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29, 2018

신앙 경주의 승리를 위한 기본 수칙 세 가지

💠신앙 경주의 승리를 위한 기본 수칙 세 가지

/ 권혁승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구약학)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12:1-2)

신앙은 경주에 자주 비유되곤 한다. 신앙과 경주 모두 승리를 마지막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본문 “우리들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역시 신앙을 경주에 비교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경주는 마라톤을 의미하는데, 신앙도 평생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장거리 경주이다.

본문 속에는 신앙 경주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수칙 세 가지가 있다. 성도들이 늘 잊지 말아야 할 신앙 점검표이기도 하다.

첫째로,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경주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간편한 복장이다. 복장이 거추장스러우면 기동력이 떨어져 효율적인 달리기가 어렵다.

신앙에서 달리는 발길을 붙잡는 것이 죄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단절시킴으로 원활한 소통을 막아버린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중심 자리를 자기가 대신 차지하게 되고, 그 결과 모든 가치의 기준이 본인이 되는 이기주의에 빠진다.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죄의 근본이라면, 죄의 구체적 노출은 자신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이기주의이다.

죄를 벗어버리는 방법은 중생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중심에 받아들이고 그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것이다.

둘째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복장을 잘 갖추었다 하더라도 목표를 분명하게 세우지 않으면 승리를 보장할 수 없다. 바른 방향과 목적이 승리의 전제조건이다. 제아무리 빨리 려도 목표가 없으면, 모든 것이 허사이다. 다른 방향으로 달릴 수도 있고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어 경주 자체를 망친다.

신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최종 목표이며 삶의 참된 목적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의 목적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이 목적이 되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하나님 이외의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이어야 한다. 목적은 우상이 되지만, 수단은 하나님께 구별된 거룩성을 지닌다.

예수 그리스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 ‘믿음의 주’는 믿음의 출처이자 시작이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믿음의 시작점이시다. 예수를 만남으로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다. 그분은 또한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온전케 하다’는 ‘완성시켜준다’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을 시작케 하시면서 또한 우리들의 믿음을 마지막까지 지켜주시고 성장케 하여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바른 신앙 자세이다. 여기에서 ‘바라보다’는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인데, 그분에게 절대 유일한 희망을 두고 산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전한 말씀처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며,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하늘로 올라가고 달리고 걸어도 피곤하지 않게 된다(사 40:31).

세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참으심과 인내를 본받아야 한다.

경주가 계속되면 될수록 힘이 들고 피곤이 몰려온다. 외부로부터의 박해가 올 수도 있고, 내적인 흔들림으로 유혹이 찾아올 수도 있다.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헌신하는데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수 있다.

예수는 아무런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 결과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인내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다.

본문은 “구름 같이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들 앞에 있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여기에서 증인들은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영웅들을 말한다. 이들 역시 인내로 승리하신 분들이다. 믿음의 영웅들이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응원과 격려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이다. 인내로 조금 더 견디면 기쁨으로 거둘 때가 오게 되어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신앙의 거룩한 경주자로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점검표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이다.

우리를 얽매이는 죄가 있지는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켜야 하는 우리의 목표와 방향이 흔들리지는 않는가?

인내하지 못함으로 신앙의 거룩한 경주를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는가?

경주의 수칙을 잘 지키면, 우리 모두는 분명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

(출처: 크리스찬 투데이 / 02132013)

Wednesday, November 28, 2018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 정용섭 목사

요일 4:7-12

오늘 우리와 마찬가지로 요한 공동체도 역시 자체적으로 풀어야할 많은 숙제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신학적으로 여러 의견들이 분분한 상태인데 아직 기독교 교리가 확실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초기 기독교에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심적인 논란거리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신이라고 한다면 인간성은 포기되어야 하며, 인간성을 강조하면 신성이 약화될 수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에서 "예수는 완전한 신이며, 완전한 인간"이라는 명제로 정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신성만 강조하는 이들과 반대로 인성만 강조하는 이들은 결국 이단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요한 서신을 비롯해서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기에는 그들이 매우 큰 세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신이며 동시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인간 예수님에게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해명함으로써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합니다.

그 매개는 '사랑'입니다. 요한이 정의하는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중심으로 한 초기 기독교의 논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랑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한은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16절에도 똑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말은 매우 아름답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추상적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명제가 추상적인 이유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냥 좋아하는 것, 보고싶은 것, 그래서 소유하고 싶은 것이 사랑일까요?

사랑에 대한 개념 정리도 천차만별이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도 역시 천차만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 명제가 기독교 신앙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자칫 하나님을 인간 관계 안으로 축소시킬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미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7절)라는 말씀이나, 뒷 부분으로 가면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은 걸 보면 이렇게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사이의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말은 옳지만 그 역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 사랑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여러 계시 중의 하나이지 유일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사랑'을 규범적 윤리로 받아들입니다. 아무리 힘이 들고, 억울하게 생각되더라도 사랑하자고 말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이대면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과 십리를 함께 가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요구 앞에서 우리는 몇 가지로 반응합니다. 첫째는 이런 말씀을 단지 비유로만 간주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늘 마음의 부담으로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는 약간씩 사랑을 실천하면서 흡사 이 말씀에 충실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실제로 자기의 모든 삶을 부정하고 희생하면서 자학적으로 이 말씀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 반응에서 우리가 선택할만한 것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실제로 마더 데레사 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불행한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런 태도로는 기업을 운영할 수도 없고, 예술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적당하게 자선을 베풀면서 자위하거나 또는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도 기독교 신앙이 근본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런 여러 태도는 흡사 충효사상처럼 '사랑'을 규범으로 간주하는 데서 벌어지는 삶의 왜곡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랑은 생명이다

요한은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생명을 얻게 하는 게 곧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대로 행동하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어린 소녀가 첫사랑에 빠질 때 느끼는 것 같은 열망 말입니다. 그런 욕망과 열망은 강하면 강할수록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기보다는 파괴하는 쪽으로 나가기 쉽습니다. 

간혹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동반 자살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욕망이 자식을 파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교회의 신앙생활도 그런 경향을 보입니다. 자기의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교회를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때문에 눈물을 흘려보았는가, 하고 감정적으로 접근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사랑이 감상주의적 차원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성의 특징이라 할 '한'에 이런 '센티멘털리즘'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정치, 사회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문제를 감상적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을 좋게 보면 '신바람'이라거나 '흥'이 난다고 볼 수 있지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냄비근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늘 합리성과 이성에 의해서 냉정하게 행동하는 게 무조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감정과 낭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요소도 결국 이성과 합리의 바탕에서 추구되어야만 삶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요한을 비롯해서 신약성서는 기독교 신앙을 감정을 중심으로 한 열광주의 범주에서 다루지 않고, 다룬다고 하더라도 아주 부분적으로만 다루고, 근본적으로 매우 논리적으로 제시합니다. 즉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말하려는 모든 교리의 핵심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이 주어졌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생명은 산다,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 반대는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숭고한 인간의 행위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당장 내일 죽는 사람에게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재물이 그를 살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 아픔을 나누고 실제로 서로 도우면 살아가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를 죽음의 운명에서 건져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을 운명에서 살리신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그를 통한 생명이야말로 참된 사랑입니다. 인간들의 달콤하고, 그러나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이야말로 사랑의 리얼리티라고 한다면 사랑은 곧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행위이며 그분의 능력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이시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을 분이기 때문에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발생한 생명과 사랑은 곧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소유이거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바로 그 하나님의 존재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억지로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없듯이 사랑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에게서 보인 일종의 도덕적 불안감은, 또한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기를 합리화하는 위선은 사랑을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는 데서 야기됩니다. 본인에게는 근본적으로 사랑할만한 능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를 감당해야 할 책임감으로 여기는 데서 오는 일종의 정신 분열적 현상입니다.   

사랑의 통로

그렇다면 우리의 무능력에 안주해도 괜찮다는 말입니까?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우리도 서로 사랑해야합니다."(11절).

이런 구절 자체는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일단 그 말은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우리는 그 생명의 열매로서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양자, 즉 생명과 사랑에는 미묘한 긴장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 자는 당연히 생명의 원리에 따라서 그 생명을 나누게 되지만, 그 생명의 열매인 사랑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는 흡사 자녀들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철부지 아들을 무조건 감싸는 게 사랑이 아니듯이 우리의 구체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체적인 삶에 대한 통찰력이 우리에게 갖추어질 때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경우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를 들었듯이,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가 자기 백성들을 엄하게 다스렸듯이 사랑은 단지 달콤함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명의 확산입니다.  

기독교적인 사랑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깊이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되었는가에 의해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중에 생명의 충만을 느끼게 되고, 그 생명의 충만을 주변과 나누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곧 영성이며, 사랑입니다.

피리를 통해서 소리가 나가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처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나가면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 자체가 아니라 피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울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소리가 우리를 통과할 수 있도록 준비하기만 하면 소리가 음악을 만듭니다. 좋은 피리는 공명을 잘 시키는 것처럼 우리의 영성이 좋게 준비되어 있으면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소리가 울릴 것입니다. 그 음악이 곧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사랑입니다. 

끝으로,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2절).

아무도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생명의 충만이 자기의 삶을 통해서 주변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까? 이 난폭한 시대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갑니까?   

성경이 알려주는 사랑!

💠성경이 알려주는 사랑!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를, 사도 요한의 편지(서신)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말씀

1. 사랑의 근원 (요일4:16)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4:8,16)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요3:16, 요일4:10, 롬5:8)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본 받기를 원하십니다. (요일4:11, 요일4:20-21)

2. 사랑의 기능 (벧전4:8)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십니다. (벧전1:22-23, 4:8, 롬12:9)

🔹사랑은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골3:14, 요일4:10, 엡4:15)

🔹하나님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고전13:8, 13, 롬13:10) 

3. 사랑의 가치 (고전13:13)

🔹하나님의 사랑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고전13:1-2, 마 7:22-23, 고전13:3, 마6:2)

🔹하나님의 사랑 모든것 가능하게 하십니다. (고전13:4, 고전13:5, 10:23-24, 고전13:6-7)

🔹사랑은 제일 좋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고전12:31, 고전13:13, 약 1:17) 

📍결론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성품)이며 성도에게 주시는 제일 좋은 선물입 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에서 절대 필요한 것이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그 사랑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성화되어,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 맺게 됩니다.

(출처: 갓피플 자료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사랑

성경이 가르쳐주는 사랑

📍Question: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그리고 이 사랑은 세상이 말하는 사랑과 어떻게 다른가요? 간단히 설명해 주세요! 

📍Answer:

1.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모두 다 "사랑"으로 번역이 되어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사랑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다른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 에피튜미아(정욕) -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
   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2) 에로스(이성간의 사랑) - 이성간의 사랑: 마음에 드는 이성만을 사랑함

 3) 필리아(우정) - 친구간의 사랑- 계산적, 이기적 요소가 있음.

 4) 스톨게(혈족간의 사랑) - 자기 핏줄만 사랑하는 경향이 있음.

그러나 성경에서는 위와 같은 것들을 진정한 사랑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사랑이 부분적으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러한 사랑은 다분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타산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간의 사랑도 자기 맘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고, 우정도 마음에 드는 친구만을 좋아하며, 가족간의 사랑도 역시 자기 핏줄만 사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 성경에서 진실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가페"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며 사랑의 원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이기적이기 보다는 이타적인 사랑이며,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의 필요를 채워 주는 사랑입니다. 또한 아가페의 사랑은 사랑할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가장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많은 죄를 지었으며, 따라서 심판을 받고 지옥에 들어가야만 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누구든지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거역하고 배반한 사람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용서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용서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랑을 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성령을 통해서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성경은 간절히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성령님을 의지하면 우리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출처: 바이블 나라)

참된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자!

📌참된 믿음의 본질을 회복하자!

/ 정성욱 교수 (미국 덴버신학교, 조직신학)

오늘날 믿음 (헬라어로 pistis 피스티스)은 심각하게 오해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고, 교회사와 신학에 대한 지식을 쌓으면 믿음이 좋아진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를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정작 가져야할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채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을 잃어 버리고,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한다. 믿음이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믿음과 지식을 동일시하는 것은 철저한 오류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신비한 경험이나 체험과 동일시 한다. 그래서 종교적인 체험이나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할수록 믿음이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방언이나 신유나 축사와 같은 신비한 체험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믿음에 기초한 어떤 체험과 경험을 할 수 있지만, 믿음 자체를 종교적이고 신비한 경험과 동일시하는 것은 철저한 오류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질문이나 의문도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성경의 내용을 믿고, 지도자가 가르치는 대로 믿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은 이성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와 이성으로 이해가 안되더라도 그냥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소위 따지지 않는 믿음이 큰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된 믿음에 대한 세 가지 태도는 현재 한국교회에 전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의 본질은 위의 세 가지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은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첫째,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나 경험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뢰' (personal trust)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신뢰란 믿어 주는 것, 그 사람이 믿을만한 분임을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을 뜻한다. 믿음의 대상에게 기대고 의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의 대상에게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인격과 능력을 믿고 그 분에게 우리의 삶과 영원한 운명을 의탁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며, 또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동시에 예수님 만이 우리의 참된 주님이시요 임금이심을 인정하고, 그 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주권을 양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이 인격적인 신뢰라는 말은 어떤 명제적인 진리나 교리가 우리 믿음의 직접적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바르게 설명되고 정리된 명제적인 진리나 교리가 바르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 명제적 진리나 교리가 지시하는 살아있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우리는 어떤 명제적 진리나 교리가 바르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적 진리와 교리가 증거하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바른 지식과 함께 시작하고, 바른 지식에 기초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함께 시작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지식이 바른 믿음의 기초가 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고, 그 죄인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과 함께 믿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의심도 질문도 제기하지 못한 채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지성적 근거도 없이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바른 지식에 기초하며, 그 지식과 함께 시작된다. 그래서 때로는 의심이 일어날 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서 믿음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한번도 우리에게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도리어 질문과 의심이 섞인 약한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강한 믿음이 되도록 도움을 요청하라고 권면한다. 중세 신학자 안셈이 주장한 것처럼 참된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intellectum)”일 수밖에 없다.

셋째,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적 경험과 체험을 낳는다. 우리가 에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그리고 구원자로 믿고 의지할 때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삶에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다. 믿음이 가진 그 영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의 경험, 기도가 응답되는 체험, 범사에 감사함으로 기쁨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체험, 용서가 되지 않던 다른 사람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는 경험, 사랑과 무관했던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차고, 그 사랑이 우리 삶을 변화시켜가는 경험, 때로는 신비한 은사에 대한 체험 등 다양한 경험과 체험들이 바로 참되고 바른 믿음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반드시 그 믿음에 일치하는 행동을 낳는다. 다시 말하면 참된 믿음은 순종에 이르게 한다. 참된 믿음은 참된 실천을 낳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그의 삶 속에서 순종과 선행과 실천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고백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 가짜 믿음, 귀신의 믿음일 수밖에 없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순종이 따른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른다.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참되게 믿는 사람은 그 주님의 말씀에 더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논리적 필연이다.

그 동안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 대해서 여러모로 오해해 왔다. 성경이 말하는 참되고 바른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때, 한국교회의 갱신과 개혁은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놀라운 현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놀라운 현실

/ John Piper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엄청난 현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의미는 숨이 멎게 할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그리스도에 묶여 있다는 것 곧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무슨 의미인지 들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디모데후서 1: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택하심을 입었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우리를 택하사" (에베소서 1: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38–3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구원받아 모든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어 하나님의 의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5:1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라디아서 3:2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그가 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에도 이미 천국의 자리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고린도후서 1:2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거룩하게 하심을 얻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고린도전서 1: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정말로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집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빌립보서 4:1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영생을 얻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23)

그리고 그가 재림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은 사망에서 건져질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2)

아담과 혈육으로 하나가 된 모든 인간은 사망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새로운 피조물은 모두 구원받아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걸까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단계에서,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린도전서 1:30)

반면, 우리가 의식하는 우리의 행동의 단계에서, 그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십니다. (에베소서 3:17)

그리고 그의 죽음과 삶에 하나되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죽음과 부활에 하나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2)

이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영원한 기쁨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값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Monday, November 26, 2018

사도의 감사(1): 믿음, 사랑, 소망 

사도의 감사(1): 믿음, 사랑, 소망 

* 본문/골 1:3-8


감옥에서 사랑하는 제자 에바브라의 방문을 받고, 그가 섬기는 골로새 교회의 형편을 들은 바울은 매우 기뻤습니다. 그들은 에바브라를 통하여 참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교회의 상황을 듣고 디모데와 함께 생각한 바를 글로 써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편지는 제자인 에바브라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당시의 편지 형식에 따라 먼저 자신을 소개하고 다음에 수신자인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인사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2절에서 보듯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성도들을 위하여 자신은 기도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3-8절에 걸쳐서 바울은 자신의 마음이 진정으로 골로새 교회 교인들에게 전달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그는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 골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사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마다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에“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정말로, 기도할 때 감사하다는 생각 속에서 하는 기도! 얼마나 행복한 기도일까요?


흔히, 기도란 어려울 때, 힘들 때, 어떤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간절히 구할 때 등등의 상황을 생각하게 되어 상황으로 인하여 겪는 어려움들을 생각하면 힘이 빠지고 눈물이 나고 마음 한 구석에 깊은 아픔을 느끼며 힘들게 기도하게 되는 것이 보통인데, 지금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의 기쁘고 즐겁고‘참으로 감사합니다!’하는 느낌과 생각이 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기도일까요!


여러분들의 기도는 어떠하십니까? 이런 깊은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의 기도 상황이 이런 행복하고 감사가 넘치는 상황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갈라디아 교회와 같지 않고(갈 1:7- 복음을 변하게 하고, 혼잡하게 하는 교회),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보낸 소아시아 교회들(벧전 4:17-복음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교회)과 같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 교회는 마치 데살로니까 교회와 비슷하였던 것 같습니다.


* 살후 1:3-4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찌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이제 바울은 4-5절에서 기도하기 전 갖게 되는 이 감사가 어떤 조건과 이유 때문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 시간과 다음 시간에 걸쳐 기도하는 바울의 감사의 조건들을 살피며, 그 속에서 생각하고 깨닫게 되는 구원의 진리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 골 1:4-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바울은 이 감사에 대하여 세 가지의 중요한 단어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이 세 가지 단어가 자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전13:13일 것입니다.


*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은 교회의 설립자인 에바브라로 부터 복음을 듣고 형성된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표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갖고 있는 바 온전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은 어떤 신앙의 덕목을 갖고 있을 때 바른 교인의 모습이 될까요?


1. 바른 믿음의 삶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예수 안에서 온전한 믿음의 삶을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안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 안 en Christou" 란 말은 믿음의 제한성을 말합니다. 어원상, ‘믿음(pistis)’은 '순종(peitou)' 으로부터 기원합니다. 이는 순종은 믿음에 따른 결과입니다. 즉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개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시며 친히 모범을 보여주시며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히 5:8-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에 따라 사도 베드로는 이 순종하는 믿음의 소중함을 강조하시며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 벧전 4: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이렇듯 믿음은 막연한 기대와 바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구원의 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살펴본 대로, 히브리서는 가장 기초적인 구원의 도리인 믿음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 것입니다.


* 히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즉 믿음이란 바라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뢰요, 보지 못한 것이나 그 확실함에 의심하지 않는 그 어떤 순종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마치 산길을 운전할 때 굽은 곡선의 도로에서 앞이 보이지 않지만, 전혀 의심하지 않고 앞을 향하여 운전하듯이,이름있는 음식점에서 주문한 음식을 먹을 때, 의심하지 않고 맛있게 먹듯이 믿음이란 알고 믿은 바에 대하여 의심없이, 그리고 그 진리가 제시하고 있는 바에 대해 신뢰를 갖고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확신하는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얻는 믿음(saving faith)란 어떤 것일까?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롬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즉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복음을 듣고 자신의 죄인 됨을 발견하여 회개(고백)하고, 그 구원도리에 대한 깊은 감사로 말씀에 순종하며 헌신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구원은 말씀을 듣고, 고백하고, 순종하여, 헌신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아무리 선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허더라도 그 선행이 그를 구원해 주지는 못합니다. 종교개혁자 Martin Luther는 이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 Martin Luther, "선행이 사람을 선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선행을 합니다. “


 

2. 사랑의 삶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이 실천하는 모든 성도들을 위한 사랑의 삶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된 성도란 자기만 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변 성도들과 얼마나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교인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진리를 깊이 깨닫고 변화된 성도는 자연스럽게 참된 영적 생명의 회복됨을 고백하며 자신 속에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깊은 감격과 감사로 옆에 있는 이웃에 대한 깊은 긍휼과 애정과 간절함으로 대하게 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믿음을 갖고 주변 성도들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는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특별한 사랑입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드린 사람은 도저히 사랑할 수없는 사람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깊은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한 유언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 요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그리고 주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위하여 기도하라는 자신의 말씀을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까지 실천하셨습니다.


* 마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눅 23:34a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3. 소망의 삶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감사는 그들이 갖고 있는 하늘에 쌓아둔 소망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이 소망은 성도가 복음으로 인하여 얻게 되는 귀한 덕목 중에서 최고의 덕목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을 수없는 미래에 대한 믿음, 사모함 얼마나 귀한 믿음의 결과입니까!


그러나 이 소망이 믿음과 사랑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 롬 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그렇습니다. 바른 성도들은 내세에 주어질 영광스러움을 확신함으로 현세에 주어진 삶의 현장 속에서 진실된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는 골로새 교인들이 누리는 아름다운 성도로서의 삶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들은 현재의 교제가 장차 누릴 그 영광스러운 영원한 교제의 연습이요 훈련이요, 모형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소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 골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사람들은 내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장차 주어질 그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에 대하여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 어느 교훈과 진리에서도 확실하게 다루고 있지 못하는 구원의 도리입니다.


바울은 이 소망은 “하늘에 쌓아둔 것” 이라고 말합니다. apokkeimai란 단어는 쌓아두는 것(in store) 보관하여 두는 것(reserved)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소망은 바로 하늘에 쌓아두는 믿음의 결과인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이 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 벧전 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시어 영원한 소망을 주십니다.히브리서 기자는 이 소망의 믿음을 “영혼의 닻과 같은 것”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히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John MacArthur, " 성도가 갖는 소망의 믿음은 영혼의 닻이요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된 끈이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담대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소망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의 소망을 완성시키십니다.


* 요일 3:1-3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그러기에 이 소망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스스로 깨끗한 삶을 살면서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다하여 열정적으로 이 진리에 투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과의 차이점일 것입니다.


성도들은 분명히 세상과 다른 관점과 시각으로 현세를 살아갑니다. 이 독특한 관점(perspective), 인생관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그 영광됨을 확신하고 그 순간과 그 영원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의 만족과 안락함과 영광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관점입니다.


그 예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성도의 배표 주자로서 구약의 모세를 듭니다.


*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의 소망을 무엇입니까? 이 믿음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의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까? 사도 바울의 설명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 롬 8:16-18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 귀한 고백과 확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세상의 온갖 죄를 극복하며, 그것들과 타협하지 않고, 고난과 환란을 감수하며 이겨나갑니다. 그 이유는 장차 주어질 그 영광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소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귀한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Jim Elliot(Auca Indian 선교사, 순교자), “선교사란 얻고 지킬 수 없는 것이나, 또한 잃어버리고 내다버릴 수밖에 없는 하찮은 것을 주는 바보들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영원히 누릴 보배를 전달해 주는 영원의 전달자들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 벧전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결론


사도 바울은 골로새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갖게 된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하여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바르게 들으면 어느 누구에게나 나타나게 되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고생과 수고가 다 지난 후, 광명한 천국에 편히 쉴 때


주님을 모시고 나 살리니, 영원히 빛나는 영광일세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


은혜로 주 얼굴 뵈옵나니 지극한 영광 내 영광일세


바라기는 찬송 289장의 찬송이 여러분의 매일의 삶속에서, 여러분의 장례식장에서, 그리고 장차 우리 주님 앞에서 힘차게 불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복음의 효과 가운데 바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아멘

(주일설교, 9-19-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