 다 그랬다. 이집트 파라오들이 영생불사를 꿈꾸면서 피라미드를 건축한 것도 결국 교만을 뿌리로 한다.

교만은 생래적이어서 사회적인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흔하게 나타난다. 건축 현장에서 내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다. 어떤 목수가 옆에서 일을 배우면서 도와주는 사람을 데리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보조자가 약간 틀리거나 다른 박자로 일을 하면 목수는 여지없이 핀잔을 줄 뿐만 아니라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교만한 행동이었다. 

운동을 하는 테니스장에서도 교만한 사람은 여지없이 교만하다. 종교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교만(휘브리스)은 존재론적인 힘으로 인간을 지배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결국 휘브리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인가? 죽어야 죄에서 벗어난다는 바울의 진술에서 보더라도 인간은 죽기 전에는 교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만 그걸 최소화할 수는 있을 뿐이다. 

자기를 최소화하는 것이 곧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표현으로 하면 자기를 비천한 여종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이런 삶의 태도를 죽을 때까지 수도승처럼 유지한다면 마리아와 같은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성장을 위한 5대 원리

*신앙성장을 위한 5대 원리

세계적 대학교 학원 선교회인 CCC (Campus Crusade for Christ)의
10단계 성경교재 가운데, 신앙성장을 위한 5대 원리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성장에 필수적인 다섯 가지 원리에 대한 글입니다.

제1의 원리는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양식은 바로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도 일주일 혹은 하루라도 육신을 위해서 음식을 먹지 않고 살아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음식은 육체적 생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도 마찬 가지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 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삶에 적용함으로서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일년에 성경을 한 번씩은 읽도록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제2의 원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고, 교제하는 영적인 체험입니다. 다른 어떤 경험도 기도만큼 그리스 도인으로 하여금 모든 문제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고 문제에 휘말리지 않고 초월하게 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많은 경우에 패배하는 생활은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실패한 이유도 깨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기도해야 합니까? 성경에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고 했습니다. 매일 기도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3의 원리는 다른 그리스도인과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제는 예수 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고 같이 일하는 것을 말 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닥불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함께 모이면 불이 잘 타는 모닥불과 같이 불같은 열심히 생기지만, 흩어지면 불처럼 타 오르는 열정도 꺼지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비록 교회 출석하는 것이 의미없는 것같이 보이고 소그룹(구역/셀 등)과 다른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거나 힘들어도, 우리는 자신의 신앙의 성장과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힘을 주기위해서 교회에 모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제4의 원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생명의 관계를 가진 사람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넘쳐흐르는 표현입니다. 우리 생활이 그리스도의 임재로 충만해 있으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최대의 사건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전도할 대상의 이름을 적고 기도하며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제5의 원리는 하나님께 순종 곧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빠른 성장의 비결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장의 원리를 안다고 해도 그것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지 않으면 아무 가치가 없습 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의 실천 곧 순종입니다.

위의 다섯가지 신앙성장의 원리를 기억하고 실천함으로서 믿음이 성인의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서 항상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성숙한 삶이 되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어느 신앙 칼럼에서...)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합시다.

십자가의 감격을 회복합시다.

/ 신형철 목사

설교의 왕자로 알려져있는 스펄전 목사님이 어느날 서재에서 흐느끼며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인이 들어와 물었습니다. “여보, 왜 울고 있어요?” 그때 스펄전이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해도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아.”

스펄전은 십자가의 감격을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 괴로워 흐느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감격, 십자가의 사랑을 잊어버린채 신앙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신자의 삶에서 눈물이 사라졌습니다. 두 손을 들어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사람은 많아졌을지 몰라도, 십자가 앞에서 목 놓아 우는 성도는 점점 더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어렸을때만 해도 예배나 집회에서 성도들의 눈물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슴을 치며 우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의 사랑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때문에 참 많이 울었습니다. 지금도 그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여전히 감사하고, 여전히 눈물이 납니다.

십자가는 나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자리임과 동시에 나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크고 처참한 것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아픔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눈물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큰 죄악으로부터 나를 건져내신 주님의 은혜가 크고 놀랍기 때문이고, 이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주님의 사랑 앞에서 감격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삶 속에 눈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이 없는 사람은 이상하게 눈물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십자가 사랑에 대한 은혜와 감격이 커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단의 모습 없이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은 십자가의 감격도 누리지를 못합니다. 그 마음과 생각이 언제나 제자리입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음을 더욱 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에 대하여 연약한 자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 없이는 도무지 방법이 없었던 자라는 사실을 날마다 다시 깨닫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감격이 살아있을 수밖에 없고, 그 은혜와 사랑 앞에서 매 순간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웁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날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에 빠져 살게 됩니다.

믿음으로 분노를 다스리는 성숙한 산앙

*믿음으로 분노를 다스리는 성숙한 산앙

분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아무리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분노의 감정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해 생겨났던 원죄(Original Sin)가 모든 인간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잘 절제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맏음의 성숙한 곧 인격이 들어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합니다.

특별히 현대인들은 자신의 상처나 아픔을 상대방에 대한 공격적인 분노로 표출합니다. 지나가다가 자기를 쳐다봤다고 칼로 찌릅니다. 길을 가다가 집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기분 나쁘다고 그 집에 들어가 사람을 죽입니다. 바로 본능적인 감정인 분노를 조절하지 못한 원죄 안에있는 부패한 인간 속성의 분출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노에 대해 크게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분노는 상대방에게 엄청난 아픔과 상처를 줍니다. 심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과 살인하는 것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분노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고 권면합니다.

마음의 분노가 구체적인 죄로 발전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 비결은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누군가에 대한 미움을 쌓아두면 언젠가는 분노로 표출됩니다. 그것은 결국 마귀가 틈을 타는 통로가 됩니다.

혹시 누군가에 대해서 미움의 감정이 있습니까?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룰 구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면 자기 마음이 지옥이 됩니다. 그 곳에 마귀가 틈을 타면 분노의 감정이 커집니다.

어느 순간에 마귀가 스위치를 누르면 지금까지 보지 못한 전혀 다른 모습이 나옵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노는 마귀가 틈타는 지름길입니다.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결국 마귀의 올무에 빠집니다.

상대방에게 아픔과 상처를 안겨줍니다. 서로의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거나 깨집니다.

감정을 따라 충동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면 마귀가 틈을 탑니다.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자기도 죽고, 상대방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감정을 따라 움직이면 넘어지게 됩니다. 신앙인은 육체의 감정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닙니다.

항상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시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인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으로 무장하고 무시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하는 성화의 삶을 꾸준히 살아야 합니다.

(어느 신앙 블로그에서 펌...)

절제

‘절제(節制)’란 어떤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절제를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절제할 수 있는 자는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자다. 자기 자신을 제어할 줄 알고 통어할 줄 안다면 참으로 지혜로운 자요 자유로운 자다.

우리는 절제를 두 가지로 생각한다. 정신적 절제와 물질적 절제이다.

물질적 절제는 사람이 살아갈 때에 필요한 먹고 마시는 것에서부터 부귀와 명예 권세를 얻고 누리는 데에 있다. 어느 선에서 자족하면 좋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조금만 더더 하다 풍선처럼 터지고 만다.

정신적 절제는 분노가 일어날 때 화내지 말며, 시기가 일어날 때 시기하지 아니하며, 탐욕이 일어날 때 탐내지 아니하며, 음욕이 일어날 때 음란하지 아니하며, 말을 많이 하게 될 때 그 말을 억제하는 것들을 말한다. 말은 쉽지만 이를 절제하여 실행하기란 어렵다.

어느 화창한 가을날, 한 농부가 토실토실 여문 옥수수를 엮어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한 다람쥐가 그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았다. 다람쥐는 날마다 농부의 눈을 피해 옥수수가 매달려있는 나뭇가지에 올라가 배가 터지도록 옥수수를 먹어댔다. 며칠 후 농부는 나무 밑에 떨어져 죽어있는 다람쥐를 발견했다. 다람쥐가 너무 먹어 둔해진 몸으로 오르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떨어진 것이다.

우리의 삶도 절제가 필요하다. 절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도 깨끗하게 한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은 성령의 아홉 번째 열매로 ‘절제’를 말한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어느 신앙 칼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