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The creation waits in eager expectation for the sons of God to be revealed.)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For the creation was subjected to frustration, not by its own choice, but by the will of the one who subjected it, in hope)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that the creation itself will be liberated from its bondage to decay and brought into the glorious freedom of the children of God.)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We know that the whole creation has been groaning as in the pains of childbirth right up to the present time.) (개역개정, NIV)
1. 존 칼빈의 로마서 주석
2. 최영찬 목사(인터넷 성경 연구원 바이블나라 원장, 리폼드 신학교 목회학 박사)
3. 호크마 주석
4. Mathew Henry Bible Commentary English
✳️칼빈 주석 / 로마서 8 :19-22
📍로마서 8장 19절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바울은 우리에게 인내하라고 권면하면서, 말 못하는 피조물들에게서도 그 인내의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나는 이 구절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을 생략하고, 그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현재의 비참함을 깨닫고 괴로워하느라 부활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지 않는 피조물은 그 어디에도 없다.”
바울은 두 가지 진리를 언급하는데, 하나는 모든 피조물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피조물들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영원한 영광이 헤아릴 수 없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물을 자극하여 그 영광을 소망하도록 만들 만큼 그 영광은 귀하다.
나아가서 ‘고대하는’이라는 단어는 약간 이례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가장 적절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나타내고 싶어 했던 의미는, 굉장한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강한 열망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이 공개적으로 드러날 날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때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사도 요한이 말한 것과 같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요일 3:2).
나는 바울이 사용한 어구를 그대로 두었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에라스무스가 사용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까지’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하지 않은 채 이 어구가 허용하는 것 이상으로 대담하게 번역한 것 같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지막 날에 나타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의 부패함을 벗어버리고 하늘의 영광으로 옷 입게 될 때 얼마나 바람직하고 행복한 상태에 있게 되는지 알려질 것이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그는 이성(理性)이 없는 피조물들이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는 신자들로 하여금 눈을 열어 보이지 않는 생명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 생명이 보잘것없는 옷 아래 감추어져 있더라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로마서 8장 20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그는 피조물이 고대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그 대상과 반대되는 특성을 들어 밝힌다. 썩어짐의 종 노릇 하는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전적으로 회복되기까지는 새로워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피조물들은 자기들이 새롭게 되기를 구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가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고 말한 이유는 그것들이 견고하고 안정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쉽게 변하며 빨리 없어져버리기 때문이다. 바울이 허무한 것과 완전한 상태를 비교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자기 뜻이 아니요
그런 피조물들은 의식이나 지각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뜻’(voluntas)이라는 것을 자연스러운 성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사물의 모든 본성은 그 자연스러운 성향에 따라 스스로를 보전하고 온전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썩어짐의 종 노릇 하는 만물은 자연의 목적에 반하고 그것과 반대되는 폭력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의인법(擬人法)을 사용해서(카타 프로소포포이안, kata prosopopoian) 바울은 세상의 모든 부분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는 우리가 이 세상이 쉽게 변하고 동요하는 것을 보고서도 마음을 더 높은 차원에 두지 못할 경우,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는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순종의 실례를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리고 그 순종이 ‘소망’(우리말 성경에는 ‘바라는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 역자 주)에서 일어난다고 덧붙인다.
해와 달과 모든 별들이 일정한 궤도에 따라 신속하게 운행하는 것, 땅이 그 열매를 맺는 면에서 부단히 순종하는 것, 공기가 지치지 않고 움직이는 것, 물이 기꺼이 흐르고자 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소망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피조물들에게 그에 맞는 과업을 주셨다.
그러나 단순히 그분의 뜻을 행하라는 정확한 명령만을 주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될 것에 대한 소망 또한 그 내면에 심어주신 것이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이 세상을 떠받쳐주지 않는다면, 아담의 타락 이후에 생긴 슬픈 혼돈 속에서 이 세상의 모든 복잡한 절차들은 거의 매순간 그 기능을 못하게 될 것이고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들은 고장이 날 것이다.
그러므로 감추어진 본능이 생명 없는 피조물들 속에서 하는 일보다 성령의 증거가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 하는 일이 덜 효과적이라면, 그것은 지극히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아무리 피조물들이 천성적으로 어떤 다른 길로 가고자 할지라도, 그것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더 나은 상태에 대한 소망을 주셨기 때문에, 그것들은 그 소망으로 스스로를 유지하며 자기들에게 약속된 썩지 아니함이 계시되기까지 계속 사모하는 것이다. 바울은 앞에서 피조물들이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처럼, 의인법을 사용해서 그것들이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다.
📍로마서 8장 21절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 해방되어
그는 피조물이 어떻게 ‘소망 가운데’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즉, 이사야 선지자가 증거하고 베드로가 훨씬 더 명료하게 확증하는 것처럼, 언젠가 피조물이 해방되는 날이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저주가 얼마나 끔찍한지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아무 죄 없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의 죄 때문에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
피조물들이 썩어짐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다. 이렇듯 인류가 당한 정죄는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영광으로 찬미를 받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들이 그 영광을 찬미하고 그 찬연함을 선포하기 위해서 새롭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동일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피조물들이 좀 더 나은 상태에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의 영광을 공유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류를 회복시키실 때 현재의 타락한 이 세상도 완전한 상태로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짐승과 식물들이 입증하게 될 완전함에 대해 굉장한 호기심을 가지고 알아보는 것은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썩어짐의 두드러진 특성은 쇠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찰력이 있기는 하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일부 주석가들은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썩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인지의 여부를 묻는다. 이러한 추측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둔다면 도대체 우리를 어디까지 끌고 갈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순한 교리로 만족하도록 하자. 즉, 피조물들의 구성과 질서가 너무도 완벽해질 것이기에 어떤 흠이 있다거나 잠시 있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로마서 8장 22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가 아느니라
그는 피조물 이야기에서 우리 자신의 경우로 옮겨오기 위해서 같은 명제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가 지금 말하는 것은 결론의 효과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피조물들은 자기들 본래의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셨기 때문에 썩어짐의 종 노릇을 하고 있다. 그리고 피조물들은 장차 썩어짐에서 해방될 것에 대한 소망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解産)하기까지 산고(産苦)를 겪으며 신음하는 것처럼 피조물들도 그렇게 탄식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우리말 성경에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그것이 해산의 고통을 나타낸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지 않지만, 칼빈이 인용한 성경에 나온 단어 ‘travail’는 ‘산고’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역자 주).
이것은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탄식이 헛되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장 적절한 비유이다. 그 탄식은 결국 기쁨에 넘치는 복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피조물들은 자기들의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초췌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피조물들은 더 나은 상태로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고통 중에 있다. 그가 ‘함께 탄식하며’라는 표현을 쓴 것은 피조물들이 우리와 동일한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통이라는 과정을 같이 경험하는 동반자로서 피조물들을 우리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이제까지’라는 불변화사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답답함과 지루함을 감소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만일 피조물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계속해서 탄식했다면, 우리가 그림자 같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쇠약해진다는 것은 도무지 그 유약함과 나태함을 변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고대하는 이유(20-22)
/ 최영찬 목사, 바이블 나라 운영자
"이는 피조물이 허무한 것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것의 지배를 받는 것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굴복케 하신 분 때문이었습니다(20). 그들이 바라는 것은 타락한(부패한) 것의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21).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알고있습니다(22)."
그러면 왜 피조물들이 영광의 날을 강렬하게 고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 날이 와야 피조물들도 진정 죄의 영향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그것을 주관하는 우리와 불가분의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피조물은 허무한 것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헛된 것"이란 말(마타이오테티)은 "허무한 것", "쓸 데 없는 것", 또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따라 그가 좆지 말아야 할 헛된 것을 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피조물들도 허무한 일에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잘 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후에 그들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맺게 되었으며, 땀을 흘려야만 곡식을 내어주는 열악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피조물은 인간과 협동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사용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조물을 가지고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피조물은 인간의 욕망이나 탐욕을 채우다가 사라져야 하는 허무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피조물은 이러한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이 피조물을 지배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 없이 타락한 인간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말로 "썩어진다"고 번역된 말(프쏘라스)은 "부패하고 썩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현재의 피조물이 인간의 죄로 인해서 "부패한 고기조각"과 같이 되었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은 자신들이 헛된 일에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에 이르는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영광에 참여하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 사용되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이 날을 고대하면서 심한 탄식을 하며 영광의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호크마 주석 / 로마서 8:19-22
📍8:19
🔹피조물 - 바울은 지금까지 구원의 초점을 인간에게 맞추었으나 이제는 보다 영역을 넓혀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이것은 장차 있게 될 성도의 영광이 성도들뿐 아니라 전체 피조물의 회복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다른 피조물조차 악의 지배를 받게 되어 전 우주가 무질서 가운데 빠졌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 본 구절은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로서 자기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과 피조물의 회복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시사해 주고 있다.
즉 피조물들조차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은 (1) 인간의 타락과 함께 피조물들도 그 타락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고 (2)하나님 자녀가 그 영광을 회복함으로써 피조물들도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Hendriksen).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 인간의 타락은 자기 자신만 허무(虛無)한 데로 이끈 것이 아니라 그의 지배하에 있던 다른 모든 피조물까지 허무 하게 만들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이러한 허무를 매우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전 1:1-11;2:11-23).
피조물은 스스로 허무한 데 굴복하지 않았고 인간의 타락에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저주하는 가운데 피조물도 인간과 함께 허무한 데 굴복하도록 명하셨다(창 3:17, 18).
이러한 사실은 본절의 '굴복하는'에 해당
하는 헬라어 '휘페타게'가 제 2단순 과거 수동태로서 '굴복을 당하였다'는 의미를 지닌 점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was made subject, KJV).
한편 이러한 현상은 만물의 지배자인 인간이 타락하여 그 지배권을 사단에게 빼앗기게 됨으로써 발생케 되는 필연적인 것이기도 하다. 즉 만물의 대표자인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당하는 허무를 그 인간에 종속된 피조물도 함께 당하게 된 것이다.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 피조물들은 각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자기에게 부여된 임무에 순종한다.
피조물들이 비록 이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부패해 갈지라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전히 회복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궁극적으로 이 땅에 도래하기를 바라는 '희망에서'(에프 헬피디)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들도 썩지 않는 영광을 함께 얻게 되기 때문이다.
📍8:21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 바울은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0, 41)라고 진술했다.
이와 같이 각 피조물이 각기 다른 영광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타락과 함께 그 영광들이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혹자는 본 구절의 '피조물'이 전우주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만을 언급한 것이라고 주장한다(E. Brunner).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22절과 23절에 의해 부정된다.
그리고 바울의 진술대로(고전 15:40, 41) 각 피조물은 각기 고유한 영광을 지니고 있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인간과 대립된 관계에 놓여지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허무하고 썩어질 것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될 때, 전우주는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이며 피조물들도 각기 자기의 영광된 위치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바울은 피조물이 자기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과 관계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든 죄와 불의에서 하나님의 절대 자유, 즉 구원과 영생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 또한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본절의 '이르는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류데로데세타이'가 미래 수동형인 점은 그와 같은 사실을 확증해 준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19절에서 22절까지
가 피조물의 회복 자체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자기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피조물의 회복은 성도의 영광의 회복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이 완성될 때에 다음과 같은 사 11:6-9의 예언이 완성될 것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害)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이 예언은 태초의 에덴 동산의 회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 앞으로 회복될 영광은 이러한 에덴 동산의 영광보다 더욱 뛰어날 것이다(P. Robertson).
📍8:22
🔹피조물이....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 - 바울은 인간이 본래의 영광과 자유를 회복해야 할 필연성을 피조물이 그 일을 위해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과 비교하고 있다.
다시 말해 피조물조차도 영광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 탄식하며 신음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본절에 깊이 암시되어 있다.
바울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 범우주적인 요구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제까지'(아크리 투 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이 저주와 고통을 받았으며, 이 저주와 고통이 주의 재림시까지 현재적으로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보아야 한다(Murray, Meyer).
Matthew Henry Bible Commentary:
Romans 8:19--22
II. As the accomplishment of the saints’ present hopes and expectations, v. 19, etc.
As the saints are suffering for it, so they are waiting for it. Heaven is therefore sure; for God by his Spirit would not raise and encourage those hopes only to defeat and disappoint them. He will establish that word unto his servants on which he has caused them to hope (Ps. 119:49 ), and heaven is therefore sweet; for, if hope deferred makes the heart sick, surely when the desire comes it will be a tree of life, Prov. 13:12 .
Now he observes an expectation of this glory. In the creatures v. 19-22. That must needs be a great, a transcendent glory, which all the creatures are so earnestly expecting and longing for.
This observation in these verses has some difficulty in it, which puzzles interpreters a little; and the more because it is a remark not made in any other scripture, with which it might be compared.
By the creature here we understand, not as some do the Gentile world, and their expectation of Christ and the gospel, which is an exposition very foreign and forced, but the whole frame of nature, especially that of this lower world—the whole creation, the compages of inanimate and sensible creatures, which, because of their harmony and mutual dependence, and because they all constitute and make up one world, are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as the creature.
The sense of the apostle in these four verses we may take in the following observations:—(1.) That there is a present vanity to which the creature, by reason of the sin of man, is made subject, v. 20. When man sinned, the ground was cursed for man’s sake, and with it all the creatures (especially of this lower world, where our acquaintance lies) became subject to that curse, became mutable and mortal.
Under the bondage of corruption, v. 21.
There is an impurity, deformity, and infirmity, which the creature has contracted by the fall of man: the creation is sullied and stained, much of the beauty of the world gone. There is an enmity of one creature to another; they are all subject to continual alteration and decay of the individuals, liable to the strokes of God’s judgments upon man. When the world was drowned, and almost all the creatures in it, surely then it was subject to vanity indeed. The whole species of creatures is designed for, and is hastening to, a total dissolution by fire. And it is not the least part of their vanity and bondage that they are used, or abused rather, by men as instruments of sin.
The creatures are often abused to the dishonour of their Creator, the hurt of his children, or the service of his enemies. When the creatures are made the food and fuel of our lusts, they are subject to vanity, they are captivated by the law of sin. And this not willingly, not of their own choice.
All the creatures desire their own perfection and consummation; when they are made instruments of sin it is not willingly. Or, They are thus captivated, not for any sin of their own, which they had committed, but for man’s sin: By reason of him who hath subjected the same. Adam did it meritoriously; the creatures being delivered to him, when he by sin delivered himself he delivered them likewise into the bondage of corruption.
God did it judicially; he passed a sentence upon the creatures for the sin of man, by which they became subject. And this yoke (poor creatures) they bear in hope that it will not be so always. Ep’ elpidi hoti kai, etc.—in hope that the creature itself; so many Greek copies join the words. We have reason to pity the poor creatures that for our sin have become subject to vanity. (2.)
That the creatures groan and travail in pain together under this vanity and corruption, v. 22.
It is a figurative expression. Sin is a burden to the whole creation; the sin of the Jews, in crucifying Christ, set the earth a quaking under them. The idols were a burden to the weary beast, Isa. 46:1 . There is a general outcry of the whole creation against the sin of man: the stone crieth out of the wall (Hab. 2:11 ), the land cries, Job. 31:38 . (3.)
That the creature, that is now thus burdened, shall, at the time of the restitution of all things, be delivered from this bondage into the glorious liberty of the children of God (v. 21)—they shall no more be subject to vanity and corruption, and the other fruits of the curse; but, on the contrary, this lower world shall be renewed: when there will be new heavens there will be a new earth (2 Pt. 3:13 ; Rev. 21:1 ); and there shall be a glory conferred upon all the creatures, which shall be (in the proportion of their natures) as suitable and as great an advancement as the glory of the children of God shall be to them. The fire at the last day shall be a refining, not a destroying annihilating fire. What becomes of the souls of brutes, that go downwards, none can tell.
But it should seem by the scripture that there will be some kind of restoration of them. And if it be objected, What use will they be of to glorified saints? we may suppose them of as much use as they were to Adam in innocency; and if it be only to illustrate the wisdom, power, and goodness of their Creator, that is enough. Compare with this Ps. 96:10 -13; 98:7-9. Let the heavens rejoice before the Lord, for he cometh. (4.)
That the creature doth therefore earnestly expect and wait for the manifestation of the children of God, v. 19. Observe, At the second coming of Christ there will be a manifestation of the children of God. Now the saints are God’s hidden ones, the wheat seems lost in a heap of chaff; but then they shall be manifested. It does not yet appear what we shall be (1 Jn. 3:2 ), but then the glory shall be revealed. The children of God shall appear in their own colours. And this redemption of the creature is reserved till then; for, as it was with man and for man that they fell under the curse, so with man and for man they shall be delivered.
All the curse and filth that now adhere to the creature shall be done away then when those that have suffered with Christ upon earth shall reign with him upon the earth. This the whole creation looks and longs for; and it may serve as a reason why now a good man should be merciful to his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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