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1-8 해설
/ 알버트 맥쉐인
🎯히브리서 6장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Therefore let us leave the elementary teachings about Christ and go on to maturity, not laying again the foundation of repentance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and of faith in God,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instruction about baptisms, the laying on of hands,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eternal judgment.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And God permitting, we will do so.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have once been enlightened, who have tasted the heavenly gift, who have shared in the Holy Spirit,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who have tasted the goodness of the word of God and the powers of the coming age,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if they fall away, to be brought back to repentance, because to their loss they are crucifying the Son of God all over again and subjecting him to public disgrace.
의심할바 없이 본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의문점을 가득히 불러일으킵니다. 이제 본문이 야기시키는 다음의 대표적인 네가지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는 구절의 의미는 무엇인가?(2절)
2) “세례들”의 의미는 무엇인가?(1절)
3) “타락한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3~6절)
4) 7,8절의 비유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본문은 문맥상 5장 11절에서 시작해서 6장 마지막 절까지 이어지는 단락의 한 부분입니다. 이 단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비유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이야기에서 방향을 바꿔 이 서신을 받은 수신자들의 변명의 여지없는 영적 미성숙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무디어지고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했으며, 기자는 그들의 빈약한 이해력으로 인해 앞서 서론적으로 진술한 보배로운 진리들을 보다 깊이 펼쳐 보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성숙한 자들만이 심오한 진리라는 단단한 식물을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가르침이 기초로서 필수적이긴 합니다만 바라는 목적이 이뤄지려면 이 기초 위에 상부 구조가 세워져야만 합니다. “기본 원리들을 떠나라”(한글 개역 성경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로 되어있음-역주)는 말은 그것들이 제쳐져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그것들은 보다 차원 높은 가르침에 이르는 과정의 시작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의문 1)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는 구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는 표현은 적어도 다음 세가지 뜻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1) 그들이 성숙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분별력을 키워가라는 권면의 말.
2)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해 가겠다는 기자의 의도가 담긴 말.
3) 기자와 함께 보다 심오한 가르침으로 들어가 보자는 권고의 말.(이 마지막 해석은 앞의 두 해석을 결합시켜 놓은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해석을 취하는 사람들은 5장 마지막 부분을 강조하며 올바르게도 이 구절의 “완전”이란 말과 5장14절의 “장성한”이란 말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는데 이는 그 두 낱말이 어원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6장의 첫 단어 “그러므로”가, 본문이 전술한 내용의 계속임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주저 없이 지적해 보입니다. 그들에게 이 구절은 지식과 분별력이 완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자는 여기서 복수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함으로써 그가 본 서신에서 종종 사용하는 기법, 즉 자신을 수신자들과 동일시하는 기법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지 말고 어른의 장성한 상태에 이르도록 계속 성장하라고 독려했습니다. 이 해석을 취하는 사람들은,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변절자가 되어 스스로 생명이 없는 자로 드러날 법도 하기 때문에 문맥상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 비교하여 계속 갈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에베소서 4장에서 이와 유사한 병행귀절을 찾는데, 거기에 보면 본문처럼 장성한 사람(13절)과 어린 아이(14절)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언급된 회개와 신앙은 수신자들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터를 다시 닦지” 말아야 하는 사람은 기자 자신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대부분 현대 주석가들은 두번째 해석을 취할 것입니다. 그들은 기자가“우리”라는 복수 인칭을 사용한 것은 기자 자신만 언급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그들에게 있어 이 귀절은 성도들에게 주는 권면이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지닌 심오한 가르침으로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기자의 의도를 선언한 말입니다. 그들은, 본 서신은 전체적으로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하지 못하며, 기자의 차원높은 가르침은 수신자들이 그로부터 벗어난 유대주의와 첨예하게 대조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완전”은 수신자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기자의 가르침의 심오성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1,2절에서 언급된 여섯 가지 중대한 진리들을, 율법 안에 있었으나 반드시 복음의 일부는 아닌 요소들로 봅니다. 그들의 판단에 히브리서 기자는, 3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자신은 수신자들의 제한된 분별력으로 인해 자신이 펼쳐 보이고자 하는 심오한 가르침이 제약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안고 있는 난점은 어떻게 그것을 문맥과 조화시키느냐입니다. 1절의 “그러므로”는, 이어지는 내용이 5장의 실패를 교정하기 위한 권면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데 따라서 “나아갈지니라”는 말도 그런 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4절의 “그러므로”(For, 한글개역 성경엔 나와있지 않음-역주)도 이어지는 내용이 앞의 내용의 연속임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완전한데 나아가는 기자와 그 뒤에 이어지는 경고 사이에 좀체로 어떤 관련성을 찾기가 힘들며 그 대신 첫번째 해석이 취해질 경우 문맥이 완전히 들어맞게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배도할 위험이 큰 사람들입니다. 성장이 결여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이 허구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법 합니다. 우리가 이미 진술한 대로 “회개”와 “신앙”은 수신자들의 경험이었지 기자에 의해 일찌기 다뤄진 주제가 아니듯이, 여기의 언급도 수신자들에 대한 것이지 기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더더욱 터를 다시 닦기를 거절한 것은 기자가 아니며, 다만 수신자들이 그렇게 하라고, 즉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권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2절의 “교훈”이 비록 문장의 맨 끝에 나오지만 사실 1절부터 시작되는 여섯 가지 항목 모두에 연결돼 있는 말이므로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신앙과 회개의 실행이 아니라 그 여섯 가지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가르치기를 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본문의 원래 의도라면 왜 기자가 그 사실을 명백히 밝히지 않았을까요?
세번째 해설 역시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그들은 본문을 기자가 자신의 가르침을 계속 발전시켜나가고, 동시에 그의 수신자들을 자신과 함께 5장에서 이미 언급된 그 완전한데로 이끌고자 하는 내용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자는 보다 깊은 가르침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으며, 그들의 미흡한 성장이 그 목적을 추진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긴 하지만 그는 보다 차원높은 가르침으로 나아가면서 그렇게 하는 동안 그들의 영적 수준이 곧 자신의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매우 타당해 보이며 또 표면적으로 난점을 해소해 주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자세히 상고해 보면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왜냐하면, “나아갈지라”(Let us go on)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앞으로 이끌림을 받을지니라”(Let us be carried forward)는 뜻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요지는 수신자들이 그들의 교사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성숙으로 이끌도록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육체적인 성장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우리의 의지에 의해 경험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성장에 이르는 개념과 어떤 주제를 발전시키는 개념은 전연 별개의 문제이므로 만일 이것(세번째 해석)이 본래의 의도였다면 그 두 경우가 구분되어 표현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이의 글에 나타났듯이 “만일 기자가 두 가지를 함께, 즉 수신자들을 각성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의도를 실행하고자 했다면 그는 반드시 두 가지를 따로 따로 언급했어야 했습니다. “ 만일 우리가 본 구절을 이와 같이 이중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버리고”와 “닦지 말고”도 역시 이중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기자가 이런 단어들을 사용할 때 수신자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의문 2) “세례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 언급된 여섯 가지 기본적인 진리 가운데 이해하기가 힘든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세례들”입니다. 이 여섯 가지 항목은 분명히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즉 “회개와 신앙”, “세례들과 안수”,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이 각각 짝을 이루어 연결돼 있습니다.
첫번째 짝은 신자의 최초의 경험들을 말해주며, 두번째 짝은 외적인 상징들을, 그리고 마지막 짝은 영원한 실재를 알려줍니다.
“세례들”이 일반적인 물 세례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며, 여기서 복수를 취한 것은, 단수의 의미뿐인 대목에서 흔히 복수 형태로 나타나는“death(죽음), bosom(가슴), blood(피), sanctuary(성소), east(동쪽)” 등과 같은 단어들처럼 아마도 강조의 형태를 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요한의 세례, 신자의 세례, 성령의 세례 등 신약성경상에 언급된 모든 세례를 가리킨다고 보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신약성경에 신자의 세례를 언급할 때는 항상 단수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편 세 구절에서 복수 형태가 나오는데 이 때는 “씻음”(washing), “씻는 것”(washings)으로 옮겨져 있습니다(막 7:4, 히 9:10).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면 “세례들”이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정화(靜化) 규례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게 됩니다. “안수”와 마찬가지로 “세례들” 속에도 상징적인 가르침이 들어있었습니다. 본서의 수신자들 중 아무리 어린 신자들도 이들 진리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보다 깊은 진리들로 나아가기 위해 능히 그것들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의문 3) “타락한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이제 “타락한 자들”에 대해서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여러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결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위선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기자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독자들을 각성시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주장하며, 아울러 그들이 생각하기에 본문에 묘사된 사람들은 너무 깊은 경험을 하고 있기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아니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박습니다. 그들은 5절 첫머리에 나오는 “만일”이란 접속 부사를, 마치 회의의 뜻을 가진 말인 양 지적하는데, 사실 그들은 “만일”(if)을 대신해서 원어의 의미를 잘 살려줄 다른 단어가 없다는 점을 잊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경고를 발하는 것은 성경의 특징에 맞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본문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엄성을 격하시키고 그것을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책 정도로 전락시키는 셈이 됩니다. 마음을 차근히 가다듬고, 본문의 위험은 실재하며, “타락한 자들”의 실례는 가상적인 인물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초점을 모읍시다.
여기에 언급된 다섯 가지 경험들은 너무 중요한 경험들이어서 그 당사자들 모두는 참 신자들일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주님께 속한 백성들의 경험을 표현하는 듯 보입니다. 사실상 이 서신을 처음으로 대한 당시 수신자들은 모두 이러한 축복들을 경험했었는바, 그들은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 목도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맛보는 것이 반드시, 자동적으로 영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췸”(enlightenment)은 그들이 복음을 접하고 “진리의 지식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런 점에서 그들은 유대주의의 어두움에 싸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이 아닙니다. 이렇듯 그들이 경험한 “비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으며 이어서 언급된 “하늘의 은사를 맛본” 것은 그들이 그것(하늘의 은사)을 소유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두번째 축복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하늘로부터 온 특별한 은혜를 가리키는 듯 한데 이것은 이제까지 이 땅에 부여된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성령의 역사를 힘입게 되었을 뿐더러 기적적인 영역에서 성령의 능력을 입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그들에겐 내세의 능력과 필적하는 기적적인 능력들이 증명되었습니다. 오직 신자들만이 이러한 놀라운 경험들을 지녔다고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유다가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참 신자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묘사된,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 가지 죄목이 부과돼 있습니다. 그들은 첫째로 “타락했으며”, 둘째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세째로 “그분을 현저히 욕보였습니다. "타락했다”(fall away)"로 옮겨진 단어는 신약 성경에는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오지만 70인역(the Septuagint, B.C. 3세기경 완성된 헬라어판 구약성경-역주)의 에스겔서에는 네 차례 나옵니다. 반면에 그 단어의 명사형은 자주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위반하다”(trespass), 또는 “범하다”(offence)로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부정(不定) 과거형(aorist, 완료,계속 따위의 뜻을 포함하지 않고 단지 과거의 일만을 나타내는 시제-역주)은 그것이 단순한 우발적인 과실이 아니라 하나의 완료된 행위임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대적이었던 이전 위치로 되돌아가 마음으로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것은 바꿔 말해서 그들이 “저를 없이 하소서”하고 외친 무리들 가운데로 다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전에는 그들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그분을 공개적으로 욕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멀어 그리스도를 나무에 못박은 모든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눈을 뜬 채로 고의로 그분을 버리고 기독교를 비난하고, 그리고 유대주의로 돌아가버린 사람들은 추호의 자비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그들이 거절한 분의 위엄을 나타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원의 희망을 저버리고 심판을 면할 유일한 다리를 불살라버렸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파멸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도, 회개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실수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한 후 자신들이 사실 구원받지 않은 것을 깨달은 사람들과 구별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회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도자들은 다른데, 그들은 의도적으로 빛을 거절하고 태양이 결코 떠오르지 않는 어두움으로 등을 돌린 자들인 것입니다.
의문 4) 7~8절의 비유는 무엇을 뜻하는가?
히브리서 6장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Land that drinks in the rain often falling on it and that produces a crop useful to those for whom it is farmed receives the blessing of God.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But land that produces thorns and thistles is worthless and is in danger of being cursed. In the end it will be burned.
배도자를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명백히 하고, 타락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농경(農耕)의 경우를 그 실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를 흡수하는 땅은 두 가지 다른 작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4~5절의 축복들에 상응하는 신선한 비가 땅 위에 먹을 만한 채소를 내면 밭 가는 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 여기게 되지만, 그러나 똑같이 경작을 하고 똑같이 비가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올 경우에는 밭 가는 자는 응당 그것들을 모두 잘라 불살라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채소의 경우엔 땅이 그것들을 “생산해 내었다”(bring forth)고 표현돼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농부가 씨를 뿌릴 당시 기대하던 생산물이라는 뜻을 암시하며, 가시와 엉겅퀴의 경우엔 땅이 그것들을 “낳았다”(bear)고 표현돼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기대하던 작물이 아니라는 뜻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한글 개역성경엔 모두 “내다”로 되어 있다-역주). 이 해로운 잡초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저주를 암시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땅과 같이 그들 중에 있는 경작자들에 의해, 또한 하늘의 축복으로 복을 받았었지만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배교를 하여 영원한 불 심판 외에 아무것도 바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표현들은 수신자들로 하여금 인류의 첫 타락(the Fall)의 이야기를 상기케 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저주”, “가시”와 “엉겅퀴” 등의 표현은 그 첫 “타락”의 결과를 엄숙히 돌아보게 합니다. 동산에서 쫓겨난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으며 그들이 이미 저지른 일을 없었던 일로 되돌려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 본문을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비유의 끝에 가서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는 말씀을 단순한 하나님의 징계를 가리키는 내용으로 해석하기란 거의 불가능한데 이는 가시와 엉겅퀴를 불사르면 채소가 풍부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멸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회복시키고자 함입니다. 불이 장래에 땅을 보다 비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의 해석 범위를 벗어나는 과실입니다.
본문의 엄숙한 경고 뒤에는 수신자들을 격려하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즉 기자는 참 신자들의 특징을 진술함으로써 수신자들 대부분이 가시와 엉겅퀴가 아니라 채소와 같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 그들이 영원한 구원을 소유한 자들임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1992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