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30, 2018

건강한 교회의 8가지 조건

"건강한 교회의 8가지 조건"

NCD 1위 김성곤 목사, 뉴욕에서 두 날개 양육시스템 컨퍼런스

부산 풍성한교회는 ncd(natural church development) 평가가 세계에서 가장 높게 나온 교회이다. 담임인 김성곤 목사는 8월 18일 두날개양육시스템 컨퍼런스에서 이를 언급하고 '건강한 교회의 8가지 질적 특성'이라는 주제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ncd에 대한 내용은 목회자라면 대부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ncd 고득점자의 경험담이 흥미롭다. 다음은 강의 내용이다.

🔹🔹🔹🔹🔹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으며 교회성장은 멈추었다. 성장한다는 교회는 수평이동이 대부분이다. 불신자 전도성장은 극소수이다. 이런상황에서 90년 중반에 ncd(natural church development, 자연적 교회성장)이 알려지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동안 교회성장의 이론은 양적인 성장이 주축이었지만 독일학자인 크리스찬 슈바르츠는 질적인 성장을 강조했다. 그는 5대양 6대주 1천여개 교회의 420만 자료를 조사하여 망하는 교회과 잘되는 교회는 원인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방대한 연구 결과로 슈바르츠는 교회의 8가지 성장 원리를 발견했는데 질적으로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성장한다고 결런지었다.
 
교회는 생명체이다. 질적으로 건강해서 살아있으면 반드시 성장한다. 이전의 교회들은 양적성장에 관심을 두고 연예인을 부르고 선물을 주며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 무슨 방법을 사용하던지 성장만 시키면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도 교회성장은 멈추었고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도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한줄기 소망은 건강한 교회를 만들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한다는 것이다. 94년 5월 풍성한 교회를 시작했다. 부산은 절과 무당이 많은 영적으로 좋지 않은 곳이다. 교회설립 7년이 되어 ncd가 한국에 들어와 2년간 한국교회에서 컨설팅을 했다. 우리는 3번을 받았는데 3번 다 전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교회라는 점수가 나왔다. 
 
그동안 4천5백교회가 '두날개양육시스템 집중훈련'을 수료하고 1만4천명이 컨퍼런스를 다녀갔다. 두날개시스템은 15년간 우리교회 역사와 함께 검증이 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의 교회가 그동안 양적인 성장에 맞춘 포커스를 질적으로 변화되면 건강해져 가만히 두어도 성장한다.
 
건강한 교회는 8가지의 질적인 특성이 있다
 
1. 사역자를 세우는 지도력

이전 연구논문에는 교회성장의 원인은 대형교회 목회자의 통치와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는 교인이 많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교회안에 얼마나 구경꾼이 적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명이라도 일꾼은 천명도 안된다. 그런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여러가지 조직이나 프로그램으로 교인을 모을수는 있다. 그러나 건강하다고 말을 못한다. 건강한 교회는 출석하는 성도들의 80% 이상이 일꾼으로  참가하는 것이다. 
 
평신도를 사역자로 세우려는 리더십을 가진 만인제사장적인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군림하고 통치하는 리더십이 건강한 교회를 만들지 못한다. 교회의 교인들을 양육하고 훈련해서 사역자로 세우려는 리더십이 중요하다. 만약 교회 리더십이 카리스마를 가진 특정 한 사람 군림아래에 있다면 교회가 건강한 것이 아니다.
 
2. 은사중심적인 사역

사역의 리더십은 항상 교회에 있었다. 그러나 성도의 은사를 발견하고 은사대로 사역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다. 크리스찬 슈바르츠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기 은사를 알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은 10%도 안되었다. 
 
대다수의 성도는 충성하고 순종의 의미로 싫어도 맡겨진 일을 했다. 은사가 없는데도 마지 못해 하므로 결코 기쁨과 즐거움과 열매가 없다. 건강한 교회는 다양하게 은사를 나누고 은사중심적으로 효과적인 사역을 하게 한다.

3. 기능적인 조직
 
교회안에 여러가지 조직이 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의 조직은 비전을 이루기 위한 조직이어야 한다. 이 기준으로 조직의 존폐를 결정해야 한다.

많은 경우 본질과 비본질을 구별하지 못해 많이 싸운다. 비본질적인 것을 건드려도 주님을 건드린줄 착각한다. 시대에 따라 구태의연한 의사결정에서 기능적인 조직으로 바꾸어야 교회가 건강해 진다.

4. 영감있는 예배
 
건강한 교회의 예배는 영감이 넘친다. 종교적이고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예배이다.

주일만 나오는 신자라도 예배에서 감동을 받아 일주일을 힘차게 살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이런 예배가 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야 한다.

5. 열정적인 영성
 
건강한 교회 성도들은 열정적이다. 열정이 없으면 절대로 성공할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열정은 성령충만할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 교회는 열정이 어느정도인지 진단하라?

6. 필요중심적인 전도
 
필요중심적이란 불신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전도이다.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다. 결국 관계전도이다. 임산부가 전도대상이면 대신 아이를 보거나 시장에 가준다. 필요를 채워주면서 전도해야 한다. 
 
이제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으로는 전도가 어렵다. 불신자의 필요를 채워주며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런 전도스타일로 전도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다. 여전히 전도은사를 가진 몇명이 전도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니다.

7. 전인적인 소그룹
 
교회의 소그룹으로 구역이 있다. 만남 자체가 전인격적인가 아닌가가 중요하다. 관리차원의 모임은 안 된다. 상호의존하는 형제처럼 모이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성경 혹은 교리적인 지식을 배우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전인적인 소그룹이다. 전인적이며 생명이 있는 소그룹은 반드시 성장한다. 일년에 한차례 이상 분가하지 못하는 셀그룹은 암세포이다. 
 
소그룹이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있어야 한다. 예배보다 셀그룹에 나오는 숫자가 많아야 건강한 교회이다. 소그룹이 아니라 건물 중심의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초대교회는 건물중심이 아니라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누룩처럼 번지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8. 사랑의 관계
 
교회는 생명체이다. 구성원들이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가가 중요하다. ncd 건강진단을 했을때 65점 이상이면 건강한 교회라 했다. 풍성한교회는 처음 93점이 나왔다. 8부분중 가장 많이 나온 점수가 사랑의 관계였다. 왜 그럴까 궁금했다. 
 
가장 중점은 둔 것은 설교를 통해 성도의 신분을 깨닫게 하고 부정적인 자화상을 긍정적으로 만들고 낮은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열등감은 복음을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나는 7년간 복음적인 설교를 통해 낮은 부정적인 자존감을 회복시켰다. 
 
자존감을 회복되니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또 하나님과 다른 영혼을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다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건강한 자화상과 자존감의 회복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출처: 아멘넷 뉴스)

소그룹 목회에 대한 고백적 성찰  

❇️소그룹 목회에 대한 고백적 성찰  
/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원로)

(이 글은 2015년 11월 16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대학교에서 열린 제2회 소그룹목회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이동원 목사의 발표글이다. -코닷-)

여는 이야기, 하나.

1973년 10년여의 이민 목회를 마무리하고 교회 개척을 위해 귀국하는 발제자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땅에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또 하나의 교회를 더 추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이 땅에서 개신교회는 천덕꾸러기, 말썽 많은 종교 집단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고 회고된다. 이미 한 지역에 교회가 들어서면 주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계절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름대로 내 안에서 일어난 자위적 대답은 만일 한 지역에 좋은 병원, 좋은 학교가 들어선다 해도 주민들이 그렇게 대할 것인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주님의 몸으로서의 한 지역교회의 존재 의미는 좋은 병원과 좋은 학교를 합한 의미와도 비교될 수 없는 공동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그런 교회를 어떻게 세워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는 명쾌한 해답을 가지지 못하였다. 다만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힘쓰는 건강한 성경적 교회를 세우리라는 열정만은 가득하였다. 빠르게 7년여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고 개척된 지구촌교회는 2,000년을 앞두고 순전히 주의 은혜로 교인 출석만 1만명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 교회가 개척할 때 열망했던 그런 건강한 교회였는지는 정직하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여는 이야기, 둘.

그러던 어느 날 잠실 야구장 근처를 지나다가 막 게임이 끝나고 밀려 나오는 인파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지난 몇 시간 동안 야구장 스타디움에서 열광하며 목소리를 높이며 응원의 함성을 보내고 게임의 재미를 만끽하던 군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지난 몇 시간을 야구장에서 보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그들이 돌아가는 가정에서의 삶, 혹은 일터에서의 삶에 어떤 괄목할만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다소 엉뚱하지만 심각한 질문이 내 안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에 연속으로 내 안에서 제기된 물음은 “우리 교회는 과연 다를까?”라는 물음이었다.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반 교회당 안에서 주일 예배 혹은 수요 예배라는 형식으로 예배에 참여한 청중들 중에는 때로 그 시간에 받은 설교나 찬양의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시고 때로 웃기도 하면서 교회당을 빠져 나오지만 문제는 그들이 가정으로 일터로 돌아가면서 그들이 참여한 예배로 인해서 진정한 변화를 동반하는 삶의 모습들이 일어나고 있을까라는 물음이었다.

아니면 지난 7년간 우리 공동체는 야구장이나 극장처럼 사람을 모이게 하는 일에만 성공한 것은 아닐까라는 물음으로 한동안 발제자는 제법 심각한 자기 고뇌에 빠져 들어갔다. 그래서 <21세기 교회 비전 연구회>를 발족시키게 되었다.

여는 이야기, 셋.

교회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남녀 20여명(기획팀 10명, 중보 팀 10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매주 모여 그 동안의 교회 족적을 반성하며 교회 미래의 방향 설정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정도 담임목사와 만나 담임목사의 미래 교회 구상을 청취하고 질의 응답하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이 모임에서 한 위원의 유머로 던진 조크가 내 영혼을 더 깊은 번민 속에 빠트리게 하였다. 그것은 이제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마음대로 목회하실 수 있는 왕국이 되셨습니다”라는 멘트였다. 정말이지 나는 지금까지 랄프 네이버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Kingdom)가 아닌 나의 왕국 혹은 나의 ‘성’(Castle) 쌓기를 위해 헌신해 온 것이었단 말인가?

한 달여 나는 이 질문과 더불어 치열한 고뇌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과제와 씨름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읽고 있었던 랄프 네이버의 책, “셀 교회 지침서”(Where do we go from here?)1)를 통해 21세기 우리 교회의 방향을 셀 교회로 가겠다는 결정과 목회자의 일반 은퇴 연령 70세가 아닌 65세에 은퇴하고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세워지는 후임자 멘토링에 나머지 5년을 헌신하겠다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담임 목회자만 의존하는 교회가 아닌 몸으로서의 기능이 가능한 공동체의 형성으로 교회 비전을 다음세대로 이어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2010년 12월 31일 밤 12시 약속대로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집으로 오면서 과연 우리 교회 셀 교회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라는 객관적 평가를 떠나 셀 사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회한 속에 맞이할 수 있었던 목회 마무리를 그래도 감사한 맘으로 마무리함을 감사할 수 있었다.

여는 이야기, 넷.

2000년 안식년으로 얼마간의 휴가를 얻은 저는 휴스턴으로 날아가 셀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우던 랄프 네이버를 만나 며칠을 교제하며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셀 교회에 대하여 씌여진 모든 책들을 구입하여 나름의 연구에 골몰했고 귀국 즉시 2001년 한 해를 부목사님들과 셀 목회에로의 전환을 위한 토론과 연구, 준비를 시작하였다.

2002년 셀 목회에로의 전환을 선포하며, 2002-2003년 셀 교회 목자 훈련을 시작하였다. 이미 좋은 소그룹 지도자(목자)가 이끄는 목장을 모범목장으로 지정하여 셀 사역의 이상적 그림을 적용하고자 하였다.

2003년 교회 모든 조직을 목장센터를 중심으로 통합하였고, 교회 내 모든 성경연구 프로그램도 목장에 합한 것은 통합하여 목장 사역에 장애가 없도록 조정하였다. 이 기간 동안 발제자는 외부 집회를 최대한 자제하며 매주 수요일 가장 좋은 오전 10시에 자매 목자, 수요 예배 후 형제 목자 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4년 5월 제1회 셀 교회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랄프 네이버, 셀 교회 연구 신학자 박영철 교수 등을 모시고 국내외, 교회 대내외,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약1,000여명을 모시고 첫 번째 대회를 개최하여 우리 지구촌교회가 시작한 작은 실험을 한국 교회와 지속적으로 나누기로 하였다.

📌지구촌교회가 셀 목회로 전환하며 기대한 교회상

1. 건강한 교회

교회성장 운동의 대부로 불리우는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박사가 인도 선교의 교회 개척 경험을 기초로 미국으로 귀환하여 1960년대부터 풀러 신학교 세계 선교 대학원과 교회 성장 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근거로 펼친 교회 성장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약 40년에 걸쳐 ‘성장하는 교회’의 화두를 던졌다.

아마 한국교회는 이 운동의 최대의 수혜자요, 성장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근접하면서 우리는 이 운동의 역기능이 적지 않았음을 미국(대표적인 실례는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과 한국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교회 성장 운동이 전도와 선교에 적지 않은 긍정적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이 운동에 대한 성찰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정확하게 1996년을 기점으로 소개된 독일의 크리스천 A. 슈바르츠의 NCD(Natural Church Development)  운동은 새로운 화두인 ‘건강한 교회’의 논의를 촉발시켰다. 우리는 이 운동이 건강한 교회의 질적 특성 8가지를 언급하면서 ‘전인적 소그룹’을 주목한 것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지구촌 교회는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교인들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교회 구경꾼이 아닌 교회 일꾼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셀 교회에로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본 것이다.

2. 크지만 작은 교회

종종 지구촌교회가 셀 목회로 전환한 것이 양적 성장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나를 질문 받는다. 지구촌교회를 개척한 개척자로서의 대답은 우리가 셀 목회로 전환하지 않았어도 현재와 같은 3만명 출석의 목표는 달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셀 목회에로의 전환이 없었더라면 이동성장을 주로 의지해야 할 것이었지만 적어도 2005-2009년까지의 5년간처럼 ‘회심성장’(conversion growth)의 숫자가 '이동성장'(transfer growth)의 숫자를 크게 앞서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딤전 3:15)를 성도들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구촌교회의 셀 교회에로의 전환은 건강한 교회에의 갈망을 기초로 주일의 대 그룹 만의 목회 경험이 아닌 셀을 통한 작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따뜻한 교회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그 중요한 전략 목표이었다. 그것은 크지만 작은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셀 교회 신학자 빌 빅햄이 그의 저서 ‘제2의 종교개혁’에서 주일 대그룹이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면 셀 목장의 소그룹은 내재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그 이상이었다.

3. 평신도 사역자를 육성하는 교회

신약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벧전2:9-10, 계1:6) 이 ‘전신자의 제사장화’(Priesthood of all believers) 혹은 ‘만인 제사장론'은 이미 종교개혁을 통해 천명되었지만 그 적용과 실천은 오늘날 까지 미루어져 왔다.

문제는 어떻게 모든 성도들 성도다운 성도, 제사장다운 제사장으로 육성하느냐의 문제다. 이것은 신학화의 작업문제 못지않게 목회 실천적인 과제이다. 오늘 날의 교육은 ‘인지적 교육’(cognitive learning)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 바로 모델링의 교육이다. 우리는 ‘들음’으로 배우기보다 ‘봄’으로 훨씬 더 잘 배운다. 유능한 전도자가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 사람들은 보다 신속하게 전도자로 태어난다. 그리고 가정을 기반으로 목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을 관찰한 성도들은 훨씬 효율적으로 성도의 행동과 삶을 모방할 수 있다. 셀 목장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 사역자 육성의 가장 효율적인 모태라 할 수 있겠다. 담임 목사가 가르치는 교육만으로 평신도 사역자는 준비되지 못한다. 여러 지도자와 성도들이 소통하는 현장에서 성도들은 ‘온전해 진다’(equipping)고 믿는다.(엡4:12)

4. 전도 지향적 교회

성경은 은사로서의 전도자를 언급하기도 하지만(엡4:11), 동시에 모든 제자의 소명으로서의 전도의 과업을 가르친다.(마태28:19) 바울은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고백하고 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가장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이고, 가장 정상적인 교회는 전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라고 믿는다. 이런 모범적인 현장을 보여준 것이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 현장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모이기를 힘썼고, 그 결과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그들의 모임에 더해지게 되었다.(행전2:46-47) 그것은 그들이 부정기적으로 모이는 성전의 대그룹 모임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이웃을 접촉하는 ‘집에서의 모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대부분의 초대 교회는 ‘집에서 모이는 교회’였다. 이것이 초대 교회를 역동적인 전도 지향의 교회가 되게 한 비밀이라면 이런 교회의 회복은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

5. 평신도의 은사를 활용하는 교회

역동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구경꾼이 최소화되고 모든 지체들이 일꾼들이 되어 섬기는 모습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구성되려면 모든 지체들의 은사 활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은사(karisma)를 활용하지 않으면 기쁨(kara)이 없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지체들에게 자신의 은사에 맞는 섬김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주일 대그룹의 환경만을 의존하고 있다면 구조적으로 그 교회는 구경꾼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발제자는 그 효율적인 대안이 바로 셀 교회라고 믿는다. 보통 아주 건강한 교회도 평신도 자원의 20%정도만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80%는 구조적으로 구경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10명 미만의 소그룹으로 구성된 목장에서 선교 활동이나 섬김의 봉사 활동을 나갈 경우 최소 80%인 8명은 참여할 것이다. 대그룹 구조 교회와 정 반대 현상이다.

그러나 이 80%의 참여가 극대화되려면 은사 배치 점검을 게을리 말아야 하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목자는 제공해야 한다. 지구촌 교회는 은사에 따라 모든 목장원에게 부장 직을 맡긴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은사 배치 세미나를 정례화하고 있다.

6. 온 성도가 12제자 비전을 갖고 사는 교회

랄프 네이버는 예수님과 그의 12제자들이 형성한 공동체를 가르쳐 ‘기독교 기초 동체’(Basic Christian Community) 혹은 ‘그리스도의 기초적인 몸’(Christ's Basic Body)이라고 불렀다.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신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은 홀로 사역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팀 사역의 모범을 남기셨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제자삼아 훈련하시고 다시 그들에게 전도의 과업을 맡기시며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신 것은 오늘의 우리를 향한 원형적 모범으로 믿는다.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제자이며 예수를 따라야 한다면 제자 삼는 사역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 소명이다. 그런데 이런 소명 성취의 가장 효율적 마당이 바로 셀 사역의 현장이다. 셀은 12명 미만으로 구성되며 리더 목자는 바로 이들과 삶을 같이 함으로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목자 없이 방황하고 고생하는 양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주님은 바로 그 후 12제자들을 부르셨다.(마태9:36-10:1)

그렇다면 제자의 사명은 목자가 되는 일이다. 셀 사역을 시작한 이래로 지구촌 교회에는 현재 목자와 미래 목자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해 왔다. 온 성도가 12제자 비전을 갖고 사는 교회, 이것이 바로 지구촌 교회의 비전이다.

7. 주님의 지상 명령을 성취하는 교회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선교이다. 교회는 단순히 선교사를 많이 파송함으로 선교적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곧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인구 증가가 없는 것이 국가적 딜레마로 대두되고 있지만 여전히 온 세상을 보면 인구 증가는 폭발적이고 기하 급수적이다.

이런 인구 증가의 대안은 폭발적인 전 세계 복음화가 유일한 대안이다. 셀 교회 연구가와 운동가들은 그 대안이 바로 ‘셀 폭발’(Cell explosion)이라고 믿는다. 셀은 분화되지 않고 뭉치면 암 세포가 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모습이지만, 12명의 제자 공동체에게 이 복음화의 지상명령이 주어진 것이라면, 12명이 다시 12명을 낳는 셀이 셀을 낳는 셀의 분가야 말로 복음화의 가장 생산적 대안이다.

마태28:18-20의 지상 명령은 개인을 향한 명령이라기 보다 교회를 향한 명령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여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밥티스마(세례/침례)의 명령과 지속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양육의 명령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준행해야 할 명령이다.

마무리 성찰

오늘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은 사실상 정체기에 들어섰다. 이런 정체기를 돌파하는 전략은 갱신과 성숙의 비전뿐이다. 그러나 갱신과 성숙은 이론적 대안 제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초대 교회적 삶의 구현이 일어나지 않으면 갱신과 성숙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셀 공동체는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한국 교회의 질적 희망이라고 믿는다.

선교학자 로스 해스팅스(Ross Hastings)는 ‘미쇼날 쳐치’의 회복은 서구 교회를 다시 복음화 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저서의 결론에서 신학자 뉴비긴(Newbigin)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 도전을 남긴다:

“그의 사명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하고 그의 영이 우리의 영이심을 알자. 이제 우리 교회가 보내심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사명 뿐 아니라, 왕국의 현존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부름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자.”

셀 목회와 셀 사역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교회의 희망이며 대안임을 믿고자 한다.

Saturday, December 29, 2018

히브리서 6:1-8 해설

히브리서 6:1-8 해설

/ 알버트 맥쉐인

🎯히브리서 6장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Therefore let us leave the elementary teachings about Christ and go on to maturity, not laying again the foundation of repentance from acts that lead to death, and of faith in God,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instruction about baptisms, the laying on of hands,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and eternal judgment.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And God permitting, we will do so.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have once been enlightened, who have tasted the heavenly gift, who have shared in the Holy Spirit,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who have tasted the goodness of the word of God and the powers of the coming age,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if they fall away, to be brought back to repentance, because to their loss they are crucifying the Son of God all over again and subjecting him to public disgrace.

의심할바 없이 본문은 우리의 마음 속에 의문점을 가득히 불러일으킵니다. 이제 본문이 야기시키는 다음의 대표적인 네가지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는 구절의 의미는 무엇인가?(2절)

2) “세례들”의 의미는 무엇인가?(1절)

3) “타락한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3~6절)

4) 7,8절의 비유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본문은 문맥상 5장 11절에서 시작해서 6장 마지막 절까지 이어지는 단락의 한 부분입니다. 이 단락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비유되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이야기에서 방향을 바꿔 이 서신을 받은 수신자들의 변명의 여지없는 영적 미성숙을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무디어지고 제대로 성장을 하지 못했으며, 기자는 그들의 빈약한 이해력으로 인해 앞서 서론적으로 진술한 보배로운 진리들을 보다 깊이 펼쳐 보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성숙한 자들만이 심오한 진리라는 단단한 식물을 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가르침이 기초로서 필수적이긴 합니다만 바라는 목적이 이뤄지려면 이 기초 위에 상부 구조가 세워져야만 합니다. “기본 원리들을 떠나라”(한글 개역 성경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로 되어있음-역주)는 말은 그것들이 제쳐져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 그것들은 보다 차원 높은 가르침에 이르는 과정의 시작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의문 1)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는 구절의 의미는 무엇인가?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는 표현은 적어도 다음 세가지 뜻으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1) 그들이 성숙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분별력을 키워가라는 권면의 말.

2) 기독교의 교리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해 가겠다는 기자의 의도가 담긴 말.

3) 기자와 함께 보다 심오한 가르침으로 들어가 보자는 권고의 말.(이 마지막 해석은 앞의 두 해석을 결합시켜 놓은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해석을 취하는 사람들은 5장 마지막 부분을 강조하며 올바르게도 이 구절의 “완전”이란 말과 5장14절의 “장성한”이란 말 사이의 연관성을 살펴보는데 이는 그 두 낱말이 어원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6장의 첫 단어 “그러므로”가, 본문이 전술한 내용의 계속임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주저 없이 지적해 보입니다. 그들에게 이 구절은 지식과 분별력이 완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자는 여기서 복수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함으로써 그가 본 서신에서 종종 사용하는 기법, 즉 자신을 수신자들과 동일시하는 기법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지 말고 어른의 장성한 상태에 이르도록 계속 성장하라고 독려했습니다. 이 해석을 취하는 사람들은, 성장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변절자가 되어 스스로 생명이 없는 자로 드러날 법도 하기 때문에 문맥상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 비교하여 계속 갈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에베소서 4장에서 이와 유사한 병행귀절을 찾는데, 거기에 보면 본문처럼 장성한 사람(13절)과 어린 아이(14절)가 대조되어 나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언급된 회개와 신앙은 수신자들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터를 다시 닦지” 말아야 하는 사람은 기자 자신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아마 대부분 현대 주석가들은 두번째 해석을 취할 것입니다. 그들은 기자가“우리”라는 복수 인칭을 사용한 것은 기자 자신만 언급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그들에게 있어 이 귀절은 성도들에게 주는 권면이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지닌 심오한 가르침으로 계속 나아가고자 하는 기자의 의도를 선언한 말입니다. 그들은, 본 서신은 전체적으로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하지 못하며, 기자의 차원높은 가르침은 수신자들이 그로부터 벗어난 유대주의와 첨예하게 대조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완전”은 수신자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기자의 가르침의 심오성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1,2절에서 언급된 여섯 가지 중대한 진리들을, 율법 안에 있었으나 반드시 복음의 일부는 아닌 요소들로 봅니다. 그들의 판단에 히브리서 기자는, 3절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자신은 수신자들의 제한된 분별력으로 인해 자신이 펼쳐 보이고자 하는 심오한 가르침이 제약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이 안고 있는 난점은 어떻게 그것을 문맥과 조화시키느냐입니다. 1절의 “그러므로”는, 이어지는 내용이 5장의 실패를 교정하기 위한 권면이 될 것임을 암시하는데 따라서 “나아갈지니라”는 말도 그런 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4절의 “그러므로”(For, 한글개역 성경엔 나와있지 않음-역주)도 이어지는 내용이 앞의 내용의 연속임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완전한데 나아가는 기자와 그 뒤에 이어지는 경고 사이에 좀체로 어떤 관련성을 찾기가 힘들며 그 대신 첫번째 해석이 취해질 경우 문맥이 완전히 들어맞게 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배도할 위험이 큰 사람들입니다. 성장이 결여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이 허구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법 합니다. 우리가 이미 진술한 대로 “회개”와 “신앙”은 수신자들의 경험이었지 기자에 의해 일찌기 다뤄진 주제가 아니듯이, 여기의 언급도 수신자들에 대한 것이지 기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더더욱 터를 다시 닦기를 거절한 것은 기자가 아니며, 다만 수신자들이 그렇게 하라고, 즉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권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2절의 “교훈”이 비록 문장의 맨 끝에 나오지만 사실 1절부터 시작되는 여섯 가지 항목 모두에 연결돼 있는 말이므로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신앙과 회개의 실행이 아니라 그 여섯 가지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가르치기를 추구해왔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본문의 원래 의도라면 왜 기자가 그 사실을 명백히 밝히지 않았을까요?

세번째 해설 역시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제시되었는데 그들은 본문을 기자가 자신의 가르침을 계속 발전시켜나가고, 동시에 그의 수신자들을 자신과 함께 5장에서 이미 언급된 그 완전한데로 이끌고자 하는 내용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자는 보다 깊은 가르침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밝히고 있으며, 그들의 미흡한 성장이 그 목적을 추진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긴 하지만 그는 보다 차원높은 가르침으로 나아가면서 그렇게 하는 동안 그들의 영적 수준이 곧 자신의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매우 타당해 보이며 또 표면적으로 난점을 해소해 주는 듯 보이지만 그러나 자세히 상고해 보면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왜냐하면, “나아갈지라”(Let us go on)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앞으로 이끌림을 받을지니라”(Let us be carried forward)는 뜻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요지는 수신자들이 그들의 교사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성숙으로 이끌도록 허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성장은 육체적인 성장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우리의 의지에 의해 경험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성장에 이르는 개념과 어떤 주제를 발전시키는 개념은 전연 별개의 문제이므로 만일 이것(세번째 해석)이 본래의 의도였다면 그 두 경우가 구분되어 표현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이의 글에 나타났듯이 “만일 기자가 두 가지를 함께, 즉 수신자들을 각성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의도를 실행하고자 했다면 그는 반드시 두 가지를 따로 따로 언급했어야 했습니다. “ 만일 우리가 본 구절을 이와 같이 이중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버리고”와 “닦지 말고”도 역시 이중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기자가 이런 단어들을 사용할 때 수신자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의문 2) “세례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에 언급된 여섯 가지 기본적인 진리 가운데 이해하기가 힘든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세례들”입니다. 이 여섯 가지 항목은 분명히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즉 “회개와 신앙”, “세례들과 안수”,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이 각각 짝을 이루어 연결돼 있습니다. 

첫번째 짝은 신자의 최초의 경험들을 말해주며, 두번째 짝은 외적인 상징들을, 그리고 마지막 짝은 영원한 실재를 알려줍니다.

“세례들”이 일반적인 물 세례를 가리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며, 여기서 복수를 취한 것은, 단수의 의미뿐인 대목에서 흔히 복수 형태로 나타나는“death(죽음), bosom(가슴), blood(피), sanctuary(성소), east(동쪽)” 등과 같은 단어들처럼 아마도 강조의 형태를 취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단어가 요한의 세례, 신자의 세례, 성령의 세례 등 신약성경상에 언급된 모든 세례를 가리킨다고 보는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신약성경에 신자의 세례를 언급할 때는 항상 단수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편 세 구절에서 복수 형태가 나오는데 이 때는 “씻음”(washing), “씻는 것”(washings)으로 옮겨져 있습니다(막 7:4, 히 9:10). 이러한 의미를 염두에 두면 “세례들”이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정화(靜化) 규례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게 됩니다. “안수”와 마찬가지로 “세례들” 속에도 상징적인 가르침이 들어있었습니다. 본서의 수신자들 중 아무리 어린 신자들도 이들 진리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보다 깊은 진리들로 나아가기 위해 능히 그것들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의문 3) “타락한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이제 “타락한 자들”에 대해서 상고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역시 여러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결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위선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기자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독자들을 각성시켜 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주장하며, 아울러 그들이 생각하기에 본문에 묘사된 사람들은 너무 깊은 경험을 하고 있기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아니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박습니다. 그들은 5절 첫머리에 나오는 “만일”이란 접속 부사를, 마치 회의의 뜻을 가진 말인 양 지적하는데, 사실 그들은 “만일”(if)을 대신해서 원어의 의미를 잘 살려줄 다른 단어가 없다는 점을 잊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경고를 발하는 것은 성경의 특징에 맞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본문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엄성을 격하시키고 그것을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책 정도로 전락시키는 셈이 됩니다. 마음을 차근히 가다듬고, 본문의 위험은 실재하며, “타락한 자들”의 실례는 가상적인 인물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초점을 모읍시다.

여기에 언급된 다섯 가지 경험들은 너무 중요한 경험들이어서 그 당사자들 모두는 참 신자들일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주님께 속한 백성들의 경험을 표현하는 듯 보입니다. 사실상 이 서신을 처음으로 대한 당시 수신자들은 모두 이러한 축복들을 경험했었는바, 그들은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 목도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맛보는 것이 반드시, 자동적으로 영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비췸”(enlightenment)은 그들이 복음을 접하고 “진리의 지식을 받았다”는 것을 뜻하는데, 그런 점에서 그들은 유대주의의 어두움에 싸여있는 가련한 영혼들이 아닙니다. 이렇듯 그들이 경험한 “비췸”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으며 이어서 언급된 “하늘의 은사를 맛본” 것은 그들이 그것(하늘의 은사)을 소유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두번째 축복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하늘로부터 온 특별한 은혜를 가리키는 듯 한데 이것은 이제까지 이 땅에 부여된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성령의 역사를 힘입게 되었을 뿐더러 기적적인 영역에서 성령의 능력을 입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그들에겐 내세의 능력과 필적하는 기적적인 능력들이 증명되었습니다. 오직 신자들만이 이러한 놀라운 경험들을 지녔다고 설명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유다가 이 모든 일들을 알고 있었지만 참 신자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묘사된,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세 가지 죄목이 부과돼 있습니다. 그들은 첫째로 “타락했으며”, 둘째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세째로 “그분을 현저히 욕보였습니다. "타락했다”(fall away)"로 옮겨진 단어는 신약 성경에는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오지만 70인역(the Septuagint, B.C. 3세기경 완성된 헬라어판 구약성경-역주)의 에스겔서에는 네 차례 나옵니다. 반면에 그 단어의 명사형은 자주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위반하다”(trespass), 또는 “범하다”(offence)로 옮겨졌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부정(不定) 과거형(aorist, 완료,계속 따위의 뜻을 포함하지 않고 단지 과거의 일만을 나타내는 시제-역주)은 그것이 단순한 우발적인 과실이 아니라 하나의 완료된 행위임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대적이었던 이전 위치로 되돌아가 마음으로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다는 의미를 내포하는데, 이것은 바꿔 말해서 그들이 “저를 없이 하소서”하고 외친 무리들 가운데로 다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전에는 그들의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그분을 공개적으로 욕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이 멀어 그리스도를 나무에 못박은 모든 사람들은 용서받을 수 있었지만, 눈을 뜬 채로 고의로 그분을 버리고 기독교를 비난하고, 그리고 유대주의로 돌아가버린 사람들은 추호의 자비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그들이 거절한 분의 위엄을 나타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원의 희망을 저버리고 심판을 면할 유일한 다리를 불살라버렸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파멸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도, 회개할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실수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한 후 자신들이 사실 구원받지 않은 것을 깨달은 사람들과 구별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회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도자들은 다른데, 그들은 의도적으로 빛을 거절하고 태양이 결코 떠오르지 않는 어두움으로 등을 돌린 자들인 것입니다.

의문 4) 7~8절의 비유는 무엇을 뜻하는가?

히브리서 6장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Land that drinks in the rain often falling on it and that produces a crop useful to those for whom it is farmed receives the blessing of God.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But land that produces thorns and thistles is worthless and is in danger of being cursed. In the end it will be burned.

배도자를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를 명백히 하고, 타락의 결과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농경(農耕)의 경우를 그 실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비를 흡수하는 땅은 두 가지 다른 작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4~5절의 축복들에 상응하는 신선한 비가 땅 위에 먹을 만한 채소를 내면 밭 가는 자는 이것을 하나님의 축복의 증거로 여기게 되지만, 그러나 똑같이 경작을 하고 똑같이 비가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가시와 엉겅퀴가 나올 경우에는 밭 가는 자는 응당 그것들을 모두 잘라 불살라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채소의 경우엔 땅이 그것들을 “생산해 내었다”(bring forth)고 표현돼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농부가 씨를 뿌릴 당시 기대하던 생산물이라는 뜻을 암시하며, 가시와 엉겅퀴의 경우엔 땅이 그것들을 “낳았다”(bear)고 표현돼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기대하던 작물이 아니라는 뜻을 암시한다는 사실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한글 개역성경엔 모두 “내다”로 되어 있다-역주). 이 해로운 잡초는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저주를 암시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땅과 같이 그들 중에 있는 경작자들에 의해, 또한 하늘의 축복으로 복을 받았었지만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배교를 하여 영원한 불 심판 외에 아무것도 바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표현들은 수신자들로 하여금 인류의 첫 타락(the Fall)의 이야기를 상기케 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저주”, “가시”와 “엉겅퀴” 등의 표현은 그 첫 “타락”의 결과를 엄숙히 돌아보게 합니다. 동산에서 쫓겨난 그들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으며 그들이 이미 저지른 일을 없었던 일로 되돌려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 본문을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보는 사람들은 이 비유의 끝에 가서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는 말씀을 단순한 하나님의 징계를 가리키는 내용으로 해석하기란 거의 불가능한데 이는 가시와 엉겅퀴를 불사르면 채소가 풍부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징계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멸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회복시키고자 함입니다. 불이 장래에 땅을 보다 비옥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의 해석 범위를 벗어나는 과실입니다.

본문의 엄숙한 경고 뒤에는 수신자들을 격려하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즉 기자는 참 신자들의 특징을 진술함으로써 수신자들 대부분이 가시와 엉겅퀴가 아니라 채소와 같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 그들이 영원한 구원을 소유한 자들임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1992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